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Shrine RAW novel - Chapter 232
00232 신뢰의 대가 =========================
“……”
허름한 장원을 보수하지도 않고, 시녀라고는 백 하나만 두고 있을 뿐이다.
입고 있는 옷도 헤진 옷을 그대로 입고 있다.
공자원을 주름잡던 중스승의 친형답지 않은 모습이다.
그의 모습에 왕흘은 입을 꾹 다물었다.
“너는 어렸을 때부터 돈이야말로 모두를 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말했었지. 그 말을 떠올리며 함부로 쓰지 않고 모아놓은 것이다. 하던 장사에 망하고 다시 시작한 이후로 폭주하기 시작한 네가 불안했다. 그렇기에 언젠가 너에게 큰 일이 생길 것 같아 모아둔 것이다. 그러니 어서 가져가거라. 제발 내 생각이 틀리길 빌었거늘… 허나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오히려 모아두길 잘한 것 같구나.”
“…형님.”
자신이 아무리 잘났다고 날뛰어봤자 결국 세상을 보는 식견은 왕옹의 밑이라는 것을 왕흘은 깨달았다.
상인의 도리를 떠들어대며 학문마저도, 인간마저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말했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에 그는 얼굴을 붉혔지만 왕옹은 그를 탓하는 대신 무덤덤한 얼굴로 동생을 볼 뿐 이었다.
“숙부님. 준비는 끝났습니다.”
어린 동생을 등에 업은 왕창은 짐을 들고 있는 시녀 백과 함께 차분히 말을 걸었다.
그의 말에 왕흘은 자리에서 일어나 왕옹에게 절을 했다.
“형님. 반드시 모시러 가겠습니다.”
“그리 하거라. 내 기다리고 있으마.”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인사였지만 왕옹도, 왕흘도 그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 아무런 말 없이 바라보기만 할 뿐.
그 시선을 이기지 못한 왕흘은 몸을 돌려 바깥으로 나갔고 왕창, 그리고 백의 차림새를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평소 입고 있던 허름한 옷이 아닌 한껏 멋을 낸 나들이 옷이다.
짐도 거의 없다.
빈손이나 다름없는 정도인 그들의 모습에 왕흘은 어깨를 으쓱였다.
“누구의 명이냐.”
“문서 도련님의 명이십니다.”
“숙부께서 이리 급하게 말씀하신다는 것은 신분을 숨겨야 한다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저희는 항상 허름한 옷만 입으며 숙부께서 보내신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그 누구도 저희가 이렇게 차려입는다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백은 평소에 절대 하지 않는 화장까지 하며 귀한 부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녀를 향해 쓰게 웃어보인 왕흘은 왕창과 백이 들고 있는 짐을 받았다.
“그럼 내가 하인의 역을 해야겠군.”
“예.”
“그럼 가자꾸나. 아니. 가시지요. 도련님… 아. 잠시.”
왕흘은 품에서 칼을 꺼낸 후 자신의 얼굴에 상처를 내기 시작했다.
몇차례나 그어진 상처자국을 보며 왕창은 숨을 삼켰지만 왕흘은 망설이지 않았다.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상처를 낸 후 그는 입술을 꽉 깨물고 먹물을 얼굴에 뿌려 상처자국에 남게 한 후 자신의 왼쪽 귀마저도 반쯤 잘라내었다.
“숙부님.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저는 가노… 이광입니다. 숙부라 부르지 말아주십시요.”
짝귀가 되고 얼굴에 흉측한 상처들을 만들어낸 왕흘은 흐르는 피와 먹물을 천으로 닦아낸 후 얼굴에 약을 뿌렸다.
귀한 약을 낭비하는 것이 아쉽지만 이미 자신의 얼굴은 꽤나 알려져 있었다.
만약 자신을 노리는 이가 마음먹고 움직인다면 이정도도 모자를 수 있었다.
그는 한쪽 발을 절고 오른손을 일부러 뒤틀리게 한 후 말했다.
“이정도는 해둬야 합니다.”
“…그렇게까지…”
“저를 쫓는 이들은 왕윤이나 이숙따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저 역시 각오를 해야겠지요.”
그의 결심을 들은 왕창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하는 그를 방해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최대한 그를 돕는 수 밖에.
“하아… 어디로 가야하는가?”
장원을 나온 순간부터 왕흘은 나이먹은 하인이, 그리고 백과 왕창은 귀한 집의 자제가 되었다.
왕창의 차분한 질문에 왕흘은 허리를 숙이며 대꾸했다.
몇몇 농부들이 그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늘상 보던 차림이 아닌 것만으로도 그저 왕옹이라는 명사를 찾은 도련님이라고 생각할 뿐 이었다.
“일단은 백마항을 통해 가시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그리고 호패는 이것을 쓰시도록 하십시요.”
북해에서 사온 호패를 왕창과 백에게 나눠 준 왕흘은 돈마저도 백에게 넘겼다.
“아가씨께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어.”
새침한 귀녀의 모습으로 변장한 백은 그녀의 미모를 돋보이는 냉정한 표정을 지으며 싸늘히 말했다.
그것에 과거의 향수를 느끼면서 왕흘은 왕창과 백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일단은 마차를 빌려서 백마항으로 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백마항에서 배를 타고 관도항으로 가야합니다. 그곳에서 동구항으로 가는 배를 타고 복양까지만 들어가면 됩니다.”
“복양…? 왜 그곳으로 가지? 그곳은 연주가 아닌가?”
“원소의 영향력 안에서 움직이는 것은 위험합니다. 차라리 좀 더 돌더라도 연주를 통해 가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최종 목적지는?”
“서주입니다.”
왕흘의 대답에 백의 표정이 딱딱히 굳었다.
그녀의 모습에 왕흘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께서 그리 생각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알고 있어.”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어.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불러 놓은 마차를 타고 백마항까지 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가끔씩 도적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마차를 호위하는 용병들 덕분인지 그들을 쉽게 격퇴할 수 있었다
며칠을 별다른 일 없이 달려 번화한 백마항 근처에 도착한 왕흘 일행은 곧장 동구항으로 가는 배편을 수배했다.
하지만 동구항의 배편은 없었다.
겨우 내일 출발하여 낙양 인근의 맹진항으로 가는 배만 있을 뿐이었다.
연주와 기주는 언제라도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런…”
배를 구할 수가 없다.
아무리 웃돈을 주려 해도 아무도 배를 몰려고 하지 않았다.
“연주와 서주간의 불화 때문에 배를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다오. 굳이 남쪽으로 가고 싶으면 맹진항을 통해 가는 것이 나을 듯 싶은디?”
늙은 뱃사람이 퉁명스레 말하자 왕흘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쉽게 풀리지 않는 것이 아쉬웠지만 낙양도 나쁘지는 않았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연주목 조조가 황제를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는 소문을 들었다.
연주목의 병력이 움직였다면 그것에 편승하여 치안이 안정화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호위를 부탁할 병력을 구하고 연주로 들어갈 수 있다.
“어쩔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서 가고 싶은데… 그럼 어떡해? 이런 곳에서 머물고 싶지는 않다고.”
새침한 얼굴로 백이 말하자 왕흘은 전전긍긍해하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머무시는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백마항에는 수광장이라는 좋은 여관이 있으니 그곳에서 머무시는 것이 어떠시겠습니까?”
“흥! 너 따위 하인이 좋다고 말해봤자 얼마나 좋겠어?”
“자자. 누이. 그렇게 화내지 마시오. 이광도 노력하고 있잖소.”
“넌 매번 이광 편만 드니? 그래! 내가 나쁜 년이다! 나쁜 년이야!”
이광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백은 화를 냈고 그것을 보며 사람들은 나이들고 다친 이를 함부로 대하는 그녀를 욕했다.
성공적이다.
왕흘은 공자원의 중스승이다.
그 누구도 저런 꼴로 아무것도 모르는 성깔 더러운 계집애에게 맞으며 괄시당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다.
씩씩거리던 백이 앞서 가버리자 왕창은 쓰러져서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왕흘을 부축할 생각도 없이 퉁명스레 말했다.
“넌 따로 방을 구해서 쉬도록 해라. 우리가 쉴 곳은 우리가 알아서 구할테니.”
“네…네에.”
왕흘이 비참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왕창은 앞서 걷는 백을 따랐다.
그들이 멀어지는 것을 보며 왕흘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백과 왕창은 따로 움직인다.
그리고 자신은 그들의 주변에서 노숙하고 있다가 만약의 경우 움직인다.
그럼으로써 둘 중 하나라도 무사함을 노리는 것이다.
——
“정말이지! 이따위 허름한 여관에서 자야 한단 말이야!? 정말 수치스럽네! 아버님께서 아시면 엄청 화를 내실 거라고!”
“하하하… 그래도 어쩔 수 없잖습니까.”
“넌 맨날 그러니!? 흥! 아아… 빨리 양양으로 돌아가고 싶어. 이딴 곳에서 계속 머물러야 하다니. 흥!”
“누이. 너무 화내지 마시구려.”
백마항에 있는 꽤나 고급진 여관에 들어오고 나서도 백의 투정은 심했다.
그런 그녀를 말리며 왕창은 다가 온 점원에게 금 세냥을 던져주며 말했다.
“이곳에서 가장 좋은 방을 내라. 내 누이가 더 이상 투덜거리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그리고 우리는 소란스러운 것이 싫으니 후원 전체를 빌리도록 하지.”
“아, 알겠습니다.”
“누이. 가시지요.”
“흥! 정말이지…”
투덜거리는 백과 그녀를 달래는 왕창은 안절부절하지 못하며 후원으로 안내하는 점원을 따라 복도를 걸었다.
아까 전 그녀가 보인 모습에 1층에서 식사를 하던 손님들의 대부분은 짜증스러운 표정이었다.
가끔씩 저렇게 돈만 많은 잘난 사람이 있다.
양양이라면 강남에 가까운 곳이다.
강북의 입장에서는 촌이나 다름없는 계집이 저렇게 잘난 듯 떠드는 것이 못마땅했던 손님들은 언짢은 얼굴로 식사를 계속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다.
구석에 앉아서 음식을 깨작거리던 소년은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생각하다가 자신의 앞에서 술을 홀짝이는 사내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방금 그 여자.”
“이건 또 예상 밖의… 혹시 마음에 드셨습니까?”
“미쳤나?”
퉁명스레 말한 소년을 향해 웃으며 그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양양의 말투가 아닙니다. 오히려… 억양은 양주, 강족들의 억양이 섞여 있습니다. 숨기는 듯 하지만 양주에서 활동을 했던지라… 확실히 그 억양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걷는 걸음걸이가… 무예를 익힌 자입니다. 또한 손을 보면 더욱 그렇군요. 화장기로 숨기려 했지만 꽤나 검을 다루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있던 소년. 그의 허리에 검이 들려 있지만 그 손은 검을 잡은 손이 아닌 오히려 도련님의 손과 비슷하더군요.”
“그리고?”
“또 있습니까?”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소년은 피식 웃었다.
“두가지를 놓쳤군. 후원 전체를 빌릴 정도로 돈이 많은 자가 하인 하나 없이 움직인다는 것. 그리고… 점원의 안내에 군소리 없이 갔다는 것. 저만큼 짜증을 내던 사람치고는 너무 순순해.”
“그것은 예측 아닙니까?”
“예측은 중요한 거야. 행동에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니까. 어디보자…”
소년은 눈을 감고 생각하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봐.”
“네.”
“다른 후원으로 방을 옮길 수 있나?”
“예? 하지만…”
벌써 사흘째 이곳에서 머무르고 있는 소년이었다.
이미 얼굴을 알고 있는 소년을 향해 점원은 조심스레 답했다.
“방은 있습니다만… 가격이.”
“이정도면 되겠지?”
금괴 반토막을 탁자 위에 올려 놓자 점원은 활짝 웃었다.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일행이 있으니 그들도 후원으로 오라고 전해주게나.”
“그럴 필요 없소.”
“그럴 필요 없다네.”
여관으로 들어 온 덩치 큰 사내와 비슷한 덩치의 사내가 들어와 탁자에 앉자 소년은 차분히 물었다.
“배는 있었나?”
“서주나 연주로 가는 배는 없더군. 있는 것은 맹진항으로 가는 배편 뿐이요.”
“하… 그냥 온현으로 돌아갈까?”
“…..”
뚱한 눈으로 덩치 큰 사내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보따리를 들어 올렸다.
딸을 위해 준비한 선물들이다.
그것을 보며 소년은 키득거렸다.
“농담이다. 그럼 일단 낙양으로 가는 수 밖에 없겠군. 그곳에서 서주로 가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