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87
농민들이 자기가 살던 땅과 집과 벗하던 이웃들을 버리고 떠도는 일을 막을 수 있었다.
그저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늘어져 잠에 들던 농민들에게 가혹한 근대의 노동을 강요하는 과정이 보다 완만하게 이뤄질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일본에 대해 결정한 바는 폭탄과도 같습니다. 그 와중에 일본이라는 세계가 얼마나 크게 망가질지··· 그 안의 사람들은 얼마나 고통받을지···.”
“바빌로프 동지, 진보가 언제나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감내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걸 감내하는 것이 우리가 아니니 그렇지요···. 고통받는 건 죄 없는 일본의 인민들이 아닙니까?”
“···괴롭더라도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더 해줄 말이 없어 그렇게 마지막 문장을 던진 뒤, 마이어 역시 목례하고서 대회의장을 떠났다.
바빌로프는 혼자 남았다.
새삼, 처음에 트로츠키가 지원했던 ‘원산유지파’의 주장이 떠오른다. 지금의 작고 고요한 공동체, 20세기에서 온 사회주의자들만의 작은 마을을 유지한다. 그렇게 평화롭게 생존한다.
소련이라는 이름이 역사 속에 묻혀 사라지든, 그들 또한 조선인으로 녹아서 흩어지든 신경 쓰지 말고.
소련이, 소련인들이 그런 조용함을 택할 수 있는 순간은 지나갔다. 그들은 한참 전에 루비콘 강을 건넜고, 소련과 조선은 하나의 국가처럼 전국토의 근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앞으로 일본을 격변시킬 것은 기정사실이다. 만주 또한 조선과 소련의 협업 아래 개발되고 있다. 어쩌면 중국과 몽골 또한 언젠가 이 무시무시한 변화의 파도를 마주할지 모른다.
소련인들은 변화를 택했으니, 이제 어디로 튀어나갈지 모를 미래를 마주하는 수밖에···
하지만 그 선택의 자리에 없었던 이들에게 변화의 결과를 강요하는 일은 옳은가?
···그것이 설령 ‘역사의 진보’를 가져온다 하더라도 말이다.
바빌로프는 쉽사리 답을 내리지 못하고 빈 회의장을 서성일 뿐이었다.
함흥.
바빌로프는 이곳에 와 본 적이 없었다.
부산에서 경부선을 따라 경성으로, 경성에서 다시 경의선을 타고 신의주까지.
조선 곳곳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종자를 수집했지만 앞서 말했듯, 이 조선반도를 관통하는 얄다란 철도 한 가닥에 의존해 그 부근을 거닐었을 뿐이다.
함흥은, 그 루트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일본 관광업체가 뿌린 홍보용 책자에서 적혀 있기를 화학공업과 중공업단지가 크게 육성되어 번성하는 도시라고 나타나 있었다.
곳곳에 공장들이 세워져 일본이 일으킨 조선 근대화의 찬란한 성과를 드러내 주는 장소라고.
아마··· 그 선전대로 조선인들의 생활수준이 어느 정도 괜찮았다면, 함흥의 모습은 지금 그가 바라보는 것과 비슷했을지도 모르겠다.
우마차 수십 대가 비린내 나는 정어리들을 싣고서 움직인다. 그들이 작업장에 닿으면 정어리들은 유기 비료로 간단히 가공되어 조선 곳곳에 뿌려진다.
그 너머로는 아직도 세워지고 있는 화학비료 공장이 눈에 띄며, 그 근방으로 여타 기술이 덜 필요한, 또는 소련에 이미 어느 정도 기술이 갖춰진 산업시설들이 즐비하게 이어져 있었다.
허허벌판 위로 새로이 건물들이 올라가고 사람들이 시끄럽게 외치는 소리로 와글거린다.
일본제국의 통치하에 있던 조선에서도 정어리가 많이 잡혔다. 이들이 원산과 함흥 일대에서 가공되었고, 마찬가지로 함흥에서 질소비료가 생산되었다.
정정하겠다. 책자 내용과 비슷한 것이 아니라 똑같았다.
왜냐하면 소련이 일본제국의 개발계획을 그대로 가져다 15세기 조선에 적용했기 때문이었다.
기적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니, 바빌로프는 무심결에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조선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머나먼 곳에서 환청처럼, 바빌로프는 기억 한 구석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듣지만 무시하려 애쓴다.
그러나 소리는 계속 들려온다.
곧 15세기의 함흥 위로 500년 뒤의 정경이 겹쳐 보인다.
///
-“그라즈다닌(гражданин, 시민) 바빌로프, 후산(釜山)의 정경, 이 나라가 주는 정취는 어떠십니까?”
부산항에서 내리자마자, 바빌로프는 흥청거리는 만찬자리에 며칠씩이나 참가해야 했다.
‘세계적 식물학자이자 유명한 탐험가’에 대한 입바른 칭찬과 아첨이 끝없이 이어지는 속에서 현기증이 느껴졌다.
이 사람은 어디에서 광산을 운영하는 이노우에 씨, 저 사람은 후지와라 씨인데 또 어디어디서 무슨무슨 은행을 운영하고··· 그런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던 정보들이 마구 쏟아졌다.
이 중 바빌로프가 무얼 연구하는지 진정 관심있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그저 저들은 유명인사를 모셔두고, 나중에 인생의 트로피처럼 오늘날의 경험을 써먹기 위해 그를 장식 삼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를 에스코트하겠다며 나와서 저 뻔질거리는 미소를 짓는 다무라인지 뭔지 하는 양반의 물음에 답할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혹시, 조선에 조선인은 인력거꾼밖에 없습니까?”
“네? 죄송하지만 제가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여···”
“아닙니다. 제 일본어가 많이 서투른 듯합니다. 개의치 마십시오.”
어리둥절하는 다무라에게 얼버무린 뒤, 바빌로프는 작게 한숨을 쉰다.
지금껏 그에게 부산이란, 그리고 조선이란 그저 허영심 많은 일본인 부호들과 아첨쟁이들이 기름진 프랑스 정찬을 먹으며 서로를 과시하는 만찬장일 뿐이었다.
그 와중에 만난 조선인은 벨보이와 웨이터, 그리고 인력거꾼뿐이었다.
“저는 급히 열차를 타고 경성으로 향해야 하니···”
“아,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선생님께 실례를 범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다행히 눈치는 있었는지, 다무라는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자리를 빠르게 비킨다. 네오 르네상스 풍으로 지어 놓은 성대한 역사 근처로 자동차와 인력거가 얽혀 부지런히 거리를 쏘다녔다.
바빌로프는 수백수천의 발걸음 소리가 또각또각 울리는 역사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
“바빌로프 동지, 정말 위대한 성과가 아닙니까? 철도입니다! 15세기에, 저희가 철도를 건설해냈습니다! 제임스 와트가 태어나기까지 거의 300년 전에 말입니다!!”
“이게 다 소련인들과 조선인들의 노고 덕분입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안내를 맡은 건설현장 감독 동지가 흥분에 차 말하니, 바빌로프는 고개를 끄덕인다.
바빌로프가 ‘함흥역’(이라고 하기에는 지붕도 없는 플랫폼이지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처럼 장진강의 댐 건설 현장을 순시하기 위해 모인 이들이었다.
그들 외에 열차에 오르는 건 대부분 건설자재를 옮기는 인부들이다.
곧 무어라 소리치는 구령들이 들려오고 종소리가 울려 퍼지니 육중한 열차가 몸을 움직인다.
콘크리트, 철강, 그리고 사람들이 이 기다란 강철의 뱀 위로 실어 날라진다.
창가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니, 선로와 철마 사이의 덜컹거림이 두개골로 전해진다.
이내 창밖의 풍경이 전속력으로 후퇴한다.
///
“뭘 그리 창밖만 물끄러미 바라보십니까?”
“아··· 예?”
“반갑습니다. 신문에서 뵈었는데, 이렇게 유명인사를 운 좋게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창밖을 바라보다, 갑자기 맞은편에 앉은 청년이 불러오니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린다.
잘 다린 양복, 신경질적으로 깔끔하게 다듬어진 머리털과 콧수염. 이런, 또 그렇고 그런 인간이다.
갑자기 열차 일등석의 소파조차도 불편하게 느껴진다. 일본과 조선을 오가면서 괜히 친한 척하는 허영쟁이들을 몇 번이나 마주쳐야 하는지···
“죄송하지만, 제가 일본어가 서툴러서 빠르게 말씀하시면 이해가 어렵습니다.”
“아 일본 밖에서 오신 분께 실례를 범했습니다. 그냥 박(朴)이라고 부르십시오.”
“만나서 반갑습니다, 박 상(さん).”
이름을 불러주자 황송하다는 듯 만족스레 고개를 까딱인다. 바빌로프가 속으로 한숨을 쉬는 것도 모르는 채 ‘박 상’은 바빌로프에게 말을 걸어온다.
“조선에는 처음이시겠죠. 어떻습니까? 그래도 나름 그럴 듯하지 않습니까?”
이 비슷한 질문을 수십 번은 이미 받아 보았노라고 쏘아붙일까 싶었으나 곧 바빌로프는 ‘박 상’의 이름을 입속에서 굴려보다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일본인이 아니시군요.”
질문도 그 뉘앙스가 다르다.
일본인 다무라는 그에게 조선이 주는 정취를 물었다. 이곳은 그에게 관광지이고 덜떨어진 지방이니까.
박은 그에게 조선이 ‘그럴 듯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조선이 유럽에서 온 소위 ‘문명인’의 눈에 들 만한 곳인지, 인정받고 싶어한다.
“맞습니다. 저는 조선에서 나고 자란 조선 사람입니다.”
역시나.
“당신이 제가 처음으로 대화를 나눠보는 조선인입니다.”
“아··· 안타깝게도 다른 조선인들이 당신과 대화를 나눌 정도의 수준이 되지 못했나 보군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하하, 에둘러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조선인을 제대로 겪어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제 지인인 기무라 상께 듣기로는, 조선 농민이 공장에 취직하면 꼭 부품이나 기계 같은 걸 도둑질한답니다. 그런 놈들은 순사를 불러서 흠씬 패 줘야 정신차린다더군요.”
처음 제대로 대면해보는 조선인이라 반가웠건만, 코웃음을 치며 제 민족을 흉보는 저 남자는 대체 뭐란 말인가? 순간 당황하여 바빌로프는 되묻는다.
“그것은 일본인 공장장의 일방적인 폄하가 아닙니까? 당신이 보고 느끼는 조선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방인인 저는 아직 조선에 대해 잘 모르지만 말입니다.”
“아··· 제가 보는 조선 말씀이시죠.”
박은 일찰나 표정에 그늘을 드리우더니, 재빨리 화장하듯 얼굴에 미소를 덧바른다.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총독부가 내는 통계가 무엇보다도 정확히 현실을 보여줍니다. 숫자는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통계 또한 조사자의 관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숫자는 누가, 어떻게, 무엇을 세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까? 일본인이 내는 숫자보다도 조선인의 눈이 더 맞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조선인의 눈 말입니까?”
바빌로프의 말이 추궁처럼 이어지자 박은 약간 울컥한 듯이 말한다.
“조선인의 눈이 맞았더라면 조선이 지금 남아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게만 이야기할 수는···”
“아닙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야만 합니다. 조선인의 눈은 틀렸고 일본인의 숫자가 옳았습니다. 대한황제는 일본천황께 나라를 양위하였으니 옳은 것이 틀린 것을 이기고 문명이 미개를 이긴 것 아니겠습니까?
무지렁이들의 눈으로 무엇을 알 수 있겠습니까?”
박이 몰아세우자 바빌로프 쪽에서도 자연히 목에 힘을 주게 된다.
“그 ‘무지렁이’들이 농사 지은 쌀로 일본이 먹고 살지 않습니까? 당신 또한 같은 조선인이면서 말씀이 가혹하십니다. 배움이 짧아 낯선 세상이 어려운 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이야기를 꺼내며, 바빌로프는 순간 조선에 온 뒤로 내내 억눌러왔던 화가 비져 나오는 것을 느낀다. 박 또한 바빌로프의 태도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얼굴빛이 차갑게 변한다.
“당신이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과자도 조선 인민들의 노동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까?”
“이건 화과자입니다만.”
“빈정대지 마십시오. 당신의 노동으로 부리는 사치도 아니면서.“
“가망이 없는 이들이라면 마땅히 땀이라도 흘려 사회에 봉사해야지요.”
“사회에 봉사한다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무슨 봉사를 하고 있습니까?”
“일본이 이 나라를 계몽시키는 사업을 돕고 있으니 마땅한 봉사를 행하고 있지요.”
그 말에 바빌로프는 순간 가슴속에서 구역감 같은 경멸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래, 조선인이 그와 같은 일등석에 타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반역자라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으나 차마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그러나 표정만으로도 바빌로프가 하려던 말을 눈치챘는지 청년은 고개를 획 돌린다.
분기가 치밀어 오른 바빌로프 또한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폐허 같은 민가 사이로 자기 몸무게만 한 쌀가마니를 이고 가는 노인이 보인다.
저 노인의 등허리가 이 일등석의 평안을 지탱하고 있으니,
갑자기 바빌로프는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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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오기까지 조선은 미개와 궁핍으로 가득하지 않았습니까?”
감독은 바빌로프의 맞은 편에 앉아 떠들었다. 아마 여기서 인민위원인 바빌로프의 의전서열이 가장 높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조선을 계몽시키고 있습니다.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그의 눈동자는 확신 속에서 빛났고, 그 머릿속에는 이미 ‘미개’와 ‘궁핍’을 일소한 새로운 조선의 모습이 반짝이는 듯했다.
깊은 산을 뚫고 달리는 열차는 비록 경사 때문에 엉금엉금 기어가는 듯했지만, 그것이 싣고 있는 인력과 물자를 생각한다면 이 지구상에서 가장 효율적인 육상 운송수단이었다.
첩첩산중을 뚫고 달려가는 이 열차야말로 문명의 승리인 것이다.
···그러나 이 철도를 세우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했는지 바빌로프는 안다.
구리는 조선에서 직접 채굴하기도 했지만, 일본에서 많이들 수입해왔다.
갑작스레 늘어난 일본의 상선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빌로프는 알고 있다.
누구도 저 넓은 동해를 건너는 험난한 여정을 반기지 않는다. 특히 정크선 밑바닥에서 내내 노를 젓는 고통스러운 일을 제정신으로 맡으려는 사람은 없다. 원래 해적질이 생업이 아니라면.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상선이 늘어났다. 한편으로 조선에 오는 해적들도 줄어들었다. 해적질할 필요 없이 상인으로 살아가면 되니까.
그렇다면 새로운 노꾼은 아마 납치해서 구했을 것이다.
동해를 사이에 끼고 이뤄지는 조선과 일본의 교역은 그렇게 노예노동으로 지탱되고 있으리라.
그 또한 조선과 소련이 일본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일어날 폐단 중 하나일 뿐이다.
한편 만주에서는 만주인들이 조선과의 계약을 이행하려는 몽골에 쫓겨 사방팔방으로 도망친다.
누군가는 조선으로 넘어오고, 누군가는 명의 변경으로 뛰쳐나가며, 또 누군가는 조선이 개발하는 만주 내 광산에서 일하게 된다. 그 광부들이 캐낸 석탄으로 이 열차가 돌아간다.
고향을 잃고, 어떤 일본인은 노를 잡고, 어떤 만주인은 곡괭이를 쥐고···.
이것이 옳은 일인가?
바빌로프는 그 생각에 잠시 눈을 감고 지난 수 년을 되새겨 본다.
어쩌면··· 어쩌면, 처음에 트로츠키가 바랐던 대로 소련은 작은 마을 공동체로 남을 수 있었으리라.
막 조선에 상륙하려던 그때 한 병사가 화살에 맞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원산현의 호장과 잘 이야기가 되어서 평화롭게 이곳에 정착했다면 말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만약에 신숙주가 조선국왕을 이끌고 소련으로 망명하지 않았더라면···
지금과 다른 길들, 가지 않은 길들의 가능성이 머릿속에서 무한히 펼쳐진다.
트로츠키가 조선의 궁궐로 나아간다. 1만 5000명의 거주권과 생존권을 확답받기 위하여.
조정에 나아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어린 국왕은 그에게 경계심을 느끼면서도 질문들을 던진다.
마침내 이 ‘서역인’들의 자치권을 받아낸 트로츠키는 원산으로 돌아와 그 ‘마을이장’ 같은 지위에 투덜대면서도 평화로이 원산을 가꾼다.
바빌로프는 그저 인근 동리에 감자와 쌀 종자를 나눠주고 다닐 뿐이다. 그 공로가 기특하다 하여 국왕이 상을 내릴지도 모르겠다.
의용군들은 그들이 기대하던 총 대신 쟁기와 낫을 들고 땅을 일구며 잡초를 뽑는다. 그렇게 1만 5000명의 사회주의자는 1만 5000의 농군이 되고, 다시 조선인이 된다.
소련은 그저 약간 민주적인 마을로 남을 뿐이다. 관료도, 인민위원도, 거창한 헌법과 마극종 같은 비밀결사도 없다.
다시 역사는 순리대로 흘러간다.
먼 훗날 사람들은 그렇게 기억할 것이다. 갑자기 원산에 도래한 기묘한 서역인들이 있었노라고.
그러나 신이 천당에 계시니, 세상은 평안하였노라고.
아무 일도 없이 그저 평화만이 있었노라고.
···그 평화를 신숙주가 깼다.
소련은 조선국왕을 손에 넣었다.
기나긴 내전의 소용돌이가 일어났고, 소련은 생존을 위해 한양으로 진군했다.
그리고 조선 전체를 뒤집어 놓았으며, 몽골을 회생시켰고, 일본으로 손을 뻗쳤다.
소련은 이제 마을로 남을 수 없으리라.
토론회와 주먹다짐으로 돌아가는 허술한 공동체가 아니라, 수십 수백만 명이 선출한 정치가와 전문가 관료들의 조직으로 작동하는 거대한 기계가 될 것이다.
앞으로 나아갈 미래에 대해 짐작조차 할 수 없고, 거기에 휘말릴 수억의 희망과 고난을 감당해낼 수 없다.
소련은 어떤 나라가 될 것인가? 조선과 소련의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세계는 어떻게 변화하며 그 속에서 바빌로프 자신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너무도 많은 고민들이 바빌로프의 머릿속에서 감당할 수 없을 만치 우글거렸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떠오르는 상념들이 잔상처럼 떠올라 어지러웠다.
결국 바빌로프는 눈을 떴다.
때마침 누군가가 창밖 저 멀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치던 때였다.
“저길 봐! 댐이다!!”
바빌로프는 무심결에 고갤 돌렸다. 그리고 마주하였다.
무한한 중력처럼 물들이 쏟아지고 있다.
아마 지금,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일지 모를 댐이다.
저 로마 판테온에 자리한 신상들조차 자신들의 거처를 초라한 시멘트 더미라고 자조하게 되리라.
바빌로프는 잠시 그 광경에 압도되었다가, 주위를 돌아본다.
어느새 멈춘 열차 옆에 수없이 많은 수레들이 달라붙어 건축을 위한 자재와 연장을 챙겨가고 있다. 족히 수백 명은 될 사람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저 멀리 댐은 건설되고 있다. 수 년 후, 저것이 완공되면 함흥을 향해 수천 개의 벼락 같은 전기를 내보낼 것이다.
그 힘으로 공기에서 비료가 생기고 쌀알이 생긴다. 수백 만을 먹이고도 남을 쌀알이.
한 사람의 머릿속 고민 따위는 너무도 작고 미세하게 보일 만큼 거대하다.
“맙소사, 15세기에 우리가 저런 걸 건설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이건 정말 인간승리로군요···.”
자신들이 이뤄낸 업적에 자아도취하는 이들도 있었다.
“저기서 전기를 생산하면 뭐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동차는 왜 못 만들겠습니까? 비행기는요?”
“공산주의 세계가 꿈이 아닙니다. 조선에서 세계혁명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진보와 발전이라는 광휘를 예찬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하.”
그러나 바빌로프는 허탈감에 웃는다.
도취되지도, 희망에 부풀지도 못한 채 그저 조용히 압도된다.
마치 지진을 어떻게 할지, 막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개미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바빌로프의 그 모든 도덕적인 고뇌에도 아랑곳 않고 이 거대함은 자라나고 있었다.
우연과 필연이 짜여 만들어진 폭탄은 이미 세계를 뒤덮을 힘을 예비하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은 인간의 손을 벗어났으니 자연과 역사라는 조각가가 미래를 조형할 뿐이다.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그와 함께 열차에 올랐던 어느 생물학자가 말한다. 인근 생태계에 대한 시찰계획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지워진 듯하다.
바빌로프 또한 그렇다. 모든 무의미한 고민들을 지운다. 물길은 막는다 하여 막아지지 않는다. 과거는 돌이키려 하여도 돌아가지 않는다.
바빌로프는 그저 세계에 대해 한탄하고 고민하기만 했다. 저항할 수 없는 변화에 애수를 느끼기만 하였다.
그러나 주목해야 했던 것은 변화 그 자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예, 정말 멋집니다.”
바빌로프는 그렇게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