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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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트렁크 안을 보았다. 옷 몇 벌, 구두 몇 켤레, 필기구를 비롯한 잡동사니 몇 개가 트렁크 안에 있는 것의 전부였다. 게다가 그 몇 안 되는 옷가지들은 얼마 입고 다니지도 않은 듯 거의 새것에 가까웠다. 이번에 수도로 돌아왔을 때 왕궁에서 마련해 준 것이 분명했다.
리엘라는 트렁크 안을 뒤적였다. 그러다 옷 아래에 있던 작은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다른 물건들과 달리 책에는 손때가 가득했다.
“창세 신화?”
가죽 표지가 너덜거릴 정도였기에 리엘라는 속표지를 보고 나서야 무슨 책인지를 알았다. 속표지 제목 아래에는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
벨라리아 아인델 호슨이 하운 아렐 팬드래건에게.
밑줄 쳐 가면서 공부하시길. 다 외워야 합니다.
날짜는 적혀 있지 않지만 아마도 아주 오래전 호슨 공작이 하운에게 선물한 책인 모양이었다.
갑작스레 만난 호슨 공작의 흔적에 리엘라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책장을 넘기자 하늘에서 떨어지는 빛을 그린 삽화가 보였다. 대부분의 창세 신화 책에 들어 있는 가장 최초의 빛을 그린 삽화였다. 다른 점이라면 빛이 떨어지는 땅에 보석과 꽃이 서툰 솜씨로 그려져 있다는 것이었다.
‘하운 님이 그리신 건가?’
삐뚤삐뚤한 선에 웃고 있는 꽃의 그림까지. 아무래도 하운이 꽤 어릴 적에 그렸던 그림 같았다. 리엘라는 다시 책장을 넘겼다. 그 뒤에는 떨어진 빛이 꽃과 보석이 되고 원래 이 땅에 있던 것들에도 색을 주어 금과 은이 탄생했다는 신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곳에도 서툰 솜씨의 보석과 꽃이 여기저기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점점 그림은 줄고 대신에 글씨가 늘어났다. 징벌의 오닉스, 창세기 1시대 500년경으로 추정, 3시대 복원의 러다이트 최초 발동 등등. 어린이의 그림은 사라지고, 올곧은 필체로 그림 이곳저곳에 요점 정리처럼 빼곡히 쓴 글씨들이 보였다.
삽화가 끝나고 글이 가득한 페이지가 시작되자 리엘라는 눈을 비볐다. 멀쩡한 곳이 없을 정도로 온갖 색의 밑줄과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으며, 조금이라도 비어 있는 곳에는 하운이 추가로 적어 넣은 글씨들이 가득했다.
아주 오래전, 첫째 언니가 의사 시험을 보기 전에 이렇게 공부했던 것이 기억났다. 리엘라는 책을 덮은 다음 침대 옆 협탁에 올려 두었다. 아무래도 왕궁에 남아 있던 물건 중 그가 아꼈던 것은 이것 하나뿐인 것 같았다.
네아가 빈 트렁크를 들고 나가자 리엘라는 의자를 끌고 와 하운의 옆에 앉았다. 이제는 혈색도 돌아왔고, 숨소리도 새근새근 고르게 들려왔다. 의사들의 말대로 그는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뿐이다.
하운을 바라보던 리엘라는 턱을 괴었다. 이곳에 짐이 없는 걸 알고는 서운했는데, 왕궁에는 더 없다는 것을 알게 되니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시렸다. 언제나 죽음을 마주하고 사는 최전선의 기사들은 소유하는 물건 없이 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보게 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속이 상하다가 안타깝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그때 하운이 뒤척거리며 이불이 흘러내렸다. 여전히 그의 목에 걸려 있는 로켓이 보였다. 그것을 살펴보던 리엘라가 중얼거렸다.
“얼마나 만진 거야….”
하운에게 선물했던 로켓은 네아에게 부탁해서 사 온 새것이었다. 그래서 하운에게 줄 때만 해도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하고 반짝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누군가 오래 목에 걸고 다닌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며칠 사이에 이걸 도대체 얼마나 자주 만져 댄 걸까.
제가 준 것이 그가 어릴 적부터 읽었을 창세 신화 책만큼이나 손때가 탄 모습이 기쁘면서도 안타까웠다. 그렇게 좋았나.
그때 밖에 나갔던 네아가 돌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편지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어디서 온 것인가 하며 바라보던 리엘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왕실의 편지는 아까 받았는데…? 그건 뭐예요?”
“새롭게 도착한 편지예요. 트렁크 가져다준 시종들이 아닌 다른 시종이 방금 주고 갔어요.”
무슨 일이길래 왕궁에서 또 편지가 온 걸까. 혹시 뭐 빠진 거라도 있었나? 리엘라는 봉투를 열었다.
“짐이 더 있는 걸지도… 헉!”
편지를 읽던 리엘라가 숨을 들이켜자 네아가 놀라 가까이 다가왔다.
“왜 그러세요? 뭐라고 적혀 있길래?”
리엘라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안녕, 리엘라 테니어 양. 그대와 할 이야기가 있는데 괜찮으면 내일 편한 시간에 왕궁으로 와 주었으면 해.
– 카르디아 71대 국왕 레이안
***
“루시안! 나 왔어!”
하르메아는 보석의 방 안으로 들어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팔짱을 낀 채로 벽을 바라보고 있던 루시안이 몸을 돌렸다. 그는 하르메아를 보자마자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비밀 잘 지키고 계십니까?”
“응! 말 안 했어!”
하르메아는 방을 나와 이곳에 오는 길에 마주쳤던 네아가 생각났다. 네아도 루시안처럼 자신을 보자마자 비밀은 잘 지키고 있냐고 물어보았다. 사실 리엘라에게 말하고 싶어 입이 간질간질했지만 꾹 참았다. 벽 너머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좀 더 정확히 밝혀지기 전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말자고 셋이서 약속했으니까.
누군가와 비밀을 공유하는 게 처음인 하르메아는 그저 신날 뿐이었다.
루시안은 근처 테이블 위에 두었던 사탕 통을 하르메아에게 건넸다. 비밀을 잘 지켰으니 상을 주겠다는 뜻이었다. 하르메아는 환한 얼굴로 사탕 통을 들더니 그 안에 들어 있던 것을 제 입 안에 와르르 쏟아 넣은 다음 텅텅 빈 통을 루시안에게 돌려주었다.
“…….”
사탕 수십 개가 단번에 사라지는 것을 본 루시안은 한숨을 쉬며 시선을 다시 벽으로 돌렸다. 이 안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자신과 네아, 하르메아만 알고 있다.
서로가 비밀을 지키는 이유는 달랐다. 하르메아는 그냥 비밀이라는 게 재미있어서, 네아는 그러잖아도 정신없는 리엘라인데 아직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것 때문에 그녀를 불안하게 할 수 없어서. 그리고 자신은 다른 자들의 방해 없이 안에 있는 것의 정체를 확실하게 밝혀내고 싶어서.
이유는 달라도 비밀을 지키자는 뜻은 일치했기에 다행히 지금까진 별문제 없었다. 솔직히 하르메아만 조용히 있어 주면 되는 거였다.
‘문제는 당분간 하르메아가 브레스를 쓰지 못하니 벽을 더 뚫을 수 없다는 건데….’
재채기를 하며 브레스를 내뿜던 하르메아는 이제 목이 아파 더 못 하겠다며 드러누웠다. 아직까지 아프다는 걸 보면 브레스를 다시 쓸 수 있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어찌 보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안에 있는 게 무엇인지 모르니.’
과거 호슨 공작은 드래곤의 레어를 탈탈 털어 오는 것으로 유명했던 사람이다. 가져온 것의 대부분은 왕실에 전부 보고했다지만 어쩌면 그중에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을 비밀스러운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자면 드래곤이 부리던 몬스터 같은 것들 말이다.
루시안은 구멍에 귀를 갖다 대었다. 얇은 벽 너머에서 다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재빨리 펜과 종이를 가져와 안에서 들리는 소리를 적었다. 무거운 것이 질질 끌리는 듯한 소리. 의자를 끌어당기는 것 같은 소리.
루시안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소리의 종류와 횟수, 들린 시각까지 전부 정리하던 그는 시계를 한 번 보더니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상하네….”
“뭐가 이상해?”
루시안의 말에 하르메아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루시안은 제가 정리한 종이의 한 부분을 펜으로 가리켰다.
“여길 보세요. 오늘 아침 6시 30분. 의자를 끌어당기는 것 같은 소리가 났습니다. 조금 전의 소리와 거의 흡사했지요. 어제 오후 7시에도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12시 30분이군요.”
“그게 뭐가 문제인데?”
“하르메아 님. 인간들은 보통 하루 세 번 식사를 합니다. 아침, 점심, 저녁.”
“그 시각에 이 소리가 들렸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항상 이 시각에 안에서 소리가 들리는군요. 마치 시계처럼 정확하게.”
의자가 끌리는 소리. 생각해 보면 이 저택에서 식사를 할 때 자주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루시안은 소름이 돋았다. 그렇다면 안에 있는 것이 매번 세 끼를 챙겨 먹고 있다는 것일까? 빛 한 줄기조차 들지 않는 이 벽 속에서? 게다가 몇 개월간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그리고 이게 정말 의자 끄는 소리라면 테이블도 있을 수 있다는 소리고… 의자와 테이블을 사용한다면….”
인간일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것도 들어가지 못하는 벽 속에서 인간이 살 수 있을 리가. 루시안이 생각에 잠긴 채 가만히 있자 하르메아는 테이블 위에서 종이와 펜을 가져오더니 루시안의 옆에 앉아 그가 기록한 종이를 보고 똑같이 따라 적기 시작했다.
애초에 드래곤이었기에 글씨를 써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인간 모습으로 변하고서는 할 수 있게 된 이 행위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는지 하르메아는 툭하면 종이를 가져와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따라 썼다. 물론 하르메아가 쓴 것은 차마 글씨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삐뚤삐뚤한 선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숫자는 조금 쓰기 편했는지 이제는 무슨 숫자인지 알 수 있을 정도이긴 했다. 루시안이 쓴 숫자를 하나하나 힘주어 따라 쓰던 하르메아가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켜 문으로 달려갔다.
“멜다! 멜다 왔다!”
“어유, 기다리고 계셨나요 하르메아 님?”
멜다 부인은 양손으로 들어야 할 정도로 큰 쟁반에 샌드위치를 산더미처럼 쌓아 왔다. 하르메아의 취향대로 되도록 채소는 빼고 고기를 가득 끼워 넣은 것들이었다. 그것을 테이블 위에 올린 멜다 부인이 조금 전까지 하르메아가 끄적이던 종이를 바라보았다.
“어머, 숫자 연습하신 건가요?”
“응! 잘했지?”
“예전에 쓰신 것보다 훨씬 좋아졌네요. 그런데 이거….”
종이를 보던 멜다 부인의 얼굴에 아련한 그리움이 스쳤다. 루시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왜 그러십니까?”
“이거 전부 시각을 쓴 것 맞지요? 그렇다면 제게 꽤 익숙한 시각이라서요.”
“익숙하다니요?”
멜다 부인은 웃으면서 종이를 가리켰다.
“이거 전부 호슨 공작님께서 식사하시던 시각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