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Heaven Sword RAW novel - chapter 56
여족인을 따라 오늘 들어온 은궤와 비단이 있는 곳에 이르
렀다.
그 곳은 쌀을 쌓아놓은 뒤편에 만들어진 조그만 공간에 불
과했다. 그리고 은궤와 비단 외에는 값져 보이는 것이 없었
다.
“에게! 이게 전부야?”
“지난달에 전부 날라 갔잖아.”
“보통 얼마나 쌓여?”
“액수는 알 수 없지. 은궤가 많으니까.”
“다른 자사들 보다 더 긁어모으는 모양이지?”
“그 놈이 그 놈이지 뭐.”
경주자사에게는 아무런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뇌물을 좋아하고 놀기를 좋아해 기강이 문란하다는 것을 제
외하면 크게 나무랄 곳이 없었다.
황유귀는 기장[稷]을 구한다는 핑계를 대고 관부 밖으로 나
왔다.
팔구 월은 말이 가장 살찌는 계절이다. 그런데도 살이 찌지
않는 말은 기장을 먹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기장에는 찰기장[黍]과 메기장[粳黍]이 있다.
중원 동북부 지방에서는 황주(黃酒)를 만드는 데 사용하며,
떡을 만들어 먹어도 별미다. 그러나 수확량이 적고 주식으로
이용하기가 적합하지 않아 재배하는 곳이 드문 편이다.
황유귀는 기장을 실을 수레를 복산(福山) 방향으로 몰았다.
기장을 구하려면 산으로 가야 한다. 수확은 많지 않지만 메
마른 땅에서도 잘 자라기 때문에 산간지방에서 주로 재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주부를 빠져나왔다.
뒤따르는 사람이 없는 지 살펴보는 것은 기본이다. 산이나
들판도 살펴봐야 한다. 마차는 멀리서도 보이지 때문에 감시
하기가 용이하다.
황유귀는 너른 들판을 지나 산굽이를 도는 순간 품속에서
죽통(竹筒)을 꺼내 길가에 던졌다.
돌팔매질을 하듯이 날랜 솜씨였다.
그는 계속 복산 쪽으로 향했다.
황유귀가 모는 마차는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져갔다.
그의 마차가 까만 점으로 변해 보이지 않을 무렵이 되어서
야 한백은 은신해 있던 곳에서 기어 나왔다.
황유귀가 관부에 들어가지 전, 미리 약정해 놓은 장소는 모
두 열 군데다. 그 중에 복산 쪽으로 가는 길목에서는 이곳이
유일하게 죽통을 전달할 수 있는 곳이다. 다른 곳은 벌판이나
야트막한 둔덕 정상에 올라서면 마부의 세세한 동작까지 뚫어
볼 수 있다.
한백은 황유귀가 던진 죽통을 집어들고 안에서 서신 한 장
을 꺼내 펼쳤다.
노노가의 창기들은 오히려 이런 일을 즐기는 듯 했다.
적엽명은 일이 생길 적마다 막대한 인원을 가지고 있는 호
귀의 도움을 청했고, 호귀는 노노가의 창기들 중에 행동이 민
첩하고 입이 무거운 창기를 불러 은밀히 지시를 내리곤 했다.
한백이 황유귀로부터 죽통은 건네 받은 지 이틀 후, 잔화
(殘花)는 뇌주반도로 건너가는 배에 승선했다.
그녀가 무사히 뇌주반도로 건너가게 될지, 아니면 경주해협
을 건너는 도중 고기밥으로 변하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쨌든 잔화가 무사히 뇌주반도로 건너간다면 한 가지는 확
인할 수 있다.
노장군에게 밀서를 전달할 통로를 뚫은 것.
그러나 잔화의 시신은 팔월 열 사흘, 잔화가 배에 승선한
다음 날 발견되었다.
그녀는 간살(姦殺)을 당한 듯 알몸이었고 하복부가 보기 민
망하리 만치 짓이겨져 있었다.
경주자사가 해남도에서 빼돌린 은궤로 무엇을 하고 있는 지
알아보라는 내용의 밀서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중대한 내용이
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진다면 경주자사는 오히려 자신이 해
남도에 유배될 지도 모른다.
단순한 간살인가? 아니면 경주자사가 사람을 시켜서 죽인
것일까? 아니면 암흑 속에 숨어있는 집단이 움직인 것인가.
경주자사가 암흑 속에 숨어있는 인물은 아닐까?
“애꿎은 희생은 이것으로 끝내야겠어.”
적엽명이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잔화의 시신은 그 누가 보더라도 처참했다.
3
“아니, 이거…… 장군님 아니십니까?”
화문은 느닷없이 들려오는 소리에 당황했다.
그가 움찔 놀라며 뒤를 돌아보자 낯이 익기는 한데 어디서
봤는지 도체 기억할 수 없는 사람이 반가운 듯 달려왔다.
“아이구! 이거 얼마 만입니까. 저 지원(池瑗)입니다. 생각
안 나십니까?”
화문은 정말 당황했다. 어디서 봤는지 머리를 쥐어 짜봐도
가물거릴 뿐이다. 그러나 이 자는 분명 장군님이라고 불렀다.
“장군님,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어디 가서 술이나 한 잔 하
죠. 제가 받아들이겠습니다. 야! 이 분이 어떤 분이신데 그
래! 군침 삼키지 말고 썩 물러가!”
사내는 취채에게 한 마디 던지고는 다짜고짜 화문의 옷소매
를 잡아당겼다. 사내가 보기에는 취채가 호객(呼客) 행위를
하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하기는 그렇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취채에게서는
몸을 파는 여인들이 드러내는 권태로움이 진득하게 묻어난다.
거기에 물분까지 진하게 발라 ‘나 창기입니다.’하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누구냐?”
화문은 잡힌 옷소매를 떨침과 동시에 반대로 사내의 손목을
잡아채며 물었다.
사내는 키가 작았지만 몸이 다부졌다. 얼굴은 평범했지만
관자놀이 부근에서부터 턱밑까지 길게 그어진 검상(劍傷)이
있어 함부로 대하지 못할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화문에게
는 어린아이처럼 보일 뿐이다.
“참내 장군님도…… 장군님, 이러면 정말 섭섭합니다. 모두
한 목숨, 한 형제라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데……”
“어느 전투에서 싸웠지?”
화문은 음성을 부드럽게 고쳐서 말했다.
모두 한 목숨, 한 형제.
분명히 자신이 한 말이다. 전장에 나가기 전 부하들은 훈시
(訓示)할 때마다 외치던 말이다. 이 자는 자신의 부하로 출전
한 적이 있는 것 같다.
“아이구! 정말 장군님 기억력은 알아준다니까. 왜 우심산
(尤甚山) 전투에도 참여했고, 팔각보(八角堡)에서도 싸우지
않았습니까.”
“아!”
화문은 이제야 사내가 누군지 기억났다.
“너 지원이구나! 맞아! 지원이야.”
화문은 지원의 양손을 거머쥐었다.
지원의 손도 작은 편이 아니지만 화문에게 잡히자 어린아이
손처럼 작아 보였다.
화문은 반가웠다.
지원은 군졸로 있기에는 아까운 용맹을 지녔다. 출신만 비
천하지 않았다면 장수가 되고도 남을 자였다. 언제 기회가 있
으면 천거해야지 하고 눈 여겨 봐뒀는데……
지원은 팔각보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었다.
관자놀이에서부터 아래턱뼈까지 이어진 상처가 그 때 입은
것이다.
원의 무장들은 검보다 도를 좋아한다.
도폭이 여덟 치에 이르는 대도는 휘두르는 위풍도 거셀 뿐
만 아니라 빗겨 맞아도 팔, 다리를 잘라버리는 것은 예사다.
지원의 얼굴을 그어버린 자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지원
이 머리를 내주며 내지른 창에 복부가 꿰뚫렸다. 원의 부장쯤
되는 자였는데 즉사했다.
지원은 싸움이 끝난 후에야 발견되었다. 뭇 시체들 틈에 끼
여 꼼지락거리는 모습이 꼭 귀신같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턱
뼈까지 잘라져버려 살아날 수 있을지도 의문스러웠다.
그 후, 싸움터에서 지원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외진 해남도에서 만날 줄이야.
“장군님도…… 아까 지원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런가? 미안하네. 바로 알아보지 못해서.”
“하하! 괜찮습니다. 벌써 십 년 가까이 되가는데요 뭘.”
“벌써 그렇게 됐나? 음! 세월 한 번 무상하구먼.”
“하하! 장군님, 어서 가세요. 제가 술 한 잔 받아들일게
요.”
화문은 자신의 위치를 자각했다.
계속 장군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곤란하다. 벌써 취채의 눈
빛이 틀려지고 있지 않은가.
“하하! 그러지. 오늘은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보자고. 그
런데 그 장군님이라는 소리 좀 그만하게. 난 이제 그 소리만
들으면 먹었던 것도 게워 올라와.”
“왜요?”
“우리가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나? 하루에도 죽을 고비를 수
없이 맞으면서 싸우지 않았나? 그런데 썩을 놈들이 물러가고
나라를 건국하자 또 다시 썩은 놈들이 나타나더군.”
“원의 잔당들 말씀입니까?”
“그거야 문제될 것도 없지. 이미 사태는 기울어졌는데. 변
방 말일세. 나라가 건국된 다음에야 무장입네하고 들어온 애
송이들이 변방에서 깝죽깝죽 하더니 상관으로 들어앉지 뭔가.
배알이 뒤틀려서 때려치우고 나와버렸지.”
“아!”
지원은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장군에도 종류가 있어서 야전에서 잔뼈가 굵은 무장이 있는
가 하면 정치판만 쫓아다니는 무장도 있기 마련이다. 화문 같
은 무장은 배알이 뒤틀린 자들과 같이 어울리는 성격이 못된
다.
“가시죠. 장…… 그럼 앞으로 뭐라고 부르죠?”
“그냥 화문이라고 불러.”
“아무리 그래도……”
“하하! 괜찮다니까. 자, 가세. 뱃속에서 술 벌레들이 술 달
라고 야단법석이야.”
화문은 지원의 등을 떠밀었다.
그는 적엽명에게 미안했다.
그가 방금 임기응변으로 말한 것은 적엽명의 경우였다. 물
론 적엽명은 잔당 나부랭이와 싸우지 않았다. 그는 최전선만
쫓아다녔고, 사태가 기울어진 것과는 상관없이 나라를 위해
죽겠다는 독종들만 상대했다. 나라가 건국된 다음에 무장이
된 사람치고는 같이 어울려도 좋겠다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
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도 그런 것은 아니다.
화문은 건국 당시 전쟁터를 누볐던 장군과 건국된 다음에
임명된 무장들 간에 심각한 알력이 있음을 알고 있는 터였다.
추잡한 일이라고 귓가로 흘려버린 일이 이럴 때 도움이 되
다니. 그러나 신진 무장들을 싸잡아 욕한 것 속에 적엽명이
끼여있는 것 같아 마음으로 용서를 빌었다.
지원이 화문을 데리고 간 곳은 시장 한 구석이었다.
“저희 안 식구입니다. 못난 사람 만나서 고생 많이 했죠.”
“안녕하세요?”
지원의 아내는 전형적인 여족인이다. 한인과 여족인이 혼인
을 하면 양쪽이 전부 불행해지지만 그것도 사람 나름인가 보
다. 지원과 그의 아내는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주위에는 여
족인이 득실거리지만 누구도 지원을 경원시 하지 않았다.
지원의 아내는 옛날에 남편이 모시던 상관이 찾아오자 당황
한 눈치다. 대접은 해야겠는데 마땅한 것이 없어 보인다.
취채가 눈치를 알아채고 동전 몇 닢을 살짝 쥐어주자 더욱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른다.
“뭐해? 빨리 가서 술 받아와.”
지원은 살림살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나 있는 것일까?
화문은 집안에 발을 들여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지원이
살아가는 모습을 짐작했다.
지원 같은 사내는 전쟁을 잊지 못한다. 지원을 만난 것도
도전방 입구다. 그는 분명 도전방에 기생하며 살고 있을 게
다.
지원의 아내가 돼지고기와 찬거리를 수북히 들고 왔다. 그
리고 곧 이어 점소이인 듯 싶은 자가 마유주 한 동이를 들고
왔다.
“호호! 한 동이 가지고 되겠어요? 이봐요, 여기 열 동이만
더 갖다줘요.”
“여, 열 동이요?”
술에 관한 한 어지간해서는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점소이도
열 동이라는 말에는 깜짝 놀랐다.
지원의 아내는 독한 마유주이니 한 동이면 될 줄 알았던 모
양이다. 화문에게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을 양인 것을. 하기
는 취채도 잘못 생각한 것이 있다. 살림을 해보지 않았으니
손님 대접을 어떻게 하는지 알 턱이 있겠는가. 그녀는 평소
안주도 없이 술만 벌컥벌컥 들이키는 화문을 생각하고는 술값
만 쥐어준 것이다.
노노가에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술하면 안주를 물었고,
되도록 비싼 안주를 시키도록 종용했다. 그런데 노노가를 떠
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 때 일은 까마득히 잊어
버린 것이다. 화문을 만난 뒤부터.
취채는 술값을 꺼내 점소이 손에 올려놓았다.
“아니, 이러면…… 이봐, 뭐해! 빨리 술 값 지불하지 않
고.”
지원이 나서며 말렸다.
“하하! 술값이야 누가 내면 어떤가? 이렇게 집으로 들어올
줄 알았으면 선물이라도 사오는 건데. 선물 사온 걸로 치자
구. 그래야 나도 속 편하게 술 마실게 아닌가.”
“장군님, 이러시면……”
“허! 이 사람! 그 놈의 장군 소리 좀 하지 말라니까.”
“네, 그럼……”
그제야 안심을 한 지원의 아내는 곧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구수한 냄새가 집안을 벗어나 시장으로 흘러나갔다.
“엄마, 뭐해?”
“엄마, 맛있는 냄새난다.”
요리를 시작하자마자 시장에서 어린아이 둘이 불쑥 들어서
며 코를 끙끙거렸다.
“이 놈들아! 어서 나가서 놀지 못해! 제 아들놈들입니다.
워낙 철이 없어서.”
“하하! 그 놈들 영특하게 생겼구먼. 자, 이리 와라. 아저씨
가 선물 줄게.”
“장…… 대인, 관두십시오. 괜히 아이들 버릇만……”
하지만 이미 전낭을 열어 동전 열 닢씩을 놓아준 후였다.
아이들은 선뜻 받아들지 못했다. 동전을 손에 올려놓은 채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치를 연신 살폈다. 아이들에게 동전 열
닢은 큰돈이지 않은가. 어른에게도 큰돈인데 하물며 아이들에
게야.
“대인, 너무 많습니다. 한 닢씩만 주셔도……”
“괜찮아. 십 년 만에 만났는데 이 정도 못 주겠는가.”
아이들은 주춤주춤 물러나더니 엄마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
었다. 지원의 아내는 동전 한 닢만을 남기고 모두 챙겨 넣었
다. 그러자 그때서야 아이들은 신이 나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엄마, 우리 먹을 것도 남겨나야 돼.”
한 마디를 남기고.
술에 취한 사내는 아무래도 버겁다.
취채는 이미 인사불성이 되어 휘청거리는 화문을 부축하느
라고 안간힘을 쏟았다.
말이 부축한다는 것이지 그저 고목에 매달린 매미처럼 옆에
붙어있을 뿐이다. 화문이 쓰러지면 취채도 쓰러졌다. 간신히
타이르고, 설득하고, 욕까지 퍼부으면서 일으켜 세우면 몇 발
자국 걷지 못해 다시 엎어졌다.
객잔에 도착해 점소이의 도움까지 받으며 침상에 눕히자 화
문은 정신 없이 골아 떨어졌다.
취채는 십 리 길을 달려온 사람처럼 숨이 턱 끝까지 차 올
랐다.
전신은 이미 후줄근한 땀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그녀는 오늘처럼 취한 화문을 본 적이 없다. 취할 틈이 없
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외줄 타기를 하는 신세에 취하기까지
한다면 그야말로 목을 내놓은 것이나 진배없지 않은가.
오늘은 마음놓고 취했다.
들이키고 싶은 대로 들이키면서 호탕하게 웃기도 하고 옛
무용담(武勇談)을 펼쳐놓기도 했다. 집안에 들어설 적에는 장
군님 소리조차 못 부르게 하던 화문이었지만 술 단지가 일곱
동이 째로 들어서자 옛날의 기개를 마음껏 뽐내기 시작했다.
지원과 화문은 열 동이를 마시고도 다시 세 동이를 더 마셨
다.
열 동이가 바닥났을 무렵, 지원과 화문은 엉망으로 취한 상
태였다. 옆에 누가 있는지, 지금 누구와 술을 마시고 있는 지
도 모르는 것 같았다. 한 소리 또 하고, 또 하고……
취채는 술 열 동이를 다시 시켰다.
아침에 모습을 보이면, 죽지 않고 살아있으면 ‘축하해요.’
라는 말을 듣는 사람.
‘그래, 오늘은 마음놓고 취해봐. 오늘은 죽을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니까 마음놓고……’
어쩌다가 이런 사내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사내라면 이가
갈리는데 또 사내를 사랑하다니.
화문이 장군이었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하지만 믿을 수 없
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된다. 화문이 장군이
라면 그에게 끌리는 마음이 너무 불쌍해진다. 장군이라면……
장군이었다면…… 한낱 창기가 넘보기에는 너무 큰 사내다.
지금까지처럼 검에 목숨을 맡기는 무인이 차라리 좋을 텐데.
취채는 화문에게 다가가 널찍한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푸우! 푸……!”
화문은 코까지 골면서 잔다. 숨을 몰아쉴 때마다 역겨운 마
유주 냄새가 풍겨 나온다. 그래도 취채는 그가 좋았다. 이대
로 영원히 굳어버렸으면.
지원의 아내는 입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졌다.
“넣어 둬. 장군님께서 주신 돈이니. 그러나저러나 가신 줄
도 몰랐으니…… 못 가시게 말리지 그랬어. 많이 취하셨는
데.”
지원은 은덩이 두 개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화문이 떠나면서 취중에 쥐어준 돈.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화문이 워낙 거세게 권했고, 옆에 있
는 여인도 받으라고 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받았지만 은덩이
두 개면 살림을 펴기에 충분한 돈이었다.
과일 행상을 때려치우고 상점을 열 수도 있으며, 땅을 사
서 농사를 지을 수도 있다. 아니면 조그만 배를 사서 고기잡
이를 할 수도 있지 않은가. 어쨌든 지금과는 비교도 안될 것
이다.
남편은 그만한 돈을 넣어두란다.
“말렸죠. 하지만 워낙 크신 분이라 힘이 닿지 않아서……”
“끄응! 나갔다 올게.”
“아침부터 어디를……?”
“어디 계신가 찾아봐야지. 계시면 아침이라도 대접해야지.
술 받아드린다고 모셔와서는 오히려 폐만 끼쳤으니.”
“그래요. 아침 준비 해놓을께요.”
지원도 엊저녁에는 폭음을 했다.
얼굴이 망가진 다음에는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요즘도 비
가 쏟아지는 날에는 얼굴이 쑤셔서 끙끙거리며 앓아 눕곤 한
다. 그런 탓에 그 좋아하던 술도 끊은 것이다.
지원의 아내는 쓰린 속을 참으면서 문밖으로 나서는 남편을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호기에 가득찬 남편을 본 것 같아 기분 좋았다.
도전방 청소를 하는 남편이 늘 안쓰러워 보였는데.
그녀가 엊저녁에 먹다 남은 돼지고기로 볶음요리를 한참 하
고있을 때, 낯선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제 여기 장군님이 오셨다던데……?”
“누구세요?”
“아! 죄송합니다. 제 소개를 먼저 했어야 하는데. 저는 장
군님과 함께 전투를 했던 사람입니다. 말을 듣자하니 어제 장
군님이 오셨다기에 댓바람에 달려왔습니다.”
“아! 그러세요. 누추하지만 들어오세요.”
사내는 서슴없이 들어섰다.
“장군님 성함이……?”
“화문이라고 들었는데 맞나요?”
“아!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군요. 화문 장군. 하하! 옛
날에는 위명이 자자했는데. 지금 어디 계신지?”
“객잔에 드셨을 거예요. 어제 많이 취하셨거든요.”
“거참…… 내가 있었어야 되는데……”
“처음 뵙는 분인데……?”
“아, 저요? 사실 댁의 남편분과는 안면이 없습니다. 장군님
부하가 어디 한둘이라 야지요.”
“그러셨군요.”
“남편분께서는 어디 전투에 출전하셨는지?”
낯선 사내는 서글서글했다. 붙임성도 좋아 초면인데도 쉽게
친근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녀자가 뭘 아나요? 듣기로는 우심산, 팔각보라고 하던
데. 전쟁이야기는 도통하지 않는 분인데 어제는 만취하셔서
그런 이야기를 조금 하셨어요.”
“이런! 나는 통산(通山) 전투와 대야(大冶) 전투에 출전했
는데.”
“네에.”
“아! 이거 아침에 너무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럼 이만.”
“조금 있다가 남편이 올 텐데요. 장군님을 찾는다고 나가셨
거든요. 웬만하면 뵙고 가시는 것이……”
“하하! 저도 찾아봐야죠. 장군님을 찾으면 바로 들리겠습니
다.”
“네. 꼭 들려주세요.”
하루해가 다 지나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들어온 지원은 아내
의 말을 듣자 곧 심각해졌다.
“통산전투, 대야전투라고? 그런 전투는 없었어.”
“네?”
“그 놈, 어떻게 생긴 놈이야?”
지원의 아내는 낯선 사내의 용모를 자세히 설명했다.
“이상해. 장군님이라고 부르지도 못하게 하고, 해남도에는
아무 연고도 없는 데 찾아오시고…… 거기에 뒤를 캐는 사내
라…… 아무래도 장군님을 빨리 찾아야겠어.”
지원은 부리나케 뛰쳐나갔다.
한 낮이 되어 돌아온 지원은 무척 피곤해 보였다.
거의 이틀 밤을 꼬박 새운 셈이다.
“장군님은?”
“못 찾았어. 어제 정오쯤에 나가셨다는데 어디 계신지 도
대체 알 수 있어야지. 객잔이란 객잔은 다 뒤졌는데.”
지원은 침상에 눕자마자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 * *
“해남도에 화문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화문? 그 놈은 홍암의 수족이 아닌가?”
“네.”
“이런 멍청한 놈!”
깊게 부복하고 있던 장군은 날아온 벼루에 이마를 맞아 피
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지만 장군은 이마를 닦을 생각도 하
지 못했다.
“뭐가 어째? 홍암이 움직이면 세 걸음도 움직이기 전에 알
게 돼? 이게 세 걸음인가!”
“……”
장군은 할 말이 없다는 듯 더욱 깊이 몸을 숙였다.
“누구누구 들어간 거야?”
“홍암, 화문, 한백.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전서에 의하면
홍암은 해남십이가 중 하나인 비가의 둘째 자식이었습니다.
이름은 비건. 여족인이라 합니다.”
“비가의 둘째 자식? 관충…… 이 늙은이가……! 후후! 사람
하나는 제대로 골랐군. 해남도 사람이니 정체가 드러나지 않
았지.”
“더군다나 홍암은 적사장군에게 무공을 배웠다고 합니다.”
“뭐라구?”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칠량관(七梁冠)을 쓰고 있다. 사자
(獅子) 문양의 관복에다가, 옥(玉)으로 만든 요대를 차고 있
다.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홀(笏)도 상아(象牙)로 만든 것이
다.
일품(一品) 관원의 복색을 한 사람은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조치는?”
“예전과 같이 할 겁니다.”
“홍암은 독 오른 독사야. 자칫 섣불리 건드리려면 아예 건
드리지 마라고 해.”
“알고 있습니다. 확실하게 제거할 겁니다.”
“홍암은 유배된 장군에게 무공을 배웠다. 그것만으로도 귀
양감이야. 그런 사실을 숨기고 기도위(騎都尉:종사품 무관)까
지 올랐으니.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섣불리 건드리려면 처음
부터 건드리지 마. 홍암을 다른 놈들처럼 생각해서는 큰 코
다쳐.”
“대장군,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겠습니다. 확실히 제거하겠
습니다.”
“우선 놈이 어느 정도나 알아냈는지, 알아낸 게 있다면 관
충늙은이에게는 보고가 되어 있는지부터 알아내.”
“존명!”
이마에서 제법 많은 피가 흐르는 장군은 한 손을 들어 군례
를 취한 후 물러갔다.
“병신들……”
대장군의 입에서 험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는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 의자에 깊이 몸을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