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Heaven Sword RAW novel - chapter 53
비로소 여자가 잠에서 깨어나 놀란 얼굴로 쳐다본다.
그는 여자의 등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 손에는 예리하
기 이를 데 없는 유엽도가 들려있었다.
여자는 공포에 질렸다.
등 밑으로 해서 옆구리에 와 닿는 차디찬 감촉에 죽음을 느
꼈는지 사시나무 떨 듯이 떤다.
그는 여자의 입술 위에 손가락을 댄 다음 천천히 손을 땠
다.
여자는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소리를 지를 생각조차 못했
다. 그가 내뿜는 독기(毒氣)에 영혼마저 얼어버린 듯 했다.
그는 여자의 눈을 쓸어 내렸다.
“사, 살려……”
그는 다시 여자의 입술에 손을 갖다 댔다.
여자는 눈썹을 바르르 떤다. 하지만 눈을 뜨거나 소리를 지
르지는 못했다. 그가 요구하는 대로 듣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
롭다는 것을 직감했으리라.
그렇게 긴 시간이 흘렀다.
여자는 옆구리에 닿았던 차가운 감촉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
다. 등 밑으로 들어와 있던 손도 빠져나갔다. 그래도 여자는
눈을 뜨지 못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남아있지 않았
다. 아니, 그래서는 안될 것 같았다.
다시 긴 시간이 흘렀다.
여자는 갑갑함을 이기지 못하고 살그머니 눈을 떴다.
우선 남편이 누워있던 옆자리를 살펴보았다. 아무도 없다.
이제는 방안을 휘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 어둠이 눈에 익지
않은 탓인지 까만 어둠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잠시 그대로 있었다.
이윽고 어둠이 눈에 익어 방안 정경이 보이게 되자, 여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여자는 살그머니 몸을 일으켜 보았다.
금방이라도 섬뜩한 감촉이 옆구리나 목에 닿을 것 같아 부
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여자가 몸을 완전히 일으킨 다음에도 상상했던 감촉
은 다가오지 않았다.
여자는 조심스럽게 침상에서 내려와 유등(油燈)있는 곳으로
갔다.
부싯돌을 집어들고 켜댔지만 손이 워낙 떨리고 있어 불꽃이
잘 옮겨 붙지 않는다.
이윽고 유등에 불이 붙자, 여자는 황급히 방안을 둘러보았
다.
정말 아무도 없다.
마치 꿈속의 한 장면처럼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방안의
정경은 여자가 잠들기 전과 똑같았다.
여인에 홀린 것일까? 아니면 악몽(惡夢)을 꾼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등 밑으로 들어왔던 건장한 사내의 팔
뚝이, 옆구리에 닿았던 싸늘한 감촉이, 살결에 닿았던- 남편
과는 전혀 다른- 돌멩이처럼 단단했던 근육이 너무 생생했다.
남편은……? 남편은 이 밤에 어디로 간 것일까?
여자는 서둘러 옷을 입기 시작했다.
옷을 입는 동안에도 그녀의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은신하고 있던 배로 돌아왔다.
오늘밤은 무척 위험했다.
그들 세 명은 무서운 고수다.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고 자신
했는데 범가에서부터 집요하게 뒤를 쫓고 있다.
그들이 있는 한 안심하고 일을 하기에는 틀렸다.
여기서 다른 곳으로 간다면……? 필요 없다. 그들은 목표한
곳에 먼저 가 있으리라. 그리고 오늘 같은 일이 반복되겠지.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
언제나 오늘처럼 운이 좋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그는 뱃전에 올라 행낭을 펼쳤다.
행낭 속에 감춰져 있던 여러 가지 병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겉옷을 벗고 병대(兵帶)를 걸쳤다.
만자탈을 왼쪽 어깨 뒤에다 찔러 넣었다. 십자표(十字 )는
허리춤에 찔러 넣고, 수리검은 등뒤로 감췄다. 비단검(飛湍
劍)은 허리춤에, 죽침(竹鍼)은 양쪽 가슴에……
행낭에서 쏟아진 많은 암기들을 하나 남김없이 병대 속에
집어넣은 그는 뱃전에 뉘어져있는 철검(鐵劍) 다섯 개 중에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는 절대 비싼 병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가지 수는 많지만 하나같이 동전 몇 문이면 살 수 있는 것
들만 사용한다. 그가 하는 일에는 병기를 회수할 틈이 없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단 한 번뿐인 기회를 사용했으면 망설이지
말고 물러서야 한다.
또 오늘 같은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석가에 잠입할 때 가져갔던 무기들은 모두 지붕 위에 놓고
왔다. 수리검 한 자루만 빼고.
범가에서부터 쫓아온 무인들은 사내를 베자마자 일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느꼈으리라.
똑같이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인데도 무인과 범인(凡人)은 살
맛이 다르다. 무인은 싱싱하고 탄력적인 맛을 주는 반면에 범
인은 물렁하고 밋밋하다.
그들은 죽은 사내를 중심으로 해서 인근을 샅샅이 뒤졌으리
라.
무인 한 명이 그가 누워있는 방으로 들어온 것이 좋은 증거
다. 무인은 침상 곁으로 다가와 잠자는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
더니 옷을 건드려 보았다. 그리고는 물러갔다. 만약 옷 속에
서 단검 한 자루라도 나왔다면 일은 크게 틀어졌으리라.
그는 모든 준비를 끝냈다.
이건 이상한 싸움이다.
목표와는 크게 동떨어진 싸움이지 않은가.
하지만 범가에서부터 뒤쫓아온 무인들을 제거하지 않는 한
그가 움직일 공간은 없다.
이런 싸움은 무척 힘들다.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는 것은 고수를 암살하는 경우보다
훨씬 힘이 든다. 이런 싸움은 늘 준비해야 되는 것 중에 하나
지만 되도록 피하고 싶은 게 사실이다.
그는 습관대로 발끝으로만 걸어 어둠 속으로 묻혀갔다.
3
“어떻게 보았느냐?”
광풍사랑 범장이 침통한 표정으로 물었다.
“임기응변이 뛰어났습니다.”
범위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는 적엽명과 외관영 영주 석두와의 싸움을 보고 난 다음,
해랑검법의 한계를 느꼈다. 해랑검법은 해적들을 소탕하기 위
해 만든 검법으로 매우 실전적이다. 그러나 해랑검법의 모든
초식을 떠올려봐도 석두를 베어낸 검공은 감당할 자신이 없었
다.
다음에 그는 대검법을 생각했다. 대검법은 망망대해의 기운
을 받으며 수련한다. 초식을 수련하는 검법이 아니라 마음을
수련하는 검법인 것이다.
크게는 바다를, 작게는 밀려오는 파도를 베어버린다는 심정
으로 일격필살(一擊必殺)을 익힌다. 다른 것을 익힐 수도 있
다. 광대무변한 바다와 하나가 된다는 마음을 익힐 수도 있
고, 바다에 떠오르는 아침햇살을 갈라버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전가의 무인들이 쇄각대팔검에서 자신만의 검을 가꾸듯이,
범가 무인들 중 대검법을 익히는 사람들은 목표를 어디에 두
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검을 배우게 된다.
그렇기에 대검법은 일정한 경지에 도달한 검인만이 수련할
수 있다. 사부도 없으며 제자도 없다. 드넓은 바다와 인간,
그리고 검 한 자루만 있는 곳에서 무엇을 얻고 못 얻고는 순
전히 개인의 능력에 달려있다.
대체적으로 대검법을 익힌 범가 무인들은 바다를 갈라 버린
다와 바다를 닮은 큰 검을 전개한다는 심정으로 검을 수련했
다.
그렇다면 주는 것 없이 혼자서 검법을 익히란 말인가?
주는 것은 있다.
열두 자로 이루어진 십이자결(十二字訣).
– 제(提), 나(拿), 봉(封), 폐(閉), 점(粘), 점( ), 방
( ), 첩(貼), 래(來), 규(叫), 순(順), 송(送)
끌어 일으키고, 잡고, 북돋우고, 단절하고, 끈끈하게 달라
붙고, 찰지고, 도와주고, 접근하고, 돌아오고, 순응하고, 보
낸다.
어떤 검공을 익히느냐는 자유다. 허나 목표가 다르고 사용
하는 검공이 다르다 할지라도 반드시 십이자결 안에서 검을
펼쳐야 한다.
범위는 거센 파도가 일으키는 포말에 착안했다.
바다가 포말을 일으키기 직전을 벤다.
진기, 안광, 속도, 변화…… 모든 것이 하나로 합쳐지기 전
에는, 아니 합쳐졌다 할지라도 최고조에 다다르지 않는 이상
베어낼 수 없는 검법.
‘대검법이라면 적엽명을 상대할 수 있다.’
그 날부터 범위는 바닷가에서 살았다.
가물함 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그가 가물함 통령으로
있는 것은 가물함의 전반적인 분야를 배우라는 측면이 강했
고, 가물함을 발전시키라는 의미는 약했다. 가물함을 발전시
키는 사람은 가물함 수좌인 하파로 충분하리라.
범위는 바닷가에 움막을 짓고 동이 트기 전에 해변으로 나
와 자정이 넘어서야 돌아가곤 했다.
바다가 포말을 일으키는 순간을 포착하여 베어낼 수 있다면
적엽명이 검을 전개하는 순간도 포착할 수 있으리라. 적엽명
뿐만이 아니라 해남도에서 제일 빠른 검법이라는 무음검법도,
건곤검 한혁도, 아버지도, 장문인도…… 모두 상대할 수 있으
리라.
범위가 임기응변이 뛰어났다는 말로 적엽명을 평가절하(平
價切下)한 데는 그만한 자신감이 있어 한 말이었다.
범장은 잔잔한 바다를 바라보며 계속 질문해 왔다.
“무엇을 주목했느냐?”
“……?”
“무엇을 보고 임기응변이 뛰어나다고 말하는 게냐.”
“검입니다.”
“검…… 이라……”
“……”
“틀렸다.”
“옛?”
“적을 잡으려면 말을 쏘라는 말이 있다. 적엽명을 상대하려
면 발을 주목했어야 돼.”
“보법…… 입니까?”
범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엽명은…… 한 쪽 발을 움직이지 않았다. 전가주의 검
을…… 실낱같은 차이로 피했어.”
범장과 범위는 잠시 동안 말을 잊고 솜같이 포근해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범위였다.
“확실히 효과적이군요.”
“……”
“실낱같은 차이로 피하니 검의 등뒤에 선 격이 됩니다. 이
제 와서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어요. 후후! 전가주님이 놀랍
군요. 적엽명이 전개하는 검은 전검…… 허를 놓치지 않는 검
을 받고도 피할 수 있었다니 대단한 무공입니다.”
“놀라운 사람이었지.”
광풍사랑의 음성에는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범위는 근래 들어 아버지가 많이 약해졌다는 생각을 금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전가주와 적엽명의 비무를 보고 난 다음부
터다. 그 때부터 아버지는 당신의 검공에 회의(懷疑)를 느끼
고 있는 듯 하다.
“단순히 전검뿐이었다면 전가주도 해볼 만 했어.”
범위는 동감했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전가주가 먼저 검
을 전개했으되 적엽명이 피했다. 간발의 차로. 그 때, 상황은
역전된다. 전가주는 무방비 상태로 등을 보이고 있는 셈이고,
적엽명은 등뒤로 검을 밀어 넣는 형세다. 그런데 피해냈다.
완벽한 수비검을 가지고 있다는 전가주가 아니면 불가능했으
리라.
‘수비하면 진다.’
범위가 내린 결론이었다.
범위는 자신이 그 상황에 선 듯 긴장했다.
내 몸은 어떻게 움직였을까?
역시 대검법뿐인데…… 적엽명이 검을 전개하는 순간은? 늦
다. 전가주가 결정적으로 패한 순간은 검을 맞대고 있을 때.
자신이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 할지라도 내력으로 밀어붙였을
것이고…… 각법이 날아오는 순간, 검을 쳐냈어야 한다. 전가
주는 동시에 쳐냈다. 너무 빠르다. 간발의 차에 불과하지만
각법과 전가주의 검이 서로 상쇄하는 사이에 심장을 허용 당
했다.
범위는 자신이 쓰러지는 환상을 보고 몸을 흠칫 떨었다. 마
치 자신의 심장에 검이 박히는 것 같았다.
‘당했다.’
범위는 주먹을 으스러지게 움켜쥐었다.
지금 수련하고 있는 대검법이라면 적엽명이 각법을 전개하
는 순간에 검을 쳐냈어야 한다.
말로 하기는 쉽다. 그러나 환상은 그렇지 못했다. 환상 속
에서는 자신도 전가주와 똑같은 검을 전개했다.
몸에 익어야 한다. 검을 갓 잡은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지
만 촌각(寸刻)을 열로 쪼갠 것보다도 더 빠르고 정확한 검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범위는 전검의 효용을 알았다.
적엽명은 사람을 죽이면서, 실전을 통해서 촌각을 열로 쪼
갠 것보다 더 빠른 검을 익혔다. 그런 사람이니 모든 검법이
허점 투성이로 보일 테고…… 이길 수밖에 없다.
오오! 전검!
그것은 허점을 놓치지 않는 검법이 아니다.
촌각보다 더 빠르게 검을 전개할 수 있는 진정한 쾌검이다.
범위는 곁에 아버지만 없다면 검을 들고 바다로 뛰어들고
싶었다. 그래서 밀려오는 파도를 상대로 대검법을 전개해보고
싶었다.
전검…… 그것이야말로 세상에서 유일하게 대검법과 겨룰
수 있는 검법이지 않은가.
그는 자신이 왜 이토록 적엽명에게 투지를 불사르고 있는
지 알지 못했다. 팔 년 전에 당한 패배는 벌써 잊어버렸다.
그건 확신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만은 수치로 생각할
망정 복수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
유소청을 빼앗긴 상실감(喪失感)?
그것도 아니다. 유소청의 마음이 돌아서기를 오랫동안 기다
린 것은 사실이지만, 적엽명을 뱃전에서 본 순간 그녀가 돌아
설 것은 예상했다. 그리고 그것이 순리라고 생각하며, 뻥 뚫
린 마음을 가혹한 수련으로 메웠다.
무인의 본능……? 그렇다. 적엽명은 세상에서 다시 만날 수
없는 호적수가 되어서 돌아왔다. 해랑검법이면 충분한 줄 알
았던 범위에게 각성하고 좀 더 노력하라고 말해버린 무인.
“중원에 이런 속담이 있다.”
생각에 잠겨있던 범위는 아버지의 말에 문득 정신을 차렸
다.
“장강의 뒤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고 하더구나.”
“아버님!”
범위는 소리쳤다.
아버지의 나약한 말이 싫었다. 그런 말이 자신의 투지까지
갉아먹는 느낌이 들어 귀를 막고 싶었다.
“들어라.”
광풍사랑 범장은 아들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전가주를 보고 느낀 것인데…… 우리는 그 누구도 적엽명
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전검만 봤다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
았을 게다. 그가 전개한 신법…… 그것은 소림사의 금강부동
신법(金剛不動身法)과 맥을 같이 한다. 정중동(靜中動) 동중
정(動中靜)의 극치. 적엽명이 전검을 제대로 익혔고, 금강부
동신법이라는 황담색마를 얻었다면…… 지금 너희들은 강성오
가주를, 아니지 이제는 사가주지. 강성사가주를 제외한 그 누
구도 눈 아래로 접어둘 게다. 어쩌면 강성사가주조차 눈 아래
로 둘지 모르지.”
“……”
범위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
전 같으면 모르겠으되 대검법에 몰두한 지금은 확실히 자신
이 선다. 아버님은 차마 생각하지 못하지만 석가주와 유가주
라면 지금 당장 검을 겨뤄도 흔들리지 않으리라.
“너희들은 적엽명이라는 자가 있어서 행복할 줄 알아라. 벗
인지 적인지 애매모호 하지만……”
아버지가 몸을 일으킨다.
범위는 문득 거구의 아버지가 알맹이가 빠져버린 껍데기처
럼 느껴졌다. 지금 아버지가 보여준 일련의 말과 행동은 평소
질풍처럼 몰아치던 아버지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참! 한광이 폐관(閉關)에 들었다더구나.”
백사장을 밟으며 멀어져 가던 아버지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한광마저……’
범위는 바다 물결에 눈을 두었다.
깊은 사색에 잠겨 백사장을 걸어가시는 아버지는 보고 싶지
않았다. 나중은 몰라도 지금은 안 된다. 아버지의 약한 모습
은 나중에…… 적엽명을 꺾고 난 다음에 봐도 충분하다.
그것보다 범위를 놀라게 한 것은 한광의 폐관수련이다.
한광은 적노검법 팔 초식을 극성으로 익혔다. 본인은 펼친
적이 없지만 눈치를 보면 일지검법과 환우검법도 손을 댄 듯
하다. 어쩌면 건곤검법과 대념검법까지 섭렵했을 지도 모른
다.
한광은 무공은 청천수를 꺾으면서부터 알려졌다.
건곤검 한혁만이 유일한 상대라고 자타가 공인하던 청천수
를 무너트린 일은 당시 해남도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런 한광이 폐관에 들었다.
그는 무슨 무공을 익히느라고 폐관에 들었을까?
그도 적엽명의 검을 보고 충격을 받았을까?
충격을 받은 사람은 많다.
아버지가 요즘 들어 나약한 소리를 많이 하시는 것이 그 영
향이요, 술이라면 근처에도 가지 않던 석가주가 술을 즐기는
것도 그 때문이다. 유가주는 서재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
고 한다. 하지만 글 읽는 소리가 멀리까지 쨍쨍 울린다니 유
가주도 충격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유가주 정도 되는 사람이
라면 소리 없이 묵독(默讀)하는 것이 정상일 테니까.
해남오지 중에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사람은 석불이다.
그는 정은구에서 석가로 돌아간 즉시 방문을 걸어 잠갔다고
한다.
그렇다.
똑 같이 충격을 받았어도 노웅(老雄)들은 무너지고, 청년들
은 일어선다.
장강의 뒤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는 불변의 법칙처럼.
범위는 오진검을 집어들고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아버지가 걸어간 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축 늘어진 듯한 어깨가 보기 싫어서.
* * *
석가에 내려오는 검법은 암암검과 무음검이다.
아버지 석중은 암암검에 달통했다. 그러나 석불은 어쩐지
유약해 보이는 암암검이 싫어 무음검을 택했다.
아버지와 자식이 각기 다른 검법에 치중한다는 것이 어찌
보면 이상하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석가 사람들은 전혀 이
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상하게 보지 않을 뿐 아니라 당연
하게까지 생각한다.
할아버지 대(代)에는 무음검을 익히셨다. 그러나 증조할아
버지 대에는 암암검에 치중했고, 다시 고조부 대에는 무음검
이다.
석가 무인들은 대를 건너가며 검법을 이어왔다.
암암검과 무음검은 각기 특성이 뚜렷하면서도 크게 대별되
기 때문이다.
두 검법이 음(陰)의 검법이라는 점은 똑 같다.
음양(陰陽)이란 무엇인가. 하늘은 양이오, 땅은 음이다. 밝
음은 양이오, 어둠은 음이다. 강함은 양이요, 부드러움은 음
이다. 공격은 양이요, 방어는 음이다. 검은 양이요, 검집은
음이다. 인간이 검을 잡고 서있을 때는 검이 양이요, 인간이
음이다.
암암검과 무음검은 음에서 시작해서 음으로 끝난다.
대체적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검법들은 음에서 시작하여 양
으로 변환한 다음 음으로 종결된다. 발검(拔劍)은 부드럽게,
적을 공격할 때는 강하게, 검을 회수할 때는 다시 부드럽
게……
암암검과 무음검은 검이 검집에서 나와 검집으로 들어갈 때
까지 모두 음이다. 공격할 때조차 부드럽게 공격한다는 특징
을 지닌다. 너무 부드럽다 못해 당금에 와서는 음유(陰柔)하
게 조차 느껴지는 검법이다.
암암검은 소리에 치중했다.
소리 없이 검을 빼고, 소리 없이 공격하고, 소리 없이 물러
선다.
그렇게 하고도 적을 벨 수 있다고 생각하는 무인은 아무도
없으리라. ‘소리 없이’라는 말 자체가 ‘살짝”천천히”조심스
럽게’라는 말들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그러나 암암검을 마
주 대한 무인들은 그런 소리를 하지 못한다. 언제 뽑혔는지
모를 검, 검을 보는 순간 벌써 육신을 저미고 지나가는 검.
암암검을 익힌 무인은 발검부터 최선을 다한다. 그렇기에
암암검을 대하는 무인들은 상대가 검을 뽑았든 뽑지 않았든
간에 최선을 다해 공격을 펼쳐야 한다. 상대가 검을 뽑을 때
까지 기다렸다가는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암암검은 빠르다.
너무 빨라 소리가 나지 않는다. 웬만한 사람들은 번뜩이는
섬광 한 줄기만 보는 것이 고작이다. 초식의 시작은 늘 발검
이며, 초식의 끝은 늘 검을 회수하는 것으로 끝나는, 상리(常
理)에 벗어난 검법.
그런 뜻에서 보면 무음검과 암암검은 서로 이름을 바꿔야
하지 않는가.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무음검.
무음검은 암암검과는 다른 의미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다.
무음검의 검리는 적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빠른 길을
찾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것이 쾌의 진수(眞髓)다.
바위 뒤에 있는 적을 베기 위해서는 빠른 검법이 별로 소용
되지 않는다. 그 때는 바위를 돌아 적을 발견한 다음 베는 것
이 순리다.
적을 발견한 다음 베는 것.
이 부분에서 가장 빠른 검법이 암암검이다. 그러나 적이 바
위 뒤에 있다는 것을 포착한 다음 적을 베기까지 가장 빠른
검법을 들라면 역시 무음검이다.
이런 경우, 길가는 무인을 붙잡아 놓고 바위를 베고 난 다
음 적을 베겠냐고 물어보면 백이면 백 ‘미쳤냐’고 말할 것이
다. 실제는 그런 행동을 하면서 말이다.
무음검에서는 적이 들고 선 검을 바위로 본다.
적이 든 검과 마주칠 일이 없지 않은가. 바위를 벨 필요가
무엇인가. 적을 베어야 한다.
무음검은 적이 든 검과 마주치지 않으며, 곧바로 적을 베어
간다. 그런 의미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 검이 무음검이다. 무
음검은 나와 적 사이에 가장 빠른 길을 찾는 검이다. 어떤 때
는 곧바로, 어떤 때는 돌아서, 어떤 때는 일 검을 흘린 다음
에……
암암검과 무음검…… 둘 다 섬광을 갈라버릴 수 있는 쾌검
이 아니면 전개할 수 없는 검이다.
석불은 무심하게 앉아 탁자 위를 바라보았다.
긴장이라고는 일말도 찾아 볼 수 없는 자세다. 힘없이 축
늘어진 어깨하며, 몽롱한 듯한 눈빛은 그가 지금 다른 생각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른 생각? 석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시간이 무심하게 흘렀지만 석불이 앉아있는 자세에는 변함
없었다.
일순, 석불의 몸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눈 깜짝할 사이.
석불은 다른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
다.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촛불도 일렁이지 않는다. 날카로운 예기(銳氣)가 방안 공기
를 가르고 지나간 것은 분명한데, 무엇이 공기를 갈랐는지,
어떻게 무엇을 갈랐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석불의 눈가 근육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탁자 위에 고정되었다.
“후우……!”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무엇인가 못마땅할 때 내뿜는 한숨이다.
석불은 손으로 아무 것도 없는 탁자 위를 쓸어버리고 다시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개미가 기어올라온다.
이번에는 어느 방향에서 갈라볼까.
개미의 몸통을 자르는 것은 웬만큼 검을 익힌 무인이라면
누구나 가능하다. 하지만 개미를 머리부터 꼬리까지 일직선으
로 갈라버리는 일은 쉽지 않다.
개미는 부지런히 움직인다.
우선 방향을 잡기가 어렵다. 가만히 고정시켜 놓는다면 장
난삼아 갈라보기를 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움직이는 개미
를 일직선으로 가르는 것은 심심풀이로 할 수 있는 장난을 벗
어난다. 거기에 한 술 더 떠 앉은 자세에서 두 발을 고정시키
고, 움직이는 개미를 가르라고 하는 것은…… 그건 이미 지고
한 검법이 된다.
이처럼 개미 베기는 어린아이들 장난에서부터 지고한 상승
검법을 수련하는 열쇠가 된다.
파아앗!
또 다시 어둠이 일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