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e Frog in the Drawer RAW novel - Chapter 6
06
최초의 사람도 사랑을 알았을까. 사랑해서 상대의 몸을 갖고 싶었던 걸까. 배운 적 없는 짐승도 발정기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 타인을 사랑하는 건 생명체 안에 깃든 본능일 거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 순서를 두고 샤워했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하얀 수증기 때문에 공기가 눅눅했다. 수시로 눈이 마주치면 입을 맞췄다. 입술을 떼고 붙일 때 보내는 시선이 농밀해졌다. 서로 몸을 비비지 못해 안달이었다. TV를 끄고 서로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나는 임하얀의 턱선을 입술로 문질렀다. 비누 향기가 코를 찌르는 목에 콧잔등을 비볐다. 임하얀이 움츠러들 때 하얀 티 사이로 분홍색의 속옷이 보였다. 입에서 더운 숨이 터져 나왔다.
“더워.”
“선풍기 꺼낼까.”
“아니, 그보단… 얘기 좀 하자.”
“여기서?”
“응….”
아직 더울 리 없는 날씨였다. 그런데도 나는 덥다는 핑계로 웃옷을 벗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 상반신으로 임하얀에게 엉겨 붙었다. 연달아 그 여린 목에 입술을 대며 자극했다. 간지럼 타는 임하얀의 허리를 만지며 서서히 위로 올라탔다.
분홍색의 속옷이 손끝에 걸렸다. 임하얀의 흰 티를 단숨에 위로 올렸다. 봉긋한 가슴을 가린 분홍색의 속옷 때문에 웃음이 건조해졌다. 그 속옷 위로 튀어나온 부드러운 가슴에 입술이 내려갔다. 혀로 진드근히 핥자 임하얀의 허리가 튀어 올랐다.
침대 위였다. 애초에 침대 위에 앉아서 이야기하자는 말에 검은 속내가 있던 것이다. 임하얀이 그걸 몰랐을 리는 없다.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후부터 이러자고 작정했다. 손을 등 뒤로 넣어 훅을 끌렀다. 부드럽게 떨어지는 속옷을 콧날로 밀어내고 완전히 내 것이 된 탐스러운 살구색 언덕을 바라봤다. 언덕 정점에 있는 분홍색의 열매는 유혹적이었다. 한 입을 베어 물 듯이 머금자마자 가슴이 따라오듯 떠올랐다.
“잠깐, 이상해….”
“몰라, 안 이상해.”
쭉 빨듯이 입술로 유두를 자극했다. 혀에 닿는 도톰한 것을 정성 들여 물고 핥았더니 임하얀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느릿느릿한 그 몸짓은 거절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붉어지는 임하얀의 뺨을 보면서 나는 희열을 느꼈다. 다른 무엇도 아닌 바뀌어 가는 임하얀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거라면 온종일 혀가 닳도록 빨 수 있었다.
더한 반응을 끌어내고 싶어 치마 안으로 손이 들어갔다. 기껏해야 허벅지를 스쳤을 뿐이었다. 임하얀의 평정심이 깨졌으면, 미쳐 날뛰었으면 싶었다. 이걸론 충분치 않다. 임하얀의 속옷은 한 세트인 모양이었다. 허벅지 사이에 있는 속옷의 색도 분홍이었다. 손가락을 끈에 걸어 잡아당기자 겁먹은 손이 단속에 나섰다.
“왜. 안 돼?”
“마음의, 준비가….”
“준비 천천히 해. 나는 보기만 할 테니까.”
개소리 반, 진심 반이었다. 만약 이대로 물러난다면 엉큼한 상상이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다. 현실에서의 임하얀을 원했다. 하지만 임하얀은 제 속옷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그런 임하얀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렸다. 그리고 임하얀의 손을 위로 잡아당겼다. 속옷에 짓눌린 음부의 윤곽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임하얀은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상상도 못 했을 거다. 내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지. 두툼한 두 개의 작은 언덕과 그 사이의 일자 선. 본능에 충실한 입술을 가져갔다. 팽팽하게 당겨진 천으로 감춰 둔 살에서 응큼한 냄새가 났다.
“손, 손 놔.”
“음, 싫어.”
“그냥, 차라리….”
차라리 벗기라는 말이겠지만, 그 말을 들으니 이 상태로 넣어 보고 싶었다. 혀를 길게 빼 천 위를 더럽혔다. 유난히 특정 부위만 진해진 게 더욱 야해 보였다.
입술을 붙이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틈에 빠져나온 혀는 가장 은밀한 틈으로 밀어 넣었다. 천과 함께 말려들어 간 혀가 움푹 파진 곳에서 정지했다. 심술맞게 꾸물거리자 속옷 끈을 쥐고 있던 손이 풀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다리 사이에 완벽히 자리 잡은 나를 쫓아낼 수 없었다.
하나의 과정처럼 임하얀의 발이 침대보를 긁어내렸다. 연약한 살 두덩이 사이를 파고든 혀는 만족스럽게 그 안을 돌아다녔다. 달라붙은 입술은 천이 얼마큼 젖고 있는지 확인하는 용도였다. 축축해진 틈이 혀가 매끄럽게 드나들 만큼 젖어 들었을 때 나는 임하얀의 손을 놓아주었다.
“흐…. 아.”
반사적으로 생명줄처럼 쥐고 있던 속옷 끈을 놓쳤다. 임하얀은 궁지에 몰리자 제 입 안에 손을 넣었다. 안타까운 듯이 손가락을 깨물고 있는 임하얀에게서 이전엔 볼 수 없었던 연약한 모습이 보였다. 입술이 닿은 부위만 진해진 속옷을 입고 있다니. 벨트를 끄르는 소리에 임하얀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참을성 있게 눈길이 섞일 때까지 기다렸다. 바지 훅을 풀며 드로어즈를 천천히 내렸다.
임하얀의 시선을 받은 성기가 양심 없이 위로 고개를 쳐들었다. 내 것을 본 임하얀이 고개를 뒤로 뺐다. 질린 듯한 얼굴로 나와 아래를 번갈아 보는 바람에 힘이 받았다. 조금씩 더 커지는 모양새에 임하얀은 어깨를 움죽대며 피했다.
“다음에…. 할까?”
“안 돼.”
“아파 보여. 그건, 너무하잖아.”
“그거 남자한텐 칭찬이야. 알긴 알아?”
내심 임하얀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임하얀의 작은 손으로 다 쥐어지지 않을 성기를 주면서 흔들어 보라고 요구하고팠다. 그런데 걸음마도 못 뗀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다시 나를 피해 눕는 임하얀의 위로 넘어졌다.
임하얀의 뺨과 목으로 이어지는 선을 따라 질펀한 입맞춤을 남겼다. 입을 맞추는 부위가 가슴인지 목인지 분간 가지 않을 즈음 임하얀은 긴장을 풀었다.
몸의 힘이 풀린 것을 감지하자마자 나의 손은 벼르던 아래를 노렸다. 속옷 중앙에 동그란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그걸 건들지 않고 지나치기엔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손가락을 끈에 걸고 훅 잡아당기자 미약한 반항이 일었다. 하지만 기차는 떠났다. 돌돌 말린 속옷이 허벅지로 내려간 상태였다.
가여운 잔털들이 젖어서 눌려 있었다. 잔털로 가리지 못한 하얀 살 두덩 사이로 손가락 하나를 넣어 보았다. 입구를 더듬다가 들어간 손가락은 그 미끄러움에 놀란 것처럼 스르르 안으로 들어갔다. 습하고 미끌미끌했다. 열심히 빨아 준 보람이 있었다. 아늑한 안을 가볍게 휘저었다.
“하으….”
운 좋게도 임하얀은 민감한 편이었다. 끊길 듯 말 듯 한 신음이 길어질수록 아래는 머리를 꺼덕거렸다. 임하얀이 아래서 흘리는 만큼 성기도 무언갈 흘리고 있었다. 빠르게 손가락 하나에 침을 묻힌 뒤 임하얀의 안으로 떠나보냈다. 그 안에 흐르는 달콤한 것을 손가락에 묻히고 다시금 혀로 가져왔다. 임하얀의 맛. 이게 임하얀의 맛이었다.
손가락을 넣어 맛보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임하얀의 허벅지를 단단히 붙잡고 양옆으로 벌렸다. 오므라져 있던 입구가 활짝 벌어지며 새빨간 밀지를 내게 보였다. 손으로 뒤늦게 가려 보려고 하지만 이미 고개를 숙인 뒤였다. 임하얀의 손은 허공을 가르다가 내 머리칼을 쥐었다. 상관없었다.
임하얀은 마음이 약해서 머리칼을 세게 쥐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나는 임하얀만큼 마음이 좋지 않아서 손가락으로 넓힌 자리에 혀를 쑤셨다. 배려 같은 건 모르겠다.
임하얀의 음부에 입이든 코든 박고 싶었다. 콧날로 한 번 축축한 곳을 긁은 뒤 그 진한 맛을 직접 경험했다. 음부를 감싸듯 핥은 혀가 들어갔다. 둔부가 파르르 떨렸다. 그 떨림조차 내게는 자극으로 다가왔다. 무릎을 세운 임하얀의 허벅지가 머리를 조여 왔다. 그게 좋다는 걸 모른다니. 가여운 여자 같으니라고.
“흐, 으, 빨지만, 마.”
입술로 흡입하는 순간 느껴지는 강렬함이 임하얀은 싫은가 보다. 입술로 훕 빨아 당길 때마다 감전된 듯 부르르 떠는 임하얀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빨아 주면 빨아 줄수록 임하얀의 아래는 진한 물을 흘렸다.
좋다는 소리였다. 사정없이 쭉, 쭉, 빨면서 혀를 넣어 휘돌리자 결국 임하얀은 손에 힘을 주었다.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쥐고서 둔부를 상하로 움직였다. 나는 입을 떼지 않고서 혀로 임하얀의 내벽을 슬몃슬몃 긁었다. 혀 아래로 들어오는 진한 물을 삼켰다. 바들거리던 임하얀의 둔부가 위로 떴다. 파르르 떨고선 높은 신음을 질렀다.
“으, 아, 아으!”
입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이 달콤한 것들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었다. 아래로 천천히 낙하하는 임하얀의 허벅지를 안고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갔다. 찾아낸 작은 공알을 콧날로 슬쩍 누르듯이 스쳤다. 방금 절정을 경험한 임하얀이 거센 힘으로 내 얼굴을 밀어냈다.
“잠깐만, 해루야…. 아, 읏!”
두 번째. 이번엔 더 빨랐다. 내벽까지 떨리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젖고 젖어서 이제는 내 혀보다 더 축축할 지경이었다. 콧날로 가두어 두듯 공알을 압박하자 신음조차 내지 못했다. 자유로운 종아리만 마구 흔들었다.
“읏, 아아, 응!”
그 움직임 덕분에 혀는 눈치 보지 않고 아래를 맛볼 수 있었다. 내벽이 맞물려 혀를 꽉 조였다. 임하얀이 세 번째 절정을 겪는 순간이었다. 혀를 빼내는 것조차 자극이 되는지 다리 사이가 시원히 열려 있었다. 임하얀의 눈가는 눈물범벅이었다. 그게 안쓰러워 마음이 약해졌다.
“울어?”
“하…. 전희는, 됐어. 창피하니까 그만. 응?”
“전희. 되게 고급스러운 단어를 쓰네.”
침착하게 굴려는 임하얀이 은근히 얄미웠다. 나는 젖은 입술을 임하얀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다. 엎드린 다음 임하얀의 귓불을 찾아 물었다. 푹 젖은 입구에 손가락을 넣어 쑥, 쑥, 넣었다 뺐다.
“그만큼, 했으면…. 으!”
“더 젖어야 하거든. 푹, 아주 푹.”
“으, 야….”
임하얀이 쌍심지를 켰다. 나는 엄지로 공알을 거칠게 문질렀다. 들여보낸 손가락 두 개로는 내벽을 쳐 댔다. 이물질 같은 손가락의 밀어붙임을 감당하기 어려운지 몸이 들썩들썩했다.
벌어진 입술에서 단 숨이 나온 순간 가볍게 음부 안쪽을 문지르기만 하던 손가락으로 물을 파냈다. 푹, 푹 파내며 내벽을 강하게 두드렸다. 더 달라는 듯이 안쪽을 자극하자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신음으로 보답해 줬다.
“이건 조금, 응, 아으, 읏!”
“조금만 더….”
“제, 발, 아니….”
미리 물고 빤 관계로 절정에 다다르는 시간이 짧아졌다. 손바닥에 물기가 묻을 즈음에 푹 젖은 손가락을 뽑아냈다. 다리를 급격하게 오므린 임하얀이 상체를 정신 놓고 흔들었다. 꽉 오므린 다리 사이에서 나오는 물들이 허벅지로 떨어졌다. 임하얀은 자기의 변화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임하얀을 보고서 한계를 느꼈다.
할딱할딱 숨을 가쁘게 쉬는 임하얀의 뺨에 입을 맞췄다. 힘으로 오므린 다리를 가뿐하게 폈다. 힘이 빠진 터라 할 수 있는 게 없을 거다. 물에 빠졌다가 나온 양 젖은 잔털들을 손으로 한 번 쓰다듬었다. 자세를 잡고 음부에 천천히 내 것을 맞췄다.
뭉툭한 부분이 살을 가를 때마다 임하얀의 눈이 커졌다. 너도 나를 원하지. 나를 원하는 거 맞지. 임하얀의 젖은 음부로 내 것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
임하얀이 아파하는 게 훤히 보였다. 하지만 옥죄기 시작하는 내벽의 느낌에 뇌가 풀어졌다. 반밖에 안 들어갔다. 기운을 풀 곳이 없어 주먹으로 침대를 쥐어박았다.
사랑하는 여자와 몸이 겹치는 순간이었다. 이걸 다른 누구와 한다는 걸 상상도 하지 못하겠다. 끙끙 앓던 임하얀이 작정한 것처럼 몸의 힘을 풀었다. 그 순간 닫혀 있던 문을 한 번에 뚫고 들어갔다. 전부는 아니었지만 반 이상이 안으로 박아 들었다.
“아! 아파, 으, 아….”
“미안, 미안….”
“빼 봐, 아….”
임하얀의 입장에선 큰 충격으로 다가왔나 보다. 저 강한 여자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임하얀이 진정될 동안 이마에 입술을 대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 이성을 놓을 것 같았다. 나 또한 임하얀만큼 충격이 컸다. 눈앞이 빙 돌았다. 아래를 죄는 음부가 나를 손쉽게 조종하고 농락했다.
완전히 들어갔다고 할 수는 없지만 큰 욕심은 내지 않으려 한다. 임하얀은 3분의 2 지점만으로도 세상이 무너진 표정이었다. 시간을 두고 기다리니 자연스레 내 목에 팔을 감았다.
허리를 들어 빼내는 과정에서 잠시 이성이 흐려졌다. 노란 침대보를 잡고 버티며 다시 안으로 진입했다. 좁은 내벽을 채우는 감각에 지고 말았다. 허리를 강하게 털어 넣었다. 끝까지 쭉 밀고 들어간 성기를 느낀 임하얀이 더는 못 하겠다는 듯이 앙탈을 부렸다.
“으응, 으….”
하지만 앓는 톤이 바뀌고 있었다. 삽입 횟수가 많아질수록 그만하라는 말이 쏙 들어갔다. 나는 성기를 치댈 때마다 이성을 조금씩 버렸다. 앞뒤로 흔들리는 임하얀의 다리를 붙들었다. 이 정도면 다정하다고 생각했다. 무식하게 허리를 치받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읏, 응, 아!”
“흐, 하….”
들어갈 때마다 물이 성기를 타고 흘렀다. 머릿속이 암전됐다. 감각도 감각이지만 특히 눈으로 보이는 것들이 자극적이었다. 이보다 더한 자극과 충만함은 없을 것 같았다. 푹, 거침없이 찔러 넣은 뒤 허리를 흔들었다. 눈살을 찌푸린 임하얀이 앙칼지게 등을 할퀴었다.
“아, 으, 아으, 읏!”
“하아…. 아, 하얀아, 아, 좋아, 하얀아….”
자기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임하얀이 아래를 가볍게 조였다. 영혼이 아래로 몰렸다. 임하얀의 입 안을 혀로 뒤적거리며 성기를 깊게 처박았다.
임하얀의 혀는 살려 달라는 듯이 밀어내 보지만 나는 죽어도 뗄 생각이 없었다. 이대로 임하얀하고 죽어도 상관없었다. 살면서 느꼈던 모든 공허함과 허전함이 임하얀과 살을 맞대는 이 행위 하나로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가슴에서 미친 듯이 샘솟은 사랑이 온몸을 배회하는 게 끔찍이 좋았다. 임하얀의 허리를 위로 들어 안았다. 찍어서 내리누르듯 아래를 맞붙였다. 마지막으로 찌르는 순간 임하얀이 온 힘을 다했다. 모든 걸 쏟아부으며 느낀 것은 달콤한 해방감이었다. 나의 삶을 억누르던 부정적인 것들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그 안을 임하얀이 채웠다.
발정기 뱀처럼 얽힌 입술을 떼어 냈다. 잔기침을 하는 임하얀의 얼굴이 핼쑥해 보였다. 다리를 벌리고 있질 않나. 제 몸을 수습할 정신이 없는 거다.
“그거….”
“아, 이거….”
임하얀은 또다시 일어서고 있는 아래를 보고 흠칫 놀랐다. 이건 어쩔 수 없었다. 젖은 허벅지에 은근히 문질러 그 투명한 살결을 즐겼다.
“아까, 숨 모자란다고 말했잖아. 그런데 왜, 안 비켰어.”
“음…. 안 들렸어.”
“그만, 문질러.”
“하아…. 하얀아.”
“이럴 때만….”
막연히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좋은 수준이 아니었다. 이 정도가 단순히 좋다는 말로 정의되는 거라면 좋다는 말의 의미를 바꿔야 한다. 왜 사람들이 사이비에 빠지는지 알겠다. 임하얀이 교주라면 나도 사이비 신도가 되어 전도하러 다닐 거다. 비록 그 신도는 타락하여 교주의 허벅지에 좆을 비비고 있지만.
정액이 삐쭉 흘러나온 걸 보자 입맛이 돌았다. 발기한 성기를 임하얀의 허벅지에 문지르고 문질렀다. 힘이 붙은 허리가 허벅지를 음부로 착각한 듯이 움직였다. 한참을 쳐올린 성기의 끝에서 하얀 것이 사출됐다. 비릿한 정액이 임하얀의 종아리까지 더럽혔다. 그 모습에 힘을 안 받을 리가 없었다.
“언제 끝나….”
네가 더 이상 예뻐 보이지 않는 날에. 그리고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거다. 옆으로 누워 임하얀을 세게 안았다. 그 행위가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전초전 같은 거란 걸 깨달은 임하얀이 도망가기 전까지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이보다 더한 행복은 사람을 망가뜨리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거기엔 임하얀이 없었다. 조부모의 집은 짐 보관소로 변했다. 중요한 옷가지와 과제는 임하얀의 원룸에 있었다. 대신 월세는 내가 내기로 했다. 반반씩 내자는 걸 내가 더 많이 쓰고 내가 더 많이 먹고 내가 더 많이 임하얀을 착취한다는 핑계로 막아냈다.
임하얀 돈은 아까웠다. 고모네 가족이 한창 장사가 잘될 때 어머니 병원비를 도와줬단다. 임하얀은 그 빚을 갚겠다고 노란 호프에서 적은 알바비를 받으며 일한 거였다. 지금도 임하얀의 사정은 그리 넉넉지 않았다. 노트북으로 밤새워 일해 알바비를 충당하는 모양이었다. 무슨 알바인지는 말해 주지 않지만 그쯤 알아내는 일이야 누워서 떡 먹기였다.
수업이 일찍 끝나 혼자 집을 지키는 신세였다. 임하얀의 노트북을 빌려서 여름 방학에 여행 갈 곳을 검색해 보고 있었다. 몰래 준비한 다음 서프라이즈로 알려 주는 게 좋겠지. 여행 사이트에서 일정 몇 개만 확인하고 노트북을 닫으려 했다. 파란 바탕화면에 무제인 폴더가 있었다.
제목을 설정해 두지 않은 이유가 있을까. 전 남자 친구 사진 같은 게 나올 가능성은 얼마일까. 그런 사진이 만약 나온다면, 설령 임하얀이 좋아하는 연예인이 나온다고 해도. 질투가 나서 노트북을 갖다 버리고 새것으로 사다 줄 거다.
폴더를 클릭하는 손길은 이미 비장하기 짝이 없었다. 긴장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데 전혀 예상 밖의 사진이 떠올랐다. 캐릭터가 밥을 먹고, 문자 하고, 울고 있는 그림들이었다. 자세히 클릭해서 확대하니 이모티콘 같아 보였다. 설마 싶어 핸드폰 메신저로 들어가 이모티콘 이름을 검색하자 임하얀이 그린 것과 똑같은 이모티콘이 나왔다.
띡띡띡띡,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와 신발 벗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노트북 뚜껑을 닫고 아무렇지 않은 척 임하얀을 맞이했다.
“뭐 하다 10분이나 늦었어.”
“장 보고 왔어.”
“뭐 샀는데?”
찔리는 게 많은 나는 괜히 장바구니를 뒤적거렸다. 임하얀이 나한테 알리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왠지 아르바이트를 따로 하지 않는데도 어디서 소액이나마 버는 눈치긴 했다. 임하얀이 냉장고에 햄 같은 것을 넣어 놓는 사이 이모티콘을 구매했다. 순위권에 들지 않은 것으로 보아 큰 인기를 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재능을 살려서 먹고살아 보려는 임하얀이 기특해 죽겠다.
“임하얀.”
“응.”
“바빠?”
“왜.”
“뽀뽀 좀 하게.”
쪽 소리가 나게 입술에 뽀뽀를 했다. 졸지에 햄을 넣어 두다가 기습당한 임하얀이 피식 웃었다. 두 팔로 임하얀을 둘둘 감은 다음 쉼 없이 볼에 입을 맞췄다. 임하얀은 장난스럽게 내 어깨를 때렸다. 남들은 당이 떨어진다는데 나는 임하얀이 떨어졌다. 보고 싶어 눈에서 진물이 났다.
“임하얀 좋아.”
“있지.”
“어.”
“왜 나한테 한 번도 누나라고는 안 해?”
생각지도 못한 말에 머리를 굴려 봤다. 객관적으로 나보다 연상이긴 하지만 내가 책임지고 보호해 줘야 할 존재라 여겼다. 장남이라 누나의 존재가 부재했고 말이다. 그러나 기대하는 눈빛의 임하얀을 무시할 순 없었다.
“누님.”
“장난 말고.”
“누, 나.”
임하얀이 가슴으로 파고들며 킬킬 웃었다. 임하얀이 좋아하는 개그는 이런 거였다. 능구렁이 같고 바보스러운 개그를 좋아했다.
평생, 늙어서도 이러고 살 거다. 대학 졸업하자마자 프러포즈하고 집도 구할 거다. 임하얀이 하고 싶어 하는 걸 뒷바라지할 자신이 있다. 하지만 임하얀은 나의 순정을 요만큼도 몰라준다. 물이 끓는 소리에 곧장 포옹을 풀려고 낑낑거렸다.
“서운하게 바로 버리고 가냐.”
“저러다 물 넘쳐.”
놓아주자마자 가스레인지 쪽으로 가는 임하얀이 머리로는 이해가 됐다.
“그리고 이게 버린 거야? 사람 다칠 수도 있어.”
가끔 임하얀은 너무 맞는 말만 해서 서운할 때가 있었다. 한 번쯤은 빈말이라도 금방 다시 안아 주러 온다는 말을 하면 좀 좋은가.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자기만 생각하는 나는 인생의 반을 손해 보고 사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임하얀이 불을 끄고 식사 준비하는 동안 나는 전기밥솥을 열었다. 무사히 고두밥이 된 걸 확인하고 소파에 누웠다. 심통 난 얼굴로 핸드폰을 보고 있었더니 임하얀이 말을 걸어 왔다.
“이제 곧 시험 기간인데. 공부는 좀 하고 있어?”
“몰라.”
“학점 관리 1학년 때부터 해야 해.”
“응.”
상은 오기 전에 내가 다 차려 놓아서 찌개만 끓이면 되는 상황이었다. 내가 입술을 내밀고 퉁퉁거리면 대개는 임하얀이 눈치 빠르게 알아차려 주곤 했다. 지금도 대답이 시원치 않자 수시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빨리, 더 빨리 와서 나를 안아 주고 예뻐해 주면 좋겠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임하얀에 대한 서운함은 늘어 갔다. 나 몰래 이모티콘을 그려서 팔고 있던 것도 이해했다. 말 못 할 사정이 있겠거니 할 수 있었다. 나는 저한테 중요한 사람이 아닌 건가, 그래서 알려 줄 필요도 없다는 건가, 하는 의심이 나를 삼키기 전에 와 줬으면.
장난으로 시작한 삐진 척이 진심으로 변하는 기로에 섰다. 임하얀이 냉장고에서 두부를 꺼내다 말고 내 쪽으로 걸어왔다.
“졸려?”
“아니.”
“내가 부르는 소리 못 들었어?”
쪼그려 앉은 임하얀은 소파 팔걸이에 비스듬히 머리를 기댔다. 내가 요지부동이자 저쪽에서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새 부리로 쪼듯이 입을 맞추는 거였다. 한 지붕 아래서 산 지가 그래도 꽤 됐다고 서로의 약점이 무언지 파악했다.
쪽쪽거리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실없이 웃어 보였다. 즉시 앉아 있는 임하얀의 허리를 잡아서 몸 위로 데려왔다. 잔머리가 일어난 임하얀의 머리를 가슴 쪽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쓸모없어진 핸드폰은 전원을 꺼 머리맡에 던져두었다.
“넌 참 단순한 것 같아.”
“알아, 나도.”
조부모의 집은 내 집이 아니었다. 그 집에서는 단 하룻밤도 잘 수가 없었다. 입구부터 낡아 있는 데다 분리수거도 힘들고 몇 걸음 만에 완주할 수 있는 원룸이었지만 이제는 이 집이 내 집이었다.
“소파 작아서 발 빠지는 것 봐. 내년에 계약 만료되면 넓은 데로 가자.”
웬일로 얌전한 임하얀이 예뻐서 보이는 곳마다 입을 맞췄다. 쪽쪽, 입술이 남아 나는 날이 없었다.
“이사? 어디로?”
“그냥. 어디든.”
어디든. 너랑 같이 살 수 있는 데로. 임하얀 저것도 나밖에 없는 것이다. 임하얀네 가족은 의지가 되지 않는다. 임하얀한테 새 운동화를 사 주는 것도, 임하얀의 꿈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나뿐이었다. 오로지 나만이 임하얀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임하얀은 완전한 내 것이었다.
“밥 먹자. 찌개 다 끓었어.”
“안 먹어.”
“상 다 차려 놓고?”
“너 보고 싶어서 눈병 났으니까 네 책임이야.”
임하얀은 가스레인지에 올려 둔 된장찌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고민 중인 임하얀의 목을 끌어안고서 몸을 뒤집었다. 아래로 내려간 임하얀이 못 말린다는 듯이 웃으며 입술을 내줬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임하얀이 없으면 하루는 달팽이처럼 기어간다. 어린 나이에 사랑을 찾은 게 감사했다. 살아온 날보다 임하얀과 보낼 날이 길다는 거니까.
나는 오늘도 본능에 나를 맡기기로 했다. 땀이 밴 속옷이 소파 밑으로 떨어졌다. 작은 소파는 잇따라 떠들리다 가라앉았다. 나의 볼품 없는 상념은 거기까지였다.
***
임하얀이 만든 캐릭터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고민이 깊었다. 내가 자기에게 이득을 물어다 준다면 나중에 가서 버리고 싶어도 못 버릴 테니 말이다. 다행히 지원할 수 있는 돈에 관해선 문제가 없었다.
몇 년 전 아빠란 인간이 미리 유산을 상속해 주면 안 되냐고 했다가 집안이 뒤집힌 적이 있었다. 안 그래도 큰아버지 일로 미운털 박힌 아빠가 본전도 못 건지고 석고대죄해야 했던 사건이었다.
그 과정에서 조부모가 홧김에 내 쪽으로 미리 상속시켜 둔 주식과 건물이 있었다. 아빠는 그걸 알고 나를 회유하려 했지만 더는 미성년자도 아니니 그걸 처분하는 데 왈가왈부할 사람은 없을 거다.
오전에 주식 중 일부를 처리하고 얻은 현금을 분류시켜 뒀다. 내년 이사 갈 때 쓰려고 반은 예금 계좌에 넣어 두었다. 나머지는 임하얀을 위해 쓸 참이었다. 며칠 전 어떻게 알고 득달같이 할아버지의 비서한테서 연락이 왔었다. 평소 내가 밖에서 한 달을 보내도 상관없으신 양반들이니 집으로 돌아오라고 할 땐 십중팔구 일이 생긴 거였다. 하지만 이번엔 그 일이 무슨 일인지 알기 때문에 철저히 무시하는 중이었다.
「어디?」
오늘 내가 데리러 가기로 한 날이라 임하얀 대학 근처에 주차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전화를 거는 족족 수신 거부당하고 있었다.
「서프라이즈 하려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 하는데 전화 안 받어.」
임하얀과 비슷한 머리를 한 여자가 지나갈 때마다 몸이 달았다. 가짜 말고 진짜 임하얀이 고팠다. 약속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애가 전화 한 통 없는 것도 걱정이고.
그때 동기 번호로 전화가 왔다. 기다리던 전화가 아니라서 실망했으나 이내 동기에게 개인적으로 부탁한 일이 생각났다. 곧바로 문자 창을 끄고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어. 나 뭐 하고 있어서.”
– 아, 지금 통화 괜찮고?
“괜찮아. 말해.”
이름 있는 대학에 다니는 덕분에 특혜라고까지 할 만큼은 아니지만 각 분야의 학연을 쏠쏠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니 우리 학교를 졸업하고서 꽤 이름 있는 스타트업을 차린 선배 하나가 있었다. 캐릭터 관련 사업을 하며 여러 유명 기업과 콜라보를 성사시킨 전례가 있는 스타트업이었다. 그 선배가 최근 학교에 강연하러 들렀다가 친한 후배들을 모아 술 모임을 한 모양이었다. 마침 그 모임에 우리 과 동기가 들어가 있어서 중간 다리 역할을 맡겼다.
– 그런데 그만큼 투자해도 돼? 진짜? 너 허공에 돈 날리는 걸 수도 있어. 혹시 거기 뭐 상장 관련 소식 있냐?
“연락처는 줬지?”
– 당연하지. 나중에 나한테 밥 한번 사라?
“살게, 잠깐…. 일단 끊어 봐.”
동기와 통화하는 사이 임하얀에게서 전화가 들어왔었다. 바로 동기와의 전화를 끊고 임하얀에게 전화를 넣었다. 얼마 안 가서 큰 문제 없이 통화가 연결됐다. 오다가 사고를 당한 건 아닐까, 하는 최악의 가정은 일어나지 않았다.
“뭐 해? 안 오고.”
– 저기….
“어.”
– 일단 심호흡해 봐.
“심호흡?”
시동을 걸고 차를 빼내다가 브레이크를 삑 밟았다. 이거 죽을병 걸려서 병원에 입원한 거 아니야? 임하얀은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화약에 불을 붙였다.
– 나 지금 집이야. 집으로 와.
“집?”
– 너희 할머니 왔다 가셨어.
“할머니?”
상황 파악이 덜 된 탓에 임하얀의 말을 복사 붙여 넣기 한 듯 따라 했다. 할머니 왔다 가셨다는 말이 이해되자 인내심이 산 채로 튀겨졌다. 임하얀은 뒷일이 걱정됐는지 막무가내 할머니 편을 들었다.
– 별말씀 안 하셨어. 오셔서 반찬 같은 것도 주시고….
“지금 집으로 갈게.”
– 응.
할머니와 함께 다니는 최 기사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약아빠진 노인네한테 걸어 봤자 100퍼센트 받지 않을 거니까. 임하얀한테는 집으로 간다고 말했지만, 할머니 위치만 파악되면 그쪽으로 먼저 갈 생각이었다. 귀가 먹먹해지려는 차에 드디어 최 기사와 연결됐다.
– 어. 최 기사 바빠. 할머니랑 병원 가는 중이야. 할머니 귀가 아파서.
전화를 바꾼 할머니가 동정심 유발 작전을 펼쳤다. 어린 시절엔 먹힌 수법이었지만 지금 상황엔 눈에 뵈는 게 없다는 말이 딱이었다.
“어디 병원?”
우회전하면서 임하얀이 말한 심호흡이란 걸 했다. 얼굴 근육이 굳어져 표정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병문안 가게. 어디 병원.”
– 아냐. 여자 친구 기다릴 텐데. 얼른 집 가야지, 해루.
“어느 병원이냐고.”
– 해루야. 할머니가 귀가 먹먹해서….
“어느 병원!”
– 덕분에 귀가 안 들린다.
“하얀이한테 무슨 말 했어.”
– 우리 해루는 목청도 좋아서 할머니 귀도 망가뜨리고…. 암말도 안 했어. 응? 가서 물어봐라. 너 먹을 반찬도 주고, 잘 지내라구 그냥 그 한마디 한 걸 가지구….
전화를 끊고 임하얀네 집으로 차 머리 방향을 돌렸다. 생각해 보니 할머니를 추궁할 때가 아니었다. 막장 집안에 학을 뗀 임하얀이 짐을 싸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숫자 1번을 길게 눌렀다.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 음성이 차 안에 메아리쳤다.
방향을 꺾어 집 앞 골목길로 들어와 다시 걸었다. 무심한 신호음이 깔딱깔딱 붙은 목숨을 갖고 놀았다.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속을 게우고 싶었다. 차를 아무렇게나 세워 두고 집으로 뛰어 올라갔다.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손이 떨려 자꾸 실패하고 말았다. 몇 번이나 틀렸는지 셀 수 없을 때 문이 저절로 열렸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임하얀이 맨발로 뛰쳐나왔다.
“비밀번호 안 바꿨….”
운동화 발로 들어가 임하얀을 와락 껴안았다. 막 머리를 감고 나와 샴푸 냄새가 물씬거렸다. 임하얀은 들썩거리는 등을 토닥여 줬다. 뇌를 파먹던 불안이 한꺼번에 비워졌다.
“들어와서 얘기하면 안 될까.”
포옹을 푼 임하얀은 윗집 할머니가 온 줄 알았다며 농담을 했다. 집 안으로 들어와 보니 테이블 위에 컵 두 잔이 놓여 있었다. 임하얀은 가련하게 무릎 꿇고 앉아 폭언을 들었겠지. 그 생각에 현기증이 났다. 임하얀은 냉장고에서 포도 한 송이를 꺼내 와 소파에 앉았다. 거기서 그러지 말고 와서 포도나 먹으라는 목소리가 아무리 봐도 꾸며 낸 것 같았다.
“어디 맞았어?”
나는 계속해서 임하얀의 표정을 살폈다. 티를 안 내는 건지 아니면 마음이 떠 버린 건지 모르겠다.
“응?”
수건으로 머리를 턴 임하얀이 티 없이 맑게 웃었다. 나는 돌아가시겠는데 얘는 포도가 달다며 씨까지 발라 먹었다. 이게 연기라면 여우주연상감이었다.
“조만간 집에 갔다 오려고.”
“그래, 다녀와.”
“가서 연 끊자고 하면 돼.”
“무슨…. 연을 끊어? 손은 왜 이렇게 떨고 있고.”
떨리는 손을 주머니 속에 감췄다. 임하얀은 물티슈로 손을 닦고 일어나 TV 장식장 서랍을 열었다. 서랍에서 체온계를 찾아낸 임하얀은 그걸 가져와 내 귀에 넣었다. 열을 재는 그 일련의 행동이 나를 향한 사랑으로 보였다.
“조금 높은데. 37도….”
임하얀의 배를 안고서 쓰러졌다. 여기로 오기 전까지 한 무서운 상상을 이기기 위해선 이럴 수밖에 없었다. 임하얀은 가닥가닥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며 웃었다.
“하던 얘기 마저 하게 일어나.”
“내일 가서 내가 말할 테니까 그쪽엔 이제 신경 쓰지 마.”
“와서 정말 좋게 있다 가셨어. 그냥…. 너 어떻게 사는지, 이사 갈 생각 같은 건 없는지, 그런 거 물으시고.”
“거짓말.”
“내가 거짓말을 왜 해. 아, 나 보고 빚이 있냐고도 물으셨다. 그래서 없다고 했지.”
“그딴 거 물을 거면 나한테 물으면 되지. 왜 나 없을 때를 골라서 왔다 간 건데?”
“네가 이럴까 봐 말씀 안 하신 것 같은데.”
안은 팔을 풀고 휙 상체를 일으켰다. 할머니가 그럴 리 없었다. 며느리로 들인 엄마와의 관계가 어떠한가. 제 빚을 탕감하기 위해 접근한 꽃뱀 취급이라며 십수 년을 괴롭혔다. 친정 빚을 갚기 위해 나를 갖고 아빠와 결혼했으니 영 틀린 말은 아니다만 할머니는 원체 가난과 빚을 혐오했다.
“그런 거라면 가지 마.”
“싫어. 내 마음이야.”
“내일 나랑 갈 데가 있어.”
내일은 황금 같은 주말이었다. 임하얀이 지난번에 예고편을 본 뒤 보고 싶다고 한 영화를 미리 예매해 뒀었다. 텔레파시가 통했나 싶었는데 임하얀이 내 볼을 아프게 꼬집었다.
“저번에 엄마가 너 초대했었잖아. 기억 안 나?”
“아…. 너희 집?”
“파랑이도 너 보고 싶대. 연두랑 하늘이도.”
“…….”
“안 갈래?”
“…아니.”
“간다고 연락드려야겠다. 아, 나 머리 좀 말리고 올게.”
이윽고 문 닫힌 화장실에서 드라이기 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파 등받이에 힘없이 드러누웠다. 할머니가 무슨 말을 했건 나중에 따로 확인해 보면 될 일이다. 어쨌든 임하얀은 이 일로 나와 헤어질 생각은 없는 듯싶었다.
그나저나 임하얀네 집에 가게 될 줄은 몰랐다. 다르게 생각해 보면 나를 가족들한테 사귀는 사이라고 소개한다는 뜻이었다. 즉 결혼까지 염두에 둔다고 짐작해 볼 법했다.
헤어질까 봐 전전긍긍해서 그런지 허기가 졌다. 머리를 말리고 나온 임하얀이 먹기 편하도록 포도 껍질을 일일이 까 두었다. 임하얀은 나와 헤어질 생각이 없었다. 괜한 오해와 의심으로 닦달하면 지겨워 줄행랑칠지 모르니 조심해야겠다.
포도가 달았다. 임하얀이 포도를 씻어 놓아 그런가 보다.
***
임하얀은 전날 백화점에 가서 선물을 사자는 계획을 뜯어말렸다. 파랑이 일로 고마운 부모님이 밥 한 끼 차려 주시는 거라고, 거하게 싸 들고 가면 도리어 역효과가 난단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공짜와 선물을 싫어하는 인간은 없었다.
첫인상이 중요한 법이었다. 몰래 인터넷으로 새벽 배송 되는 걸 시켜 두었다. 5시에 일어나 차 트렁크에 실어 두는 정성 덕에 임하얀은 모르고 있었다.
오랜만에 임하얀네 동네로 오니 지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옆자리에서 곤히 자고 있는 임하얀은 어제 밤새도록 태블릿 작업을 했다. 말로는 과제라고 하지만 그게 과제랑 무관한 그림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오래된 버전의 태블릿은 화면 크기가 요즘 것보다 작아서 그림 그리는 데 불편해 보였다. 사실 어제 임하얀 가족의 선물을 준비하면서 새 태블릿까지 사 두었다. 돌아오는 길에 주면 임하얀이 좋아서 뽀뽀를 막 하지 않을까. 주차하는 내내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차가 정차해도 새근새근 잘 자는 임하얀의 입술에 도장 찍듯 뽀뽀했다. 내쉬는 숨에서 솜사탕 냄새가 났다. 다물린 입술을 쪽 빨자 잠자는 골목길 공주가 깨어났다. 안전벨트를 풀어 주는 척하며 배부터 가슴까지 은근하게 쓰다듬었다.
“집 앞에서 뭐 하는…. 음.”
보기 좋을 만큼 봉긋 솟은 가슴을 콱 움켰다. 도망간 임하얀의 고개를 붙들어 돌렸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입 맞추기란 불가능하니 이건 이해를 해야 했다. 입 안 깊숙이 혀를 넣어 천장을 긁었다. 혀를 묶어 아래부터 끌어 올리자 입에서 끈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젯밤 집요하게 가슴만 애무했더랬다. 유두를 물며 제 아래를 쑤신 게 기억났는지 차 문을 더듬었다.
“하…. 넌 변태가 확실해.”
“변태가 나빠?”
“내가….”
대문을 열고 나온 임파랑이 누나를 찾듯이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임파랑 누나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분홍색 립스틱이 번져 있어 닦아 주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 마.”
임하얀은 손을 뿌리치고 차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건 또 이거대로 재밌겠다 싶어서 말없이 차에서 내렸다. 임파랑은 제 누나 얼굴을 보지 못했는지 내게 깍듯이 인사했다.
“형. 나 키 큰 것 같지 않아?”
“모르겠는데.”
임하얀이 내 등짝을 콱 때리는 사이 트렁크로 가 사 온 물건들을 꺼냈다. 아무것도 안 사 온 줄 안 임하얀은 헐레벌떡 트렁크 쪽으로 달려왔다.
“언제 샀지? 그럴 시간 없었는데….”
“간단하게 고기랑 과일 같은 거.”
“내가 사지 말랬잖아.”
“내가 언제 네 말 듣는 거 봤어?”
“자랑이다….”
뾰족한 눈초리를 무시하고 첩첩이 쌓아 올린 짐을 들었다. 손이 없어 어깨로 차 트렁크를 닫은 뒤 임하얀과 나란히 들어갔다.
“아니, 누나….”
문을 잡아 주던 임파랑이 제 누나 얼굴을 보고 기겁했다.
“들어가, 파랑아.”
아무 소리 말라는 뜻으로 윙크를 날렸다. 임파랑은 담이 작은지 제 누나를 지나쳐 쏜살같이 달려가 버렸다.
“쟤가 오랜만이라 쑥스럼 타나.”
“그런가 보네.”
흰 자갈을 깔아 둔 마당에 족히 수십 년은 된 나무가 굽은 채로 있었다. 덜그럭거리는 자갈길을 걸어가 마주한 고동빛 현관문은 한옥을 연상시키듯 단아했다. 앞서간 임파랑이 현관문을 열자 긴장감이 몰려왔다. 현관문 근처에 옹기종기 서 있는 가족들은 임하얀 판박이였다.
“우리 딸. 오랜만에 얼굴 보네.”
“언니이!”
“누나, 누나!”
괴성 지르며 사람을 맞이하는 게 과하다고 느껴졌다. 게다가 종교 의식처럼 한 사람도 빠짐없이 줄을 서서 임하얀과 포옹을 했다. 낯선 땅에 떨어진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해루야. 들어와.”
“어서 와요.”
“언니 남자 친구다!”
만만치 않은 환대를 받으며 신발을 벗었다. 임하얀이 쓰는 섬유 유연제 냄새가 집 안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는 가족사진 아래에 놓인 청색 도자기가 인상적이었다. 전에 본 임하얀의 어머니에게 먼저 고개 숙여 인사를 드렸다. 그사이 짐은 임하얀의 아버지가 받아 갔다.
“그때 우리 봤잖아. 선후배 사이라더니. 하얀이 남자 친구 맞지?”
“네.”
“그럴 것 같았어.”
빈손으로 오지 무얼 이렇게 많이 사 왔냐며 웃으시는 어머니와 악수를 했다. 낯간지러워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했다.
“너희 배고플까 봐 밥부터 빨리 차렸어.”
부엌으로 가는 어머니와 짧은 눈인사를 나누었다. 어디 갔나 했던 임하얀은 아버님께 놀림당하는 중이었다.
“입술이 그게 뭐야. 자다 왔어?”
“아니, 이게….”
번진 립스틱 자국을 알아챈 임하얀이 나를 밉게 흘겨보았다. 초등학교 1학년 정도로 보이는 남매가 가져다준 물티슈로 제 입술을 벅벅 닦았다. 형제자매끼리 우애가 좋았다. 그런데 무언가가 속에서 어그러지고 있었다. 잘 지냈냐며 웃는 임하얀을 보고 배알이 틀렸다.
“배고프지?”
“아, 네.”
“하얀이랑 같이 살면서 불편한 건 없어? 쟤 엄청 깍쟁이에 깔끔쟁인데.”
전적으로 임하얀을 신뢰하고 있는 어머니의 눈빛은 한없이 자애로웠다.
“얘기는 밥 먹으면서 하자. 상 다 차렸으니까 얼른 와.”
임하얀이 거친 손으로 나를 밀어 식탁에 데려갔다. 10인용 식탁에 모여 앉은 가족들이 수저를 나누며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어머니는 나를 임하얀 옆자리에 앉혔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갓 지은 밥이 나왔다. 임하얀은 왜 이리 많이 차렸냐고 핀잔을 줬지만 눈으론 웃고 있었다.
“저기. 이름이?”
옆을 돌아보니 임하얀 아버지가 있었다. 책잡힐 짓은 하고 싶지 않아 재깍 대답했다.
“정해루입니다.”
“아, 이름이 참 예쁘네. 근데 그 손도 참 예뻐서 자꾸 눈이 가. 혹시 못질 같은 거 잘하나?”
“아빠.”
“내가 목수라. 이 못질 잘하게 생긴 손은 딱 알아보거든.”
임하얀네 아버지는 한옥 목수를 전담으로 하는 20년 차 도편수라고 했다. 나중에 임하얀과 데이트하러 오라고 주소가 적힌 명함을 주었다.
“자, 먹자 먹어.”
“잘 먹겠습니다.”
갈비찜, 잡채, 호박전 등이 있는 식탁 위로 젓가락 네 개가 달려들었다. 젓가락 부대를 뚫고 들어간 임하얀은 갈비찜 하나를 집어 내 밥공기에 올려 줬다. 그걸 보고 앞에 앉은 꼬맹이 남매가 우우거리며 야유했다.
“우리도 줘.”
“우리는 왜 안 줘.”
“너넨 엄마가 줄게.”
임하얀네 집안에서는 말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밥을 앞에 두고 가족끼리 말을 해 본 적이 없어 이런 분위기가 어색했다.
“나 간장 좀.”
“그냥 먹어, 짜.”
“아, 간장.”
임하얀의 아버지는 종잡을 수 없었다. 자처해서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만들어 모두를 웃게 하질 않나 직접 자식 먹을 물을 떠다 주지를 않나. 아버지라는 사람이 저럴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내 얼굴에 뭐 묻었나?”
“…아니요.”
차마 속마음을 얘기할 수 없어 어색한 미소로 상황을 넘겼다. 임하얀의 아버지는 불룩한 자신의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자네가 봐도 나 잘생겼지. 우리 하얀이가 나 닮아서 저렇게 예쁜 거야.”
“아빠. 밥 먹어, 얼른.”
“맞다. 하얀이 너 왜 그 서랍 안 가져갔어. 아빠가 만들어 준 거. 네가 아끼는 거잖아.”
“응. 집이 좁아서. 나중에 가져가려고.”
임하얀 아버지의 눈에서 애정의 꿀이 떨어졌다. 나를 아낀다고 말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조차 저런 눈으로 봐 준 적이 없었다. 볼 때마다 웃는 상인 임하얀의 어머니는 생선 살을 발라서 남매의 그릇에 올려 주느라 바빴다. 임파랑은 온 가족에게 자기의 하루를 재잘재잘 보고했다. 덕분에 그 애의 절친 이름까지 외우고 말았다.
이 집에 있는 임하얀은 편안해 보였다. 턱을 괴고 사랑스러운 눈으로 동생들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이유 없이 서글퍼지고 말았다. 나는 이 밥상을 받을 자격이 없는 못된 새끼였다.
모두가 웃는 얼굴인데 나만이 무표정했다. 나는 임하얀뿐인데, 임하얀밖에 없는데, 임하얀은 나 말고도 가진 것이 많았다. 나와 헤어져도 임하얀은 혼자가 아니었다. 임하얀 주위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나 같은 건 없어져도 티 나지 않았다.
임하얀이 나와 동류인 줄 알았다. 임하얀의 세상에도 나밖에 없는 줄 알았다. 이 축제 같은 소란스러움이 나를 고립시켰다. 임하얀은 나의 삭막한 집을 보면 뭐라고 할까. 어떻게 이런 집이 있을 수 있냐며 도망칠까.
“해루?”
고독을 찾아서 생각 속을 헤엄치고 있다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현실로 건져졌다. 고개를 드니 임하얀의 어머니가 밥그릇을 가리키며 물었다.
“밥 더 줄까?”
“아니요. 배불러서.”
“밥 정말 빨리 먹네. 하긴 키도 훤칠해서. 맛은 있어? 내 솜씨가 좋긴 하지?”
“네, 맛있어요.”
그때 막내 남동생이 제 엄마 어깨에 기대어 나를 빤히 바라봤다.
“형.”
“…….”
“우리 누나랑 뽀뽀해 봤어요?”
“임하늘.”
“헉. 나도 궁금하다. 내 딸이랑 뽀뽀해 봤어?”
갑자기 나에게로 눈과 귀가 몰리자 뺨이 뜨거워졌다.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지켜본 임하얀이 시선을 가져가 주었다.
“우리 일어날게요.”
“응, 그래. 둘이 올라가서 뽀뽀만 해, 뽀뽀만.”
“아빠.”
헛소리 말라고 호통친 임하얀은 제 방이 2층에 있다는 소리를 했다. 임하얀의 손에 잡혀 위층으로 가는 계단을 밟았다. 이 집 2층은 거실 없이 일자 복도로 되어 있었다. 그중 가장 끝방으로 들어간 임하얀은 들어가자마자 문을 잠갔다.
“어디 불편해?”
둘만 남게 되자 헛헛한 느낌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터져 나오려는 서러움을 가까스로 억압했다.
“아니.”
“체한 것 같아서.”
임하얀은 은근히 잘 체한다며 손바닥 혈을 꾹꾹 눌러 줬다. 이 착하기만 한 바보는 모를 거다. 내가 얼마나 비열한 놈인지, 얼마나 졸렬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저 가족들이 없었으면, 그랬다면 임하얀도 나만큼 외로워서 우리 둘만 의지하고 살 수 있었을 텐데. 이 말을 임하얀에게 했다간 끝이었다. 절대 나를 용서할 리 없었다.
“집에 일찍 가자. 체했다며.”
“응.”
“안 좋은 일 있어?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좋아, 기분.”
그때 임하얀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다급히 뛰어가 한 서랍장의 문을 닫았다. 그 행동은 만사에 침착하던 임하얀답지 않아 이상했다. 임하얀의 아버지가 만들어 줬다던, 그 아끼는 서랍장이 저거 같았다. 서랍이 네 개인 흑갈색 장은 확실히 기성품으로 보이진 않았다.
“너 안 좋아 보이니까 이만 간다고 말씀드릴게. 얘기는 다음에 더 하면 되니까.”
나는 그 책상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걸어갔다.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한번 곤두박질친 기분은 올라올 생각이 없었다. 임하얀네 어머니는 나의 위장을 걱정하며 다음에 또 밥을 먹으러 오라고 그랬다. 마당에서 꼬맹이 둘과 배드민턴을 치던 임하얀네 아버지는 자신이 먹는 소화제라며 박스 하나를 챙겨 줬다. 모두가 친절하고 다정했다. 임하얀처럼.
집으로 오는 길엔 임하얀이 운전을 했다. 장난 치듯 머리칼을 건드리는 손길이 좋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못난 것만 모여 응어리진 감정은 낡은 원룸 건물로 들어서자 감쪽같이 발밑으로 빠져나갔다.
그날 밤 꿈을 꾸었다. 악몽의 주체가 달라져 있었다. 임하얀과 어린 동생들, 그리고 언제까지나 자식을 믿고 사랑하는 부모가 악몽의 주인공이었다. 나는 그들의 구성원이 되기엔 이기적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땀을 진탕 흘리고 일어나 꿈이라는 걸 인식했다. 하지만 감정은 길이길이 남는 법이다.
***
임하얀은 아침에 드라이할 때마다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기분이 좋은 이유를 알고 있지만 저쪽에서 먼저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임하얀에겐 미안한 일이었다. 지금 내겐 같이 웃고 떠들 여유가 없었다. 틈만 나면 예전 버릇이 나왔다.
나를 사랑하는지 테스트를 하는 것이다. 작은 부탁이든, 들어주기 민망한 부탁이든, 거절하지 않고 들어줘야 나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임하얀이 거절이라도 하는 날엔 반드시 감정이 상했다.
요즘엔 임하얀이 나를 대할 때 감정을 내리누르는 게 보였다. 힘든 일 있으면 털어놓으라고 말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힘든 일. 나는 매일 똑같은 악몽을 꾸고 있었다.
임하얀이 나와 있는 것보다 가족과 있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는 악몽 같은 것. 나같이 성격 이상한 남자와 있는 것이 재미없다고 말하는 악몽 같은 것. 이걸 임하얀한테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행히 임하얀은 이상해진 나를 버리는 대신 무엇이든 해결해 주려고 하고 있었다.
“더 벌려.”
“부끄러워….”
“더.”
“…….”
“얼른.”
이것도 일종의 테스트였다. 키스해 달라, 안아 달라, 그리고 내가 하는 부탁을 들어달라. 임하얀은 미적거리긴 하지만 결국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준다. 그럴 때마다 무형인 사랑을 만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비로소 사랑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분홍색의 속살이 보인다. 음부를 붙잡고 있는, 파르르 떨리는 가느다란 손가락이 아름다웠다. 임하얀은 배가 홀쭉해질 정도로 숨을 깊게 마셨다. 수치스러워하는 임하얀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서서히 내려와 제 손으로 벌려 보여 주고 있는 음부를 쓸어 만졌다.
흐르는 물을 손으로 훔쳐 내어 맛을 봤다. 달콤한 맛이 났다. 임하얀 스스로 벌린 분홍 속살에 혀를 가져다 댔다. 혀가 미끄러운 틈을 핥자마자 반응이 뜨거웠다. 이 상황을 믿고 싶지 않은 것처럼 눈동자가 초점을 잃었다.
“더.”
“여기서, 어떻게 더 해.”
“더 벌려 줘.”
임하얀이 가는 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구부렸다. 시선만으로 흠뻑 젖은 음부가 사랑스러웠다. 조금씩 다가갈 때마다 임하얀은 차마 보지 못하는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나는 조심스레 임하얀의 허벅지를 잡아 벌린 뒤 음부에 입술을 붙였다.
“아….”
움찔거리는 둔부와 힘이 들어간 허벅지. 임하얀은 나 못지않게 긴장하고 있었다. 입술이 닿자마자 살짝씩 허리를 튕겼다. 입술이 가만히만 있어도 자극이 오는지 음부에서 물이 소르르 새었다. 입술을 깨문 임하얀이 허벅지를 닫으려 든다.
손으로 막고 있어 불가능한 일이었다. 뜻대로 되지 않자 고개를 마구 젓는다. 그러는 사이 혀는 착실하게 임하얀의 속살을 핥는다. 내벽을 핥다가 모자라면 위에 있는 앙증맞은 공알을 쭉 빨아 버린다. 옴츠린 음부가 입술이 젖도록 부드러운 물을 내보냈다.
“아으, 느리게, 하지 마, 응?”
“너무 느끼는 것 같아서?”
“아, 해루야….”
바지 버클을 열고 곧추선 성기를 꺼내 들었다. 임하얀의 신음 소리에 맞추어 페니스 잡은 손을 흔들었다. 빨아 당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손힘이 빠지고 있었다. 음부를 벌려 주던 손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게걸스럽게 혀를 넣고 쭙, 빨기 시작했다.
약속을 어긴 걸 복수하듯 잠시도 가만두지 않았다. 쭙, 쭙, 빨아 마시는 소리가 날 때마다 허리를 뒤틀었다. 이윽고 임하얀의 다리가 머리를 가운데에 두고 조이기 시작한다. 혀에 올려 둔 음부를 긁어내기 위해 둔부가 움직였다.
“하, 으, 읏!”
임하얀의 음부에 혀를 박아 넣은 채로 사정했다. 손에 흐르는 정액을 무시하고 음부에서 혀를 빼냈다. 그만한 자극도 버틸 수 없을 만큼 젖은 임하얀이 숨을 헐떡였다. 촉촉한 속살을 그리워하듯 아래가 일어섰다. 하지만 아침부터 징그럽게 괴롭혔으니 오늘은 이쯤 해 두자 싶었다.
“어디 가게….”
“따듯한 물 떠올게.”
물을 뜨기 전에 비누로 손을 닦았다.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이 밤이 가도록 물고 빨지 못한 게 아쉽지만 임하얀의 마음을 확인했으니 됐다. 손을 닦고 아래를 정리한 후 바지 버클을 올렸다. 티셔츠는 어디에 벗어 뒀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날이 덥든 춥든 임하얀은 따듯한 물을 마시는 걸 좋아했다. 주방에서 물을 떠 와 지쳐 누워 있는 임하얀의 옆으로 갔다. 제 몸을 추스를 정신도 없어 보여 물을 입술에 흘려 넣어 줬다. 꼴딱꼴딱 물을 받아 마시는 목이 울긋불긋했다. 살을 깨문 자리에 입술을 문대는데 간지러운 듯 임하얀의 어깨가 움씰했다.
“간지러워.”
“참아.”
“하.”
일어나 앉아 물잔을 내려놓은 임하얀이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 옆에 누워 같이 핸드폰을 보려 하는 차였다.
“맞아. 그 말 해 주려고 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돼서….”
임하얀은 어색한 연기로 시간을 끌었다. 슬슬 밝힐 때가 됐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뭘.”
“나 내일, 약속 있어. 학교 갔다 와도 나 없을 거야.”
“어디 가는데.”
“사실.”
장단에 맞추어주자 임하얀이 대뜸 침대에서 일어났다. 기력 빠진 사람이라곤 할 수 없을 만큼 발랄한 몸짓으로 달려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청소해야 해서 열지 말라고 하더니 그 이유가 아니었나 보다. 초 꽂은 하얀 생크림 케이크를 들고서 내 앞에 나타났다.
“나 생일 아닌데.”
“생일이 아니라 기념할 게 생겼어.”
오늘 그쪽에서 연락했나 보다. 나는 웃으며 일어나 케이크를 받았다. 기대감 어린 눈빛을 보니 쓴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차분하려고 애쓰지만 목소리에 담긴 흥분과 기대가 어쩔 수 없이 통통 튀었다.
“토몽이라고 알아?”
“토몽이?”
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임하얀은 핸드폰을 켰다. 떨리는 손으로 자기가 그린 이모티콘을 보여 줬다.
“그게 뭔데.”
“사실…. 놀라지 마. 이거 내가 그려서 팔고 있던 거야.”
“너 닮았네.”
“안 놀라워?”
“놀라워.”
이런 연기는 잘하지 못하겠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밝혀지겠지만. 임하얀은 케이크에 올려진 딸기 하나를 집어 먹으며 우물거렸다.
“그런데 하나도 안 놀란 사람 같다.”
“놀라고 있는 중이야.”
“애니콘이라고…. 크지 않은 회산데 이런 캐릭터로 콜라보 같은 거 많이 하는 곳이거든. 그런데 나보고 계약하자고 그랬어.”
“와. 임하얀 출세했네?”
“아직 자세한 건 가서 들어 봐야겠지만 난 내가 만든 캐릭터로 컵이나 볼펜 같은 거 나오는 게 꿈이었거든. 지금도 안 믿겨, 솔직히.”
이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 보이는 임하얀을 보며 내가 더 행복했다. 임하얀의 미소를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었다.
“끝나면 전화해. 데리러 갈게.”
“그럴까? 아, 내가 저녁 사 줄게. 너 먹고 싶은 거 있어?”
“없어. 너 먹고 싶은 거 먹든지.”
“아니야. 내일까지 생각해 봐.”
평소보다 수다가 는 임하얀이 내 목을 끌어안았다. 나는 케이크를 바닥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임하얀을 마주 안았다. 핀에서 빠져나온 머리카락 몇 가닥이 뺨을 쓸며 간지럽혔다.
내일이면 자기 인생에 내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알게 될 거다. 나를 더 진지하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인생의 동반자로 나만 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새 운동화를 신고 울었던 날처럼 내일이 임하얀에게 특별한 날이 됐으면 했다.
임하얀이나 나나 평생을 가도 잊을 수 없을 거다. 나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큰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건, 그건 정말 멋진 일이구나. 임하얀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이었다.
***
트렁크에 개봉되지 않은 신상 태블릿을 싣고 다녔다. 오늘이 디데이니만큼 보석상에 들러 프러포즈할 반지를 사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했다. 태블릿과 반지를 함께 주는 건 멋이 없으려나. 생에 한 번뿐인 프러포즈를 성의 없이 한다고 오해할 수 있겠다.
군대 문제만 아니면 프러포즈는 몇 년 뒤의 정식으로 하고팠다. 남이 들으면 그 나이에 결혼을 준비하는 게 정상이냐고 할 거다. 하지만 임하얀을 두고 군대에 가 있을 생각을 하니 프러포즈, 유부녀, 아기 같은 단어밖에 안 떠오르는 걸 어쩌나.
“해루, 잘 가.”
“오늘 약속 있어? 종일 폰만 보네.”
미팅 나간 임하얀이 연락 두절 상태였다. 아침에 분명 막힐 걱정 없는 지하철로 미팅 장소에 다녀온다고 했었다. 그 이후로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혹시나 싶어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임하얀의 핸드폰이 먹통이 되면 이쪽으로 전화를 걸어 확인하는 게 습관이 됐다.
– 어, 우리 해루.
“하얀이랑 있어?”
– 아니. 할머니 지금 성당 모임. 못 믿겠음 오랜만에 성당 오든가. 그리고 해루 네가 돈까지 쓰면서 사귀는 거 첨 봐서 그냥 정신머리 제대로 박혔나 한번….
성당으로 오라고 하는 걸 보면 할머니는 아니었다. 전화를 끊고 임하얀에게 걸었지만 연결이 어렵다는 안내음만 들었다. 걱정 되는 마음에 문자를 연달아 남겼다.
「아직 안 끝났어?」
「약속 시간 지났잖아. 나 걱정되니까 답장이라도 하든가.」
「어딘데.」
「나 계속 기다리고 있으니까 전화 좀.」
미팅 시간이 예상치 못하게 길어졌나. 늦으면 늦는다, 짧게라도 답장을 보내 주면 좋았을 것을. 차 안에 갇혀 핸드폰만 눈알 빠지게 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미팅이 일찍 끝나 집으로 간 걸 수도 있었다. 차를 돌려 집으로 가는데 심장이 욱신거렸다. 길이 엇갈렸다는 생각에 원룸으로 빠르게 돌아왔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 침대에 누워 잠든 임하얀을 깨우고 안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집 안은 인기척이 없었다. 나가기 직전과 똑같이 어딘가 어수선한 집안 꼴을 보며 뒷골이 쑤셨다.
화내면 안 된다. 오늘은 임하얀에게도, 내게도 최고의 날이 되어야 했다. 임하얀에게 이런 날을 선물하기 위해서 시간과 돈을 쓴 게 아니었다. 살다 보면 미팅이 늦어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배터리가 없어서 전화를 받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거나 말이다. 어쨌든 임하얀의 집은 여기니 늦어도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믿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빨래통에 있는 옷들을 분리해서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 청소기를 꺼내 청소를 하고 개수대에 있는 컵 몇 개를 씻었다. 대략 한 시간 넘게 집안일을 했다. 그동안 임하얀은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내가 보낸 문자에 답장도 없었다.
아무리 봐도 이건 임하얀이 너무했다. 사고가 난 게 아니냐는 걱정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는 거 알면서 그런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전화해 보고 이번에도 받지 않으면 직접 미팅 장소로 찾아갈 작정이었다. 임하얀의 컬러링을 들으며 손가락을 까닥거리고 있는 차였다. 바깥 계단에서 핸드폰 벨 소리가 들렸다. 임하얀의 것이었다. 전화를 서서히 내려놓으니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났다. 남의 마음이 까맣게 태워진 줄도 모르는 임하얀이 야속했다.
“내가 몇 통이나 건 줄 알아?”
“…….”
“미팅은.”
임하얀은 내가 있는 걸 알면서도 땅만 보며 걸어 들어왔다. 신발을 벗고 들어와 나라는 존재가 없는 것처럼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거실에서 내가 멍한 시선을 보내는 사이 셔츠를 벗었다. 실내복으로 갈아입느라 바쁜지 대꾸도 없다. 철저히 무시당하는 중이었다.
무표정으로 옷을 갈아입고 나와 소파에 앉는다. 바른 자세로 앉아 꺼진 TV만 멀뚱히 보고 있는 게 수상했다. 슬슬 걱정이 들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
“왜, 말이 없는 건데. 어디 아프기라도….”
“너 그 회사에 나 써 달라고 하면서 투자했어?”
임하얀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닌 것 같아 보여도 임하얀은 지금 내게 화를 내고 있었다. 내가 본 임하얀의 눈빛 중에 가장 차가운 눈빛이었다. 싱크대에 기대어 서 있던 나는 허리를 똑바로 폈다. 이해가 가지 않아 인상을 찌푸렸다.
“왜.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
“했구나, 정말.”
“…내가 부탁한 것 때문에? 그래서 이러는 거라고?”
“왜 어젠 말 안 했어. 내가 자랑할 때. 그때 말해도 됐잖아.”
이건 내가 상상한 반응이 아니었다. 기분 나쁨보다는 돌변하여 화내는 임하얀이 적응되지 않았다. 당혹스러운 마음에 말이 세게 나갔다.
“거기서 뭐라 그랬는데. 무시라도 당한 거야? 그래?”
“무시당할 만하지. 거기 작가들은 자기 실력으로 인정받아서, 인기가 있어서 계약된 거고. 나는 돈 내서 낙하산으로 꽂아 준 거니까. 거기다 남자 친구가.”
낙하산이라는 단어에 다리가 움직였다. 하지만 임하얀은 나를 피해 반대편으로 일어나 걸어갔다. 창가에 서서 화를 주체할 수 없는 것처럼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너한테 자랑스럽게 얘기한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수치스러워.”
“임하얀. 난 상황이 이해가 안 돼. 거기서 너 무시라도 했냐고 묻는데 왜 말이 없어.”
임하얀은 어처구니없다는 미소로 나를 돌아보았다. 속눈썹에 그렁그렁 달린 눈물을 보자 억울한 마음이 쏙 들어가 버렸다. 천하의 죽일 놈이 된 것만 같아 가슴이 덜컥했다. 다름 아닌 임하얀을 울게 만든 게 나였다. 머리는 복잡하지, 가슴은 울화가 치밀지, 머리와 가슴이 따로 놀아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더욱이 임하얀은 내가 다가오려고 하자 오지 말라는 듯이 손을 뻗었다.
“너랑 전화라도 하면, 길거리에서 소리 지를 것 같아서 안 받았어. 얼굴 보고 차분하게 이야기하고 싶어서.”
“…….”
“뭐가 문젠지 모르는구나. 그 사람들이 아니야. 다름 아닌 네가 날 무시한 거야. 그 회사 벽면에 걸린 캐릭터들을 보는데 부끄러워서 죽을 뻔한 거 알아? 남자 친구 잘 뒀다는 말, 부럽다는 말, 그 모든 게 다 모욕이었어. 내 꿈이, 내 캐릭터들이 왜 그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데?”
새 운동화를 사다 줬을 때처럼, 임하얀의 꿈이 이루어지면 좋아할 줄 알았다. 맹세코 그게 임하얀을 무시하는 건 줄 몰랐다. 나를 필요한 사람으로 인식할 줄 알았다. 그 과정에서 다칠 임하얀의 자존심 같은 건 계산에 넣어 두지 않았다. 애당초 다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임하얀의 좋아하는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그때처럼 웃으며 고맙다고 하는 얼굴을 보고 싶어서였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매사 돈으로 해결하려는 걸 한심하게 보지 않았던가. 이건 욕을 하다가 닮아 버린 셈이었다. 이성적으로 굴고 싶지만 무서웠다. 나 자신이 한심하고 임하얀이 무서웠다.
임하얀이 당장이라도 나를 버릴 것만 같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도 울지 않으려고 감정을 내리누르는 임하얀이 정말 무서웠다.
“이깟 걸로 헤어지진 않을 거지?”
지금 그깟 게 중요하냐는 듯이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봤다. 어떠한 감정도 읽어 낼 수 없는 저 눈동자가 당장이라도 이별을 떠올리면 나는 빈털터리가 된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말은 이 상황에 기름을 부을 뿐이었다.
“난 몰랐어. 그렇게 하면, 네가 좋아할 줄 알았다고.”
“…….”
“네 꿈이라고 하니까. 나는, 이뤄 주고 싶었을 뿐이야. 누구나 실수는 하잖아. 안 그래?”
“그 실수로 내 마음이 다쳤는데도?”
“그냥 좋게 봐 주면 안 돼? 다음부턴 안 그런다잖아.”
임하얀의 표정이 예전 같지 않았다. 창밖을 보는 뒷모습이 너무할 정도로 차가웠다. 거부하든 말든 다가가 임하얀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 기세였다. 무서워, 너무 무서우니까 안아 줘.
“안아 줘.”
“싫어. 이거 놔….”
“키스해 줘.”
질색하며 손을 쳐 내린 임하얀의 표정이 끝을 말하고 있었다. 잘해 보려다가 실수한 건데, 이것도 이해를 못 해 줘? 나를 사랑하는 거라면 이 정도쯤은 이해해 줄 수 있는 거 아니야? 나는 네가 이것보다 더한 짓을 해도 아무렇지 않은데.
“솔직히 말해 봐.”
임하얀은 처음부터 나와 헤어질 생각으로 실수하기만을 기다린 것이다. 이런 순간이 오기만을 고대했을 터다. 나와 달콤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헤어질 궁리만 했겠지. 할머니를 보고 심드렁했던 것도 이미 헤어질 결심을 해서 그런 걸 거다.
“헤어지고 싶어서, 별로 화도 안 나는데 화내는 거지?”
“…….”
“나한테 차라리 욕을 하거나 화를 내. 헤어질 것처럼, 다 정리한 것처럼 눈 내리깔지 말고.”
“말, 다 했어?”
“아직 다 안 했어. 헤어지려고 그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나는 너랑 안 헤어질 거야. 누구 마음대로 헤어져?”
“이 일과 별개로 헤어지는 건 한 사람만 결정하면 되는 거야. 거기에 네 동의는 필요 없어. 사랑은 둘이 하는 거지, 한 사람만 하는 게 아니니까.”
“가르치려 들지 마. 내가 헤어지기 싫다고 하면 너는….”
“너랑 같이 있기 싫다.”
어깨를 치고 지나간 임하얀이 소파에 놓은 핸드폰을 집었다. 밖으로 나가려 하는 게 보였다. 이대로 보내면 안 된다. 그러나 임하얀은 나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해. 난 그래. 네 말대로 헤어질 만한 일은 아닐 수 있어, 그런데….”
“…….”
“감정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지금의 너랑은 그게 불가능할 것 같아.”
“지금 가면.”
보내기 싫었다. 이대로 가면 나는 끝이었다. 머리를 굴려 어떻게든 임하얀을 잡을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나 네 전화도 안 받을 거고, 문자도 안 할 거고….”
“마음대로 해.”
마음대로 하라는 말에서 피가 식어 버렸다. 온몸이 조각조각 나뉘는데 임하얀은 그딴 일에 관심 없었다. 내가 내뱉은 말이 있어서, 지금 잡으면 임하얀이 더 화낼 것 같아서 속으로만 어디 한번 가 볼 테면 가 보라고 큰소리쳤다.
기어코 나가는 임하얀이 미웠다. 임하얀은 하나도 특별하지 않았다. 임하얀도 결국 단 하나의 사람이 되어 주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따위 작은 실수도, 나란 사람을 받아 줄 용기도 없으면서 받아 주는 척한 임하얀이 싫었다.
문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 소파에 앉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었다. 머리가 지끈거려 두통약이 있는 TV 서랍장을 열었다. 까만 서랍 안을 지키고 있는 체온계가 보였다. 임하얀은 언제나 이 체온계를 가져와 내 귀에 댔다. 체했냐, 열나냐, 배탈이냐, 밤새 나를 보아 주던 얼굴을 떠올리자 미워하는 게 힘이 들었다.
체온계 위로 비가 떨어져 천장을 바라봤다. 어디서 물이 새는가 했더니 내 눈에서 새고 있었다. 사실 무서웠다. 임하얀이 정색하며 옷을 갈아입을 때부터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한테 미움을 받는 것만큼 무서운 것이 또 있을까.
손이 미끄러워 몇 번이나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놓쳤다. 연락처 속에서 임하얀의 이름을 찾는데 짭짤한 장맛비가 내렸다. 내가 우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전화를 걸며 현관으로 뛰어갔다. 누구의 신발인지도 모르는 것을 짝짝이로 신고서 밖으로 나갔다.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 혼자 남은 나는 방향치가 됐다. 어디로 가야 할지 잊은 사람처럼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몇 번 신호음이 가던 전화가 끊겼다. 차 키를 찾으며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을 때였다.
– 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
핸드폰을 힘없이 떨궜다. 나한텐 여기가 임하얀의 집이었다. 어디로 가야 임하얀을 찾을 수 있을까. 머리는 코드 선이 뽑힌 것처럼 마비됐다. 임하얀한테 나는 내다 버린 사람이었다. 찾아가서 매달릴수록 나를 우습고 쉬운 사람 취급할 게 빤했다.
나의 연애가 끝이 났다. 예전에 그랬듯 임하얀이 없던 것처럼 살면 된다. 나와 임하얀은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에서, 옛 추억 속에 첫사랑으로 기억되겠지. 아니, 언젠간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야 했다.
그렇게 살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형 선고를 받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살면 될 일인데…. 나는 내 발로 집에 돌아가고 있다. 저 집엔 임하얀의 짐이 있었다. 나는 지워 버리더라도 짐은 찾으러 올 것이었다. 그때, 다시….
집을 깨끗이 해 놓고, 또, 그러면 임하얀은 착하고 순한 여자니까 짐과 함께 나를 찾으러 올지도 모른다. 나는 임하얀을 인생에서 지우기보다 기다리기를 택했다.
오늘 밤 돌아오지는 않을까 했지만 그런 건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저를 무시했다고 오해해서 그렇다. 화가 풀리면 돌아와 헤어지는 건 아닌 것 같다고 해 줄 터였다.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아침이 되어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임하얀의 전화는 꺼져 있었다.
***
투자한 선배의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자초지종은 이랬다. 선배는 임하얀에게 굳이 숨기지 말라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따랐다. 투자를 받아 그 캐릭터를 쓰기로 한 걸 자랑스럽게 이야기한 모양이었다.
이미 이야기가 된 줄 알았는데 왜 계약을 하지 않고 간 것이냐고, 우리 투자는 무산된 이야기냐고 묻는 그에게 화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할머니 말은 틀렸다. 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싸우고 다닐 애라는 할머니의 말과 달리 난 지금 누구와도 싸우고 싶지 않았다.
전화기는 하루에 두 번, 임하얀에게 전화를 걸 때만 쓰고 있었다. 학교에 가지 않아 여기저기서 나를 찾는 전화가 왔다. 계속 울리는 게 귀찮아 평상시엔 꺼 두고 있었다. 내가 하는 건 일어나 집을 청소하고 몸을 씻고 임하얀의 베개를 끌어안고 자는 것뿐이었다.
겨울잠 자는 짐승처럼 하루를 보냈다.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고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 하루 종일 자도 잠이 부족했다. 밥은 배고프면 먹고 적당히 배고프면 먹지 않았다. 음식이 떨어져 아무것도 없을 때는 물만 마시고 잤다. 그래도 무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똑, 똑, 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임하얀이면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지 문을 두드릴 리가 없었다. 지금이 며칠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잠을 청하는데 끈질기게도 문을 두드렸다. 저 방해꾼을 쫓아내려면 밖으로 나가 볼 수밖에 없었다.
귀찮아 죽을 것 같다. 아무하고도 얘기하고 싶지 않아 문을 열고서 멍하니 땅만 보았다.
“해루야!”
할머니였다. 눈을 들어 할머니인 것을 확인하고 터덜터덜 방으로 들어갔다. 발을 질질 끄는 것도 귀찮아 몸을 던져 침대로 골인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임하얀의 베개를 끌어안았다. 하도 문대는 바람에 임하얀의 향기가 희미하게 남아버린 베개였다. 뒤따라 들어온 할머니가 이불을 잡아당기기에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숨겼다.
“이게 뭐, 뭐야. 일어나 봐, 해루야. 어?”
“나가, 귀찮아.”
“미쳤어, 미쳤어. 너 학교도 안 간 거지? 어? 아니, 얘가 왜 이래. 네 여자 친구는 어딨어.”
여자 친구라는 말에 임하얀이 떠올랐다. 오늘 아침에 전화했을 때도 전화가 꺼져 있었다. 현실이 뻑뻑할수록 꿈은 달콤해졌다. 꿈에선 임하얀을 만날 수 있었다. 아니면 임하얀 생각을 하지 않거나.
“혹시, 헤어졌어? 그래. 그럼 할머니랑 집 가자.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어? 전화가 며칠째 꺼져 있어서 할아버지랑 나랑….”
“나가.”
“해루야. 이놈아. 할머니 이제 눈도 안 보인다, 어? 귀 안 들리고 눈 안 보이고….”
“그 집 안 가. 여기가 내 집이야. 난, 그냥 여기서… 잘 거야.”
말하다가 목이 메었다. 안 나오는 말을 강제로 꺼내느라 지쳤다. 사람하고 대화하는 것 자체가 지치는 일이었다. 할머니가 불을 켜는 바람에 누워서도 집 구조가 훤히 보였다. 벽에 걸린 노란 셔츠를 보고 진드근히 참던 마음이 으스러졌다.
“우, 울어?”
“가….”
“아, 아니, 그….”
말을 더듬던 할머니가 어디론가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임하얀에게 전화를 걸어서 귀찮게 할 요량인가 보다. 할머니의 손목을 잡아 핸드폰을 뺏었다. 반으로 접어 부순 다음 할머니 손에 돌려주었다.
“이런….”
“가.”
“이젠 늙은 할머니 말도 못 하게 하네. 귀도 멀고, 눈도 멀고, 말도 못 하고.”
체념한 듯 말한 할머니가 침대에 주저앉았다. 대장부인 할머니가 충격받은 게 내가 울어선지 차여선지 알 수 없었다.
“잘생긴 우리 손자 얼굴이 이게 뭐야, 어? 일단 가자. 가고 나면 할머니가 알아서 그 여자애 데려다 놓을 테니까. 어?”
할머니의 떨리는 손이 내 앞머리를 매만졌다. 내가 당장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더라도 데려다 놓는다는 그 말만은 유하게 넘어갈 수 없었다. 눈에 칼을 세우고 할머니를 노려봤다.
“아무것도 하지 마.”
“하…. 참 답답시럽다. 어쩌자고. 어? 여기서 말라 죽을래?”
“안 죽어. 걔 곧 와.”
“미치겄네, 미치겄어….”
“괜찮으니까 가. 나 좀 자게.”
할머니는 부서진 전화기를 쥐고 한참을 내 옆에 앉아 있었다. 10분 정도 등을 돌리고 누워 있자 마지못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꼼짝 않는 손주를 포기한 할머니가 현관문 닫는 소리를 들었다. 오랜만에 깨어 있는 시간이 길었다. 몹쓸 호기심이 들어 꺼 두었던 핸드폰을 켰다. 수많은 부재중 전화를 일일이 확인했다. 그중 임하얀의 전화는 없었다. 머리가 배기는 기분에 핸드폰을 끄려고 하는데 유난히 읽지 않고는 못 배길 문자의 앞머리가 있었다. 모르는 번호로 온 문자였다. 평소라면 확인하지 않았을 문자를 엄지로 눌렀다.
「혹시 내 딸이랑 헤어졌나?」
임하얀의 아버지였다. 어디로 갔을까. 돌아오겠지. 소득 없이 허튼 생각만 반복하고 있었다. 임하얀이 자기 집으로 떠났다는, 그 당연한 사실이 진실이 되었다. 집에 안 오고 목공소에 숨어 있던 것이다. 격한 물살을 타는 것처럼 감정이 저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왔다. 당장 임하얀을 보고 싶었다. 그곳으로 가서 이번만 봐달라며 사정하고 싶었다. 기다리는 건 너무 지치고, 너무 괴로웠다.
다급히 청바지 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냈다. 지갑 안에 넣어 둔 임하얀 아버지의 명함을 꺼내 거기에 적힌 목공소 주소를 외웠다. 차로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 길로 욕실로 들어가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었다. 속이 비었는데도 힘이 솟았다. 약간의 희망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임하얀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쓰라린 속이 다스려졌다.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하는데 긴장이 지나쳐 에어컨을 18도로 틀었다. 머리가 차가우니 어지럼증이 떠나는 기분이었다. 임하얀을 보자는 일념 하나로 내비에 주소를 쳤다. 비어 있는 옆자리를 보며 숨죽이듯 웃었다.
조금만 있으면, 볼 수 있다.
***
목공소가 보이자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빠졌다. 차를 빈 공간에 주차하고 내리는데 작업복 입은 남자가 마중을 나왔다. 차를 주차할 때부터 이쪽을 주시하던 임하얀의 아버지였다. 사람 한 명 없이 혼자서 목공소 앞에 나와 있었다. 인사하려고 고개를 숙이는데 머리가 핑 돌아 잠깐 휘청했다.
“여기 하얀이 없는데.”
임하얀 아버지는 가볍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짙은 실망감이 심장 위에 내려앉았지만 티 내지 않았다. 이 아저씨가 나와 임하얀 사이에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말이 매끄럽게 나오질 않았다. 목에 눈물이 낀 것처럼 말을 막았다. 임하얀의 이름만 들으면 이런 반응이 자동으로 나왔다. 목을 누르며 감정을 갈무리하려는데 임하얀의 아버지가 내 등을 어루만졌다.
“들어가서 커피 좀 마시자.”
“…네.”
“얼굴이 그새 반쪽이 됐네.”
목공소 안을 아슬아슬하게 겹쳐진 나무판 수십 개가 차지하고 있어 빈자리는 얼마 없었다. 작업 중이라서 더러울 수 있다며 앉을 곳을 마련해 줬는데 나무로 된 커다란 식탁 옆이었다. 임하얀 아버지는 종이컵에 믹스커피 봉지를 뜯어 넣고 커피포트 물을 따랐다. 금세 인스턴트커피 냄새가 내 후각을 자극했다. 며칠째 빈속이어서 그만큼 자극적인 걸 넘기고 싶지 않았다. 따듯한 커피를 받아서 가만히 만지고만 있었다.
“안 마셔? 커피 안 좋아하나?”
“조금 뜨거워서.”
“뜨거운 거 못 마시는구나. 우리 하얀이도 그런데.”
또다. 임하얀의 이름에 버티던 정신이 땅 밑으로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이래서 밝은 대낮이 싫었다. 내 표정을, 감정을 발가벗겨져 마주해야 하는 이 시간을 피하고 싶었다. 입술에 종이컵을 대고 기울이는데 뜨거운 김 때문인지 눈가에 물이 고였다. 까끌거리는 혀 위로 커피 한 모금을 붓고 느릿느릿 삼켜 냈다.
“자네, 우나?”
“아니요. 제가 왜….”
“아….”
임하얀 아버지는 더는 묻지 않고 커피를 홀짝거렸다. 나도 차라리 그게 나았다. 말을 하지 않고 있으면 덜 비참했다. 임하얀의 아버지는 커피를 다 마신 뒤 작업하던 것을 계속하려는 듯 식탁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 작은 목판을 내려다보던 임하얀의 아버지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옥 학교 나왔거든, 내가. 한옥 목수 일도 하고 가구도 만들어 팔면서 느낀 건데, 나무란 놈들이 엄청 까다롭단 말이지.”
처음엔 혼잣말인가 했다. 임하얀의 아버지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 내 귀에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 뜨거운 커피가 담긴 종이컵만 조용히 쥐고 있었다.
“한옥에 들어가는 나무는 함수율이라고, 목재가 갖고 있는 수분이 얼마나 되는지 그거 따지는 게 중요하거든. 우리나라 사람들이 소나무를 좋아해서 그런지 가끔 멋 모르는 사람들이 내가 싼 나무를 쓴다고 하는데 말이야. 그 소나무가 엄청시리 까다로와. 함수율이 높으면 틀어지고 곰팡이 생기고…. 그 꼿꼿한 게.”
“…….”
“그래서 난 우리 하얀이가 어렸을 때부터 참 소나무 같다고 생각했지. 꼿꼿하고 항상 푸르르고 밝고. 키우기 쉽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우리 하얀이 신경 써 주지 못한 만큼…. 애가 속에서 뒤틀리고 저 혼자 곰팡이 같은 감정을 키우고 있더라고.”
임하얀의 아버지 말에 사포로 상처를 긁은 것처럼 아팠다. 고개를 들어 보니 그는 나를 진지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팔짱을 풀고 앞으로 온 임하얀의 아버지가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애들은 넷에, 아내는 신장 때문에 아프고 장모님도 혼자셔서 내가 돌봐야 해. 천지에 돈 쓸 데는 많은데 우리 하얀이는 그런 거 자기는 안 해 줘도 된다고 그러기에 진짜 그런 줄 알았지.”
“…….”
“그런 줄 알았는데. 어느 날 하얀이가 혼자 울더라고. 그 자존심 강한 애가 얼마나 미술을 하고 싶었으면 물감을 잡고….”
물감을 안고 우는 임하얀의 모습이 그려졌다. 천천히 들고 있는 종이컵을 구겼다. 커피가 손을 타고 흐르는데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래도 난 아무 말 못 했어. 하얀이가 괜찮다고 하니까. 그 애 자존심에 내가 아는 척을 하면, 그 자존심까지 무너지잖아.”
“…….”
“그래서 난 자네가 좋아. 우리 하얀이가 그렇게 밝은 얼굴로 다니는 거 오랜만이거든. 어릴 때 보는 것 같아.”
“…….”
“그래서 묻고 싶어. 왜 싸웠나? 자네가 헤어지자고 했어?”
나는 말을 할 수 없어 고개를 저었다. 가족을 사랑하는 만큼 힘들어도 웃는 게 임하얀의 자존심이었을 거다. 학원비가 없다고 엉엉 울던 임하얀이 생각이 난다. 생전 처음, 내 앞에서만 풀어 준 자존심을 밟아 죽인 게 누구던가.
“제가 실수했어요. 그런데, 하얀이가 저 보기 싫어서 전화도 안 받아요.”
“하얀이가?”
“…….”
“매일 집 앞에서 누구를 기다리던데.”
거짓말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 위로 같은 말을 누구보다 믿고 싶었다. 임하얀의 아버지는 사랑싸움이 몸을 상하게 한다며 내 걱정을 했다.
“하얀이는 그런 거 표현 잘 못 해. 전화를 꺼 둔 것도 아마 네가 혹시 전화를 안 하면 어쩌나 하고 무서워서 그런 걸 거야.”
“…….”
“오늘 우리 집서 저녁 먹을래? 민어 좋아해?”
임하얀의 아버지는 아무 말 없는 내 어깨에 손을 두르고 일으켰다. 오늘은 자기 차를 타고 떠나자며 수시로 내 등을 다독거렸다. 오래된 트럭을 꺼내 와 나를 옆자리에 태우고 음악을 틀어 줬다. 조금 자 두라는 말에 반신반의하며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이었다.
“잘 자네. 응? 아깐 얼굴이 너무 그랬어.”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이 낡은 트럭에서 느끼는 편안함은 임하얀에게서 느낀 편안함과 같았다. 그 덕분인지 지근거리던 두통이 도망가고 없었다.
임하얀의 아버지를 따라 트럭에서 내렸다. 현관문에서 임하얀이 나오는 상상을 했다. 임하얀의 아버지는 걸음이 늦어지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함께 걸어갔다. 현관문을 열리는 소리에 나온 건 임하얀의 어머니였다. 국자를 들고 나온 어머니가 나를 보고 왜 이리 수척해졌냐며 놀란 눈을 했다.
“엇갈렸네. 하얀이는 잠깐 어디 나갔다 온다던데.”
내가 온다는 걸 알고 도망간 걸까. 무거운 감정이 가슴을 옥죄었다. 그때 다른 생각 하지 말라는 것처럼 커다란 손이 나를 이끌었다. 덕분에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임하늘, 임연두와 인사를 하고 나니 어느 사이엔가 식탁 앞에 앉혀졌다. 입맛이 개운치 않아 무언가를 먹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임하얀 부모님 앞에서 안 먹는다고 투정할 수 없는 터라 숟가락을 들었다.
“형. 형도 집 지을 줄 알아?”
“언니 남자 친구는 경영학과래.”
“경영학과는 집 못 지어?”
임연두. 임하늘. 이 쌍둥이 남매는 볼 때마다 말이 많았다. 그래도 이 애들은 임하얀과 눈매가 닮아 귀여운 편이었다. 예전엔 저렇게 어린애들을 보면 동생인 해리가 떠올라서 멀리하곤 했으니.
하늘이와 연두는 어린아이다워서 좋았다. 안 받는다고 생각했던 밥도 생각보다 잘 넘어갔다. 숟가락 위에 민어 살을 발라 올려 준 임하얀 어머니는 더 먹고 싶으면 말하라고 다정히 웃었다.
“자주 와요, 하얀이랑. 내 딸 얼굴도 보게.”
“네.”
“하얀이가 어렸을 때부터 자기 집 지어 주는 남자랑 결혼한다고 그랬는데. 경영학과 다니는 고등학교 후배를 데려와서 깜짝 놀랐지 뭐야.”
자기 집을 지어 주는 남자. 경영학과는 집을 못 짓냐는 말을 왜 하나 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다. 임하얀의 아버지는 신경 쓰지 말라며 내게 말했다.
“내가 어렸을 때 집 짓는 남자가 진짜 남자라고 세뇌시켰거든. 그래서 일부러 자네 손이 못 집기 좋은 손이라고 그런 거고. 하얀이한테 점수 좀 따라고.”
“…….”
“웃으니까 더 예쁘네. 먹고 하얀이 방에 올라가 있어요. 좀 있으면 올 거야.”
“그래, 그래. 이참에 둘이 찐하게 화해해. 어?”
“여보….”
“알았어. 주책 그만 떨게. 여보도 빨리 화해했으면 좋겠다고 했으면서.”
“저….”
“응, 말해.”
“그만 먹고 올라가도 될까요.”
임하얀의 방. 거기라면 종종거리는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임하얀의 어머니가 밥그릇을 한쪽으로 치웠다. 올라가도 된다는 뜻이었다. 당신들 딸하고 관련된 일이라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을 텐데 내가 불편할까 봐 캐묻지 않는다. 이런 가족이라서 나는 질투가 난 것이다. 이런 가족이라서 끼어들 자리가 없을까 봐 걱정이었다.
쉬고 있으라는 임하얀의 부모님을 뒤로하고 계단을 올랐다. 목공소의 나무 냄새가 이 집에서 흐르고 있었다. 소나무 같은 임하얀이 자란 곳이었다. 그 여자의 방은 내 안식처였다. 아니, 임하얀이 있는 곳이 내가 갈 곳이었다. 그것을 허락해 주길 간절히 바랐다.
문을 열고 들어간 작은 방에 석양이 들어 있었다. 며칠 동안 잠 못 이루게 만든 감정들이 활활 날갯짓하며 날아갔다. 나는 임하얀이 아낀다던 서랍 앞에서 멈추었다. 흑갈색의 나무로 만든 듯한 서랍 문을 손바닥으로 만져 보았다. 서랍의 고리에 손가락을 걸고서 조심스레 당겼다. 그 여자가 숨기던 비밀이 무언지 나는 알아야겠다.
그러나 서랍 안에는 비밀이 없었다. 짧은 몽당연필 세 자루와 엎어진 종이들이 쌓여 있을 뿐이었다. 그사이 치웠나 싶어 종이를 들었다. 일기인가, 하는 마음으로 하얀 종이를 뒤집은 순간이었다.
하얀 종이 위에 그려진 건 초상화였다. 그것도 다름 아닌 고등학교 때의 나였다. 입은 체육복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교복을 입고 운동장을 뛰는 모습, 체육복을 입고 물을 마시는 모습, 누군가와 떠들며 웃는 얼굴. 총 열 장의 그림 전부가 나를 그리고 있었다.
임하얀의 시선으로 보는 나는 실제의 나보다 훨씬 더 밝고 건강하게 웃고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그 그림들을 보고 또 보았다. 그 그림에 묻어 있는 애정이 너무나도 탐이 났다. 임하얀은 어째서 나를 그렸던 걸까. 왜 그 시절의 내가 이 그림에 담겨 있을까.
베개에 머리를 누이고서 그 그림을 수십 번은 더 보았다. 이상하게도 더는 무섭지 않았다. 임하얀을 기다리는 내내 느꼈던 두려움을 그 그림이 먹어 주었다.
나의 악몽까지 가져간 듯 꿈에서 만난 임하얀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나는 내가 지은 집을 임하얀에게 선물하며 결혼식은 언제쯤이 좋지, 했다. 행복해하는 임하얀의 무릎에 누워 그녀의 손길을 받았다. 우리 집이야. 너에게 주는 나의 집. 머리칼을 넘겨 주는 손이 달아나지 못하게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눈이 떠졌다.
밤이었다. 창문으로 어슴푸레한 달빛이 비껴들고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행복한 꿈을 꾸며 잠든 게 얼마 만인지. 그리고 이 손을 잡아 본 게 얼마 만인지. 눈물이 흘러나와 노란 베개로 떨어졌다. 잡은 손을 뺨에 슬몃슬몃 비볐다. 꿈이 아니란 확신이 드는 때에 다정한 목소리를 들었다.
“오늘까지 안 오면, 내가 찾으러 가려고 그랬는데. 난 널 찾아가고, 넌 날 찾아왔네.”
“멍청하게….”
“내가?”
“나 말이야.”
임하얀의 얼굴을 볼 수 없어서 그 손등에 입을 맞췄다. 제발. 제발 나를 떠나지 마. 염원을 담아 입을 맞추는 것에 어떤 힘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부디 임하얀이 곁에 영원히 있기를.
“그거 봤구나.”
“응.”
“안 이상해? 스토커 안 같애?”
“안 이상해. 네가 내 스토커였으면 좋겠어.”
“아, 그건 조금 그렇다.”
“이거, 나 갖고 싶어”
“그래, 가져. 네가 그 그림 속 주인공이니까. 새삼 그립다…. 이때의 넌 유일하게 나를 인정해 준 사람이었어. 기억 못 할 테지만.”
임하얀이 내 팔을 베고서 옆자리에 스르르 누웠다. 다가온 붉은 빛 도는 입술이 턱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다시 만난 하얀 얼굴은 쳐다보기 아까울 정도로 생기 있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너한테 인정받고 싶었는데. 네가 나를, 동정한다고 생각하니까 창피했어.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됐나 해서.”
“생각 짧은 새끼라서 그래. 네가, 좋아할 것만 생각해서.”
“아니란 걸 알아. 그런데 사랑이 끼면 가끔 곧이곧대로 생각이 안 돼.”
“나를, 아직도 사랑해?”
임하얀이 손에 들고 있던 그림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곤, 그것을 손에서 놓아 보라는 듯이 빼냈다. 그림을 도로 가져가려는 게 아니었다. 자세히 그걸 들여다본 그녀가 가슴에 뺨을 댔다.
“이때부터 사랑했어.”
그 말은 나를 살게 해 주는 말이었다. 나는 그때에야 비로소 임하얀을 의심 없이 끌어안을 수 있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동안의 부재로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을 주고받았다.
“용서하는 거야? 안 헤어지는 거, 맞지?”
“너를 미워하는 거, 생각보다 더 힘들더라.”
“나도 그랬어. 진심으로 미워했다는 뜻은 아니고….”
“알아. 아, 이제 잘 수 있겠다. 나 조금 재워 줘, 해루야.”
“나.”
“응.”
“너한테 집 지어 주고 싶어.”
“집? 하하, 아빠한테 들었어?”
임하얀은 말의 뜻을 이해한 것처럼 미소 지으며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빈말이 아니었다. 임하얀과 내가 만든 집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을 때 그건 더 이상 깨어나고 끝날 꿈으로 그치지 않았다.
눈을 뜨자마자 든 생각은 임하얀을 위한 집을 짓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우리가 함께 살 집. 언젠가 너와 내 아이가 살 집. 그걸 내 손으로 짓는 것을 나의 꿈으로 삼고 싶었다.
“일어나서 얘기하자. 이 그림도, 집도.”
“너 자는 거 봐도 되는 거지?”
“응. 너무 피곤해….”
임하얀은 정말로 피곤한 것처럼 쌔근쌔근 잠을 잤다. 그런 임하얀을 지켜본다던 나 또한 어느새 눈이 감겼다. 자고 일어나서, 그러고 나서 이야기를 해야지.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왜 우리가 헤어지면 안 되는지. 더는 외롭지 않게 임하얀과 머리를 맞대고 잠이 들었다.
꿈에서 그녀를 만나기를 바라며. 언젠가 나의 꿈이 너의 삶으로 들어가기를 바라며.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