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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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미움도 숙명이다
지금까지 표출되지 않고 켜켜이 쌓여 발효되던 분노가 일거에 터졌다. 나는 이성을 좀체 회복할 수 없었다. 온몸이 뜨거웠다. 눈빛으로 뿜어지는 적개심에 주태는 어깨를 움찔거렸다. 미쳐버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내 몸으로 시험하여 깨달을 수 있었다. 내 사지는 나의 것이되 나의 통제를 따르지 않았다. 허리춤의 칼을 빼들고 세련되지 않은 솜씨로 주태의 생살을 찔렀다. 피가 마구 뿜는 터, 피의 색과 향은 사람을 더욱 광기에 서리게 만들었다. 나는 억센 칼질로 주태를 마구 베었다. 베었다고 뭉뚱그리기엔 나의 검법이 균일하지가 않았다. 베고, 찌르고, 썰고, 쑤셨다. 이미 한참 전에 죽은 주태의 목을 나는 마지막으로 결딴내었다. 주태의 주검은 독수리가 쪼아 먹은 듯 해체되었다.
처음 사람을 죽였다.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제야 점점 끝 모르고 치닫던 분노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내 얼굴은 뜨끈한 피를 뒤집어썼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남의 피 냄새가 내 코끝에 진동했다.
“하아……”
일거에 힘이 빠져 나는 칼을 떨어뜨리고 풀썩 주저앉았다. 감녕과 유복이 나를 부축했다.
“합비공, 괜찮으십니까.”
아니, 괜찮지 않다. 나는 풀린 눈으로 중얼거렸다.
“장흠의 목도 반드시 거두도록… 용서할 수 없다……”
서성이 읍하며 명을 받들었다. 서성의 칼이 번쩍이자 장흠의 목이 떨어졌다. 주태가 운운한 계획을 알아내려면 장흠을 살려두고 갖은 고문을 해야 옳았겠지만 나는 그들과 조금이라도 같은 공기를 나누어 마시고 싶지 않았다.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우리가 죽인 소년들은 잘 수습하여 매장하시오.”
유복이 읍하며 받들었다.
우리는 침울하게 개선했다. 주태와 장흠을 처단하고, 천 명의 소년들을 땅에 묻고 돌아오는 길. 시산장과 와주동의 백성들이 넋 빠진 얼굴로 우리를 바라봤다. 그들은 산채에 불을 질러 주태와 장흠을 도주하게 하고 우리 군에 큰 피해를 안겼다. 그냥 묵과할 수는 없었다. 시산장과 와주동의 촌장을 붙잡아 목을 베었다. 촌장들은 죽을 때 짐승처럼 울면서 나를 저주했다.
“과연 원술의 후예답구나! 나를 유평과 공혁의 곁으로 보내주니 고마울 뿐이다!”
“너도 죽을 것이다! 죽을 것이다! 죽을 것이다!”
촌장과 더불어 산으로 기름을 조달하고 방화를 주도한 것으로 의심되는 사내 열 명을 처단했다. 그들도 나를 저주하면서 죽었다. 처형을 집행할 때,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나를 향해 중년의 계집 여럿이 나를 향해 돌을 던졌다. 호위들이 잽싸게 막아서는 터, 상처는 입지 않았다.
“이 미친년들이!”
주환이 칼을 뽑아 해치려는데 나는 그를 제지했다.
“그만 두어라.”
“대장군! 이년들이 대장군께 돌을 던졌습니다!”
“이미 내 손으로 많이 죽였다. 그만 죽이고 싶다……”
“이년들이 대장군께 돌을 던지며 미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들을 저주에 빠트린 건 구강공이 아니라 주태인데! 저들이 주태를 두호하며 대장군을 욕하고 있지 않습니까! 대장군이 왜 욕을 들어야 합니까. 돌을 맞아야 합니까.”
나는 고통스러운 마음에 이마를 두 손으로 감쌌다. 고개를 푹 숙이고 울음에 젖은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미움도 숙명이다……”
양주자사 염상은 와주동과 시산장의 백성들을 뿔뿔이 흩어 다른 곳으로 이주하게 하고,
와주동과 시산장의 이름을 폐했다. 나에게 복수심을 품은 자들이 모여 있으면 언제 준동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은 울면서 고향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다. 관군의 강제하는 힘이 그들을 원방으로 내쫓았다. 나는 염상의 조처를 묵과했다.
나는 분노와 슬픔, 그 중간쯤의 감정에 갇혀있었다. 주태를 베고, 찌르고, 썰고, 쑤셨던 감촉들이 죽지 않고 계속 살았다. 나는 괴로워하는 중에도 커다란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이곳으로 떨어지면서 화평의 내림말씀을 받았다. 화평이란 좁다면 한없이 좁게, 넓다면 한없이 넓게 여길 수 있는 터. 나는 오래 전처럼 느껴지는, 아니 실제로도 오래된 관우와의 대담을 떠올렸다. 하도 신이하고 모욕적인 대담이어서 오래 지나도 잊기 어려웠다.
“조루와 넋을 바꾼 그 영감쟁이한테도 상제께서는 내림말씀을 주셨지.”
“뭐라고 주셨죠.”
관우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금주.”
금주라니.
“술을 마시지 말라는 뜻의 그 금주요?”
관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술과 도박으로 가산을 진탕 말아먹고, 하루 소주 한 병 살 돈 얻으려고 경비노릇을 하는 자에게 상제께서 거창한 내림말씀을 전하실 리 없지. 그저 거기 가서는 술이나 그만 처먹으라는 말씀만 이르신 거야.”
눈높이 내림말씀을 실천하시는 상제님이로구나. 관우는 말을 이었다.
“이건 네놈에게도 마찬가지다. 수능 하나 제대로 못 치러서 연고대도 못가는 주제에 네가 세상을 바꾸면 얼마나 바꾸겠니.”
나는 헛웃음을 웃었다.
“진짜 사람 열받게 말씀하시는 데는 도가 트셨네요.”
“그런 고로 화평이란, 곧 네 내면의 화평을 유지하라는 뜻이 아니겠냐. 나도 상제의 뜻을 온전히 짐작하기는 힘들지만, 대충 사람을 보면 견적이 나오지.”
“내면의 화평이라면?”
“이널 피쓰Inner Peace말이다, 이널 피쓰, 이 새끼야. 무조건 화를 내지 말라.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이동풍으로 흘려듣고 헤헤 실실 웃어라 이 얘기지.”
나는 입술을 쭉 내밀었다.
“아, 네……”
관우는 이렇게 말했다. 무조건 화를 내지 말라.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이동풍으로 흘려듣고 헤헤 실실 웃어라 이 얘기지. 나는 그 내림말씀을 완벽히 어기고 말았다. 어기는 즉시 이 회귀의 약조는 깨지고 상제의 엄벌을 받을 거라며? 그런데 왜 며칠이 지나도 아무 일도 없는 건데? 엄벌이 내리지 않는다면 나야 좋지만 도통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잠자리를 같이하는 시영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천하의 모든 것을 다 알 법한 나의 참모진에게 물어봐도 답을 얻지 못할 터였다. 나만 미친놈취급을 받겠지. 혼자서 끙끙 앓는 수밖에 없었다.
“화평을 깨셨수?”
귓전에서 진동하는 소리에 나는 허리를 바짝 세웠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 노인장……”
그곳에는 좌자가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멍청한 목소리로 문장을 다 종결시키지도 못했다. 좌자는 뒷짐을 진 채로 허허 웃었다.
“명색이 천하의 내로라하는 방사라면 그쯤은 알고 있어야지 않수?”
심장이 달음박질쳤다. 그렇다면 좌자는 내 정체를 알고 있었단 말인가? 짝사랑하는 여자한테 알몸을 들켜버린 기분이었다. 나는 지금껏 품었던 분노와 슬픔은 한꺼번에 망각해버리고 오로지 좌자에게 들킨 내 정체에만 관심을 두었다.
“뻑 하면 혼자서 화평, 화평, 화평, 중얼거리시잖수. 아예 별명도 화평자로 지으시구. 그러니 내림말씀이 화평인 줄은 진즉에 짐작했지.”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내가 화평을 중얼거리는 걸 몇 번씩이나 봤을 수도 있다. 그는 항상 나를 지근거리에서 도왔으니까. 그런데 내림말씀이며 무엇이며 하는 것을 어떻게 아느냔 말이야.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좌자를 바라봤고, 좌자는 무엇이든 다 안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바보천치가 된 기분이었다. 좌자는 빙긋 웃었다.
“술 한 잔 하시려우?”
간단한 주안상이 마련되었다. 싱겁게 무친 풋나물과 진한 탁주가 올랐다. 좌자는 웃음을 머금은 채로 내 잔을 채웠다. 나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리했다. 좌자는 허연 수염에 허연 탁주 방울을 매달고 시원하게 술을 넘겼다.
“천하에 명주가 널렸다지만 싸구려 탁주 만한 것도 드물지 싶수.”
좌자는 젓가락으로 나물을 양껏 집어 씹었다. 나도 술을 넘겼다. 좌자가 자초지종을 말해줄 때까지 나는 잠자코 있을 작정이었다. 그도 그런 내 마음을 읽었나보다.
“나도 신세가 주군이랑 다르지 않수.”
그는 탁주처럼 걸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미간을 천천히 좁혔다. 그의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전라남도 광주시 북구 문화동 272번지 지하층. 나 살던 곳이우. 쥐 오줌 얼룩 있던 단칸방.”
“……”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지금의 나에게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그의 말을 나는 똑같이 되풀이했다.
“전라남도, 광주시, 북구, 문화동, 272번지, 지하층……”
“계엄령 내리구 총소리 비명소리 들릴 때까지는 거기서 살았었수. 혼자 지내기에두 답답한 집이었지.”
“허면 그대 역시……”
좌자는, 아니 좌자 이전에 다른 이름을 가졌을 그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거푸 주억거렸다.
“흐허허, 놀랐수?”
좌자의 젓가락이 나물을 마구 헤집었다.
“이제는 내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수. 소싯적에 칼 쓰는 법을 배우겠다구 방방곡곡을 쏘다녀 검법을 익혔더니마는, 어디 그 시절이 그런 잔재주로 밥 빌어먹고 살 시절이었겠수? 딱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만 살았지. 하두 답답해서 하루에 한 번은 무등산엘 올랐소. 거기에 산신도가 그려진 족자가 있었는데, 거 노인네 신수 한 번 훤하더군. 그냥 넋 놓고 보고 있으니 귀신이 나와서는… 그 다음은 주군도 아실 게요.”
나는 충격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반가운 마음도 들면서 지금까지 왜 얘기하지 않았는가, 배신감도 얼핏 들었다. 그러면서 문득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슬픈 향수도 얼핏 느껴졌다. 그것이 잡스럽게 얽혀 묘한 기분이었다.
“그대도, 그대도 그랬군……”
좌자는 어깨를 들썩였다.
“뭐, 지금은 주소나 간신히 기억할까, 완전히 시대의 타성에 젖어버렸지만.”
“그랬군, 그랬군……”
“늦게 알려서 미안하우. 나는 본시 만지라 하지 않았소. 늦게 알 게 될 거라 하지 않았소.”
“하하……”
나의 웃음은 경쾌하지 않고 엉성했다.
“내가 상제한테 받은 내림말씀은……”
어쩌면 이 시대의 천하에서 오로지 우리 둘만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비밀을 우리는 술과 함께 지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