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191
올리비에가 그 광경을 보고 멍하니 읊조리니, 이징옥과 로밀리 역시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 * *
테노치티클란의 중심에는 거대한 광장이 있고, 그 주위로 수많은 궁전들이 조성되어 있다.
왕이 바뀔 때마다, 무언가 나라에 일이 있을 때마다 궁전을 새로이 건축하는 만큼 수많은 궁들이 도시를 빼곡히 채워 가고 있던 것이다.
개중에는, 몇 해 전 새로이 테노치티클란의 대공이 된 아샤야카틀이 새로 건설한 궁전도 있었다.
그 기둥과 벽들 사이에 선 것은 두 사람, 아샤야카틀과 틀라카엘렐.
우이칠로포치틀리(Huitzilopochtli, 아즈텍 신화의 태양신)나 테스카틀리포카(Tezcatlipoca, 아즈텍 신화의 창세신) 대신 12사도가 광배를 두른 채 벽화로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왜 그랬나?”
아샤야카틀의 질문은 그렇듯 성의 없기가 짝이 없었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언급도 없이 그저 한마디 ‘왜’만으로 압축되는 질문.
그러나 명령과 추궁과 변명을 짧게 할 수 있음이야말로 권력자의 특권인 법이다. 틀라카엘렐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연다.
“대공 전하, 다름이 아니라….”
“벗이여. 이곳에는 우리 둘밖에 없네.”
“…가여워서 그랬네.”
“누가?”
“둘 다. 제 딸의 안위를 걱정하며 죽어 가는 주군이든, 기댈 곳 없이 홀로 남겨질 어린아이든.”
“맙소사….”
틀라카엘렐은 “순해 빠진 인간 같으니…”라고 읊조리는 아샤야카틀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숙인다.
“미안하게 되었네.”
“그래, 내가 주군으로서 그 정도 사과를 받을 자격은 되겠지.”
아샤야카틀이 가벼운 원망이 담긴 눈으로 공작을 노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자네라는 사람이 그러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네.”
나이도 비슷한 대공과 공작. 바로 몇 해 전까지, 그들이 왕자와 왕이던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그들은 서로에게 곤봉을 겨누고 세력을 겨루었다.
허나 아샤야카틀의 아버지 모테쿠소마가 시대의 변화를 읽어 빠르게 개종을 택한 뒤로, 그들은 ‘신앙의 형제’였다. 아니, 그 이상의 혈맹이다.
개종한 메시카인들과 토토낙인들이 이룬 메시카 대공국이, 이제 이 땅의 새로운 패권을 차지했으니.
또한 나이 어린 두 군주는 타고난 무인으로서 성향 역시 잘 맞았으니 빠르게 교분을 쌓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아샤야카틀은 벗에게, 어떠한 가식도 없이 이리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어찌 보일지 알겠나?”
신생 대공국의 2인자가, 종주국의 왕실과 혈연으로 얽혔으니 이는 곧 패권의 이동이 아닌가?
메시카의 수위권을 인정하며 형성된 지금의 평화에 불만을 품는 이들도 있었기에, 틀라카엘렐의 결정이 이 신생국에 무슨 파란을 일으킬지 몰랐다.
게다가 선대왕의 바로 유일한 직계 자손이라니.
그와 왕위를 두고 다투었던 군주가 다스리는 본국과의 관계가, 심히 우려될 수밖에.
“저들이 무리한 외교적 요구를 해 올지도 모르네. 안 그래도 우리의 개종이 선왕의 큰 업적으로 남았다는 소식에 불안했거늘….”
본래 적의 권위를 떨어뜨리려면 그 업적을 깎아내리고 잊히게 만듦이 가장 좋은 수이다.
엔리케 4세는 그들에게 온갖 지원 물자와 무역 특혜를 하사했으나, 이제 다가올 이사벨의 시대에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샤야카틀의 질책은 어느 선을 넘어서지 않았다.
틀라카엘렐이 그에게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을 들고 왔기에.
아샤야카틀은 방 한쪽, 붉은 벨벳 위에 올라간 황금과 보석의 꽃을 바라본다.
교황이 직접 내린 왕관이다. 그는 전통적인 터키석 왕관의 사이에 조심스럽게 두 번째 왕관을 덧쓴다. 두 왕관의 무게가 기분 좋게 머리와 목을 짓누른다.
십자가의 가호를 받는 메시카의 군주.
틀라카엘렐은 그에게 권위를 주었다.
이 땅의 어느 토착신이나 군주도 줄 수 없던 절대적인 권위를.
틀라카엘렐은 한쪽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아샤야카틀의 약지에 껴 있는 터키석과 황금으로 장식된 반지에 입을 맞춘다. 돋을새김을 한 황금 칠면조의 형상이 틀라카엘렐의 입에 닿는다.
“나는 줄 수 있는 게 사죄뿐이라네. 자네를 위한 모든 전투와 전장에서 선두에 서겠네. 나의 충성을 의심치 말아 주게.”
“…얼마 뒤가 대관식이니, 동방에서 온 손님들을 그때까지 자네가 맡아 주게.”
무릎 꿇은 틀라카엘렐을 내다보던 아샤야카틀은 말한다.
“저들이, 강철로 된 배를 타고 왔다 하였나?”
“그래. 카스티야와 포르투갈의 선원들조차 두려움에 떠는 걸 보면 유럽인들조차도 만들 수 없는 함선이야.”
“저들의 총포도 유럽의 것보다 훨씬 강하고.”
“내 앞에서 수도 없이 과시했다네. 기백 명만으로도 도시 하나를 무너뜨릴 위력이었어.”
“그렇단 말이지….”
아샤야카틀의 눈이 빛난다.
“기대되는군.”
그렇게 다음 날.
“저희 보고… 대관식 맨 앞줄에 앉아 달라 청하셨단 말입니까?”
“대공 전하께서 바라시는 바가 그러하였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왕족도 뭣도 아닙니다. 이징옥 동지는 그저 해군 제독이고 저 역시 번역자 나부랭이입니다만….”
“전하께서 바라십니다.”
“저 선생님, 혹시 궁금한 게 있는데 공작 각하께 여쭤봐 주실 수 있을까요?”
“무엇인가?”
“아, 각하. 올리비에가 혹시 크리스티야노틀란 공작께서도 대관식에 참여하시는지 묻는군요.”
“….”
공작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올려 저택의 난간 너머로 보이는 피라미드―성당을 바라본다. 그 등성이를 성큼성큼 올라가는 작은 형상.
“나는 정복자다!”
“왕녀님! 제발, 내려와 주십시오!”
그 광경을 보고 잠시 말을 잃던 공작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답한다.
“당연히 참석해야 합니다. 그때까지…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진정시켜야겠지요.”
“수고가 많으십니다.”
“아닙니다. 항해 동안 저분을 제 대신 보살펴 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틀라카엘렐은 정중히 고개를 숙인 뒤 방을 나선다. 이징옥은 그 모습을 보고 읊조린다.
“어찌하여 대공이 우리를 국빈으로 대접하는가?”
“모르겠군요. 뭐가 어찌 되었건 이징옥 동지, 저희는 정식 사절단이 아닙니다. 저들에게 어떤 여지도, 약속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알겠네.”
과분할 정도로 성대한 숙소의 규모를 둘러보며, 두 사람은 한숨을 쉰다.
그렇다. 정식 사절이 오기 전까지, 그들은 그저 정탐꾼이니.
그저 손님으로서 대접받다가 돌아가 소련 사회에 이곳의 실태를 알리면 그만이다.
그렇게만 생각했다.
* * *
“지지 기반 확보 및 유지에… 차질이 빚어질 것 같습니다.”
“바빌로프 동지, 그렇게 길게 말씀하실 필요 없소이다.
의장 동지, 지금 낭떠러지입니다. 한 발짝 더 가면 동지는 정계 은퇴입니다.”
신숙주의 말에 ‘담배 횡령범’, ‘거짓말쟁이’ 트로츠키는 뭐라 반박도 못 하고 머리를 싸맨다.
이명민, 신숙주, 바빌로프, 그 외 기타 등등 트로츠키의 계파라 할 수 있는 이들이 차곡차곡 모여서.
“빌어먹을. 아메리카 간다고 괜히 내질렀군.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나?”
여기서 ‘이렇게’란, 아즈텍이 가톨릭을 받아들이고 카스티야의 봉신이 된 상황을 뜻한다.
말 그대로, 누군들 알 수 없었던 상황이다.
물론 문제는 그게 아니고, 트로츠키가 예고한 개척 사업이 급작스레 기약없이 밀려 버렸다는 것이지만.
“동지의 발표 이후로 조선이든, 만주든 기대감이 드높았습니다.
지금 조선과 만주의 뭇 농군이 한목소리로 트로츠키 동지를 연호하니 토지 분배가 어긋나면 그 인원이 전부 반대세로 돌아설 터입니다.”
“원산 역시 상황이 좋지는 않습니다. 다른 호재가 없다면 흔들거리던 정권 지지도가 갑자기 하락할지도 모릅니다.”
“제발, 다들 한 명씩만, 짧게들 이야기하게.”
“동지는 좆 됐습니다.”
“…이명민 동지, 아주 고맙네.”
트로츠키는 머리를 끙끙 싸맨다.
아예 밑도 끝도 없이 캐나다 쪽으로 개척선을 들이받아 버리기에는, 농민들에게 아메리카의 비옥하고 따뜻한 옥토가 어쩌고 약을 팔아 놨던 게 걸려서 안 된다.
그렇다고 또 남쪽의 캘리포니아 등지로 보냈다가 선주민 제국과 충돌하면 그 역시 골치가 아파진다.
서두르면, 어느 쪽이든 명백히 역효과가 온다.
“크흠, 제가 의견 하나 올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오.”
신숙주가 머리를 잠시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
“동지, 잠깐 해외로 좀 순방하고 계십시오.”
“…뭐?”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생각할수록 이것이 해답입니다.
비난할 사람이 없으면 비난도 사그라드는 법입니다. 동지가 없는데 동지를 욕해서 무얼 합니까?
게다가 인민위원회 의장 동지께서 직접 외교의 중대사를 펼치고 계시는데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 비난을 쏟아 내면 도리어 역풍이 불지 않겠습니까?”
“자네 말은….”
“어차피 동지가 몇 달 없어도 소련이 안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생각해 보니 마침 명분도 있습니다.
이제 저희가 유럽까지 진출했으니 중간 기착지들에 무선 통신 장비를 설치해야 하겠습니다. 통신이 안 되면 아메리카 진출도 어려우니 그를 위한 밑작업인 것이지요.”
신숙주는 트로츠키를 보고 환하게 웃는다.
“그러니 유럽까지 순방하면 좀 어떻겠습니까?”
서방견문록 (2)
보통 유럽에서 대관식을 치른다면 당연히 그 장소는 성당이다. 이러한 상식은 중부 아메리카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다른 것이 한 가지 있다면,
“허… 흐어어… 아직입니까?”
“반 정도 올라왔네. 기운 내게나.”
역시나 성당은 피라미드니, 귀빈으로 초대받은 이상 당연히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한다.
우에이 테오칼리(Huēyi teōcalli, 현재는 스페인어로 템플로 마요르라 불림)에서 가장 높은 주 피라미드의 계단은 인체 공학따위 엿이나 먹으라는 듯 가팔랐다.
헉헉거리던 로밀리가 위를 올려다보자 저 위쪽 두 개의 제단 위로 뻗은 쌍십자의 예수상은 그의 체력을 비웃는 듯 보인다.
“자네, 생각보다 체력이 별로로군.”
“매일 빼놓지 않고 운동하는데….”
…까지 이야기한 로밀리는 수십 년 동안 말을 타고 전장을 넘나들었던 이징옥에게 이야기하기는 부끄러운 수준임을 깨닫고 입을 닫는다.
심지어 이징옥은 케찰(Quetzal, 비단날개새과의 새) 깃털로 장식해 아즈텍식으로 꾸민 소련 국장을 등에 지고 걷고 있으니.
노인이면서 어떻게 관절이 남아나는지 성큼성큼 걸어 나가고, 올리비에는 그 모습에 혀를 내두르며 로밀리의 옆에서 신음성을 뱉었다.
그들의 앞뒤로 다른 아메리카인과 유럽인 귀족들 역시 지친 기색을 드러내며 계단을 올랐다. 그 사실에 위안을 느끼고 힘을 내자, 곧 정상이었다.
60미터는 족히 될 듯한 높이에 다다르자 테노치티틀란의 전경이 훤히 내다보였다.
도시는, 넓어지고 있었다.
물론 생산력이 폭발하고 인구가 늘기 시작하면 도시가 커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테노치티틀란이 다른 도시들과 달랐던 점이라면, 이곳이 호수 가운데의 간척지였다는 것. 습지를 개간해 만든 섬들 사이로 격자 모양의 도로와 운하가 뻗어 있다.
그 가장자리의 땅이 넓어지고 있다.
유럽에서 들어온 야금술은 무섭도록 빠르게 이 땅의 정경을 바꿔 놓고 있었다. 철기를 손에 쥔 신세계인들은 숲과 습지를 개간하고 황무지를 농토로 만들어 낸다.
이 호수가 모두 육지가 될 때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선생님, 저곳에 서면 될 것 같습니다.”
올리비에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자, 틀라카엘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옆에 선 후아나는 의젓하게 가만히 서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저 아이도 피라미드를 오르느라 탈진한 듯싶었다. 공주에게 무슨 수를 쓰려나 했더니, 공작의 비결은 바로 피라미드의 끔찍한 높이 그 자체였다.
어느 정도 대관식에 참석할 요인들이 저마다 자리를 찾아 도열하고, 저 수십 미터 아래에서도 기대감에 찬 군중들이 모여든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모두 들으시오!”
이제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비어 있는 옥좌 앞에서 외치는 것은 이번에 베라크루스의 주교로 새로 서임된 토마스 데 토르케마다라는 성직자다.
“주님께서 축복하신 이 성스러운 땅을 다스릴 적법하고도 유일한 지배자, 카스티야의 으뜸가는 봉신이자 멕시코 땅의 모든 교회의 보호자이신 틀라토아니 아샤야카틀께서 이 자리에서 기름부음받은 군주가 되시니,
모두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하시오!”
그의 말에 모두들 무릎 꿇고 절을 올린다. 동시에 유럽과 메시카의 악기가 섞여 작곡된 장중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성가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저 멀리 계단에서, 가장 늦게 천천히 걸어오는 자가 있다.
그가 두른 기나긴 망토 자락을 시종들이 붙잡고 뒤따르며, 수많은 깃발과 장대와 문장이 그 뒤를 잇는다.
푸른빛의 주단(綢緞)이 깔린 길을 걸어 대공은 주교의 앞에 가 닿는다.
그 역시, 무릎 꿇는다.
주님의 앞에 선 세속의 권세로서.
한낱 인간으로서.
“아샤야카틀 데 테노치티틀란.”
“…예.”
“그대는 메시카인, 토토나카인, 오토미인, 마자틀인, 그리고 다른 모든 족속들의 군주로서 법과 관습으로 이들을 다스릴 것을 엄숙히 서약하겠는가?”
“엄숙히 서약합니다.”
“왕권을 공정함과 자비와 정의로서 행사하며 언제나 신민들을 위하고 약자를 보호하겠는가?”
“그리하겠습니다.”
“주님의 법과 복음의 선언을 따르고 또한 보호하겠는가? 멕시코 땅의 모든 교회를 지원하고, 보호하고, 진흥하겠는가? 거룩한 사도좌가 대변하는 공변된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겠는가?”
“저의 영육(靈肉)을 모두 걸고서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대공의 맹세에, 토르케마다는 흡족한 표정으로 그 옆의 사제가 들고 있던 성유함에 손가락을 찍는다.
“그대의 손과, 가슴과, 머리를 성유로써 축성하노라.
솔로몬 왕이 제사장 나독과 선지자 나단에 의하여 기름부음받았듯이.”
대공의 이마로 축성된 기름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곧 그 이마 위에,
관이 씌워진다.
인간으로 무릎 꿇었던 자가 군주로서 일어난다.
“대공 전하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