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The Unfinished Lord RAW novel - Chapter 210
210화
유기가 다급하게 팔을 붙잡자, 황조는 부드럽게 손을 토닥여 주었다. 그러고는 엄중한 음성으로 말을 했다.
“공자, 형주의 상황은 그야말로 위급하기 짝이 없습니다. 마치 바람 앞의 등불이요, 광풍 속 화초와 같지요. 하니 공자께서 똑바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시면, 유 형주께서 이루어 놓은 모든 업적을 그대로 빼앗길 수도 있음입니다.”
겁에 질린 유기가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황조는 그저 힘겹게 걸음을 옮기며 계단을 오를 뿐이었다.
계단을 거의 다 올라왔을 즈음, 유기가 황조에게 물었다.
“장군, 이제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장군의 말처럼 형주를 좀먹으며 권세를 이어 가려는 이들을 처단하였습니다. 그다음은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유기는 채씨 일가를 양번에서 일소하긴 하였으나, 그게 전부였다. 물론 강하 세력이야 황조가 이끌고 있으니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곳을 제외하면 사정이 좋지 못했다.
이미 형주 곳곳에 채씨 일가의 힘이 뻗어 있으니, 만약 지지부진하게 일을 끌다가는 오히려 역공을 당해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를 상황인 것이다.
“공자.”
“예.”
“스스로 하기 어렵다면, 사람을 불러서 하면 될 일입니다. 굳이 이곳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의 인재까지 모두 끌어들여 기틀을 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을 높은 자리와 권한을 내준다면, 능히 높은 공적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황조의 논리정연한 설득에 유기는 문득 유비를 떠올렸다. 유비 휘하에는 수많은 인재가 모여 있고, 형주의 뭇 인사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황조의 말에 따르면 유비 또한 중히 써야 할 인재임이 분명하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을 떨치기 어려웠다.
그 정도 인망과 세력을 갖춘 유비가 반기를 들어 올린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이 빤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유기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자, 황조는 단박에 이유를 파악했다. 그러고는 다독이듯 말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아무리 유 사군이 대단하다고 한들, 정당성을 갖춘 공자를 향하여 칼을 들어 올리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정의와 인의를 기치로 삼아 일어났으니, 그에 합당한 족쇄를 채우면 됩니다. 공자께서 더더욱 감싸 안을수록 그는 움직일 수 없을 것입니다.”
황조는 여전히 불안해하는 유기의 손을 부드럽게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그를 더욱 띄워 주고, 그가 원하는 바를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내주십시오. 그러면서 언제나 그를 전장에 세우십시오. 공자께서 스스로를 낮추며 유비의 군공을 높인다면, 그는 감히 칼을 뒤집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공자로서는 가장 좋은 사냥개를 얻어 낼 수 있는 방법입니다.”
황조는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유비의 본질을 읽어 냈다. 이를 모르는 유비는 그저 황조가 욕심을 부려 이번 일을 일으켰다고 생각을 하고 있을 테니 당할 수밖에 없으리라.
황조는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품에 담긴 구슬을 꺼내 유기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언제나 걱정이 많을 것입니다. 그처럼 사람을 믿고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 말입니다. 그럴 때마다 의심을 해서는 결코 일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말처럼 망설여서는 안 됩니다. 생각은 깊되, 빠르게 결정해야 합니다.”
유기는 노회한 황조의 말을 듣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유표에게 받지 못한 애정과 조언을 지금 황조로부터 받는다 생각하며 가슴에 새겨 넣었다. 더욱이 황조의 눈빛은 마치 해탈한 사람과 그것과도 같아 더더욱 믿음이 차올랐다.
유기는 황조를 부축한 채 이것저것 계속 물음을 던졌다.
“유 사군은 그리하면 된다고 치지만, 형주의 많은 세족은 어찌해야 합니까?”
“가문의 안위와 부, 명성을 중요시 여기는 인물들입니다. 그들을 이용할 때는 가문의 명성을 이용하고, 그들을 벌할 때는 부를 빼앗으소서.”
유기의 물음에 황조는 전혀 귀찮은 내색 없이 답변을 들려주었다.
그렇게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뒤로 부곡들이 따랐다. 혹여 채모가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 준비한 최소한의 대책인 것이다.
만약 이 자리에서 유기나 황조가 목숨을 잃는다면 상황은 정말 걷잡을 수 없이 악화일로를 달릴 것이고, 이는 다시 채모의 복귀를 알리는 일이 될 것이었다.
이윽고 유표의 침전 앞에 이르자, 유기와 황조는 그 자리에서 멈추어 서서 예를 표하며 말했다.
“아버님, 소자 유기이옵니다.”
그러자 안에서 내관이 나와 말했다.
“유 형주께서 몸이 좋지 않으셔 대답하기가 어렵사옵니다.”
황조는 그런 내관을 잡고 바닥으로 내팽겨 치며 말했다.
“내가 그런 허락 따위를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모르느냐! 그런 것을 보면, 네놈은 원래 유 형주를 모시던 내관이 아닌가 보군.”
황조는 유표와 격이 없이 지냈는데,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전임자로부터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비록 사소한 일이긴 하나, 그런 점 하나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 황조였다.
바닥에 쓰러진 내관이 황망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황조가 거침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침상에 누워 중얼거리는 유표가 보였다.
황조는 그의 앞에 서서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미안하지만, 약속은 못 지켰군. 다시는 양양으로 오지 말라 했는데 말이야.”
황조는 유기의 부축에서 벗어나 유표의 침상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자네나 나나 이룬 것도 없이 늙기만 하였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군.”
황조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유표에게 마치 자랑을 늘어놓듯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댔다. 그 시간이 무려 한 시진에 이르렀지만, 전혀 지루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언제나 서로 견제하며 이용하던 관계인 유표를 바라보는 황조의 눈은 사뭇 슬퍼 보였다.
“그래도 자네와 달리 나는 제 발로 걸을 수 있으니, 내가 이긴 것 같군. 물론 자네 아들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말이야.”
이죽거리는 표현에도 유표는 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저 골골대며 겨우 숨을 쉬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황조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는 물었다.
“어째서 유종에게 형주목을 주려고 하였는가. 채씨 놈들에게 그렇게까지 권한을 내주면서 말이야.”
약간은 원망 서린 질책. 하지만 황조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분명 약속하지 않았는가, 손가 놈들은 걱정하지 않게 해 준다고. 자네는 한조를 다시 일으켜 보겠다며 그 난리를 쳐 댔지만, 결국 우리가 한 일들은 그저 꼴사나운 몸부림에 불과했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자네나 나나 어린 치기에 세상을 똑바로 보지 못했지.”
순간, 유표가 움찔거렸으나 황조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일방적인 이야기를 이어 나가다 황조는 잠시 눈을 감았다.
한참 후, 유기가 부르자 황조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으으음, 깜빡 졸아 버렸군. 그래, 유 형주도 우리의 손에 들어왔으니, 이제 걱정할 것은 없네. 아무리 채모가 수작을 부리려 해도 이미 늦었지.”
유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황조의 손을 잡으려는 순간, 황조는 갑자기 몸을 일으켜 크게 외쳤다.
“어찌하여 그랬는가, 어찌하여! 자네는 나와의 약조를 지키지 않았어! 난 자네를 믿고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강하를 지켰어! 명예도, 인생도… 내 모든 것을 바쳤다고! 그런데 자네는 무엇을 바쳤는가!”
갑자기 실성이라도 한 듯 소리를 질러 대는 모습에 모두가 놀라 황조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형주목이 되어 만족했지. 선비들을 모아 나라를 구할 생각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만 지키려 하니, 누가 자네를 위해 일하겠는가! 어!”
결국 보다 못한 내관들이 달려가 황조를 침전에서 끌어냈다.
“되었으니, 놓아라!”
“장군, 이게 대체 무슨…….”
서슬 퍼런 황조의 기세에 내관들이 물러나자, 유기가 다가와 뭐라 말을 하려 하였다. 그러나 황조는 손을 들어 올려 막으며 호통 치듯 언성을 높였다.
“자네는 말이야, 내가 유 형주와 마지막 말을 나누는 것이 그렇게 싫었는가! 그래, 칼을 거꾸로 쥐어도 아비는 아비라는 것이군!”
“장군, 그런 게 아니지 않습니까.”
“되었네. 내 일도 마무리 지었으니 돌아가 보겠네.”
황조의 의중을 알아차린 유기가 내관들이 보는 가운데 당당하게 말을 꺼냈다.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하신단 말입니까, 장군. 저는 그저 아버님의 상세가 위중하고, 장군께서도 나이가 연로하셔 걱정이 되어 그랬을 뿐인걸요.”
유기의 능글맞은 연기에 유표의 과거 모습이 떠오른 황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공자, 나는 이제 저택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공자는 아직 제가 필요하다 하였지만, 이 황 모는 이미 늙고 힘이 빠져 무엇인가를 더 할 여력이 없습니다. 이제 소인의 약조는 여기서 끝이옵니다.”
단호한 언사에 유기는 붙잡으려 했지만, 황조는 다른 내관의 손을 붙잡고 그 자리를 떠났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유기에게 호위병이 옆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주공, 관청은 모두 장악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채씨와 괴씨는 성을 탈출한 것으로 보입니다.”
“모두 말입니까?”
“식솔들이 일부 남기는 하였으나, 그자들은 딱히 죄가 없는 이들이라…….”
“아니, 모조리 잡아들이세요. 혹 간자가 되어 문제가 생기는 것보다는 그전에 아예 싹을 잘라 버리는 것이 편하지 않겠습니까?”
“…네. 바로 명을 따르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보인 호위가 뒤로 물러나자, 유기는 여전히 황조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 * *
황조가 홀로 나오는 것을 확인한 황조의 자식들이 서둘러 달려가 그를 부축하였다. 내관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황조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에게 뛰어온 자식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서둘러 강하로 돌아가야겠다.”
“네?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제 채씨와 괴씨가 사라졌으니, 우리가 형주의 정국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황조는 경솔한 말을 입에 담는 아들의 주둥이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퍽!
난데없는 횡액에 놀란 아들이 당황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으나, 황조는 전혀 개의치 않고 말했다.
“말조심하거라. 유기, 그놈도 교활한 놈이니, 자칫 잘못했다가는 우리도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양양에서 잠시 떠나 있는 것 나을 것이다.”
무엇이 아쉬운지, 여전히 미련이 남은 듯한 아들의 기색에 황조는 혀를 차며 말했다.
“죽을 자리가 그리 좋다면 네가 남는 것은 말리지 않으마. 한데 네놈이 유비와 각을 세우고 싸울 수 있겠느냐?”
그 말에 아들이 고개를 숙이며 현실을 자각하자, 황조는 어깨를 두드려 주며 말했다.
“어차피 유 공자가 기댈 곳은 우리뿐이다. 잠시 물러나 유비와 공자의 싸움을 지켜보다가 손을 내밀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