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273
“신 또한 본래 건망증이 심하고 머리가 둔하여 함부로 조정의 높은 곳을 범하였으되, 이제는 연소하면서도 영명한 조신들이 폐하의 곁에 가득하니 이제 고향에 돌아가 노모를 봉양하고 작고한 부친의 제사를 돌보고자 합니다.”
“윤허한다. 그대에게 고향에 땅과 뽕나무를 내리니 지친을 봉양하는 데 힘쓰라.”
이렇게 하루 걸러 중신들의 사직과 윤허가 이어진다.
한편으로는 잇다른 사직이 곧 평화가 도래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기에 성화제는 굳이 그들의 낙향을 막지 않았다. 항간의 말대로 조정의 세대 교체가 필요하기도 했다.
부황 때부터의 오랜 측근들이 모두 낙엽처럼 스러져 곁을 떠나간다. 죽거나 너무 늙어 더 이상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어 간다.
얼마간 공백이 이어지겠지만, 나쁘지 않은 일이다.
황상은 다시 코밑으로 흐르던 피를 닦아 낸 뒤 용상에서 일어나 되돌아온다.
오늘만 하더라도 중신 둘이 낙향하였고 얼마 전에는 하나가 노사(老死)했으니 그 공백을 채우는 것은 황제여야 한다.
그러나 이 순간만 지나면 된다.
황후로부터 후사를 보고, 조정의 공백기를 버텨 내며, 어떻게든 시간이 지나면 정국이 안정화될 테니.
그렇게 다시 며칠이 지나고.
한계란이 죽었다.
성대한 장례가 치뤄졌으니, 공신부인(恭愼夫人)의 시호가 내려졌다.
괜찮다.
조금만 더 버티면….
강물이 흐르듯이 (2)
“…대명(大明)의 사절들이 대원(大元)의 카간 폐하를 엎드려 뵈옵니다.”
갖은 미사여구와 거창한 의례를 지나 내뱉어진 마지막 한 문장.
그 뒤로 공손히 읍(揖)하며 명나라에서 온 사신들은 예케 몽골 울루스의 카간 호루크다슨에게 예를 표한다.
그들의 숙여진 허리 뒤로 수많은 궤짝이 보화를 담은 채 옮겨진다. 비단, 서책, 산호, 금괴 등등이었다. 호루크다슨은 흡족하게 그 광경을 내다보며 사신들에게 위엄 있는 미소로 답한다.
주기적으로 카라코룸으로 올라와 예물을 바치고 ‘변치 않은 형제간의 우애’를 확인하는 사절들. 그 각각의 지위도 결코 낮지 않아, 하나같이 상서(尙書)니 시랑(侍郎)이니, 무슨 학사니 하는 거창한 직함들을 달고 있는 사족들이다.
주첨선이 살해당하기 이전과 같이 이어지는 이런 몽골과 명 사이의 외교 관계가 성화황제의 안정적인 치세를 몽골이 용인하는 주된 이유였다.
아니, 예물의 양만 생각해 보자면 오히려 주첨선이 보내오는 것보다 훨씬 극진한 태도를 보인다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주견심은 바보가 아니지….’
만일 하잘것없는 자존심 따위를 내세워 예케 몽골 울루스에 저항을 시도할 위인이었다면, 그가 북조를 무너뜨리기 전에 몽골의 기병이 앞서 남경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을 것이다.
주견심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한 가지는 몽골을 적대하여 다가올 수밖에 없는 패배를 기다리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적극적으로 고개를 숙여 중원을 재통일하고 안정을 되찾는 것이었다.
평시라면 사실 전자의 선택도 잘못된 것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몽골이 중원에 비해 압도적인 힘을 가진 것이 분명한바, 언제 카간의 마음이 바뀌어 명국을 무너뜨리러 올지 모른다면 차라리 맞서기를 택할 수도 있으리라.
허나 주견심은 몽골의 방책이 바뀌었음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명국이 몽골에 충분한 이득을 안겨 주기만 한다면, 굳이 힘을 들여 흡수하지 않는다. 굳이 무모하게 소련을 자극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주견심은 몽골에 숙이기를 택했다. 사직의 안위를 위해서.
‘중원이 괜찮은 황제를 얻었으니….’
이제 앞으로 한동안 명은 태평하리라.
호루크다슨은 그렇게 평가를 내렸고,
그는 틀렸다.
* * *
“몽골로 보낸 사절들은 지금쯤 도착했겠나?”
“소신이 보기에는 그러하옵니다. 허나 폐하, 지금은 옥체를 살피소서.”
정무에 대해 질문하는 황제의 말을 막고 난 환관들이, 문을 닫고 방에서 나가 버린다. 말 상대를 잃은 황제가 한숨과 함께 팔을 내밀자 늙고 주름진 손이 황제의 손목을 쥔다.
덜덜 떨리는 노인의 손이 황제의 맥(脈)을 살피니, 주견심은 내심 저 노인의 둔하고 두꺼운 피부가 어찌 사람의 기를 살핀다는 건지 의문이 생긴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의는 잠시 눈을 감고 그 미세한 맥동을 느끼며 무언가를 중얼거린다. 옆에서 조수들이 그 들릴락 말락 중얼거림을 받아 적더니, 어의에게 내민다.
진맥이 끝난 것이다.
“송구하오나 폐하….”
어의는 공손하게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말한다.
“간장(肝腸)부터 염통까지 성한 데가 없습니다. 옥체를 보전하셔야 합니다. 성상(聖上)의 일신에 대명의 사직이 걸리었으니….”
“이제 곧 황후가 회임할 것이다. 내가 회임시킬 것이다.”
주견심은 더 이상의 말을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짧은 담화 이후에 문이 열리고 내관과 궁녀들이 그 뒤에 따라붙는다.
“그러니 사직이 오직 나의 몸에 걸려 있다는 말은 과장이 심하구나. 아직은 나라의 근본이 바로잡히지 않았으니 내 어찌 육체의 소소한 안녕을 바라겠느냐?”
그것이 전부였다. 황상은 다시 집무를 보러 떠난다.
물론 이 모든 게 단순히 주견심이 업무 중독자라서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측근들이 대거 물갈이되고 있으니 당장은 어쩔 수 없다. 지금만 이렇게 몸을 혹사시키는 것이지 곧 있으면 안락한 세월이 찾아올 것이다.
본래의 역사에서도 그렇고, 지금 성화제의 마음속도 그렇지만, 그는 오랫동안의 과로에 지쳐 있다.
지난 수십 년의 세월을 오직 경태제와 홍치제에 대한 복수를 위해 다 바쳤다. 다시 그 이후의 시간은 복수의 마무리와 뒤처리를 위해 쉼 없이 달려왔다.
인간이 그렇게 오랫동안 하나의 집념만으로 달려올 수는 없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분명 부서지고 망가진 자다.
더구나 얼마 전에는 오랫동안 따랐던 한계란마저 세상을 떴으니 성화제의 마음도 이리저리 흔들릴 때였다.
‘쓸 만한 중신 몇몇을 뽑아 올리고 원자(元子)를 생산한다면….’
그러면 성화제에게도 진정한 휴식이, 생애 처음으로 어떠한 목적도 없이 유유자적하게 살아갈 나날이 올 것이다.
자신이 치유하고 완성한 제국을 굽어살피면서 흡족한 마음으로 여생을 보낼 수 있으리라.
그리 생각하자 가슴이 훈훈해지고 얼굴의 표정이 핀다. 계속 흐르는 코피를 닦고, 차가워지는 손발을 주무르면서도 이 모든 고통이 곧 가실 것이라는 생각에 기쁨이 차오른다.
그래, 얼마 안 있으면.
정말 조금만 더 기다리기만 하면.
그리 생각하면서 제신(際臣)들이 기다리는 태화전(太和殿)으로 발을 성큼 디딘다.
그리고 발아래로 허공이 날아드는 것을 느낀다.
…어?
뭔가 이상한 틈을 느낄 새도 없이 다리에서 힘이 풀리고 세상이 앞으로 크게 기운다.
대전의 차가운 마룻바닥이 무섭게 그의 얼굴로 달려들어 온다.
―쿵.
―폐, 폐하께서 쓰러지셨다!
―의원을 부르지 않고 무얼 하느냐? 다, 당장! 어서 사람들을 물려라!
기묘하다.
사람의 말소리가 말소리처럼 들리지 아니하고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그 뜻을 헤아릴 수 없는 소음으로 화(化)하누나.
아니면 마치 들리지 않는 원본을 따라 하여 희미하게 되돌아온 메아리처럼 몹시도 아득하고 공허하게 들려오누나.
팔다리는 마치 해파리의 촉수들처럼 흐물흐물하여 힘이 들어가지를 않고.
시야는 뿌예져 오는 것이 마치 우유 통 속에 세상이 잠기는 것만 같다.
천하는 어찌 될지, 자신의 육신과 삶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대한 근심과 걱정이 잠시 불티처럼 일었다가 훅 사라진다.
세상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마치 티끌처럼 허무하고….
마치….
….
.그날 조신들은 종잇장처럼 얇고 창백한 황제를 보았다.
더 정확히는, 황제의 넋을 담고 있었던, 황제라 불리었던 힘없는 고깃덩이를.
* * *
―다닥. 다그닥. 다득. 탁….
“끄, 으아아악!”
말도 혹사하면 쓰러진다.
북경과 카라코룸 사이를 오가던 이들은 그 사실을 아주 오랜만에 깨달았다.
미친 듯이 질주하던 말과 사람이 몇 번이나 땅바닥에 넘어지거나 구르는 것을 보면서 말이다.
“화, 황제가, 황제가아아….”
마치 실성한 듯한 사절들이 곳곳에서 혼잣말처럼 주절대는 것을 듣게 된 운 좋은 사람들은 기어코 중원에서 뭔가 일이 터졌구나 하는 직감을 얻을 수 있었고.
그럼에도 먼지 묻은 옷을 털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급히 내달리는 이들의 모습에서 그 심각성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며칠을 밤낮없이 달려 카라코룸으로 도달했을 때,
“황제가 급사했습니다!”
“…뭐?”
전달된 내용은 항간의 예상대로 충격적이었다.
항간의 뜬소문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소식을 전해 들은 호루크다슨은 잠시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당혹감에 빠져 있어야 했다.
얼마 전까지 사절을 보냈… 아니, 지금 여기에도….
“저, 저희는 금시초문입니다! 결코 숨기거나 하던 것은….”
“믿겠다. 저들은 북경에서 소식을 물어 오면 곧바로 전달하는 이들이니.”
북경에서 첩보를 위해 상시 대기 하는 연락선이 있다 면전에서 폭로한 격이지만, 누구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럴 경황도 없었다.
명국에서 파견된 사절들은 자신들의 황상이 승하했다는 소식에 장탄식과 눈물을 쏟으며 몸을 떨었다.
한참 동안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이어지고, 그를 겨우 진정시킨 카간이 물었다.
“북경의 사세는 어떠하던가?”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하던 세작들 역시 차분히 상황을 설명할 여유가 생긴 듯 입을 열었다.
“폐하, 명국의 황제에게는 원자가 없습니다. 허면 종친 가운데서 다음 황제가 나와야 할 터인데….”
당연히 죄다 고만고만한 놈들이다.
고만고만하지 않은 놈들은 명이 남북조로 갈렸을 때 헛바람 들어서 헛짓거리하다가 목에 절취선이 그어졌고, 고만고만한 놈 중 태반이 경태제와 홍치제의 편을 들었다가 역시 지난 3년 동안 목이 달아났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의 난리를 떠올리면서 딴 주머니를 차는 작자들이 하나도 없을까? 아니, 한둘로 그치기나 할까?
허나 그렇다 하더라도….
“명국의 다음 황제로 누가 즉위할지 조심히 살핀 뒤에 접근하라.”
명은 대국이다. 쉬이 무너지지 않는다. 호루크다슨은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바로 얼마 전까지 허리가 잘려 있었건만, 3년 만에 거의 완전히 봉합되지 않았던가?
지금은 조금 불안정한 상태일지 몰라도 이미 한 세기를 견뎌 온 제국이다. 결코 허무하게 허물어져 내리지만은 않을 것이다.
앞날을 장담할 수는 없지만 명이 무너지기는 결코 쉽지 않으리라….
아마도.
* * *
“트로츠키 동지, 지금 명국의 상황이….”
“전달받았네. 유자광 동지가 이야기해 주더군.”
서류들이 날아다니는 사이를 급히 뛰어다니며 에티앙블과 트로츠키는 대화를 나눈다.
―타타타타타타타타…. 팅. 타타타타….
사방에서 몰아치는 타자 소리가 사태의 급박함을 알려 주는 듯했다.
사무실에 들이치자마자 각종 전문가가 달려든다.
“인민 위원장 동지, 저희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립니다만 차기 황제로는 남경의 관리를 맡고 있던 초왕(楚王)이 유력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희는 의견이 다릅니다. 현재 남경의 권위를 줄여야 하는 상황에서 유력한 황족은 남경에 배치했을 리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또한 지금 당장 북경의 여론을 장악하는 것이 차기 황제로 올라설 가장 큰 조건이 된 만큼 머나먼 남경의 종친이 제위에 오를 여지가 있을지….”
맙소사. 명나라 황제가 죽었다.
소련에서 보기에 성화제는 조선에 칭제까지 허락했던 유연하면서 강단 있는 자였다.
거기에다 주첨선이 시행한 급격한 개혁책으로 인한 사회 불안을 적당한 복고주의 정책으로 무마시키면서 황권을 회복하는 안정적인 치세까지.
앞으로 두세 해만 더 있으면 중원은 완전히 평정될 테니, 그때쯤 되면 아예 이쪽에서 먼저 몽골과 같은 전면적인 경제 교류를 제안해 보자는 이야기까지 나오던 참이었다.
그 황제가 죽었다.
“현재 명나라의 종친 목록을 뽑아 왔습니다. 이 중에서는….”
“…그만.”
트로츠키가 손을 내젓자, 각 부서에서 충원된 중국 전문가들과 외교관들이 입을 다문다.
“다들 쓸데없는 짓거리들을 벌이고 있군.”
“그게 무슨 뜻입니까?”
“지금 명나라의 역사는 백 년 정도밖에 되지 않네. 주(朱)씨는 원래 그리 강고한 기반을 가진 가문이 아니라 지방 농군의 자식들이고.”
트로츠키가 머리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말한다.
“그러니 가장 우선해서 질문해야 할 것은 ‘주씨 중에서 누가 황제가 될까?’가 아닐세.
과연 지난 수십 년 동안 서로 죽이고 죽여 댄 주씨가 여전히 황성(皇姓)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트로츠키의 눈이 날카로워진다
그래,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명나라가 멸망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다음부터 질문해야 할 것은 이것이지.”
트로츠키는 자신의 지팡이로 바닥을 툭툭 두드리고는 방 안에 모여든 사람들을 하나하나 가리킨다.
벌컥, 문이 열리면서 뒤늦게 회의에 참석한 신숙주와 에드워즈까지. 트로츠키는 지팡이로 가리켜 보인다.
“여기 모인 사람들이 뭘 해야 할지.”
우리가 짠 세계의 틀이 단 2년 만에 뒤틀릴 수 있다.
소련과 몽골과 유럽이 세계를 나누어 통치한다는 대전략이 무너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세 세력은 서로 적당히 견제하되 전면적인 전쟁을 벌여서도 안 되고, 셋 중에서 소련이 주도권을 잃는 일도 없어야 한다.
소련의 지도하에 몽골과 유럽에서도 산업과 자본주의가 조금씩 자라날 것이고, 소련이 배치하는 바에 따라 그들 역시 세계 체제에서 나름의 일익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세계의 평화로운 정복.
“명나라는, 몽골의 텃밭일세.”
막대한 조세와 각종 수공예품을 바치는 명나라는 사실상 몽골 제국 내의 자치 정권이라 봐도 될 정도로 몽골에 크나큰 수혜를 안겨 주었다.
그 체제가 뒤흔들릴 때, 우리는 개입할 것인가? 오랫동안 조직적 기반을 마련해 왔던 유럽처럼 효율적이고 성공적인 개입이 가능키는 할 것인가? 새로운 황제가 안정적으로 안착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명나라는 붕괴할 것인가?
우리는 중국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소련은, 세계를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
이건 새로이 정립되어 갈 세계 체제에 대한 첫 번째 도전이다.
몽골과의 관계는 어떻게 유지할지, 1억 정도에 달하는 인구가 살아가는 중원에 어떤 새로운 질서를 세울지.
앞으로 우리가 내릴 답이 지금부터의 수 세기를 결정할 것이다.
트로츠키는 그렇게 경고한 뒤 방을 나섰다.
실무자들은 트로츠키의 말에 잠시 침묵에 빠졌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