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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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전국시대의 일이다. 귀곡자(鬼谷子)라는 노인 밑에서 동문수학한 소진과 장의라는 인물이 있었다. 소진은 당시 강대한 힘과 영토를 지니고 있던 진(秦)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제, 초, 위, 한, 조, 연 여섯 개 나라가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제대로 먹혀 들어서, 소진은 이른바 육국재상(六國宰相)이 되어 진나라를 압박한다. 진나라에 대항하여 육국이 남북으로 긴 형세를 이루었으니 세로로 합하였다 하여 합종(合從)이라고 했다. 그런데 소진의 학우인 장의는 위, 조, 한, 제나라를 찾아가 변설로써 합종을 분쇄하고 도리어 진나라 중심의 연합체를 이끌어내니 가로로 길게 이어졌다고 하여 이를 연횡(連橫)이라고 했다.
무릇 과거의 저러했던 형국이 지금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당대의 진나라는 고스란히 나의 세력으로 치환할 수 있다. 지금 방통은 나를 빙 둘러싼, 이른바 오왕동맹을 이끌어내니 소진의 계책과 다르지 않다. 진나라는 남북으로 긴 포위망에 둘러싸였지만 나는 동서로 긴 포위망에 둘러싸였으니 합종과 연횡이 바뀌었다는 정도의 차이뿐이다. 역사에서 꾀를 얻는다고 한다면, 나는 장의를 배워야만 했다.
백각의 똘똘이들도 나와 생각이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백각은 연일 갑론을박하다가 결국 연횡을 분쇄할 합종의 계책을 나에게 상신했다.
“지금 마등이 한중에 머무르며 상용까지 석권하였으니 그 세력이 자못 두렵습니다.”
백각의 일원인 합비태수 유복이 발언했다. 유복의 지적은 옳았다. 상용을 얻은 마등은 양양으로 직행할 수 있는 지름길을 얻게 되었다. 그는 거듭되는 성공에 기세가 매우 거셌다. 유비는 여전히 위축된 상황이고 원소와 유장은 아직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으며, 장제는 한줌도 안 되는 적수이니 가장 견제할 만한 인물은 마등이었다.
노숙이 잘해주고 있었지만 형북은 여전히 불안한 형세였다. 경계를 맞대고 있는 장제가 동맹에서 이탈하였고 채씨와 괴씨는 온전한 우방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형남의 아버지가 든든히 받쳐주면 좋겠다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워낙 관리해야 할 영토가 넓고, 그 넓은 땅에 적은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져있었다. 그러하니 산발적으로 도적들이 일어났고, 그들을 때려잡는 일만으로도 아버지는 힘에 부치는 눈치였다. 결국 마등을 상대하는 것은 고스란히 노숙의 몫일 수밖에 없었다. 마등은 서량의 억센 기병을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명장이기 때문에 쉽사리 대할 상대가 아니었다. 그 아들 마초라든지 상장 방덕의 위명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바이며, 천하에 그 명성이 널리 퍼져있었다. 맹장으로 이름난 감녕과 허저를 노숙에게 붙여줬지만, 개활지에서의 전면전을 가정한다면 쉽사리 승리를 장담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백각의 책략도 마등을 과녁으로 삼았다. 우선 마등의 손발을 묶어놓는다면 오왕동맹의 힘을 크게 약화시킬 수 있었다. 유복은 탐스러운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유, 복스럽기도 하지.
“마등이 한중에 머무르고 상용까지 먹어치웠지만 그것은 순전히 마등의 몫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러나 량국(凉國)은 량왕 마등이 온전히 소유한 땅이 아니란 말입니다.”
량국과 량왕이라는 말이 우스워 유복은 히죽히죽 웃었다. 나도 함께 웃었다.
“일명 관중십장이라 하는 군벌들이 모여 이루었다고 들었소.”
“마등이 한중에 머무르고 그의 의제이자 관중십장의 이인자인 한수가 서량을 맡아 통할한다고 합니다.”
“한수가 불만이 좀 있으려나?”
유복은 고개를 저었다.
“한수는 형편이 그래도 괜찮습니다. 마등이 아주 머리가 굳은 인물은 아니라 어느 정도 챙겨주기는 하거든요. 곡무호선생토(谷無虎先生兎)라고, 마등이 서량을 비운 것이 한수로서는 오히려 나을 겁니다. 서량의 실질적인 주인행세를 하니까.”
나는 턱을 매만지면서 유복의 말을 곱씹었다.
“허면 문제는 마등과 한수를 제외한 나머지 여덟 군벌들이겠군.”
“바로 그렇습니다.”
양추, 정은, 이감, 성의, 장횡, 마완, 후선, 양흥. 그 여덟 장수는 분명 마등과 한수보다는 세력이 약했지만 엄연히 서량의 일각을 맡고 있는 군벌들이었다. 헌데 그들이 일선에 나서지 못하고, 마등이 홀로 한중으로 옮겨 모든 것을 해치우려 드니 그들로서는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전장에 나서는 것은 마등의 병력이었으나 그들을 먹일 양곡과 그들을 태울 전마는 모두 저들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얻는 것은 없으되 잃는 것만 있으니 그들이 불만을 가질 만했다.
“그들을 흔들자는 것이로군.”
유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헌데 어떻게?”
“저를 서량으로 보내주십시오.”
“멀고 위험한 길이 될 텐데.”
내가 우려 섞인 표정으로 주저하자 유복은 몸을 들썩거리며 웃었다.
“합비에만 있었더니 이거 나날이 뱃가죽에 기름만 들어차고, 합비공을 제대로 돕지를 못했습니다. 제게도 공을 세울 기횔 주시죠.”
“그 무슨 말씀. 유 공은 합비태수로 있으면서 누구보다 훌륭한 치적을 이루었소. 지금 내가 유 공을 알아주지 못해 시위하는 거요?”
내가 농조로 타박하자 유복은 더 유쾌하게 웃었다.
“그럴 리가요! 허나 이 유복, 이 일을 맡고 싶습니다.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꼭 해내겠습니다.”
나는 유복의 손을 꼭 붙들었다.
“알겠소. 노자를 두둑이 드릴 터이니 부디 무사히만 돌아오시구려. 무리하지 말고.”
유복은 눈을 찡긋거렸다.
“살도 좀 빼고요.”
유복은 한사코 내 송별연을 거부하고 장도에 올랐다. 나는 그가 염려되어 무사 몇을 붙여주려고 했지만 그는 그 또한 거부했다. 사람이 많으면 의심을 산다는 이유였다. 그는 점술사로 위장하고 당나귀에 올라탄 채 서량으로 떠났다.
교주, 교지성.
남국의 정취라는 말이 꼭 옳았다. 더운 날씨라 윗도리를 제대로 걸친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피부가 까무잡잡한 사람이 많았고, 북방과는 다른 기이한 활엽수가 빼곡히 들어있었다. 이곳은 교주자사 사섭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비록 그가 교주자사라고 하지만 중원에 서로 진짜배기라고 뻐기는 천자가 세 명이나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에게 칙사를 보내지 않았다. 참으로 먼 곳인데, 교주에서도 최남단에 있는 일남군으로 유배당하는 인물은 떠나기 전에 미리 장례식을 치렀다고 할 정도였다. 그는 이곳에서 임금에 준하는 권력을 쥐었다. 공공연히 사왕(士王)이라고 할 정도였다. 사섭의 권위는 대단하여, 그가 움직일 때마다 숱한 원주민들이 향을 피우며 따랐으며 종을 울리고 주악을 연주했다.
멀리 산다고 하여 그가 야만의 정치를 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사섭 스스로도 춘추에 해박하여 중원의 청류들이 그의 학식을 추켜세울 정도였다. 게다가 유학의 거두로 칭송받는 정현(鄭玄)이 난리를 피해 교주로 이주하니, 그 문하에 있던 정병(程秉)과 유파(劉巴) 등 숱한 문사들이 사섭을 섬기고 있었다.
“먼 곳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소.”
사섭은 우아한 자태로 허리를 곧게 펴고 상좌에 앉았다. 노인의 축에 드는 그는 백발이 성성했는데, 그럼에도 주름이 별로 없었고 남국의 햇볕을 오래 맞았어도 흰 얼굴이었다. 눈빛은 그윽하고 수염이 아름다우니 외양만 보고도 복종할 만한 인물이었다.
사섭의 앞에 엎드린 인물은 유장을 섬기는 면죽령 비시(費詩)였다. 병자처럼 파리한 안색이었지만 눈빛만은 형형했다. 그는 사섭에게 절을 올리고 손을 공손히 모았다.
“그래, 무슨 일로?”
사섭이 차분한 음성으로 묻자 비시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촉왕 전하의 명을 받들어 왔습니다.”
사섭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왼쪽에 배석한 정병 쪽을 바라봤다.
“촉왕이 누구냐?”
정병이 답했다.
“유익주가 이번에 하내의 천자로부터 촉왕으로 책봉되었습니다.”
“오, 그랬던가.”
사섭은 다시 비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왕이라니.”
사섭은 홀로 곱씹다가 비시에게 말했다.
“그래, 촉왕, 께서 무슨 일로.”
“이번에 담왕께서 동맹을 주도하셔서 은왕, 량왕, 남양왕이 모두 연대, 합비공 제갈찬을 압박하고자 합니다.”
사섭은 눈살을 찌푸렸다.
“담왕, 은왕, 량왕, 남양왕은 또 누구야.”
정병이 알려주었다.
“담왕은 서주의 유비, 은왕은 병주의 원소, 량왕은 한중의 마등, 남양왕은 남양의 장제를 말합니다.”
사섭은 툴툴거렸다.
“남양의 장제? 그건 또 무슨 듣도 보도 못한 녀석인가.”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뭐, 어쨌든.”
사섭은 자세를 가지런하게 하며 말했다.
“제후들이 모여 합비공을 친다, 이 말씀이오?”
“맞습니다.”
“이곳은 중원에서 먼 곳이라서. 지금껏 나는 중원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아왔소이다.”
비시는 목소리에 힘을 주고 강변했다.
“그러나 이번 일은 관심을 가지실 만합니다. 제갈찬은 형주 남부까지 거머쥐고 있는데, 만일 명공께서 이 동맹에 참여하신다면 그의 배후를 공략, 넓은 영토를 거머쥐실 수 있습니다.”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이긴 하오.”
“긍정적으로 검토해주십시오. 북방의 전선에서 접전을 벌이는 동안 명공께서는 손쉽게 그 넓은 땅을 가지시게 됩니다.”
사섭은 비시의 말을 긍정하면서도 섣부른 답은 내놓지 않았다.
“우선 그대는 객관에서 쉬도록 하오. 근신들과 의논한 뒤에 결정하겠소.”
비시는 그 말을 따랐다.
“부디……”
정병은 비시가 돌아간 것을 보고 다음 사람을 불렀다. 사섭은 정병에게 물었다.
“다음은 누군가?”
“합비공의 근신인 유엽이라고 합니다.”
“유엽?”
정병이 덧붙여 설명했다.
“합비공이 꽤나 신뢰하는 인물로, 청금교위를 지내는데 주로 정보수집과 감찰을 행한다고 합니다.”
“좋다. 들라 하라.”
유엽은 사섭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소인, 대장군부에 속한 청금교위 유엽이라고 합니다. 합비공의 명을 받잡아 오늘 사왕을 뵙습니다.”
사섭은 쿡쿡 웃었다.
“사왕은 호인(胡人)들이 사사로이 지껄이는 말인데 그대도 그 부름을 취할 까닭은 없소.”
“일대의 권세는 가히 사왕이라 높임 받을 만하더이다.”
“듣기에 거북하지는 않군.”
“북방의 제후들이 저들끼리 왕을 참칭하면서 합비공을 적대하니 괘씸하기 짝이 없습니다.”
사섭은 비시의 말과 유엽의 말을 속으로 비교하면서 웃음을 지었다. 유엽이 사섭을 찾아온 까닭이야 불 보듯 뻔했다.
“우리 자질구레한 명분론을 집어치우고 할 말만 하도록 하지. 합비공은 내가 돕기를 바라는 것이오?”
그 편이 유엽의 방식이기도 하여 유엽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사왕께서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북방의 제후들이 거하는 곳에서 멀리 있고 합비공의 영지와는 가까운지라. 원교근공(遠交近攻 : 먼 곳과 사귀고 가까운 곳을 침)의 상례를 생각하면 그들과 손잡고 합비공을 치는 것이 내게 유리할 것이오.”
유엽은 그 말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아, 그것은 아주 틀린 말씀이십니다.”
사섭은 입꼬리를 올렸다.
“틀렸다?”
“그렇습니다.”
사섭은 웃음을 흘리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재밌군. 비시가 옳다고 한 말은 그대는 틀렸다고 하는구나.”
그는 흔들림 없는 유엽의 표정을 흘끗 보았다.
“좋다. 잘 들었네. 우선 객관에 가서 푹 쉬도록 하게.”
유엽은 넙죽 절을 올리고 물러났다. 물러나오는 등 뒤로 사섭을 비롯하여 정병, 유파 등의 웃음소리와 사씨 일족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사흘 뒤, 날이 밝자마자 사섭은 객관에서 늦잠을 자던 유엽을 불렀다. 급한 부름에 유엽은 대충 눈곱을 떼고 물 한 잔을 죽 들이켠 뒤 사섭의 앞으로 나아갔다. 냉수의 찌르르한 자극이 유엽의 덜 깬 속을 각성시켰다.
못 보던 장막이 쳐져있었다. 정확히 사섭의 앞을 수직으로 가르는 장막이었다. 장막의 반대편에는 또 다른 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는데, 유엽은 직감으로 비시의 것임을 알았다.
‘별 같잖은 악취미군.’
유엽은 속으로 사섭을 욕하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사섭이 웃으면서 장막을 거두라 명하자, 유엽의 생각대로 다소 경직한 비시의 모습이 드러났다. 비시는 이를 짐작하지 못했다는 듯 놀란 표정이었다. 유엽은 적국의 사자와 마주한 기분이 이상야릇하면서도, 어딘가 짜릿했다.
사섭의 주문은 간단했다.
“둘이 싸워봐.”
그는 밥상까지 차려놓고 남방의 흩날리는 쌀알을 젓가락으로 후루룩 마시듯 먹으면서 유엽과 비시에게 주문했다. 유엽은 당면한 상황이 우스워서 비식비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