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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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오, 제갈공명
전령이 던진 한 마디가 원술의 희망의 불씨를 꺼트렸다. 원술은 짧은 탄식을 토했다. 양주파 가신들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고, 남양파 대신들은 거 보라는 듯 뻐기는 품이었다. 원술은 한동안 머리를 싸쥔 채 맥을 추리지 못했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가신들은 말하지 않았다. 제 아들보다 귀히 여기던 손책이 자신을 버리고 독립세력을 구축했다는 소식은 원술을 뒤흔들어놓았다. 그는 차분히 분노했다. 불같은 분노보다 무서운 것이 깊은 물처럼 잔잔하고 검은 분노다. 그는 그렇게 분노했다.
“은혜를 모르면 짐승이야.”
원술은 주먹을 쥐었다.
“손책은 짐승이야.”
그의 분노에 장단을 맞추는 남양파 대신들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기령이 나서서 굵은 목소리를 냈다.
“주공, 강동으로 밀고 들어가 손책을 치십시오!”
“주공께서 손책에게 병마를 주셨으니 마땅히 거두셔야 합니다! 그를 치십시오!”
양주파의 가신들도 그렇게 외치는 상대를 만류하지 못했다. 그들은 오로지 문책이 두려울 뿐이었다. 원술은 손책을 치겠다는 남양파의 입을 다물게 했다. 우선 예장의 난리를 진화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또한 이미 들불처럼 일어나는 손책의 세력을 제어할 힘이 부족했다. 그 전에 주변의 호족들부터 손책에게로 이탈하지 않도록 단속하는 것이 중요했다. 손책의 힘을 아는 원술은 그가 두려울 터였다. 원술은 불타오르는 혈기를 꺾을 장수가 가신들 중 아무도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손책은 아직 명목상으로 원술의 휘하를 이탈하지 않았다. 지금 손책을 친다면 부하의 군공을 시기하는 주군이라는 악명을 얻게 될 것이다. 또한 높은 확률로 패배할 터이니, 패배의 후폭풍은 거셀 것이었다. 유요를 때려잡고 원술의 군대마저 격파한다면, 손책은 양주의 패자라는 거룩한 칭호로 일컬어질 테니까. 원술은 참담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어차피 예견된 미래에 나는 놀라지 않았다. 나는 덤덤한 표정으로 원술의 앞에 나섰다.
“대장군, 예장으로 가겠습니다.”
원술은 힘겨운 시선으로 나를 봤다.
“진작 그대를 신용하지 못한 나를 용서해라.”
나는 읍했다.
“대장군의 낙담이 걱정스러울 따름입니다.”
원술은 힘없이 웃더니 가신들을 바라봤다.
“염상, 그대에게 병마 삼천을 맡길 터이니 토역과 함께 종군하여 예장을 수호하도록 하라.”
“예, 알겠습니다.”
원술의 버금가는 상석에 앉은 여포가 원술에게 말했다.
“대장군, 이 몸 또한 병마를 이끌고 토역을 돕겠소.”
나는 그를 만류했다.
“온후께서는 정북장군의 소임으로 북방의 난적으로부터 이 땅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이 일은 사사로이 부친을 돕는 일이 되오니 온후의 힘까지 빌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뒤에 말을 덧붙였다.
“또한 유요와 주호 정도를 잡는 데 온후마저 나서시면 재미가 없습니다.”
여포는 흡족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고순의 함진영을 붙여주겠다.”
거푸 호의를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나는 그것은 받아들였다. 지금껏 묵묵히 있던 장료도 나섰다.
“본디 무사의 분수로 성 안에만 있으니 배에 기름이 낍니다. 소장 또한 예장으로 출진하여 바람을 좀 쐬고 오겠습니다.”
장료의 부곡이야 본래 원술의 것이 아니었으니 원술이 이에 가타부타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좌우로 고순과 장료를 끼고 예장으로 출진하게 되었다. 나는 으레 노구가 군의 수장이 되고 내가 참군으로 따를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원술로부터 출진을 승인받고 성부의 밖으로 나오면서 나는 노구에게 다가가 말했다.
“대장, 이번에도 잘 부탁할게.”
노구는 나를 흘끔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번 출정에는 나서지 않겠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어째서.”
“이번 출정은 네가 맡아라, 화평자. 주장으로 나서서 부친을 구해내고 부친께 네 위용을 뽐내드리라고.”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럴게.”
노구가 나서지 않는 것은 훈훈한 미담을 만들어주자는 목적도 있지만, 낭야군 전원이 원정을 나가게 되면 수춘에서의 우리 입지가 크게 축소될 수도 있음을 경계한 것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원술의 가신은 아니지만 객장으로서 성부에서 적절한 발언권은 확보해둘 필요가 있었다. 노구는 수춘에 발붙이고 있으면서 이곳에서의 지분을 잃지 않으려는 포석이었다.
낭야군 중 남은 병력은 칠천가량이었는데, 나는 그 중에서 삼천만 동원했다. 장료는 노국군 오천 중 이천을 동원했고, 고순은 함진영 일천을 이끌었다. 염상의 삼천을 합하면 딱 일만의 군세였다. 직급으로 따지면 장료와 내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는데, 이번 출정은 내 혈연이 얽힌 일이었으므로 장료가 양보해주었다. 내가 주장으로서 군을 통솔했다. 부담이 되었지만 내 비빌 언덕인 영자와 만지가 있으니 크게 염려하지는 않았다. 나는 예장으로 내려가는 길에 구강태수 진기(陳紀)와 여강태수 유훈(劉勳)의 환대를 받았다. 그들 모두 양주파의 가신들로, 나에게 호의를 품고 있었다. 염상이 다리가 되어준 덕에 그들과 쉬이 친밀해졌다. 여강은 강북의 끝자락으로, 예장으로 향하려면 장강을 건너야만 했다. 유훈은 우리에게 배편을 내주겠다고 했다. 그는 무장이라기보다는 문사에 가까웠다. 상당히 인심이 후하고 말씨가 얌전했는데, 난세에는 자칫 물러 보이는 인상을 줄 수가 있었다. 뭐, 거의 물렁하기가 물침대 수준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제갈토역의 좌충우돌 무용담은 아주 인상 깊게 들었답니다. 그런 영걸이 대장군께 귀부하셨다니 참으로 기쁘군요.”
“패전지장일 따름입니다. 영걸의 부름이 듣기 부끄럽습니다.”
“원본초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능히 이기셨을 겁니다.”
물론 그렇지 않았겠지만 나는 애먼 웃음으로 넘겼다. 우리는 한참 환담했다. 유훈의 넉살이 워낙 좋아서 나도 대화를 즐겼다. 그는 대화 도중에 슬그머니 말했다.
“헌데 토역, 예장을 정벌하시면 나를 좀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슨?”
그는 아주 질린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치소의 근처에 정보(鄭寶)라는 자가 무리를 이끌고 있는데, 그 기세가 매우 사납습니다. 예장을 평정하시고 귀환하시면서 여강군과 함께 그를 정벌해주시면 감사천만이겠습니다.”
내가 아는 정보라는 이름은 손견의 숙장으로 오래오래 군공을 세운 장수였다. 군벌로서의 정보는 동명이인인 듯. 나는 유훈의 제안에 선선히 동의했다. 그를 정벌하면 일부 병마를 내 부곡으로 삼을 수도 있었고, 원술과 유훈에게 신임을 얻을 수도 있으니. 주변의 시시껄렁한 군벌을 토벌한다면 백성들에게도 좋은 일이 아닌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마땅히 그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토역. 오늘은 푹 쉬시고 날 밝거든 여강의 전선을 이용하여 강을 건너도록 하십시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유훈은 빙긋 웃었다.
“별 말씀을.”
다음날 유훈의 호의대로 우리는 수월하게 강을 건넜다. 여강의 강 건너 남쪽은 단양군이었는데, 손책은 벌써 이 일대를 평정하고 오군으로 진격하는 와중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유요의 객장이었던 태사자(太史慈)라는 자가 유요를 따라 예장으로 가지 않고 이곳에 웅거하여 산월을 규합, 손책에 대항했다고 했다. 그러나 삽시에 손책에게 토벌되고 그의 막하로 들어가 종군한다고. 나는 속이 쓰려서 그날 밤은 잠을 자지 못했다. 태사자는 원 역사에서 동오의 명장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 원술이 나를 바로 예장으로 보내주었으면 가는 길목에서 손책보다 먼저 그를 얻을 수도 있었는데. 장료와 고순 등 나의 전우들은 나 혼자 뒤집어진 속을 부여잡고 이리저리 구르는 꼴을 염려하는 표정으로 볼 뿐이었다.
손책은 오군으로 진격하면서 자신의 절친한 벗인 주유(周瑜)는 이곳에 두어 지키게 했다. 과연 진군하는 와중에‘주’자가 적힌 깃발이 펄럭이는 진영이 보였다. 삼국지를 깊이 탐독하지 않은 사람도 주유의 이름은 언뜻 들어봤으리라. 양주의 호족 출신으로 용모가 매우 뛰어나 미주랑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인물. 병법에 통달했고 대국을 보는 식견이 있으며, 음률의 이치마저 꿰뚫으니 누구나 그를 사랑했다고. 저 유명한 적벽대전의 눈부신 군공도 모조리 주유의 몫이니, 그와 결코 우호적인 관계가 아닌 나로서는 두려운 존재였다. 나는 모른 체 하며 단양을 경유할 작정이었지만, 그가 사자를 보내 내 발목을 붙들었다. 손책은 공식적으로 원술을 등지지 않았으므로 내가 그와의 만남을 지레 겁먹고 피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주유의 치소로 초대되어 차를 대접받았다. 아, 근데 좀 짜증날 정도로 잘생기기는 했다. 길게 내린 머릿결도 곱고 흰 피부에다가 턱선도 갸름하게 떨어졌다. 눈은 맑고 깊었으며 코는 우뚝하게 잘 섰으니 분칠만 좀 하면 반해버릴 지경. 목소리도 부드러운 듯 절도가 있으니 어찌 좋아하지 않고 배기나. 이 완벽한 남자에게 악담을 퍼부어주고 싶었다. 너 그렇게 잘나봤자 아무 소용없다. 젊은 나이에 켁 죽어버릴 운명이거든.
“제갈토역의 말씀을 여러 번 들었는데 이렇게 뵙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내가 더 영광이었다.
“주랑의 명성은 온 강동에 향기처럼 퍼져 있습니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그는 살짝 웃었다. 아, 멋있다.
“수춘의 양적후께는 우리의 보고가 들어갔겠지요?”
“크게 낙망하셨습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토역께서 손랑의 배반을 강한 목소리로 예견하셨다고……”
나는 멋쩍게 웃었다.
“천하영웅이 마냥 남의 밑에 웅크리지 않을 것임을 모르지 않으니.”
“공의 통찰에 놀랐습니다.”
“강동을 일거에 평정해가는 손 공과 주랑의 위업이 나는 더 놀랍습니다.”
그는 웃으며 슬쩍 내 손을 잡았다. 약간 심장이 떨리는 것도 같은데…… 아니야, 나는 이런 쪽에 취미가 없어요.
“토역 또한 마냥 양적후의 밑에 있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훗날 인연이 닿으면 세를 합쳐서 함께 난세를 종결함이 어떻습니까.”
나는 씩 웃었다.
“일단 닥친 일이 급해서 말입니다. 손 장군이 오군으로 방향을 틀어준 덕분에 제 부친의 목이 달아나기 일보 직전입니다.”
주유도 나를 따라 다시 웃었다.
“그 일은 유감입니다. 더 잡아둘 수가 없군요. 재회를 기다리죠.”
“좋은 인연으로 뵙기를……”
나는 예장으로의 여로에 다시 올랐다. 예장에 가까워지면서 전장의 소문이 이따금 들렸는데, 장기간의 대치로 양측이 크게 지쳤다고 했다. 아마 유요와 주호도 나의 남하를 들어 알고 있을 터. 삿된 술수를 쓰기 전에 서둘러 그를 공략해야 한다. 나는 행군에 속도를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