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194
203
어느새 걸음을 멈춘 리엘라는 들려오는 대화의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땅굴이라니? 사람이 만든 것 같지 않았다고?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사람이 만든 것 같지 않았다니? 그럼 그건 그냥 동굴 아닌가?”
“아니, 그렇다고 하기에는 일부러 파낸 흔적이 확실했거든.”
“그럼 큰일 아니야? 치안대에 신고는 했어?”
“당연히 했지. 그렇게 수상한 것을 보고 가만있을 수 있나.”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리엘라의 귀가 더욱 쫑긋거렸다. 하마터면 엿듣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그래서요?’라고 물어볼 뻔했다.
“사라졌어.”
“뭐?”
“사라졌다고. 치안대를 데리고 땅굴을 봤던 곳으로 갔는데 거짓말처럼 땅이 멀쩡하더라니까. 그래서 내가 그럴 리 없다고, 분명히 봤다고 했는데 치안대 표정이 꼭 술 취한 사람 보는 듯한 표정이더라고. 그래도 한 번만 더 살펴봐 달라고 했는데 다음 날에 네이판타가 깨어났지 뭔가. 그래서 더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마을을 떠났지, 뭐. 그게 끝이야.”
“거, 사람 싱겁긴. 결국 진짜 있는 건지 없는 건지도 모르는 거네. 정말로 그날 술 마셨던 것 아니고?”
“마시긴 했지만 그런 걸 잘못 볼 만큼 많이 마시진 않았어! 아니 그것보다 너무 이상하지 않아? 땅굴이라는 게 하루 만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거냐고?”
“됐네. 됐어. 임시 숙소 짓는 거나 마저 도우러 가자고. 그리고 술은 조금만 마셔.”
“많이 안 마셨다니까!”
두 사람이 멀어지고 대화 내용 역시 바뀌었다. 리엘라는 몸을 돌려 음식을 준비하는 천막으로 걸어갔다. 가면서도 조금 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루 만에 나타났다 사라진 땅굴이라니? 그럴 수도 있나?
그때 천막 쪽에서 리엘라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디 리엘라!”
저 레이디 소리 좀 안 할 수 없을까. 리엘라는 바구니를 든 손으로 제 팔등을 쓸었다. 정말이지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단어였다. 공원의 직원이 허겁지겁 리엘라의 앞으로 달려왔다. 꽤 급한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무슨 일이세요?”
“왕궁에서의 호출입니다. 지금 바로 들어오시래요. 마차까지 보내셨던데요?”
고개를 돌리니 정말로 왕실의 문장이 붙어 있는 마차가 서 있었다.
“왕실에서요? 무슨 일인가요?”
“글쎄요. 일단 국왕 전하께서 찾으신다고 들었습니다.”
리엘라는 곧바로 바구니를 내려놓은 다음 아일리를 찾았다. 사람들 뒤에서 식재료를 손질하던 아일리가 요리에 쓰일 포도주를 따더니 슬쩍 한 모금 마시는 모습이 보였다. 리엘라는 저것도 레베카 언니에게 쓰는 편지에 다 적어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아일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언니!”
“안 마셨어! 맛만 본 거야!”
화들짝 놀란 아일리는 허겁지겁 와인병을 옆에 내려놓으며 손을 저었다.
“급한 일 있는 거 아니면 나랑 같이 왕궁 가자. 어차피 저택으로 돌아가려면 마차도 같이 타야 하니까.”
국왕이 또 무슨 일로 자신을 찾는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왕궁에 혼자 가는 것은 무서웠다. 언니라도 데리고 가면 좀 낫지 않을까. 하지만 아일리는 귀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됐어. 내가 미쳤냐. 일부러 왕궁에 들어가게.”
지난번 왕궁에 불려 갔다가 레이안의 하운 자랑에 맞서 내 동생도 지지 않는다며 목소리를 높였던 아일리였다. 게다가 리엘라에게는 어쩌다 보니 왕실의 일을 받았을 뿐, 국왕과도 알고 지내는 사이라는 것은 아직 비밀로 하고 있었다. 괜히 같이 갔다가 국왕이 쓸데없이 친근하게 말이라도 걸면 들킬지도 모른다.
“이거 놔라. 찾지 마. 난 안 갈 거야.”
“같이 가아! 무섭단 말이야!”
“두려움을 이겨 내야 어른이 되는 법이야.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마차에 타렴.”
그때 마차에서 내린 왕궁의 시종이 밝은 얼굴로 다가와 아일리에게 말했다.
“혹시 아일리 테니어 양입니까?”
“그렇습니다만….”
“아일리 테니어 양도 함께 오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누구 명령인데요.”
“레티시아 왕비님이십니다.”
그 말에 아일리는 곧바로 몸을 돌려 리엘라의 팔을 붙들었다.
“리엘라, 같이 가!”
그러자 리엘라는 씩 웃으며 말했다.
“뭐 해, 언니? 어서 당당하게 가슴 펴고 마차에 타야지?”
***
왕궁으로 가자마자 시종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두 사람을 맞이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아일리가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자리를 뜨고, 리엘라 역시 저를 맞이하러 온 시종을 따라 걸었다.
본궁의 복도를 걸으면서 리엘라는 마지막으로 왔을 때와 확연히 달라진 왕궁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예전에는 조용하며 느긋하고, 안정된 느낌을 받았던 왕궁이었다. 하지만 지금 왕궁은 완전히 무장한 기사들이 자주 지나다니며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다.
게다가 건물 안에는 수많은 왕실의 직원들이 이곳에서 며칠 밤낮을 샌 것이 틀림없는 모습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무도회가 열렸던 연회장에 들어선 순간 리엘라는 말을 잃었다.
연회장은 모두가 모여서 춤을 출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공간이었다. 아직도 그날은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곳곳을 가득 채운 꽃들과 천장에 떠 있는 보석으로 만들어 낸 아름다운 빛들 그리고 수백 명의 사람들. 잔잔히 흐르던 음악. 잔뜩 차려진 음식들.
하지만 지금의 연회장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새롭게 들어온 전황 보고입니다!”
“정찰대의 크리스털이 도착했습니다. 어디로 보낼까요?”
“12구역의 민간인들 대피 시작했다고 합니다. 식량 추가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테이블에 앉아 큰 목소리로 소리치고 있었다. 회장의 제일 앞, 국왕 부부가 섰던 연단은 이제는 집채만큼이나 큰 흑판이 놓여 있었다. 가운데에는 큰 대륙의 지도가 붙어 있었고, 지도의 곳곳에는 수십 개의 화살표들이 빽빽하게 붙어 있었다. 지도의 양옆으로는 알 수 없는 숫자와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중에서 리엘라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다른 화살표 표시보다 훨씬 큰 검은색의 화살표였다.
그 화살표의 위에는 눈에 잘 띄도록 노란색으로 쓴 글씨가 보였다.
네이판타
그리고 검은 화살표의 바로 앞에서 그것을 막는 듯한 푸른색의 화살표가 있었다. 푸른색의 화살표 위에는 리엘라가 잘 아는 이름이 있었다.
하운
그 광경을 본 순간 리엘라는 소름이 돋았다. 저 거대한 검은 것을 하운이 혼자서 막아 내고 있다는 것이 뼈저리게 느껴져서.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돌리고 손등으로 입술 위를 누르고 있을 때, 국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네, 리엘라 테니어.”
“전하!”
레이안이 저에게 달라붙는 대신들에게 잠시만 기다리라 말하면서 리엘라에게 다가왔다. 그는 놀란 표정의 리엘라를 보더니 연회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 건가? 하긴, 어지간해서는 이 연회장까지 써 가면서 대책 본부를 만들 일이 잘 없지. 드래곤의 활동은 대부분 예정되어 있고, 그 전에 준비를 다 끝내 놓으니까. 이 연회장을 다시 쓰는 것은 40여 년 전에 호슨 공작이 네이판타를 상대했을 때 이후로 처음일 거야. 이쪽으로 와.”
레이안은 앞서 걸으며 리엘라를 이끌었다. 시끄러운 연회장을 벗어나면서도 리엘라는 계속 고개를 돌려 하운의 이름이 붙은 화살표를 바라보았다. 칠판의 아래에 있던 보석술사 한 명이 마치 누군가와 이야기하듯 허공에 뭐라 말하더니 어두운 얼굴로 하운의 화살표를 뒤로 물렀다. 그리고 그 옆에 검은 동그라미 하나를 붙였다.
“저기, 죄송합니다만 전하. 저기 저 검은 동그라미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까요?”
평소라면 감히 먼저 국왕에게 뭔가를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했을 텐데, 하운과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하니 고민할 새도 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저건… 사망자 100명당 하나씩 붙이는 표시지. 오늘 전투에서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온 모양이군. 아무래도 전세가 밀렸는지 좀 후퇴도 했고.”
연회장의 옆 복도로 나온 레이안은 리엘라가 나오자 문을 닫았다.
“그렇게 어두운 표정 할 것 없어. 전쟁 중의 흔한 하루일 뿐이니까. 하운 녀석만 살아 있으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어.”
그 말에 리엘라는 안심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더 걱정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저기에서 버텨야 하는 것은 하운이라는 소리였다.
막연하게 상상만 하고 있던 전쟁의 일면을 보게 된 리엘라는 가슴이 더욱 무거워졌다. 공작가의 보석들을 대부분 내놓고, 호슨 공작이 물려준 돈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돕고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자신이 좀 더 도울 수 있는 것이 없을까.
“문제는 하운이 아니라 보석들이지. 워낙에 네이판타가 난동을 부리는 탓에 보석술사들의 보석이 빠르게 힘을 잃고 있거든.”
그 말에 리엘라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내 피.’
몇 방울로도 여러 송이의 꽃을 환하게 피웠다. 만약 자신이 피를 이용해서 빛나는 꽃을 만들어 낸다면. 그러면 하운이 좀 더 빨리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리엘라는 저도 모르게 레이안의 옷을 붙잡았다.
“전하, 저기….”
그 순간 떠나기 전날, 하운이 몇 번이나 신신당부하던 말이 생각났다.
“절대 그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당신을 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나를 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왜 그러지?”
레이안이 저를 붙잡은 리엘라를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레이안을 만난 횟수는 많지 않았다. 그래도 그가 진심으로 동생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하운을 위해서라면….
하지만 그 순간 다시 하운의 목소리가 리엘라의 머릿속에 울렸다. 그 누구에게도.
“혹시 뭐 도움 될 것이라도 있나?”
마음이라도 읽은 것일까. 리엘라는 레이안의 질문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아쉽군.”
레이안은 리엘라를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혹시 자네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나 싶었거든.”
“…….”
지금까지와 다른, 감정 없는 레이안의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제 능력에 대해서 알고 있을 리가 없는데, 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리엘라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자 레이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왜 그렇게 굳었어? 워낙에 시급한 상황이라 왕실에서 공작저 보석을 가져가긴 했지만 그 이상 뭘 더 가져가려 하는 건 아니야. 그래도 혹시나 왕실 몰래 숨겨 둔 보석이 있나 싶어서 물어본 거야. 알다시피 호슨 공작이 몰래 한 일이 좀 많아야지. 자네도 공감하지?”
레이안은 다시 평소와 같은 밝은 목소리로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리엘라는 레이안 몰래 소름이 돋았던 손등을 쓸어 만지며 말했다.
“그런데 전하, 오늘은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는지요.”
“아, 그게 말이야. 자네가 꼭 필요한 일이 있어서.”
레이안은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린 리엘라는 그가 자신을 어디로 안내했는지 알았다.
“여긴 왕궁 보석의 방….”
“응.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구.”
레이안이 문을 연 순간 그 안에서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것이 있었다. 철썩!
“으아악!”
다짜고짜 날아온 것이 자신에게 들러붙자 리엘라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다 문득 이 감각이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에 찰싹, 손목에 찰싹, 가슴 위에 찰싹. 그 외에 다른 것들도 찰싹찰싹. 마치 집에 돌아온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처럼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들.
그것들은 전부 에르첼라의 컬렉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