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38
“그러면 활로를 뚫어야지 무얼 하느냐!”
착각.
양측의 정규군을 도성에서 물리고, 또 드러나는 무장세력의 준동을 엄금한 것이 일전에 안평과 수양이 맺은 화약(和約)의 내용이라 한다면,
“저기, 대역죄인 안평이다! 잡아라!!”
“우와아아아아!”
정규군이 아니고, 드러나지도 않게 조용히 곳곳에 숨은 검객(劍客)들에 대해서는 어찌 건드릴 수 있는 바가 없던 것이라.
그리고 일전부터 그러한 검객들과 연을 맺어 놓고,
그들과 호형호제(呼兄呼弟)하며 거리낌 없이 친분을 쌓고 교유를 이어갔던 이가 있었으니,
“사우당, 이제 어찌하면 좋을 것 같은가?”
“손자(孫子)도 십즉위지, 오즉공지(十則圍之, 五則攻之)라 이르지 않았던가? 자고로 머릿수가 많은 이는 그렇지 못한 이들을 에워싸서 치는 법일세. 저들을 운종가 방향으로 몰게. 한양에서 가장 넓은 길로.
그곳에서 모두 쳐죽일 걸세.”
저 비릿한 미소를 짓는 허우대 좋은 장부가 바로 사우당 한명회라 하더라.
안평이 작금을 호기(好機)라 여겨 수양이 알아챌세라 빠르게 군을 일으킨 것이야말로 군사를 씀에 가장 큰 부덕이었으니.
도리어 재빨리 전란을 일으키면 일으킬수록, 성 바깥의 병졸들에게 연락이 닿기 전에 싸움이 붙으니 성안에 칼 든 장정을 수두룩히 부리는 한명회와 수양대군의 편이 더 유리하였더라.
더하여 한명회가 비로소 몇몇 군세를 얻어 부리게 되니···
“레닌 만세!”
“공산주의 만세! 소련 만··· 크헉···.”
“이놈들은 기껏해야 어느 집 머슴살이하던 놈들이다! 저놈들부터 죽여!”
바로 한명회가 소련의 조직책을 죽여 그 패를 취하니, 그제야 공산주의자라는 이들도 한명회의 말에 속아 부림당함이라.
한명회로서는 위기시에 동원할 인력을 얻음과 더불어 도성 내의 불온세력을 쓰고 버림이 일석이조의 효과를 낳으니, 참으로 기책이더라.
이렇듯 싸움이 이어질 때마다 안평의 군세가 지치고 파(破)해지기를 반복하여··· 이것이 바로 적을 모르고, 저 스스로에 대해서 또한 몰랐으며, 병법에 무지했던 안평의 맹동(盲動)에서 비롯한 소산이라.
한명회가 슬금슬금 한길 쪽으로 군사를 물리는 것도 모른 채, 그쪽에 싸움에 서툰 공산주의자들을 죽으라고 놔둔 것도 모른 채, 안평은 활로가 트였다 생각하고 거침없이 병사들을 몰아붙여 나아갔다.
그렇게 좁은 길목에서 빠져나온 안평과 군사들이 사방을 둘러보자,
온통 수양의 사람들이다.
“젠장···.”
필마에 올라타 높이서 그 형세를 지켜본 안평대군의 입에서는 절로 욕지거리가 나왔다.
속았다, 바보같이.
수양에게? 아니면 저 앞에서 알짱거리는 족제비 같은 한명회 놈에게?
아니다. 제 궁리 속에서 제 스스로를 속였다.
“어리석었던 한 찰나가 백 년의 대업을 망치는도다···.”
그리 속삭이며 고삐를 쥔 손을 피가 날 정도로 움켜쥔다.
허나 분기를 드러낸다 하여 달라지는 바는 없고, 그저 시시각각 달빛을 튕기며 춤추는 칼날들이 점차 자신에게 가까워 올 뿐이다.
그러다 안평은 문득 이상한 점을 느낀다.
괴이한 일이로다.
사람이 타고 나기를 두 다리에 두 팔을 달며, 어쩌다 그보다 적게 태어나는 이들이 있을 뿐일진대.
이 내 옆구리에 자라난 시퍼런 칼날은 무엇인고?
···아.
살과 날이 쓸리며 칼이 빠져나가자, 울컥울컥 피가 쏟아지며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러나 불 밝은 곳에서는 도리어 가장 밝은 별만이 또렷이 보이고, 눈이 좋지 아니한 이에게는 가장 커다란 글씨들이 도드라지는 법처럼, 흐려가는 의식 속에서 허우적대는 안평에게는 그 한 몸 빠져나갈 퇴로만이 분명히 드러나 보인다.
“흐럇!”
어두운 밤의 혼란 속에서 누구 하나 제대로 안평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이가 없었다.
그저, 행색을 보아 중한 인물이겠거니 하고 뒤쫓았으나 실로 사력을 다하는 이를 생사람이 좇을 수는 없었는지 결국 중도에 놓치고들 말았다.
피로 된 선을 땅에 흩뿌리며, 다만 한 줄기 넋을 보채며 이 몸에 붙어있으라 다잡던 안평은, 마침내 서대문을 나가 어느 사찰에서 정신을 잃었더라.
그리고 깨어났을 때는 완연한 역신(逆臣)이 되어 추포되었더라.
곧 역적은 한양 복판에서 온몸이 찢겨져 죽으니.
드디어 한양에 임금이 한 사람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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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해동 땅에 감히 군왕을 참칭하는 이는 금성대군 이유(李瑜)뿐이니, 선왕을 참살한 역적 용(瑢)을 주살하고, 난을 평정하신 금상의 덕을 어찌 칭송치 아니하겠습니까?”
“축하드리오. 허나, 조선반도의 서부에서 이리 험준한 동쪽 끝으로 넘어오는 수고를 거치시고 전하는 말씀이 새로운 국왕의 즉위뿐만은 아니라 생각하오만.”
“조선···반도?”
“아, 미안하오. 우리가 조선땅을 지리학적으로··· 아니 지리지에 적을 때 쓰는 말이오. 신경쓰지 마시오.”
“아닙니다. 이국에서 새로움을 배워가니 즐거울 뿐입니다. 자고로 선비라면 어디서든 저가 모르는 것을 배울 궁리를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옛사람 또한 삼인행필유아사언(三人行必有我師焉)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허허, 뿔이 달린 것은 이빨을 갖지 않는다(角者無齒) 하였으니 조선국의 사절 되실 정도의 고매한 인사가 이런 사소한 지식 하나하나에 연연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하···하하. 먼 이방에서 오신 분임에도 이리 문자를 잘 아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얕은 재주를 익혔을 뿐이오. 어찌 제가 예부터 충신과 효자가 많이 났다는 이 땅의 선비와 비길 수 있겠소?
물론, 한문 하나 제대로 못 쓰는 지도층들도 이 근방에서는 꽤 보기는 했다만 그는 이곳 원산이 귀국의 수도와 멀리 떨어진 산촌이라 그런 것 아니겠소?”
놀라나? ···좋다, 놀란다.
이 개새끼, 어디서 기선제압을 하려고 들어?
트로츠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바로 옆방에서 대기 중인 에티앙블에게 감사의 시간을 가졌다.
지금도 그의 왼주머니에서 잠자고 있는 에티앙블 저, ‘실전압축 고사성어 모음집’이 아니었더라면, 저 동양 인텔리겐챠가 하는 말에 찍 소리도 못하고 야만인 취급당할 뻔했다.
아무튼, 눈앞의 능구렁이 사절은 언제 자신이 당황했냐는 듯 태연한 얼굴로 다시금 말을 꺼내온다.
“제가 전하의 명을 받아 이곳으로 온 연유는 거창하지 아니하옵니다. 그저 양국 간의 친교와 선린이 더욱 돈독해지고 이 땅에 다시금 큰 싸움이 일어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뿐이 아니겠습니까?”
“아름다운 말씀 감사하오. 하지만 싸움 없는 평화를 원산이 바라더라도 이미 조선국에 칭왕자가 둘이나 되는지라 전란이 끊이질 않는 듯하오?”
트로츠키의 비꼼에 한명회는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인다.
“지금 간신배들이 대군 하나를 꼬여내어 불측한 짓거리들을 저지르고 있으나 이 또한 곧 순리대로 평정되지 않겠습니까?
허나 순리라 하여 세상만사가 그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며, 그 또한 성정이 어질고 인의를 행하는 이들이 힘써 이루기 때문에 순리가 아니겠습니까?
하오니, 어찌 어찌 역리를 따르는 이들을 가만히 둘 수 있겠습니까? 원산국과 트로츠키··· 전하?”
“의장이라 부르시오. 그리고 국호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이오.”
“트로츠키 의장께서 저 역적 모리배들과 단호히 적대하신다면 어찌 모든 일이 옳게 흘러가지 않겠습니까?”
1년. 전쟁 이후로 1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사실, 대신들이 유배를 떠난 이후로 조선은 이미 전란을 예비하고 있는 상태나 다름없던 터.
이 원산이라는, 멀고도 이질적인 이들을 신경 쓸 여유 없이 눈앞의 적들을 쓸어버리지 않으면 제 목이 날아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작금에 와서 안평이라는 한 축이 무너져 내리며 내란이 경향(京鄕) 간의 싸움으로 굳어졌으니 어찌 속내도 모를 이들을 옆구리에 끼고 대업을 논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한명회라는 인사가 굳이 이 원산 땅에 사절을 온 것은 다름아닌 확인을 위한 것이었다.
원산을 꿰찬 저 이방인들의 정체는 무엇인지, 저들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저들이 종사(宗社)에 위협이 되는가?’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나머지는 그저 곁가지일 뿐.
만일 이 소비에···뭐시기가 금성의 무리와 손을 맞잡았다 한다면, 진즉에 주상 전하와 안평 모두 광화문 앞에 효시되어 있었으리라.
그러니 이들이 당장 반졸(叛卒)들과 손을 잡았다 생각하기는 아직 어려웠다.
허나, 추후 이들이 이빨을 드러낼 조짐을 보일는지, 아니면 잠자코 조선국과 화의를 이어갈 것인지, 그 사안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특히 한명회가 국경을 넘어오면서 보았던 그 숱한 광경들, 이 낯선 족속들이 원산을 넘어 다른 마을을 평정하고 주인 노릇하던 모습들을 보았을 때, 이들에게 확장에 대한 욕망이 없지는 않은 듯하였다.
그렇다면 그 야욕의 크기는 얼마만 할 것인가? 이들에게 그 야욕을 충족시킬 역량은 존재하는가?
이렇듯 질문들을 한 보따리 싸들고 온 한명회의 앞에, 트로츠키와 인민위원들이 있다.
그들이 답을 줄까? 아니면 다른 곳에서 대답을 찾아야 할까?
둘 다 아니다.
그 대답은 한명회가 만들어야 한다.
질문은 ‘원산은 내란에 개입할 것인가?’, 그리고 ‘원산은 조선을 침략할 것인가?’. 이 두 가지.
한명회가 만들 대답은 오직 하나.
‘아니오.’
이들을 압박하기 위해, 한명회는 슬슬 가지고 있는 패를 되새기며, 또 상대의 손에 들린 패가 무엇일지 가늠했다. 그러자 문득 사소한 궁금증이 든다.
이 소비뭐시기는 대체··· 어떤 나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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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판 (3)
한명회는 쭉, 탁자에 둘러앉은 이들의 면면을 지켜본다.
얼굴빛이나 생김새도 퍽 다르게 생겼으나, 이제 다들 조선말도 유창하고 특히 이들의 우두머리라는 저 투로추키라는 자는 경전를 들먹이더라도 대강은 알아들으니··· 크게 이질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 루네, 에치앙불? 인가 하던 그 작자가 가르쳐준 것이리라.
다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에서 갑작스럽게 자신과 저들 간의 심대한 차이를 지각하게 된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심지어 한명회는 저들의 국명조차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지 않은가?
초반에 저들을 기선제압하려는 시도는, 투로추키 의장이란 자가 성공적으로 받아쳐 내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도리어 저들이 조선과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데 비해, 한명회 자신의 원산과 소비에··· 연맹, 그리고 저들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할 뿐.
무지는 공포를, 공포는 다시 압박감을 안긴다.
허나 이대로 회담이 이어질 수는 없고. 또 이대로 끝마쳐져서도 아니된다.
어디까지나 한명회의 목적은 저들을 압박하고, 원산의 세력이 전란 동안 경거망동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아내는 데 있으니만큼 더더욱.
원산에서 한양까지는 도보로 열흘도 채 걸리지 않는다.
이들의 저의가 의심스럽다면, 주상 전하와 한명회 자신, 그리고 중앙군은 뒤통수가 불안하니 발목이 묶여 제대로 난을 진압할 수 없으리라.
그러니··· 이제 빙빙 돌아가는 미사여구도, 서로에게 별 의미 없는 소리를 던지며 의중을 떠보려 애쓰는 것도 관둘 때가 왔다.
이제는 정공법으로 치고 나가야 할 때.
한명회는 우선 운을 띄웠다.
“바로 작년까지만 하여도 원산현은 조용하고 궁벽한 어촌이었거늘, 이제 와서는 이리 번창하는 별천지가 되니 그 물산과 국력이 짐작조차 되지 않습니다.”
“별 말씀을 하시는구려. 오히려 우리 소련 입장에서는 조선의 빼어난 문명과 문화, 철학··· 아니 성학(聖學, 성인의 학문. 여기서는 즉 유학을 이른다.)에 대해 언제나 더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소.”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이 신이한 문물들이며, 이 거대한 선박이며···
또한 무엇보다도 작년에 병졸 1만여 명을 몰살시킨 병장기들이며.
우리 조선국이 원산에 대해 참으로 모르는구나, 싶습니다.”
순간, 트로츠키의 얼굴근육이 굳었다가 곧 바로 풀린다. 그러나 한명회는 그 짧은 순간의 요동을 잡아냈다.
천연덕스레 폭탄 발언을 쏟아낸 다음, 한명회는 한가로이 소련 인사들의 반응을 훑어본다. 순식간에 주위의 공기가 팽팽하게 긴장한다.
경악, 경계 등등··· 이렇게 쉬이 감정들이 읽히다니, 투로추키 의장이라는 작자를 빼고는 위정자로서 있기엔 꽤나 어수룩한 이들이 많은 듯싶다.
화의를 청한다며 어째서 병장기의 이야기를 꺼내는가? 어째서 조선측에는 학살에 가깝던 지난 전투를 다시금 언급하는가?
인심이 좋은 한명회로서는 그 의문을 곧바로 해소해주는 아량을 베풀어야 하리라.
한명회가 다음에 내뱉을 단어를 고르고 고르는 동안, 상대방 편에서 다소 다급히 말을 걸어온다.
“···원산은 우리 연맹의 한 구성국일 뿐이오. 부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이라 불러주시오. 모두 부르기에 힘들면 줄여서 소련이라 하여도 좋소.”
“송구하옵니다. 제가 이국의 문화에는 아직 익숙치 않은지라···.”
“···.”
허나 투로추키라는 자의 입에서 나온 말 또한 사소한 트집잡기. 그는 잠시 입을 다문 채 탐색하듯 한명회의 면면을 살펴보고 있다. 어떻게든 반격의 여지를 찾아보는 것으로 보인다.
어허, 이미 대세가 기울었거늘.
그렇다면 이쯤에서 결판을 내야 하리라.
“저는 단순히 조선국의 신하라 잘 알 수는 없지만서도, 그리 많은 수효의 군졸을 적은 이로도 일당백에 물리치도록 하는 병기라니···
감히 상국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논하기는 어려우나, 이를 전해 듣게 된다면 대명(大明)에서도 참으로 크게 관심을 보일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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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트로츠키는 한명회의 속내를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인민위원들도 비로소 그 말 속에 담긴 날카로운 뼈를 알아차린 듯싶었다.
로의 표정이 굳는다. 블레어는 등뒤로 주먹을 꽉 쥐고 놓지 않는다. 베순은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멈췄다. 바빌로프는··· 데리고 오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저, 개자식이 하려는 말은, 너무나 분명하다.
‘중국이 너희를 가만히 둘 성싶으냐?’
지금 중국대륙을 다스리는 왕조는··· 밍(Ming, 明). 조선어로는 명나라.
중국학자들에 따르면 이 시기 중국은 북방민족에 대한 패배와 갑작스러운 황제 교체 등으로 혼란스러울 참이었다. 조선 옆에 작은 종기처럼 붙어있을 뿐인 소련에 영향력을 투사할 여유가 남아있을지는···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허나, 초기 명 왕조의 중국은 조선을 몹시 경계하고 견제하였다 한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제하고선 가장 생산력이 높고 강력한 지역이, 베이징과 지척에 자리잡은 이들이, 북방의 이민족들과 손잡고 제국을 흔들까 염려한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눈에 소련은··· 조선에 대한, 더 크게는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비칠 수 있다.
‘중국의 황제가 우리를 정벌하러 올 것이다.’
‘한족 제국에서 수십 만의 단위의 대군이라도 몰고 온다면, 소련으로서는 견딜 재간이 없다.’
막 조선에 도착했을 때부터, 주화론자들이 간절하게 외치던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굳이 그 소리를 고장 난 레코드마냥 반복하던 데는 이유가 있다.
중화제국의 침공이란, 정말 버틸 수 없는 재앙이니까.
그렇기에 한명회의 은근한 협박이 소련의 인민위원들에게 가지는 무게는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수준이었다.
조선이라는 국가가 들고 나올 수 있는, 그 무엇보다도 실질적이고 치명적인 협박이다.
중국.
그것은 국가가 아니다.
그 자체로 대륙이며, 하나의 세계다.
소련에서 대략적으로나마 산출해낸 명나라의 현재 인구는 약 1억명. 세계의 대여섯 명 중 한 사람은 중국에 살고 있다.
소련은 세계와 싸울 수 없다. 고작 조선의 자그마한 소도시 하나를 손에 쥐고서, 중화세계에 거슬러 가면서까지 살아남을 수는 없다.
‘소련은 세계와 싸울 수 없다.’
그 한 문장에 생각이 닿자 트로츠키로서는 과거를, 아니 이제는 사라졌을 머나먼 미래를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구(舊) 소련, 모스크바에서 오갔던 그 기나긴 회의들···.
독일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폴란드에서는 반소련파 쿠데타가 발생하고, 영국은 갑작스레 일방적인 국교 단절을 선언하던 그 때.
그 순간들이 가져다주던 뼈저린 충격과 공포. ‘고립’이라는 그 짧은 한 단어를 입밖에 내뱉기 두려워하며 회의실의 모두가 절망에 빠져 있던 모습.
심지어 그 스탈린도, 그 스탈린조차도! 차갑게 굳은 절망을 감출 수는 없었다.
소련은 세계와 싸울 수 없다. 소련은 세계로부터 홀로 고립되어 말라죽을 수는 없다. 조선에 오기 전에도 그럴 수는 없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트로츠키의 표정이 경직되어가는 모습을 보며, 저 한명회라는 인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공손한 미소를 띠고 식탁 위에 놓인 투명한 사탕을 신기해하며 살펴보고 있다.
교활한 새끼.
“···귀국과의 우호관계 유지는 언제나 우리 소련의 최우선 목표라 할 수 있소. 그러니 중국의 입장에서는 그저 사이좋게 서로 사귀며 문물을 교류할 나라가 새롭게 늘어난 것이 아니겠소? 소련의 등장이 모두에게 이로운 일로 다가가기를 바라오.”
“하하하, 이리 아량이 넓고 배포가 큰 임금께서 치세하시니 어찌 천하가 태평치 않겠습니까?”
“나는 임금이 아니오.”
“그러하다면 누군가의 신하입니까?”
한명회의 눈빛이 달라진다. 조선에서 오랜 기간 있어온 논의, 원산은 더 거대한 세력의 선발대인가? 원산에 건국된 이 소국은 조선을 삼키려는 대계(大計)에 있어서 전초기지일 뿐인가? 그 질문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문제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슬슬 고개를 저으며 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