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133
그러고 보니 이 집안의 정치적 위치가….
* * *
와르르, 무너져 내렸었다.
수양대군이 한창 안평과 힘겨루기를 하던 때, 집현전 부교리셨던 아버지는 점차 수양대군의 파벌로 기울었다고 한다.
김종서 등과의 친분을 놓지는 않았으나 점차 수양대군과의 인연이 쌓여 가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전란이 일어났을 때 수양대군은 빠르게 자신의 친위 세력이 될 만한 이들을 발 빠르게 포섭했고, 결국 아버지 역시 수양대군의 복심이 될 뻔했었다.
신숙주의 사촌과 혼인하지 않았더라면.
신숙주의 ‘천인공노할 역모’가 밝혀졌음에도 수양대군은 신숙주와 나머지 소장파들의 인척들을 쳐 내지 못했다.
그러자면 잃을 세력이 너무도 많았으니 그저 포섭할 대상과 그러지 않을 대상을 골라냈다.
아버지는 후자였고, 한양 인근의 절에 다른 이들과 함께 유폐되었다.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한 채 ‘난이 끝나면 처우를 결정하겠다’는 말만 던지고 수양은 떠났다.
정말 난이 끝나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처우는 결정되었다.
그 결정의 주체가 수양이 아니라 금상 전하셨을 뿐.
―“전하, 윤기견과 그 식솔들은 난중에 수양에게 협력한 바가 없으니 마땅히 사면함이 옳습니다.”
―“만일 예판의 인척이 아니었더라도 그러하였겠는가? 그 말은 가납하지 않겠다.”
유배는 없었다. 다행히 참형도 없었다. 저지른 죄가 없고, 무려 1등 호성공신이 5촌이니 아버지는 서울에서 쫓겨나는 비교적 관대한 조치만을 받고 살아남으셨다.
그때 이 윤순비가 태어났다.
고향을 향하여 간 뒤, 청운의 꿈을 영영 접고 틀어박힌 아버지.
이것저것 식구를 챙겨 주려 재물을 보내오는 사촌만 바라보는 어머니.
…그리고 본관인 함안 인근의 창원 농업공장을 돌아다니며 자라난 윤순비.
농업공장에서 나눠 주는 팸플릿을 읽고, 콤소몰(Комсомол, 전연방공산주의청년연합)의 클럽에 드나들면서 자라난 딸아이.
오랫동안 양친은 ‘엇나가는’ 딸아이를 방치하였고, 기회를 잡은 것은 오랜만에 찾아온 신숙주와 마주하면서부터였다.
“…얘야, 너 책장에 저게 뭔지 아느냐?”
“그, 외당숙께서 쓰신 공산당 선언 해제 아닌지요?”
“그러면 이해는 하느냐, 응?”
“다 읽고 공부했으니 깊게는 몰라도 대강은 알지요.”
얼굴에 갑작스레 화색이 돌던 신숙주는 곧 양친을 모아 놓고 온갖 이야기를 시작한다.
사면 분위기가 어쩌네, 무슨 안정의 상징이 되느네, 하는 소리를 시끄럽게 늘어놓으시던 당숙은 곧 돌아와서 이야기를 꺼낸다.
“순비야.”
“예, 당숙.”
“…너, 왕비 할 생각 없느냐?”
* * *
“이 아이로 하겠소.”
금성대군과 다른 종친들은 이홍위가 동그라미 쳐 놓은 이름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저 홀로 두드러지는 아이였으니 어느 정도 예상한 결과였다.
‘윤순비.’
윤관의 10대손인 함안 윤씨 윤기견의 장녀.
연산군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제헌왕후(齊獻王后),
또는 어머니.
그리고 중종반정 이후로는 이렇게 불렸다.
폐비 윤씨(廢妃 尹氏).
* * *
/ 작가의 말
폐비 윤씨의 이름은 당대 여성들의 실제 성명을 바탕으로 창작하였습니다.
안정의 결과 (3)
간택된 윤순비는 곧 별궁으로 불려가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동안 궁중의 예절과 왕비로서의 몸가짐을 배운 뒤, 왕비로 책봉되었다.
마지막으로 동뢰연(同牢宴)에서 왕과 왕비가 마주 보고 술을 나누어 마시니 두 사람은 부부가 된다.
본래는 왕비조왕대비(王妃朝王大妃)라 하여 동뢰연을 마친 왕비가 왕대비에게 나아가 조회하는 과정이 있으나, 왕대비가 없으니 그 과정 또한 자연스레 생략되었다.
조선의 왕통이 얼마나 가느다랗고 불안하게 이어져 왔는지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제대로 서고 궁중 예법을 정비한 지는 고작 수십 년밖에 되지 않았다.
젊은 왕국인 조선에서 그 제각각이던 예법들을 정리하여 문서화하고, 정비한 것이 20여 년 전 세종대의 ‘오례의주(五禮儀註)’이며, 그를 다시 정리한 것이 문종대부터 집필되어 가던 ‘세종실록오례의(世宗實錄五禮儀)’였다.
허나 궐 안이 싸움터가 된 적도 있으며, 심지어 전각 일부가 불타기도 했던 그 사태 속에서 많은 사람과 서책이 유실되었다.
또한 글 몇 줄로 의례의 제기의 배치와 가무의 분위기와 음악의 빠르기를 모두 표현할 수 없으니. 남은 기억, 남은 기록들의 위에서 새로운 의례가 만들어진다.
옛것들의 흔적 위에서 새것이 재조립된다.
그중 하나가 바로, 결혼식이 끝난 뒤에 열리는 피로연이었다.
젊은 선비들끼리 만나면 악수요, 감탄할 때는 박수를 치는 것처럼 세태에 자연스레 섞여들던 원산식 예법이 궁중에까지 유입된 것이었다.
더하여 원산, 엣추, 마극종, 만주 등 각국에서의 사회주의 세력 및 국가에서 사절이 올라와 이 피로연에 참가하니.
이 행사에는 ‘사회주의 형제국’들에게, 동맹국들에게 조선의 국력을 보이고 그들과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국혼을 외교적 장으로서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조선국 천세!”
“천세! 천세! 천천세!”
가까이에서는 근정전 앞에 차양들이 펼쳐지고, 화려한 요리들이 참석자들의 소반 위에 올라간다.
특히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설탕으로 만든 원앙 조각상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그리고 멀리서는 하늘에 색색의 불꽃놀이가 터지니 마치 별을 잡아다 터뜨리는 것 같은 황홀한 광경이었다.
왕비가 된 윤순비는 잠시 그 화려함에 취하고 또 놀라 말을 잊는다.
“…중전, 여기 포도 사탕 하나 들겠소?”
“아, 아아!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중전이 급히 사탕을 받아 입에 넣어 보니 스륵, 하고 녹아 사라진다. 젤리다.
역시 처음 먹어 보는 것이라 눈이 휘둥그레져 주상의 용안을 돌아보니,
어쩐지 어색해 보인다.
분명 부부이건만, 부부로 여기기를 꺼려하는 느낌.
나이 차가 많이 난다 하더라도 가례를 맺은 사이인데 여전히 그의 눈빛은 딱 늦둥이 누이동생을 내려다보는 그 느낌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따뜻하고 어떤 긴장감도 없는 눈빛.
거기에서 한창 묘한 느낌을 받고 있는데 주상의 표정이 갑자기 변한다. 무언가 흥미로운 것이 생각났다는 그 느낌.
“아, 그렇지. 내 긴히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소.”
“무엇이든 하교하소서, 전하.”
“중전의 답안은 누가 써 주었소?”
“…예?”
“처음에 보았을 때는 당연히 그대의 외당숙이 써 준 줄로만 알았지. 허나 만일 보한재가 썼다면 보다 치밀하고 보기 좋은 논리 전개를 만들어 냈을 것이오.
이제 갓 성년이 된 아이가 하리라 생각되는 치기 어린 실수들도 꾸며서 넣어 귀여운 구석도 만들어 냈을 터이고.
헌데 그대의 서신은 그 내용이 너무도 조잡하고 난삽하구려. 십수 살 먹은 아이가 썼다기에는 과하게 성숙하였고.”
“….”
“허나 내 놀라웠소. 정치와 담을 쌓은 집안에서 그래도 미숙하게나마 유물론적인 사유에 관심이 있는 이가 있다니 내 궁금증이 도져….”
“신첩이 직접 썼사옵니다.”
“하하, 이제 어엿한 왕비로 책봉되었으니 사실대로 말하여도 좋소.”
“…신첩이 직접 썼사옵니다.”
“….”
만일 그때 원산인들 중에서도 일부만 들고 다닌다는 ‘카메라’라는 기물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윤순비는 평생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된다.
“새, 생각해 보니 그 투박함 속에 내 평시에 생각지 못하던 지점들을 날카롭게 파고들어 가는 대담함이 엿보이는 글이었소. 특히 국가의 초계급적 성격에 대하여서는….”
항상 차분하던 이홍위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오르는 일이 얼마나 희귀한지, 지금의 그는 알지 못했다.
아무튼 이홍위의 횡설수설하는 모습에서 잠시 시선을 뗀 그녀는 연회가 이뤄지는 이곳저곳을 지켜본다.
만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과도 정부의 부(副)수상이라는 이아구. 그는 연회장 중앙에서 펼쳐지는 가극 공연에 대하여 얼마나 혁명적인 내용인지를 끊임없이 주위 사람들에게 연설한다.
전 동녕부 총관이자 현재 만주 과도 정부의 자문을 맡은 몽골 제국의 아락투무르. 그는 다른 곳에 관심을 가지는 대신 멀리서 쏴 재끼는 예포나 검무에 사용되는 칼날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마쓰다이라 일가의 차기 가주라는 지카타다는 조심스레 조선인 관원들과 말을 붙여 보며 어떻게든 친분을 쌓으려 기를 쓴다.
마극종의 어느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선사는 눈치를 보며 고기반찬을 삼킨다. 아마 본래 계율을 지켜 채식하던 사내인가 보다.
그리고 당연히 참석한 원산의 트로츠키는….
윤순비 자신을 잠시 뜯어보다 고개를 돌린다. 윤순비는 너무 놀라 급히 고개를 돌려 다시 이홍위를 바라본다. 아직도 횡설수설 변명을 주워섬기는 꼴에 군왕답지 않은 우스움이 있다.
뭔가를 재 보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흥미로워 견딜 수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 * *
근정전에서 얼마나 기기묘묘한 잔치가 치러졌든, 국혼으로 인하여 나라가 축제 분위기로 들떠 올랐다.
“앞으로의 정세는 점차 호전될 것일세. 대군 대감께서 이번 국혼의 결정권자로서 앉아 계셨으니, 이제는 앞으로도 종실의 큰 어른으로서 많이 불려 다니실 걸세.
그리고 대군 대감께서 불려 다니신다면 사면의 논의 역시 보다 가속될 터이니 곧 웅크려 있던 선비들이 다시 세상으로 나오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아흔에 가까운 나이로, 이제 언제 홀연히 다가올지 모를 절명(絶命)의 때만을 기다리던 김종서 또한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게다가 작금에 혼약 상대가 된 윤씨 또한 수양의 조정에 속할 뻔하다 결국 유폐당해 죽음 직전에 몰렸던 이가 아닌가?
역적이되 역적 아닌 상태로 숨만 붙어 있던 상태임은 그 또한 마찬가지이니 이번 간택 역시 이전 전란의 역적들에 대한 대사면을 암시하는 바이리라.
김종서는 오랜 마음의 짐을 덜어 낸 듯 홀가분한 표정을 짓다, 곧 고개를 내젓는다.
“내 정말로 많은 이들에게 잘못을 하였네….
나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하여금 함께한 선비들이 역적으로 몰려 그 긴 세월을 오명 속에서 숨어 지내게 만들었으니 어찌 이 노구(老軀)에 죄가 없다 하겠나?”
“절재 대감께옵서는 그저 종사를 생각하셨을 뿐입니다. 우리와 뜻을 함께한 이들 또한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충심을 따랐을 뿐이니 심려를 더십시오.”
“허허. 원봉, 자네는 아직도 나를 대감이라 부르는가?”
“대감을 대감이라 부를 뿐이오니 무어가 이상하겠습니까?”
“….”
이징옥의 말에, 김종서는 잠시 고개를 숙인다.
흑립에 그의 주름진 얼굴이 가려지니 이징옥은 대감의 턱 끝으로 흐르는 방울 진 눈물을 보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여기 주인장 계시오?”
눈치 없는 손이 끼어들기 전까지는.
이징옥은 급히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고, 김종서 또한 언제 그랬냐는 듯 급히 의관을 정제한 채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한다.
목소리를 들으니, 10년이 지나도 그 속의 능글거림과 배배 꼬인 심성이 드러나는 게 누구인지 짐작할 필요도 없었다.
“역시 이곳에 머무르실 줄 알았습니다.”
“예판 대감, 사석에서는 오래간만이오.”
“그저 오랜만이라 이르고 끝이 나겠습니까? 서로 왕래가 없던 사이 강산이 수십 번은 변한 듯합니다.”
어색할 만도 하거늘, 그들을 대면하여 어떤 거리낌 없이 후룩후룩 차를 들이켜는 신숙주.
…저것도 좋게 보아 주자면 일종의 호연지기(浩然之氣)라 할 수 있겠다.
“전하께서 마침내 종실의 어진 배필을 얻으셨으니 기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꽃마다 붉고 노란 빛이 더하며, 강물은 경쾌하게 흘러가지 않습니까?”
“보한재, 자네는 이미 청운에 올랐고 하나의 학풍을 이루었으니 자네를 흠숭하여 문지방 앞을 서성이는 이들이 많을 터인데. 어찌 이 늙은 촌부를 찾아올 생각을 하였나?”
“과찬이십니다. 아직도 저는 조정의 우신(愚臣)이며 정승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으니 청운에 올랐다 말할 바도 되지 못합니다.”
물론 그가 정승에 오르지 못한 것은 명예직인 블레어를 제하면, 이 나라의 정승이랄 것이 사실상 없어졌기 때문이니 신숙주답지 않은 겸손이었다.
그 불길할 정도로 공손한 태도에 오히려 김종서의 불신이 더해만 간다. 속이 시커먼 인간이 군자처럼 행세할 때는 그 결과가 좋지 못한 법.
헌데,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신숙주가 던져 오는 말은 뜻밖의 희소식이라.
“전하께옵서 중신들을 모아 회의를 여셨습니다.
절재 대감께옵서 안타까운 일을 당하시어 그 높은 덕에도 불구하고 조정에 이바지하지 못하고 그저 강호에 떠도실 뿐이니 이는 부당한 일이라는 데 공론이 모였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곧 김종서에게 벼슬을 제수하겠다는 말이 아닌가?
“…한데 이를 어찌 자네가 직접 전해 오는가?”
“이 기쁜 소식을 제가 직접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만일 저와 벗들이 절재 대감의 큰 뜻을 미루어 알았더라면 역적 유(수양대군)와 용(안평대군)이 사직을 뒤흔드는 일이 없지 않았겠습니까?”
김종서는 곧 신숙주에 대한 평가를 상향 조정한다.
지위와 학식에 걸맞지 않게 인물이 가볍고, 신의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으며, 벗과 동지를 쉬이 버리는 소인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염치는 아는 인간이었나?
“그대의 마음 씀씀이에 고마울 뿐이네. 허나 이 노신(老身)은 눈이 침침하고 허리가 굽어 국정을 돌볼 수 없네. 차라리 여기 있는 원봉에게 직임을 맡김은 어떠한가?”
“대감!”
어차피 옛 금성대군 세력의 중심인 그를 품음으로써 정권의 안정성을 홍보하려는 의도라면 꼭 김종서 그 자신이 직접 관품을 받을 필요는 없다.
그래… 이징옥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괜찮지 않겠는가? 후대가 없어 사라져 가는 이들 구 고명대신들의 세력을 갈무리하고, 그 마지막을 아름답게 거둘 인물로 말이다.
“그는 전하와 더불어 논의해야 할 내용이라 제가 사사로이 답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나도 아네. 그저 이 미신(微臣)의 천견을 주상께 상언해 주기만을 바라네.”
“참고해 두겠습니다. 허나 원봉 영감께도 이미 상응하는 직위를 준비하고 계실 겁니다.”
그렇게 예의를 차린 말들이 오가며 슬슬 말속에 든 내용의 밀도가 낮아지기 시작한다. 김종서는 은근히 궁금한 바를 묻기 위하여 대화 주제를 슬슬 돌려 보지만, 신숙주는 끝까지 답을 내놓지 않는다.
이상하다.
그를 어딘가에 내정하였더라면 그 관작을 알려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관품에 노욕을 부리는 것으로 보일까 하여 김종서는 먼저 묻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한다.
헌데 이리 빙빙 돌려 가며 시간을 끄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는가?
결국, 괄괄한 무인답게 참는 것에는 재주가 부족하던 이징옥이 먼저 입을 연다.
“이보게, 예판. 그래서 절재 대감께 제수하고자 전하께서 말씀하신 벼슬이 무언가?”
그리고 이징옥이 질문을 던진 순간 두 사람은 보았다.
언뜻 아무렇지도 않게 스쳐 갔지만, 그 찰나 사이에 신숙주의 안면에 번져 있던 비열한 웃음기.
“아, 그를 잊고서 말씀을 못 드렸군요. 송구하옵니다.”
그렇게 말하며 신숙주는 갑자기 소맷부리에서 웬 종잇장을 한장 꺼내어 펼친다.
지도다.
* * *
“그 소임이 중요하면서도 작금의 균형을 흔들지 않을 만한 자리가 어디 있겠는가?”
단지 명예직이나 한직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기능을 하는 직책.
그러면서도 이미 조정을 장악한 세 파벌의 균형 상태를 훼손하지 않을 자리.
가능하면 공을 세울 수도 있어 이제 옛 금성대군의 세력까지 완전히 포용했다는 징표가 될 수 있는 그런 관작.
전하께옵서는 그런 자리가 어디 없느냐고 물으셨다.
허나, 이미 뽕나무가 바다 되듯 세상이 뒤집혔거늘 옛날의 정승이라 하여 할 수 있는 바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김종서와 이징옥의 특장점이라 해 봐야 잔뼈 굵은 무장으로서 북변을 지키던….
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