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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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비 내리는 호남선(湖南船)
“유표가 중병에 걸렸다는군요.”
청금교위 유엽이 나에게 보고했다. 하기야 그 양반도 오래 누렸지. 나이가 벌써 몇 개야. 게다가 총애하던 아들 유종을 먼저 보내고 지금은 측근세력과 호족인 채씨가 하루가 멀다 하고 고성을 내지르고 했으니 마음도 고단하겠다.
“산월에서 난 약재라도 좀 보내줄까?”
내가 흰소리를 중얼거리자 함께 배석했던 좨주 노숙이 눈살을 찌푸렸다.
“합비공께서는 마음이 참 여유로워서 좋으시겠습니다.”
뭐야, 지금 노숙이 날 비꼬고 있는 거지, 지금? 나도 그를 따라 눈살을 찌푸렸다.
“어쨌든 송경을 기준으로 동서로 영지를 나눠먹고 같은 천자를 섬기는 동료가 아닙니까.”
노숙은 푸 웃었다. 어쭈구리! 많이 컸네, 자경이.
“동료는 무슨 동료입니까. 당장 장강 남쪽을 두고 다투는 호적수일 뿐입니다.”
“그래서 뭐 당장 군대라도 일으킬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당장 유비가 급선무이기도 하거니와 유표에게 싸움을 걸 명분도 없다. 우선 그와 결전을 벌이자면 천자의 도읍인 송경을 경유해야 한다. 유총이 아무리 나에게 지금껏 호의를 베풀어왔다지만, 유표와의 전쟁을 승인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유총이 비교적 적은 병력으로 천자로 군림할 수 있는 것은 유표와 나 사이의 완충지대를 점하면서 제3세력으로서 기능하기 때문이었다. 손책이야 강동 구석의 비교적 작은 세력이었고 원술 사후 내 영지를 노렸기에 내가 그에게 복수할 명분이 있어서 유총이 선선히 토벌을 윤허했지만, 유표는 달랐다. 유표는 천자와 같은 종씨이면서, 남중국에서 나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었다. 합비공 제갈찬이 남군왕 유표를 토벌한다면 명실 공히 남중국의 패자가 되는 것이요, 허면 허울만 좋은 천자는 더 이상 구실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이었다. 천자의 윤허도 받지 못하고 유표를 치는 것은 내가 스스로 마련한 대의를 저버리는 일이었다. 뭐 패도주의를 숭앙하는 자들이야 그깟 대의가 무슨 관계랴 하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더군다나 나의 서쪽 영지인 여강을 관할하는 유훈도 문제였다. 유훈은 그저 자신의 세력을 보전하면 그만인 인간이었다. 비록 나에게 복속했지만 그는 수만의 병력을 거느린 대군벌이며 수가 틀리면 언제든 나를 등질 수 있었다. 이것저것을 따졌을 때 당장 유표와 결전을 벌일 일은 없었다. 그런 마당에 보약 한 첩 선물하는 것이 무에 큰일이겠는가.
이번엔 노숙에 이어 북부교위 왕수가 나를 가르치려 들었다.
“유표가 중병에 걸렸다면 머지않아 타계할 것입니다. 유표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자신의 명이 다했음을. 유표가 죽으면 당장 형주에 소요가 일 터, 유표가 그것을 수수방관하겠습니까?”
죽는 마당에 그런 걸 고민해서 뭐한담. 나는 왕수의 말을 잠자코 경청했다.
“내우(內憂)를 씻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외환(外患)을 만드는 것입니다.”
“외환이라? 외환의 외는 아마 우리겠지요?”
왕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표는 일부러 가신들의 불안감을 부채질할 것입니다. 병력을 우리의 접경지대에 배치하여 알력다툼을 잊도록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싸움을 걸지 않으면서?”
“작은 국지전은 염두에 뒀겠지요. 하지만 전면전은 걸어오지 못할 겁니다. 유표는 우리를 당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렇지. 원소의 세력이 공중분해 된 이상 천하에 우리를 능가할 제후는 없다. 유표 따위가 뭘 어쩌겠어.
“때문에 우리가 기껏 호의로 보약을 선물해봤자 유표는 오만하게 굴 것입니다. 제 가신들을 긴장시키려고요.”
“허면 내 체면은 땅에 떨어질 테고요.”
“그렇습니다.”
왕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로 눈을 흘겼다.
“그러니 공연한 호의는 관두세요.”
“쳇.”
그때 늠가연사 량이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쓸데없이 땀은 뭐 저렇게 많이 흘려? 그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합비공.”
“합비의 일은 너 혼자 다 하는 것 같다. 뭘 그렇게 빨빨거리고 돌아다녀?”
“북부교위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 말 하려고 그렇게 급히 날 찾았어? 괜히 연기하지 마라. 그렇다고 한단자의 병법수업에서 빼줄 줄 알고?”
량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고요. 어쨌든 북부교위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세요. 유표가 접경지대에 병력을 집중시키는데 가만히 계실 겁니까?”
“어차피 사소한 국지도발만 일으킬 텐데.”
“그러면 기 싸움에서 지고 만다고요. 우리도 주력을 대거 배치하도록 해요.”
나는 미간을 좁혔다.
“공연히 우리 쪽에 불안감을 일으켜서 뭐가 좋다고.”
“오히려 적의 도발에 손 놓고 있는 게 더 불안하게 만드는 일이에요. 한 오만 정도면 적당하겠네요. 유표가 손을 쓰자마자 우리도 병력을 집중시키는 거예요.”
얘가 점점 모를 소리만 하네.
“오만이 뉘 집 개 이름이냐? 그 많은 전비를 굳이 감수하면서 그럴 필요가 없는 것 같은데.”
그때 량이에 이어 태위 여포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가볍게 목례하고 대뜸 목소리를 깔았다.
“늠가연사의 말이 옳습니다, 합비공. 그렇게 하시지요.”
“아니, 태위까지 왜……”
여태 술 먹자 소리 아니면 일절 정사에 관여하지 않던 여포까지 나서서 성화였다. 다들 전쟁 못해서 죽은 귀신이 씌었나.
“그럴 듯한 진언이지 않습니까! 늠가연사의 안을 채택하시죠.”
“그래도 오만씩이나……”
또 다른 목소리가 개입했다.
“요즘 뱃살이 쪄서 죽겠습니다. 늠가연사의 안을 채택하고 저를 선봉으로 삼아주십시오. 바람 좀 쐬고 오게.”
영자였다.
“야, 너 오랜만이다.”
“늠가연사의 안을 채택해줘요.”
나는 팔짱을 끼고 꽁한 표정을 지었다.
“영자! 네 살 빼려고 병사 오만을 생고생시키려고 해?”
“형주를 견제하기 위한 심계라고 하지 않습니까? 누가 제 사리사욕만을 채우려고 이럽니까?”
“그래! 너네 맘대로 해!”
내가 대뜸 소리를 지르자 영자가 미심쩍은 눈으로 날 바라봤다.
“혹시 삐지셨습니까?”
“흥.”
나는 그들을 집무실에 그대로 두고 일찌감치 퇴근했다. 역시 시커먼 사내놈들은 상종할 바가 못 된다고! 역시 마누라밖에 날 알아주는 사람이 없지. 암, 그렇고 말고. 나는 자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시영을 찾았다.
“부인, 부인, 내 말 좀 들어보오.”
내가 칭얼거리자 시영이 풋 웃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아니 글쎄, 유표가 시비를 걸어올 것 같다면서 병력 오만을 유표의 접경지대에 때려 박으라고 하질 않소.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이 안을 채택하라 성화요. 당최 이게 이치에 닿는 말입니까?”
시영은 웃음을 머금은 채 칼 같이 대답했다.
“네, 이치에 닿는데요.”
누가 내 머리를 새해의 보신각 종 삼아 열두 번 두드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우두망찰했다. 마누라도 소용없다, 소용없어.
형주, 남양군.
남양태수 겸 평서장군 장제의 본거지.
장제는 본디 동탁의 측근이었다. 서량 출신으로 기병을 운용하는 데 제법 두각을 드러냈다. 동탁의 사후 이각과 곽사가 역병처럼 들고 일어났을 때도, 별도의 독립군단을 운용하며 그들 사이에서 일정한 세력을 쥐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이각과 곽사가 멸망한 이후, 유표와 결탁했다. 유표가 채모를 보내 장안으로 진출할 때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그 덕택으로 장제는 형주 북부 남양을 기반으로 삼고, 유표 산하 유력 군벌로 구실하면서 평서장군의 인까지 지닌 인물이었다.
“문화(文和), 남군왕이 오늘 내일 한다던데.”
서량의 장부답게 장제는 거구의 사내였다. 그의 두터운 손은 곰발바닥처럼 위협적이었다. 그는 손바닥만큼 두꺼운 목소리로 한 사내를 불렀다. 문화라고 불렀다. 문화는 사내의 자였고, 이름은 가후(賈詡)였다. 이각, 곽사가 휘말린 멸망의 소용돌이에서 장제를 건져내고 유표와 결탁하여 여전히 유력한 군벌로 자리매김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가느다란 눈에서는 심모가 빛났고 도드라진 목젖으로 꾀를 실현했다.
“주공께서도 양양(유표의 본거지) 쪽에 시선을 두셔야겠습니다.”
가후는 난간 밖으로 하나 둘 지기 시작하는 낙엽을 바라봤다.
“단풍구경하기 제격인 시기가 왔거든요.”
장제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에 가후는 옷깃을 여미고 안으로 들어갔다.
“날이 쌀쌀해지고 있어요. 돌풍도 간혹 분다고요. 외투 한 벌 마련해두세요.”
쌩 들어가버리는 가후의 뒷모습을 보고 장제는 툴툴거렸다.
“나 원, 우리 집 마나님도 신경 안 쓰는 외투를 제가 신경 쓰고 있네.”
낙준도 천자 유총을 알현하러 왔다가 윤허를 받는 사이에 저 너머 지는 낙엽을 바라봤다. 그는 수염을 쓸었다. 환관이 나와 고개를 끄덕여 안으로 들라는 신호를 주자 비로소 붉은 단풍에서 시선을 떼고 천자의 내전에 들었다.
낙준이 절을 올리려던 것을 유총은 권태로운 손짓으로 만류했다.
“한 번만 더 짐 앞에서 절을 올리면서 시간을 낭비했다가는 엄히 치죄할 것이다.”
천자의 엄포를 낙준을 웃음으로 흘렸다.
“주청 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 들었습니다.”
“뭐 하러 귀찮게 일일이 주청을 하나? 경이 알아서 처리해.”
“아, 천자의 윤허가 특별히 필요한 일이라서요.”
낙준은 마련해온 두루마리를 환관을 통해 건넸다. 천자는 그것을 받아 죽 훑어보았다.
“여강태수 유훈에게 용선(龍船)을 내리고 노군(櫓軍) 삼십 여와 궁녀 십 여를 내려라? 자네 뇌물 받았나?”
“받았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유총은 싱겁게 웃었다.
“부패한 심복은 필요 없다. 잡아다가 목을 베고 청렴한 치를 데려다 상서령을 삼아야지.”
“목을 벨 땐 베더라도 관철해주십시오.”
“이유나 좀 듣자고.”
“유훈은 천자께서 거하시는 송경의 지척에 있으면서, 천자를 위해 지극한 충성을 보였으니 마땅한 포상을 내리시라는 취지입니다.”
“짐이 온갖 구실은 다 들어봤지만 이것처럼 성의 없는 구실은 처음 들어보는군. 이봐, 용선은 천자의 상징이야. 차라리 합비공 제갈찬이나 남군왕 유표한테 내리라면 기분은 나빠도 그렇게 하라고 하겠어. 그런데 시답잖은 유훈이 웬 말이야!”
“유훈은 충신이라니까요.”
“경의 성이 낙이 아니고 이름이 준이 아니었으면 벌써 주먹 날아갔어.”
“신의 진언을 물리치지 마십시오, 폐하.”
쉬파리처럼 귀찮게 덤벼대는 낙준에 유총은 항복을 선언했다. 그는 낙준의 두루마리를 환관에게 던지면서 툴툴거렸다.
“상서령 낙준의 안을 윤허하겠다! 그렇게 하라!”
환관은 진땀을 흘렸다.
“화, 황상, 옥새를 찍어주셔야……”
유총은 귀를 후비적거렸다.
“네놈이 찍어!”
남군, 양양성.
유표의 얼굴에는 짙은 검버섯이 퍼져 있었다. 폐부까지 깊게 스미지 못하고 목구멍만 들락날락하는 얕은 호흡이 그의 명줄을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있었다. 병상에 여러 겹으로 쳐진 장막이 유표의 정신을 더욱 혼곤하게 만들었다. 본시 환자의 안정을 위해서는 최소의 인원만이 병실에 남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유표의 병상에는 숱한 가신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의 후계로 유기를 지지하는 측근세력과 유기의 유일한 맞수였던 유종을 잃고 불안감에 휩싸인 형주의 호족세력의 대표들이 병실에 모두 있었다. 만일 둘 중 한 개 정파의 인원만이 유표의 병실을 지킨다면 유언과 유서를 조작하고 정국을 휘어잡게 되는 탓이었다. 유표의 적장자 유기와 호족세력의 대표인 장안태수 채모가 눈을 부라리고 병실을 떠나지 않았다.
“하아……”
사소한 호흡에도 가신들은 시선을 유표에게로 향했다. 채모의 누이이자 유표의 정실인 채 부인은 유표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그의 곁을 결코 떠나지 않았다. 유표는 반밖에 뜨지 못한 시선으로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하아……”
그들을 보기 싫어 유표는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가신들도 유표에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서로를 쏘아봤다. 사람들이 많아서 병실의 공기는 답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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