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134
나머지가 답을 찾지 못할 때, 오직 신숙주만이 답했다.
“전하, 이 지도를 보시겠습니까?”
* * *
“대감께서도 보이시겠지만 이 나라를 일컬어 마다가스카르라 하옵니다. 아국 강역의 두세 배쯤 되는 거대한 섬입니다.
그리고 이 옆에 있는 군도는 이름 모리셔스이온데 이곳은 얼마 전까지 무인도였습니다.”
“생소하기 짝이 없는 이름들이군. 대체 이곳에서 얼마나 멀기에….”
“직선거리로는 한 1만 킬로미터, 아니… 2만 리는 훨씬 넘을 겁니다.”
“헌데 어찌 그 머나먼 곳의 이야기를 꺼내는가?”
“대감.”
신숙주가 갑자기 눈을 빛낸다. 김종서는 다시금 팔다리의 솜털이 우수수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
“이곳이 대감의 관할지입니다.
제가 대감을 인도양 수군도절제사에 천거하였습니다.”
몇 초간의 침묵.
그리고 한발 늦은 상황 파악.
이징옥은 뒤늦게 사태를 깨닫고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김종서는 목 뒤쪽이 당겨 온다.
…사면이 아니라, 유배 아닌가?
김종서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말달리던 선구자 (1)
“전하께서 사면을 결정하시매 뭇 조신들의 반대가 지대하였습니다.
아무리 사직을 위한 마음이 있었다 한들 주군이 모르게 거병을 준비하였으니 불충이 한 가지요, 또 살아 계신 인군을 버리고 사이군하였으니 불충이 또 한 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리 복권함은 불가한 일이오니 차라리 자기들의 목을 치라고 대간들이 이야기하더이다. 그리하여 제가 낸 절충안이 이러하였습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김종서 앞에서 신숙주는 주절주절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재상의 자리에 올랐던 바 있으니 종2품 아래의 관직은 제수할 수 없으며, 북벌에 공을 세운 바 있으니 적합한 것은 무관직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새로이 절제사직을 설치하여 드리니 괜찮지 아니하겠습니까?”
“어… 그것이….”
김종서의 눈앞이 하얘진다.
가다가 죽을까…? 아니면 돌아오다가 죽을까…?
어느 쪽이 되었건 간에 고향에는 못 묻힌다.
절재 대감의 눈에 눈물이 맺힐 지경에 이르자 보다 못하던 이징옥이 나서서 호통을 친다.
“이보게, 보한재! 절재 대감께서는 이미 미수(米壽, 88세)의 연세이시네! 어찌 고된 수군 생활을 견디실 수 있겠는가! 자네는 생각이 있는 겐가, 없는 겐가!
혹시 옛적의 원한을 잊지 못하여 이리 소인배들처럼 구는가!”
“저를 뭘로 보십니까! 소인배라니! 당연히 원봉(이징옥의 호) 영감을 안도양 수군부절제사로 삼아 실질로서의 지휘관으로 삼는 안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어어?”
“그리하면 절재(김종서의 호) 대감께서는 적절한 겸직들이 덧붙을 테니 한양에서 편히 계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번에는 이징옥의 눈앞이 까매지니, 두 사람 모두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송장이 될 생각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리고 그 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구경하다가, 태연하게 찻잔을 쓰다듬으며 신숙주는 말을 잇는다.
“하하, 걱정 마십시오. 제가 그리 매정한 작자로 보이십니까?
한양과 서로 오가는 데는 달포도 걸리지 않을 겁니다. 종래의 동래현령(東萊縣令)과 같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뭐라?”
“수 척의 증기선이 이미 목포와 차고스 제도, 모리셔스 제도를 오가고 있습니다. 대감께옵서도 상경하시며 기선을 겪어 보셨다 들었는데 그 속도는 잘 아시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김종서는 짧은 항해를 기억해 낸다. 하루도 안 걸려 가까워지는 원산의 정경에 놀라던 그때.
그 정도 속력이라면 설령 2만 리가 아니라 20만 리라도 너끈히 오갈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이미 연로하신 몸으로 어찌 저 먼 외방으로 나가 정무를 돌보실 수 있겠습니까?
말씀드렸듯이 원봉 영감께서 부절제사직을 수락하신다면 비록 관작의 이름을 수군도절제사라 하여도 실직은 아닐 터입니다.”
사람 좋은 웃음을 지은 신숙주는 차를 한 모금 빨아들이며 차분히 이야기한다.
“제가 직접 천거를 하였으나 필히 오해가 생길 수밖에 없는 문제이니 제가 직접 말씀을 전하러 온 것입니다. 어떻게, 피차 소통에 혼선이 없게 되어 다행이옵니다.”
당연히 판서씩이나 되는 사람이 직접 찾아와서 설명할 이유는 없다.
“자네… 어째서 그 중한 사실을 이야기해 주지 않고서….”
“음? 아, 증기선의 속도 정도는 ‘상식’이 아닙니까? 당연히 알고 계실 줄 알고….”
그럴 리가.
지금 저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만 보아도 거짓말이다. 이징옥은 그의 순진무구한 얼굴에 혀를 내두른다.
이거 순 미친놈이 아닌가?
“그리고 현지 진영의 행정은 원산에서 담당할 것이니 걱정할 필요 없으실 터이며, 만주에서 또한 고문관을 파견할 터이니 홀로 낯선 수군 업무를 담당한다고 낙담하지 마십시오.”
“…만주에서의 고문관이라니?”
“아, 거기에 대해서도 설명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신숙주의 얼굴에 시종일관 즐거운 기색이 떠나지 않는다.
* * *
“만주 소비에트 구룬 우라!”
“우라! 우라! 우라!”
기나긴 행렬이 심양(瀋陽), 아니 이제 만주어로 묵던(Mukden)이라 불리우게 될 도시의 거리 한복판을 지나간다.
사람들은 행렬을 구경하러 나와서는 어디선가 준비한 붉은 손수건을 들고 흔든다.
요동의 이 유서 깊은 도시, 앞으로 만주의 심장이 될 도시가 붉은 물결로 가득하다.
칼같이 각을 세운 제복과 완장이 수천의 장정들로 하여금 하나의 생명체처럼 통일감을 주며 발걸음 소리도 박자를 맞추니 척, 척, 땅을 울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깃발, 수많은 깃발.
붉은 깃발들 위에 쓰여진 찰 만(滿) 자가 백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원래는 붉은 바탕 위에 흰 동그라미가 있고, 그 속에 찰 만 자를 써낸 형태의 깃발이었다.
깃발은 네모나며 중심에 원이 있으니 이는 하늘이 둥글고 땅이 모남을 드러냄이요,
혁명의 붉은 기에 옛 금나라 완안부(完顔部)의 상징인 백색이 더해지니 만주족의 순수함과 역사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아니 되오.”
―“어째서입니까? 우리는 그저 천지를 아우르는 만주족의 기상을 표현하고 만주족의 정당한 강역을 나타내는….”
―“그 찰 만(滿) 자만 만 만(卍) 자로 고치면 영락없는 나치 깃발… 아니오. 방금 그 말은 괘념치 마시오.”
헌데 기이하게도 트로츠키 의장 동지께서 결사반대하시니 안타깝게도 그 뜻깊은 기를 쓰지 못했다. 이아구의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가.
―“…나는 그저 어떠한 다른 의도 없이 순수하게 미학적 관점에서만 접근하고 있을 뿐이오. 일단 소련의 구성국이 될 터이니 낫과 망치를 구석에 넣어 통일감을 줘야 하지 않겠소?”
―“그, 그렇군요!”
―“그런데 깃발에 색상이 셋 이상으로 늘어나면 난삽해질 수 있지 않겠소? 부탁하건대 동그라미는 빼시오.”
그래도 이아구는 트로츠키 동지의 ‘순수한 조언’에 감동하여 깃발의 구성을 바꾸었다.
그 결과 지금 같이 붉은 기 왼쪽 위에 낫과 망치를 그리고 찰 만 자를 하얀색으로 중앙에 배치한 형태가 채택되었다.
소련의 깃발과 나란히 움직이니 붉은 바탕과 혁명적안 낫과 망치가 가지런히 빛을 발한다.
“이고납합 우라! 이아구 우라!”
그렇게 설계된 깃발을 휘두르는, 제복을 걸친 수천의 사람들이 한 곳을 바라본다.
바로 신설된 만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아직까지는) 유일한 정당, 만주족공산주의대동맹 전당 대회장 건물의 발코니.
그 발코니 위에서 이아구와 함께 행렬을 내다볼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만주족공산주의대동맹 우라!”
“민족의 영도자 이고납합에게 충성을! 동맹의 맹주이신 이아구 동지에게 경의를!”
만맹 소속 무력 집단 ‘백색여단’의 행렬의 경례를 받는 두 사람, 두 형제, 이고납합과 이아구.
만주족의 구원자이자 만주의 수호자, 핍박받는 만주 민중의 대변자로서 이고납합은 이 신생 민족 국가의 지도자가 되어야 했다.
만주 민족의 운명과 생존권을 만맹이 보장하고 대변하며, 다시 만맹은 이고납합의 영도 아래 단결한다.
민족적 혁명 역량을 집중시킬 단 한 사람의 지도자, 이고납합!
이아구는 그런 형님 이고납합을 깊이 존경했고, 그저 야망 있는 요동의 많은 추장 중 한 사람이었던 그를 전(全) 만주의 지배자로 탈바꿈시켰다.
이아구는 거기에 이런저런 사상적인 정당화를 더하여 형에게 강력한 친위 세력과 명분을 주었다.
그런 만큼 당연히 만주를 이끄는 정치적, 정신적 지도자로서 두 사람은 만주국이 건국되는 이 상징적인 순간에 함께해야 했다.
행렬은 묵던의 전당 대회장 건물 내부로 진입하기 시작하고, 그에 따라 두 사람도 발코니에서 실내로 들어온다.
전당 대회장은 위엄 있게 직선으로 뻗은 거친 콘크리트질의 외관처럼, 내부도 커다란 규모에 비해 소박하고 투박한 내장으로 단순한 웅장미를 뽐내고 있었다.
…물론 경제적 사정 때문에 장식 같은 것을 할 여유도 없었고, 일단 수백수천 명을 수용할 규모 있는 건물부터 빨리 짓자는 생각에 이런 결과물이 나온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괜찮은 설계가 얻어걸렸으니 이 정도면 훌륭하다.
두 사람이 발코니에서 실내 통로로 이동하자 곧 전당 대회장의 건물 내부의 연단으로 이어진다.
휘장 뒤에서 슬쩍 훔쳐보니 아까 이어지던 수천 명의 행렬이 관중석을 빼곡히 매웠다.
그 밑으로는 어디 추장이니, 어디 도독이니 하는 만주 일대의 이런저런 정치적 지도자들이 전당 대회장의 의석들을 하나씩 채워 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동하느라 일어나는 어수선한 분위기가 정리되자 이아구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연단을 향해 걸어 나간다.
그리고 단 한 사람의 등장에, 수천의 인원이 기립한다.
“이아구 동지께 경례!”
“우와아아아!”
“이아구! 이아구!”
“감사합니다. 이 자리의 참석해 주신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우와아아아아아!”
이아구의 말이 한마디 이어질 때마다 환호성이 일어나고, 환호성이 일어날 때마다 이아구는 다시 손을 흔드니 더 큰 소리의 파도가 넘실거린다.
…완벽하다.
이 혁명적 열성.
“우리는 오늘날, 마침내 완전한 자주와 독립을 이룩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만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여당으로서, 만맹의 첫 전당 대회가 성립함을 선포하게 되어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아버지 이만주의 대에도 이뤄 내지 못했던 명국으로부터의 자립.
조선과 원산에서 지원받은 감자와 밀은 이곳 만주 일부의 척박한 땅에서도 잘만 자라난다.
많은 황무지들이 벌써부터 개간되어 밭으로 바뀌고 있다.
원산이 개발해 놓은 광산촌 인근부터 빠르게 치안상의 혼란과 인프라 미비를 정리해 나가고 있다.
즉, 더 이상 생존을 위하여 중국과의 교역(약탈)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한낱 도적 떼 취급받으며 명과 조선에 이 잡듯 잡힐 일도 없다. 이제야 당당한 하나의 국가로서 조선, 원산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아직 이 국회의 작동 역시 기존 추장들의 의견을 취합하고 조언을 듣는 수준의 임시 기구에 불과하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의 만주국 국체 자체가 만맹이 이끄는 임시 정부의 훈정 체제로 돌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직 미숙할지는 모르겠으나 이 모든 것이 이아구에게는 하나로 단결한 민족의 상징처럼 여겨져 감동을 더했다.
이 웅대한, 마이어 동지가 직접 설계한 전당 대회장! 거기에 저 일치단결한 대오의 동맹원들! 그를 올려다보며 박수치는 군중들까지 전부!
“아, 아, 동지들!”
이아구는 말한다.
“동지들은 곧 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님이 무엇입니까? 언제나 그리운 이름입니다. 우리들의 가슴입니다. 우리가 사모하고 눈물 흘리며 오랜 세월을 목말라 해 온 이름입니다.
바로 만주족을 위한 사회주의 국가를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
“우와아아아아아!”
아직도 혁명의 달성이 믿기지 않는지, 이아구는 왠지 누군가 개소리 집어치우라며 나와서 훼방을 놓을 것 같은 기분을 느끼지만, 다행히 아무 일도 없다.
“기대해 주십시오! 오늘 여러분들은 그토록 고대하시던 여러분들의 님을 확실하게 만나고 확인하시게 될 것입니다!”
…드디어!
“임시 정부 수상이신 이고납합 동지가 나오시겠습니다!”
“우와아아아아아!”
오랫동안 바라 왔던 순간이다.
형님이 추장들의 만류에도 동포들을 난민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주장하셨을 그때부터.
항상 은인으로 감사히 여기는 에드워즈 동지의 지원과 함께 만맹이 탄생했을 때부터.
만주 민족의 자립을 외치시던 형님의 선견지명에 뒤늦게 감탄하며 그를 모시고 지원하겠다 굳게 다짐했었고, 그 결실이 지금 눈앞에 보이려 하지 않는가?
물론 이고납합으로서는 그저 여진인들 중 조금 더 힘센 추장이 되고, 난민들을 제 부족으로 흡수시키려 한 것뿐이다. 이아구는 그를 과대 해석했고.
즉 만주민족주의는 이아구의 굳은 믿음과 다르게, 자기 자신이 창시해 낸 것이었다.
“…반갑소, 임시 정부 수상 이고납합이라 하오.”
“와아아아!”
그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 것이 바로 지금, 그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것만 같던 이 순간에서였다.
사람들이 이고납합의 등장에 열렬한 박수를 친다. 모두가 기립하여 박수를 친다.
그러나 큰 소리로 환호하는 이는 많지 않다.
그마저도 이런저런 구호를 외칠 뿐 이고납합 개인에 대한 존경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 광경을 보고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이아구는 잠시 주위를 둘러본다. 그리고 깨닫는다.
여전히 청중의 태반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 연설하는 이고납합이 아니라.
* * *
신숙주가 쥔 신문에는 ‘만주국 임시 정부는 어디로 나아가는가?’라는 내용의 칼럼이 있다.
“만주국의 정치적 지형이란 참 신기하오? 그 쌍두 정치의 형국이 너무 기괴하지 않소?”
“…뭐가 말입니까? 이고납합 수상 동지는 이미 만주국의 정국 안정화에 혁혁한 공을 세우셨습니다.”
손님이 답하자 신숙주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전혀 이용하려 하지 않고 그를 형에게 바치려는 동생과, 그런 동생의 선물을 겨우 흡수해 가는 형의 대비라니.
그럼 묻겠소. 정국의 안정화가 대중들에게 드러나는 것이오? 그로 인해 이고납합 동지가 대중에게 존경받소이까?”
“….”
“부수상 동지는 마치 자신이 형의 그림자인 것처럼 굴지만 기실 그 반대나 다름없소.
본인은 선구자에 대중적 인기인이지만 그 형님은?”
신숙주는 잠시 이야기를 쏟아 내다가, 무례를 깨닫고 입을 닫는다.
“손님을 앞에 두고 이상한 이야기를 많이 했구만. 도중에 끼어들어서 미안하오. 계속 말씀하시오.”
“…좋습니다. 저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 * *
형님은 그저… 한 사람의 추장일 뿐이다.
민족의 초인적 영도자가 아니라.
그러나 이아구는 누구보다도 스스로를 잘 안다.
이아구는 사색할 줄을 안다. 글을 쓸 줄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