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86
결국, 대일본무역에 관한 문제는 회의가 끝날 때까지 우야무야 묻히고···.
에티앙블은 다시 머무르던 선실로 돌아와 한참을 고민한 뒤에야 깨닫는다.
그들은 살아가던 세상이 다르다.
***
자, 여기 아서 에릭 블레어라는 한 남자가 있다.
영국령 인도 제국의 벵골에서 식민지 하급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영국 본토에서 교육받아 다시 영국령 식민지 버마의 경찰관으로 부임한다. 이후에는 본토로 돌아와 작가로 생활하고.
이 사람에게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아마 블레어의 세상은 크게 둘로 나누어지리라.
제국의 안과, 제국의 바깥.
대영 제국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하늘을 떠다니는 라퓨타처럼, 외부로부터 유유히 동떨어져 있는 브리튼섬에서 영국인들은 세계를 지배한다. 세계는 영국의 무대다.
미국인인 에드워드 K. 바스키에게는?
남북 아메리카는 이른바 ‘구대륙’들로부터 떨어진 독자적인 세계다. 여기까지는 블레어와 비슷해 보이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영국인에게 영국은 세계의 중심이지만 미국인에게 아메리카는 문명 세계의 변두리다.
미국인들은 언제나 그 사실에서 열등감을 느낀다. 세계의 나머지에서 유리된 촌뜨기들이라는 자격지심에 시달린다.
게다가 미국은 식민지적 팽창을 통한 직접 지배와 폐쇄적 경제 블록 형성보다는, 자유로운 무역을 통한 영향력 확보와 외교적 압박을 통한 세력 확대에 익숙하다.
바스키에게 외교 관계와 교역이란 명목상 대등한 상대방과의 거래다. 식민지와의 연결이 아니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때 처음으로 이의를 제기했던 러시아계 소련인 남성, 그리고 그의 말에 동조하는 듯한 눈빛을 보이던 바빌로프 같은 여타 소련 계열 인사들.
소련이 성립할 때, 적백내전에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미국 등 세계의 열강들이 군대를 파견했던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
이들에게 무역이란 거래가 아니다.
자신들을 포위한 세계에 맞선, 사회주의 형제국 간의 연대와 지원이다.
아르메니아 공화국에서 트랙터가 부족하다? 그렇다면 마침 트랙터 생산량이 남아도는 러시아 공화국에서 제공하면 그만이다.
이번에는 러시아 공화국에서 쌀과 밀의 수요가 넘쳐 난다? 저기, 카자흐 공화국에서 생산되는 곡물들을 러시아로 유통해 오면 될 일이다.
그렇다. 이 공화국들은 서로에게 값을 치르고 거래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원이 많은 곳에서 부족한 곳으로 ‘옮기는’ 것일 뿐.
그렇기에 소련의 일부로서 자리 잡을 이즈미 지방에, 필요한 자원을 ‘운송해다’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들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진보씨의 영토를 각각 소련의 국제적 패권의 일부, 소련의 영향권에 속할 국가, 소련과 일체가 될 사회주의 형제국이라는 상이한 라벨링 속에서 이해하게 된다.
관점에 따라 세계로 진출하는 소련의 위치, 역할, 의미가 달라지고 나아가야 할 정책의 방향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말이 좋아 ‘소련인’이지, 이들은 일생의 대부분을 체코인, 독일인, 이탈리아인, 프랑스인, 영국인, 캐나다인, 미국인으로 살아왔다.
모두가 각기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수십 년 동안 살아온 이들이다.
지금껏 트로츠키 동지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이들을 이끌었다면, 그 트로츠키 동지는 조선에서의 협치에 바쁘니 이제 소련의 국정은 남은 이들의 합의 속에서 굴러가야 한다.
지금껏 당장의 먹고사는 문제가 바쁘고, 소련이 망하느냐 마느냐 하는 눈앞의 위기가 더 급해서 이런 ‘사소한 이견’들은 묻혀 왔지만··· 이제는 아니다.
에티앙블은 떠올린다. 원산 유지파니, 영구 혁명파니, 하면서 반으로 나뉘어 의견을 다투던 그때를.
그 또한 작고 비체계적인 의용군 무리였을 때의 논쟁이다.
이제 그들은 국가를 이루었고, 쟁점은 국가를 어떻게 경영하고 바라보느냐에 있다.
···어째 쉽게 마무리될 논쟁이 아닐 듯싶다.
그리고 다음 날.
“제국주의자! 네놈들은 망할 제국주의자들이야!”
“내가 뭐랬어, 시발! 미국놈들이 세계 경영에 대해 뭘 알겠냔 말이야! 니들은 동네 깡패 짓이 외교의 전부인 줄 알어?”
“너희들의 의견은 모두 틀렸다. 유감을 표하도록 하지.”
“그게 뭔 헛소리야!”
“여기서 사회주의 국가 출신 손 들어 봐. ···나밖에 없군. 그러니까 내 말이 맞는다.”
“개소리 집어치워! 맞긴 뭐가 맞는다그래!”
이 더럽게 좁아터진 원산은 소문도 참 빨리 퍼진다.
게다가 애초에 여기 사는 5만 명 중 1만 5000명 정도는, 고향이랑 목숨도 내버리면서 스페인에서 싸우겠답시고 달려온 작자들이다. 어지간해서는 이들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
한번 말싸움이 나면 이기고 봐야 하겠는 작자들이 대다수고, 좋게 말하면 신념이 굳건하고 나쁘게 말하면 고집불통인 인간들이 득시글하다.
어제 평의회에서의 소란이 소문으로, 회의록 공개로 퍼지고 나니 곧 원산 전역이 논쟁의 소용돌이로 휩싸였다.
마침내 아침을 먹으러 찾아간 식당 옆자리에서, 점잖게 시작하던 언쟁이 의자를 집어 던지며 진행되는 레슬링 시합으로 바뀌었을 때 에티앙블은 갑자기 한양이 미친 듯이 그리웠다.
···트로츠키 동지, 당신은 대체 어떤 싸움을 해 오고 있었던 겁니까?
어떻게 이런 인간들을 묶어 놓고 통제할 수 있었던 거지? 역시 말아먹은 인성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지도자를 먹을 뻔했던 인간의 능력이란 절대적인 것이었나?
3일이 지나고 나니, 광장에는 ‘특별 토론회: 소련의 외교 정책,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주먹 사용 금지)’ 같은 현수막이 몇 개씩이나 휘날리고 있다.
사람들이 의식주가 해결되고 나니 기운들이 넘치신다.
“아··· 아아···! 에티앙블 동지!”
그리고 멀리서 이 활활 불타오르는 투기장 같은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것 같은 한 사람이 뛰어온다. 에티앙블에게 아는 척을 하면서.
“···에드워즈 동지? 북청은 어쩌고 여기 오셨습니까?”
“인민위원평의회의 정기 회의가 일주일 동안은 이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만주민족전문가로 불려 왔더니만 도시가 웬 쑥대밭이···.”
그렇게 말하던 에드워즈는 에티앙블에게 조심스레 묻는다.
“그, 이 개판이 동지 작품이라는 말이 나돌던데···.”
“···나중 가서 설명해 드리도록 하죠.”
“저기, 제국주의자 에티앙블이다!”
“우우우! 프랑스 제국주의에 함몰된 반역자!”
“···아닙니다. 그냥 지금 바로 설명해 드리도록 하죠.”
행인들이 소리치는 걸 듣다 보니 이건 안 되겠다 싶다.
근처 벤치에 자리 잡고서 에티앙블은 앉은 자리에서 모든 사정을 설명했다.
“···민감한 주제이기는 하군요.”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겠습니까?”
에드워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전에 만주인들의 폭동을 겪으면서 얻은 바가 많습니다.”
“뭘 얻으셨길래?”
“‘아 지금 내가 좆 됐구나’ 하는 순간을 감지하는 능력입니다. 근데 그게 지금 작동합니다.”
“···.”
“젠장, 괜히 원산까지 왔습니다. 회의에 초대받아도 강제력은 없어서 거부할 수 있었는데.”
“그런 말씀 말고 좀 방법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동지는 곧 돌아갈 수 있지만, 저는 당분간 원산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입니다!”
“흠··· 글쎄요.”
에드워즈가 머리를 갸웃거린다. 무슨 생각이 저 안에서 굴러가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하는 사이 토론회가 개최되고, 안전을 위해 글로브를 낀 토론자들이 서로를 향해 열변을 토하고 있다. 그러다 역시나 주먹이 나가면서 복싱 경기로 바뀐다.
순간 에티앙블과 에드워즈는 이 자리에 블레어가 없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 사람은 이렇게 흥분한 군중의 ‘격렬하고 민주적인 토론’에 환장했겠지.
결국, 토론에서 이긴 것은 폴란드인. 그가 마지막 잽을 날릴 때 청중들은 그가 주장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 국가 건설 지원론’이 옳음을 깨닫는다. 토론에서 주먹 금지를 외치던 사회자도 그의 화려한 손기술에 환호한다.
상대 패널이던 프랑스인이 땅바닥에 쓰러지는 광경을 보던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한다.
“···복싱 연습을 하셔야겠네요.”
···가히 지옥과도 같았던 3주였다.
슬슬 무식한 주먹다짐도 회의가 시작된 지 2주가 지나자 마무리되어 갔다.
드디어 어금니 날아가는 게 무서워졌는지, 자기가 때리고들 있는 게 이 세계의 유일한 제지기술자, 숙련광부, 제철노동자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수없이 이어지던 토론회(물리)의 물결이 사그라든 것이다.
그리고 질질 끌어가던 회의 또한 3주차가 되니 결론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다.
“자, 여기서 잠시 휴회하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시간 뒤니까, 오후···4시에 다시 모여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회의의 임시 서기를 맡은 조지프 푸츠가 선언하자 기지개 켜고 하품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사람들이 우르르 회의장을 빠져나간다.
그건 에티앙블과 에드워즈도 마찬가지였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제가 얘기했잖습니까? 좆 될 것 같았다고···.”
“제게 복싱 연습 열심히 하라고 조언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도 해봤는데, 아마 제 ‘토론 상대’들이 더 열심히 연습한 것 같더군요.”
이 3주가 지나기까지 에드워즈 동지는 어마어마하게 얻어맞았다.
정작 논란의 시작에 서게 되었던 에티앙블이 점잖은 토론 몇 번 하고 끝났을 때 에드워즈는 한동안 얼굴 한 쪽이 부어서 제대로 눈도 뜨지 못했다.
···이유는 자명했다.
“이번에 ‘토론’을 걸었던 사람은 이름이 뭡니까?”
“···다이크 오’ 설리반”
“지난번에는 누구였죠?”
“···잭 매컬리스.”
“이름들만 들어도 알겠군요.”
“···.”
다 아일랜드계 이름이다.
“한번 덮어놓고 물아봐도 되겠습니까? 그때는 왜 그랬던 겁니까? 조선에 오자마자 정치 공작이라니?”
“그땐 트로츠키주의 조직이 다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저도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건 아닙니다. 당원들이 총대 좀 메 달라고 하니까 앞장선 거지.”
“영국인들이 떼로 몰려가서 아일랜드인들한테 시비 걸었던 것도요?”
“···그건 제가 기획한 거긴 한데, 과거의 사건은 이제 기억 속에 묻어둡시다.”
조선에 오자마자 에드워즈가 아일랜드계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싸움을 걸었다가 영국인이고 아일랜드인이고 전부 지휘권 박탈당한 원한은 아직도 남아있었다.
당연하다. 그때 아일랜드인들의 조직 기반이 박살났으니.
회의 중간에 식사 겸 휴식을 위한 시간이 2시간이나 제공되었으니, 에티앙블과 에드워즈는 1등석 승객 전용 레스토랑을 개조한 휴게실로 향해 각자의 소파에 몸을 던져 놓았다.
에드워즈는 주머니에서 하얗고 기다란 무언가를 꺼낸다. 담배인가 싶어 에티앙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다시 돌아온다. 조선산 약초로 만든 대용 담배다.
유리창 바깥으로는 수평선이 하늘색과 바다색을 얄따랗게 나눠 놓은 단조로운 풍경이 보인다.
“아무튼, 이번 회의에서 대강 합의의 가닥이 잡혀가는 건 다행이군요.”
“젠장, 좀 빨리 마무리됐으면 얼굴에 멍 하나는 더 줄었을 텐데.”
“그건 당신의 업보라 생각하십시오. 상황이 달랐다면 암살당하고도 남을 일이었으니.”
“그거야··· 맞지만은···.”
에드워즈가 풀내음 나는 연기를 한숨처럼 뿜어내다가 말을 얼버무린다.
그렇다. 소련에서 다른 건 몰라도 정치적 목적의 살해는 있을 수가 없었다. 숙청 또한 없다시피 했다.
이들 1만 5000명, 바다처럼 넓은 15세기의 세계에 섬처럼 떠있는 20세기의 인간들.
서로가 얼마나 귀중한 고급인력인지를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이 다양한 정파,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뒤섞여 있는 가운데도 평화가 유지되는 건 오직 그 때문이었다.
“···뭐, 어쩌면 다행입니다. 의용군들의 머릿수가 한미한 마을 수준으로 적어서. 그 덕에 당신 머리도 몸통에 잘 붙어있고 말입니다.”
“만약 의용군들의 수가 많았더라면, 사람들이 트로츠키 동지에게 이렇게 살갑게 대할 수나 있었겠습니까?”
두 사람 모두 안다. 트로츠키는 그렇게 말랑말랑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의 호의와 관심은 철저하게 필요에 따라 배분된다.
두 사람이 트로츠키의 측근 취급을 받는 것도 그들이 트로츠키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못해도 이들이 딱 열 배 정도, 15만 명만 되었어도 소련에서는 몇 번이나 피바람이 불었을 것이다.
아마 트로츠키도 에드워즈를 살려 두고 써먹기는커녕 ‘핫하 죽어라!’하고 본보기로 처형했을지 모를 일이다. 에드워즈가 싸질러 놓은 문제가 워낙 민감한 부분에 맞닿으니···.
트로츠키의 집권에 대해 사람들이 어느 정도 용인하면서, 또 견제할 수 있는 것도 에티앙블의 말대로 ‘한미한 마을 수준’의 인구에 있다.
1만 5000명 정도의 공동체라면 직접 민주주의로도 그럭저럭 굴러갈 수 있다.
트로츠키의 리더십이 어느 정도 무리 전체를 통솔할 수 있을 만큼의 규모다.
스탈린주의자가 의용군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가운데, 트로츠키가 우두머리로 있는 상태에서 의용군의 규모가 쉽사리 제어를 벗어날 만큼 거대했다면···.
대규모 반란, 그 성패에 관계없이 이어지는 숙청, 피바람, 그리고 계엄상태의 지속.
두 사람 모두 굳이 입밖으로 꺼내지 않고도 그 ‘만약’의 경우에 대해 그려볼 수 있었다.
블레어처럼··· 순진하고 나이브한 사람은 아마 지금 소련의 적당히 자유로운 분위기가 ‘정의로운 민주 사회주의자들의 의용군이니까’ 가능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건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지금의 소련이 갈등이 빠르게 자제되고 봉합되며, 어느 정도 내집단의식을 가지고 똘똘 뭉칠 수 있을 정도로 자그마한 공동체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의 노선투쟁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았던가? 폭동이나 본격적인 정파간 다툼도 아니고, 그저 토론 중의 난투극으로 끝나는 귀여운 갈등이라니.
그 틈에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은 에드워즈에게 분풀이도 했지만··· 그 분풀이가 총알이 아닌 주먹으로 이뤄진 것이 천만다행인 일임을 에드워즈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소비에트 연방 내에서 투표권을 가진 인구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압니까?”
“전 지난 몇 년 동안 북청에만 처박혀 있었습니다. 원산은 잠깐 잠깐 휴가처럼 들른 게 전부였고.
당장 폭동이 일어날까, 제 모가지가 간당간당할까 싶어 소련 내부 사정은 관심 밖이었습니다.”
에드워즈가 그렇게 너스레를 떨자 에티앙블은 웃으면서 대답한다.
“2만입니다, 2만. 아마 올해가 지나갈 때면 주민 등록과 소비에트 가입 후 적정 시간이 지나 투표권을 획득하는 인구가 4만, 5만까지 늘어날 겁니다.”
“···맙소사.”
“그래요. 원래 의용군으로 온 이들보다 조선 출신 소련인들이 많아집니다.”
직접민주주의로 평화롭게 굴러가는 소련이라는 작고 아담한 공동체. 국가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조선의 한 도시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소련의 인구 수가 10만, 20만을 넘어가고, 지금처럼 건너건너 다들 아는 사이인 마을 같은 분위기를 넘어선다면?
“만약에··· 아니 훗날에, 일본에 소비에트 공화국들이 건국된다면.”
에티앙블이 운을 떼다가 말을 고친다. 마치 영원히 오지 않을 영원한 미래 같지만, 고작 10년에서 20년 사이에 이뤄질 일이다.
“그들도 우리 국민으로 취급받게 될 테죠.”
“맞습니다. 언젠가 지금 원산 인근의 조선인들처럼 공민(公民)으로서의 권리와 참정권을 손에 넣을 겁니다.”
“당연한 귀결이죠.”
“언젠가 반드시 오게 될 미래고요.”
그렇게 서로 주거니 받거니 말을 건네던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본다. 에드워즈 또한 에티앙블의 말에 담긴 고민이 무엇인지 알아챘기 때문이다.
적어도 구성원 대부분이 사회주의자라는 공통점 하나로 모여든 이 소련이라는 작은 공동체.
훗날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들이 소련이라는 나라에 속한 인민이 된다.
이 소련이 어엿한 하나의 국가로서 작동하면서 행정체계와 관료제가 안착한다.
거대하고 체계화된 국가인 소련에는 보다 빠르고 효율적인 판단이 필요해질 것이다.
···그때도 소련이 지금 같은 공동체일 수 있을까?
대일무역 정책 하나를 결정하려고 나라 전체가 말다툼과 주먹다툼으로 빠져드는 그런 나라일 수 있을까?
에드워즈는 대용 담배를 불을 손가락으로 눌러서 꺼버린다. 그리고 나서 재떨이에 꽁초를 던지니, 정말 오랜만에 재떨이가 그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는 순간이었다.
“전 앞으로 소련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변해갈지 짐작조차 되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앞으로의 소련은, 수십 수백 년 뒤의 소련은 어떤 모습일까?
두 사람의 걱정이 그런 방향을 향해 뻗어나갈 때, 다른 지점을 근심하는 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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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저녁 8시, 회의를 끝마치고 바빌로프는 박수를 쳤다. 대회의장의 모두가 뿌듯함과 후련함으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에드워즈, 에티앙블, 푸츠, 마이어 등등 소련의 이름있는 인사들은 전부 여기에 모였다.
···베순과 바스키는? ‘토론’에서 생긴 부상자가 너무 많아 참석하지 못했지만.
아무튼 장장 3주간의 마라톤 회의가 마무리되었다. 소련 전역을 뜨겁게 달구고, 또 몇 차례 뒤집어 놓았던 회의였다.
그런 주제에 나온 결과는 사실 대단치 않았다.
“표결 결과, 과반수 이상의 동의로 해당 안은 통과되었습니다.
일본에 대한, 특히 진보씨의 영지에 대한 경제적 교류는 해당 지역의 시장 장악과 자본주의적 발전을 위한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일본의 경제를 ‘개방’하고 소련과 하나의 시장으로 묶는다. 여기까지는 미국인들의 의견이 관철되었다.
“단, 해당 지역에 대한 사회주의화가 완숙하게 진행되면 상거래를 통한 교류는 철폐합니다. 그리고 상호호혜적 자원 분배를 통한 자원 교류를 도입하는 것으로 결정합니다.”
일본이 충분히 발전하면 소련의 일부처럼 자원을 분배한다. 이 부분은 결국 소련인들의 주장이 반영되었다.
“더하여, 경제가 발전하지 않은 여타 문명에 대해서는 공동의 경제권 형성을 채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두겠습니다.”
미국인들의 방식이 조선과 가깝고 봉건제가 발달한 일본에서만 통할 수 있다는 우려에, 서유럽인들의 주장이 일부 수용된 결과였다.
결국 그렇게나 치고 박고 싸운 결과, ‘네 말도 옳고 내 말도 대강 옳으니 전부 따르자’ 정도의 밍밍한 결과물이 나왔다.
물론 서로의 의견을 과잉해석해 ‘착취적인 제국주의자’니 ‘퍼주기만 하는 호구’니 물고 뜯는 것보다야 나았지만···.
이럴 거면 왜 그렇게들 서로들 레슬링 기술을 걸어대며 싸웠던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격렬하게 다툰 것 치고는 어느 쪽의 승리라고도 할 수 없는 어정쩡한 결과만이 나왔으나, 모두들 결론이 났다는 사실 자체에 충분히 만족하는지 푸츠의 정리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결국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20여 일을 질질 끌었던 길고 비효율적이고 치열했던 공방이 끝난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개운한 표정으로 회의실 문밖을 나설 때, 바빌로프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또 그의 초롱초롱한 눈빛에 걸맞지 않게 약간 우울감이 깃든 얼굴로 비어가는 의자와 탁자들을 돌아볼 뿐이었다.
바빌로프는 오늘의 이 결정이 일본에 미칠 영향에 대해 생각했다.
조선과 소련에서의 생산력이 확보되는 대로 일본 곳곳에 면포가 저가로 팔려 나간다면, 일본 내 경제는 심각하게 교란되고 친소련적인 다이묘와 상인들만이 유유히 살아남으리라.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아, 마이어 동지.”
원래 접점이 크지는 않았으나, 조선 곳곳에 농업공장과 협동조합 농장을 개발하면서 자주 마주치게 되던 두 사람이었다.
게다가 마이어가 신설될 산업건축인민위원직에 선출될 것을 생각한다면 앞으로 이 둘이 협업할 일은 더더욱 많아질 것이다.
그렇기에 바빌로프는 선뜻, 마이어에게 속내를 터놓아 보았다.
“···이 결정이 도덕적입니까?”
농업공장을 순회하다, 농기구를 훔쳐 고철로 팔아 매질당하는 노동자를 보았을 때,
부전강에 댐을 건설하던 현장에서, 인근의 마을들을 허물어버렸을 때,
항상 마음에 걸리던 문제가 이렇게 한 문장으로 간단히 표현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틀린 결정이 아니라 하여 옳은 결정이라는 보장이 있는가?
그러나 이에 대한 마이어의 대답은 건조했다.
“글쎄요···. 하지만 소련과 조선에는 안보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큰 이익이 될 것은 확실합니다. 일본 내에도 역사적 진일보를 가져올 것이고요.”
“하지만, 우리는 이제 생존만을 생각할 시기를 지나쳤습니다. 국익 말고도, 다른 걸 생각할 수도 있잖습니까?
예를 들면 일본인들의 삶은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황폐화될 것이다. 면포와 쌀은 동아시아의 화폐나 다름없다. 그런데 그 두 가지 재화의 생산량을 크게 뒤흔들고 있으니 경제가 안정될 리 없다.
조선은 애초에 대기근이 이어졌으니 괜찮았지만, 일본은···.
“···제가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 같군요.”
“제가 블레어 동지의 계획을 도운 것은, 협동조합들을 순회하며 신품종을 보급한 것은 그저 트로츠키 동지의 뜻만은 아니었습니다.
동지가 조선에 동지의 건축적 이상을 실현하고 싶어서 뛰어든 것처럼, 제 의지도 있었습니다.”
블레어가 생각하는 대안은 적어도 덜 잔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