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Heaven Sword RAW novel - chapter 66
는 만무하다.
그렇게 보면 해남도 해안 어디 곳이나 배를 댈 수 있다.
만약 다른 때 같았으면 그들은 충분히 배를 얻어타고 해남
도를 빠져나갔으리라. 이런 경우, 범가의 손을 빌리지 않고
해안을 봉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허나 지금은 장마철이
다. 폭우가 쏟아지지는 앉지만 바다 물결을 키를 넘고 있으리
라.
이런 날씨에 해남도를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큰배가 필요하
다. 해구소를 이용하지 않는다면…… 남은 곳을 두 곳뿐이다.
유광과 적림무인들은 해안가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기다렸
다.
그들은 억세게도 운이 없다.
장마만 들지 않았어도…… 그렇게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하
더라도 요 며칠 사이에 폭우만 쏟아지지 않았어도.
비파는 해남도를 빠져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잃었다.
지금쯤 그들도 그런 사실을 눈치채고 있으리라. 그럼 다음
은 어떤 행동을 취할까.
유광은 자신이 비파를 이끌고 있다면 정면승부에 운을 걸어
보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최선이다.
해남파 무인이 모두 나서서 천라지망을 구축한다면 빠져나
갈 기회는 전혀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러면 사냥개에 쫓기는
맹수처럼 이리저리 쫓기다가 결국은 몰살당하는 수밖에 없다.
유광은 비가 참 구질구질하게 온다고 생각했다.
옷 속으로 촉촉이 젖어드는 빗물이 기분을 께름칙하게 만들
었다.
유광이 적림 무인들을 이끌고 비파원이 나타나기를 기다리
고 있는 시각, 유화는 다른 해안 송림(松林)에 몸을 은신하고
희뿌연 바닷가를 노려보았다.
바다에는 커다란 범선이 떠있다.
해안에는 범선까지 사람을 실어갈 소선 네 척이 정박해 있
다.
파도가 높은 날인데…… 배는 당연히 해구소에 있어야 한
다.
이곳이다. 비파원은 이곳에서 배를 타려고 한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해변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
거리지 않았다.
밤이 소리 없이 찾아온다.
유화는 적림 무인들을 걱정했다.
그들은 흔히 하는 말로 ‘검 쓰는 법’을 깨달은 무인들이다.
그러나 초식보다는 마음 수련을 더 깊게 하는, 심검(心劍)이
일체가 되는 목검(牧劍) 경지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 더군다나 아직 살인을 해본 적이 없다.
이들이 과연 비파원을 만나서 잘 싸울 수 있을까?
초식은 걱정하지 않는다. 무공의 수위만 가르는 비무라면
마음 편하게 지켜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생사(生死)를 가
르는 자리. 한 점 흐트러짐도 용서하지 않을 게다.
슈각……!
등골을 쭈빗 울리는 검음(劍音)은 등뒤에서 들렸다.
‘기습! 당했다!’
“뒤닷! 뒤를 조심햇!”
소리를 버럭 지른 유화는 번개같이 몸을 날려 뒤쪽으로 쳐
갔다.
“허억!”
짧은 단발마가 터져 나왔다.
눈을 부릅뜨고 죽는 자…… 사촌동생이다. 숙부의 아들. 숙
부에게는 아들이 하나밖에 없는데…… 청심전 출입을 허가받
았을 때 무인다운 무인이 탄생했다고 기뻐하시던 숙부님의 얼
굴이 선연한데.
“타앗!”
허공에서 펼치는 공(空)의 무학!
유화의 검은 커다란 방갓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그러자 드
러나는 얼굴. 낯선 자다. 그 자는 얼굴 한 가운데 붉은 혈선
을 그린 채 놀란 얼굴로 쳐다보고 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처음으로 한 살인.
머리뼈를 가르는 손맛이 이럴 줄은 미처 몰랐다. 손목을 묵
직하게 저려오는 맛.
유화는 털썩 무너지는 비파원을 쳐다보고 있을 겨를이 없었
다. 착잡한 감상에 젖어있을 수도 없었다. 그는 검은 박쥐처
럼 전신을 온통 검은색으로 둘러싸고 있는 다음 비파원을 향
해 검을 쳐가야 했다.
얼굴을 완전히 가린 검은 방갓, 전신을 휘감고 있는 검은
피풍의.
써걱……!
이번 감촉은 더욱 안 좋았다.
단숨에 허리를 갈라버리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검에 묻어나
는 감촉이 생각 밖으로 징그러웠다. 물컹하고 연한 육질을 베
는 느낌이라니.
다행스럽게도 내장이 쏟아지는 모습은 보지 않아도 되었다.
비파원들이 걸치고 있는 피풍의가 역겨운 광경을 막아주었다.
그는 허리를 낮게 하고 다음 상대를 골랐다.
낮과 밤이 교차하는 시간이다.
이런 시간은 오히려 완전히 어두운 것만 못하다.
상대가 보이지 않았다.
유화는 재빨리 주변을 돌아보았다.
적림 무인들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다.
하나, 둘, 셋……
대충 훑어본 바로는 네 명이 보이지 않는다.
네 명…… 네 명이 죽었단 말인가.
자세히 세어 볼 시간은 없었다. 아직 싸움이 끝난 것이 아
니기 때문에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수나 세고 있다가는 언
제 기습을 받을 지 모른다.
대신 그는 귀를 기울였다.
제발 신음소리라도 들렸으면…… 들리지 않는다. 아무리 귀
를 기울여도 숨 넘어가는 소리나 고통에 시달리는 소리는 들
리지 않는다.
이쪽이고 저쪽이고 모두 즉사다.
적림무인들은 늘 일격필살(一擊必殺)을 논의했고, 수련했
다.
‘누구든 내 검을 대하면 가장 고통 없이 죽을 거야.’
‘빠르게 베는 것만으로는 고통 없이 죽일 수 없어. 사혈(死
穴)을 정확히 베어야지.’
‘후후! 그건 내 검을 맞대보면 알게 돼.’
‘한 번 시험해 볼까?’
‘아서. 누구 쫓겨나는 것 보려고 그래?’
‘쳇! 내 검이 빠르다는 건 아예 무시하고 있네.’
‘내 검에 비하면 넌 굼벵이라니까.’
‘하하하! 그래, 굼벵이다. 굼벵이. 하하하!’
그들은 잠깐동안의 겨룸에 혼신을 다했다.
유화가 겪어본 바로는 초식을 전개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
다. 그만한 무공을 지닌 사람들이니 베는 것까지는 평소 익힌
대로 진행됐을 터였다. 약간의 시간이라도 있었다면 검을 제
대로 뻗어내지 못했을 지 모르지만 비파원들은 다행스럽게도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일격필살 대 일격필살.
당한 자는 깨끗하게 죽었다.
유화는 부르르 치를 떨었다.
비파원들의 무공이 예상외로 강하다. 유가의 정예라고 할
수 있는 적림 무인과 맞겨룰 정도라니.
“있닷!”
적림 무린 중 한 명이 대갈을 터트리며 소나무를 헤쳐갔다.
파앗! 파아앗!
종적이 발각된 비파원은 소나무 뒤에서 튀어나왔고, 쳐오는
검에 맞서 검을 휘둘렀다.
“커억!”
“흑!”
두 사람은 소리 없는 검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똑같이 무너
졌다.
유화는 그제야 앞으로 쳐나간 무인이 누구라는 것을 알았
다.
유의(劉宜), 촌수를 알 수 없을 만큼 먼 친척이다. 검에 대
해서라면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나서 남들은 족히 십 년이 걸
려야 이룬다는 심검(尋劍:검을 찾는다)의 경지를 단 육 년 만
에 이룩한 기재다.
현재 검의 경지는 목검(牧劍).
대단한 자부심을 가질만한 경지이건만 비파원들과의 싸움에
서는 무력했다.
“흩어지지마! 천천히 나간다!”
유화는 일갈을 내지르고 적과 마주선 듯 조심스럽게 발뿌리
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오로지 소나무 사이에서 튀
어나오는 적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 그를 두고
누가 평소의 유화를 떠올릴 것인가.
적림무인들도 상황이 비슷했다.
모두들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마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그 동안 익혀온 학문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피를 보면 모
두 악귀처럼 변하고 마는 것일까.
쉬릭……!
옆에서 불쑥 검이 튀어나왔다.
유화는 밀어버리듯이 검을 제쳐냈다.
차앙!
검과 검이 마주치며 날카로운 금속음을 냈다. 순간, 유화의
검은 상대의 검을 그대로 밀치고 들어갔다.
검날이 방갓을 가르고 들어가 상대의 이마에 닿았다.
피가 흘러내린다.
상대는 밀쳐오는 검을 밀어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
다. 몸을 옆으로 튼다거나 피하는 행위는 꿈도 꾸지 못한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검에서 약간이라도 힘을 빼는 순간 이마
에 닿은 검날은 머리 속을 후벼팔 것이다.
“끄응!”
상대는 힘겨워한다.
이마로 점점 파고드는 검.
상대가 머리를 뒤로 젖혔다. 본능적인 행동이리라. 검날이
이마를 파고드는 대야. 하지만 그것으로 승부는 끝났다. 아무
래도 전신의 모든 힘을 검에 집중하지 못해서는 곤란하다.
퍼억!
상대의 머리가 잘 익은 수박처럼 갈라졌다.
유화는 진기를 일주천(一周天)했다.
그는 상대의 눈을 보았다.
공포에 질린 눈, 죽음을 두려워하는 눈.
그 눈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런데도 그는 죽였다. 만약
검을 거뒀다면…… 반대로 죽은 자는 자신이었으리라. 그런
것을 잘 알면서도…… 그는 마음이 무거웠다.
나약하다면 나약하다고 할 수 있는 감정도 일순간일 뿐이었
다.
유화는 쓰러지는 적림무인들을 보자 무서운 적개심에 사로
잡혔다.
자신이 적 한 명을 죽이는 사이에 적림 무인 절반이 쓰러졌
다.
먼저가 제일선(第一線)이라면, 이곳은 제이선(第二線)인 셈
이다.
적은 단계적으로 공격계획을 세운 듯 하다.
해남무인들이 달려드리라는 것을 예측한 계획이다. 먼저 공
격을 가하여 주의를 환기시킨 다음, 물러서면서 매복공격을
가한다. 그렇게 되면 언제나 선공(先攻)을 취할 수 있다.
불행히도 유화는 말려들었다.
죽어가는 친척들을 보는 순간, 냉철하던 그의 이성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오직 적을 모두 죽이고야
말겠다는 적개심만 활활 불태웠다.
“커억!”
짧은 단발마를 남기고 마지막 한 명이 쓰러졌다.
유화가 이끌고 왔던 적림 무인 중 마지막으로 남았던 유조
(劉措)가 마침내 쓰러지고 말았다.
유화는 검을 들어보았다.
검에 피가 묻지 않는다는 소성검(素星劍)이다. 헌데 지금은
진득한 피가 가득 묻어있다.
“??!”
실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런 결과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비파 무인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적림 무인이라면 충분
할 줄 알았다. 자신들이 그 동안 익혀온 검공이라면 하늘도
두 쪽으로 갈라버릴 줄 알았다.
조가의 전대가주인 조곡노인으로 직접 받은 소성검.
‘이 검에 피를 묻히지 말았으면 하네. 그런 날이 온다면 아
마도 자네에게는 가장 불행한 날이 될 거야. 유가의 훌륭한
가법, 영원히 지켜주기 바라네.’
그랬다. 그 말대로 오늘은 유화 일생에서 가장 불행한 날이
다.
검이 너무 빨라 귀신의 그림자 같다는 귀영검 유화.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다섯 명의 검은 그림자를 노려
보았다.
“후후! 다 나오지 그래.”
“우리…… 뿐이다. 유가에 적림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만…… 솔직히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다.”
“죽은 것도 강한 것인가?”
“우리를 얕보지 마라. 적림이 자부심을 가지고 있듯이 우리
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허울좋은 남해삼십육검. 우리들
중 두 명이면 삼십육검 한 명쯤은 죽일 수 있다고 믿었다.”
유화에게 말을 하는 비파원은 비파에서 거둬들인 정보를 장
문인에게 직접 보고하던 바로 그 무인이었다. 해남오지로 이
십여 년간을 본문에 있었던 유광 같았으면 한 눈에 알아보았
으리라. 하지만 유화는 본문에 거의 드나드는 일이 없었기 때
문에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너희들은…… 누구냐?”
“후후후!”
“너희들의 무공은 해남무공이 아냐.”
“무군(武軍).”
“뭣?”
“무군이라고 들어봤나?”
“……”
“못 들어봤군. 후후후!”
“……”
“두 가지 실수를 인정한다. 하파라는 인간을 너무 과대평가
한 점. 그리고 적림을 과소평가한 점. 그래도 우리는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적림을 없애는 것이 우리 목적이었으니까.”
“뭣!”
유화는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방금 무엇이라고 했나? 적림을 없애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파가 뛰어나긴 뛰어난 놈이지. 그 놈은 자신이 뒈진 후
에 장문인이 어떻게 하리라는 것을 예상했다. 다른 곳은 상관
없는데 유가가 문제였어. 너희들은 워낙 폐쇄적이라 뚫고 들
어갈 틈이 없었지. 후후! 하파의 생각대로 장문인은 너희를
불렀고, 우리는 너희를 기다렸다.”
“뇌주반도로 건너가려던 것이 아닌가?”
“우리가? 하하하! 왜? 우리가 무엇 때문에 건너가지? 하하
하!”
유화는 소성검을 들어올렸다.
말을 나누는 사이에 자리를 잡은 적들은 한 치 한 치 다가
섰다.
“좋아. 해보지. 누구 검이 빠른가.”
“검은 네가 빨라. 하지만 너는 죽어.”
“누가 죽는지는 검이 말해주겠지. 타앗!”
유화는 처음으로 선공을 취했다.
이렇게 검을 마주하고 있다면 상대가 그 누구라도 자신이
있다.
‘환!’
검이 너울거렸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수천 가닥의 빗물처럼 파상적으로 퍼부
어지는 검날.
비천검법 환(幻)의 정수(精髓)다.
써…… 걱!
섬뜩한 기음이 터져나왔다.
그가 목표로 했던 자는 맥없이 쓰러졌다. 그 자는 검을 쳐
냈지만 유화의 검은 손을 베어버리고 복부를 갈라버렸다. 헌
데,
‘응?’
유화는 웃는 얼굴을 보았다.
오른 손이 잘리고 복부를 베인 사람이 웃는다?
이유는 곧 나타났다. 검이 빠지지 않는다. 이 자는 피풍의
속에 지갑(紙鉀)을 받쳐입었다. 복부는 비록 갈라버렸지만 왼
쪽 손으로 지갑 한 귀퉁이를 움켜쥐는 것으로 검을 묶어 놓기
는 충분했다.
파르륵……!
검의 떨림이 느껴진다. 옆이다!
o욱!
유화는 검을 밀어 넣었다. 상대는 밀어올 줄은 예상하지 못
한 듯 두어 걸음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 사이 옆에서 다가
온 검날은 등뒤를 스쳐지나갔다.
“잘 가.”
유화는 검을 비틀어 뽑아냈다.
잔인한 광경이다. 상대의 손가락이 마디마디 잘라졌다. 동
시에 내장이 검을 따라 뽑혀 나왔다.
“커억!”
상대는 처참한 비명을 토해내며 뒤로 넘어갔다.
‘강!’
상대의 수법을 알게 되자 평범한 초식을 전개할 수 없었다.
다소 진기가 이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강의 초식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퍼억!
찍어 치듯 옆구리를 쳐버린 검이 탄력을 받고 퉁겨 올랐다.
빠악……!
또 한 명이 머리 윗부분을 드러내며 넘어갔다.
유화의 신형을 제비처럼 부드럽게 날아올랐다.
슈욱!
검이 발 밑으로 스쳐 지나는 것을 느끼며 상대의 등뒤로 날
아 내렸다. 그리고 상대의 척추를 향해 일 검을 내리그었다.
완벽하게 걸려들었다. 공의 초식에.
이제는 살을 가르는 촉감이 부드럽게 느껴진다.
뼈를 가르는 묵직함이 야릇한 쾌감을 일으킨다.
유화는 땅바닥을 한 바퀴 구른 다음 몸을 일으켰다.
하늘에서 번개가 내리꽂히듯 검날 하나가 다가온다.
이래서 공의 초식은 일대일의 상황에서만 펼쳐야 한다. 상
대의 척추를 노리는 것은 좋으나 머리부터 떨어지기 때문에
땅바닥을 구르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런 틈을 놓치는 무인이
있다면 그는 검을 들 자격도 없다.
쩌엉!
유화는 검이 밀리는 충격을 손목에 느꼈다. 상대는 내리꽂
는 검, 자신은 아래에서 받아 올리는 검. 충격이 전해질 수밖
에 없다.
검과 검을 맞대놓고 힘 겨루기를 할 틈이 없다. 상대는 이
자 외에도 한 명이 더 남아있다.
한 명이 더? 어디?
써걱……!
허리가 반으로 꺾어지는 아픔이 뼈마디를 울렸다.
등에서부터 시작된 아픔은 반으로 나뉘어 하나는 등을 타고
머리로 솟구쳤고, 또 다른 하나는 엉덩이로 해서 다리를 마비
시켜갔다.
‘당했다!’
순간적인 판단이었다.
유화는 망설임 없이 검을 비틀어 빼냈다. 순간,
퍼억!
쏜살같이 내리꽂힌 검이 유화의 머리를 정확히 반으로 갈라
버렸다. 그러나 이 순간 유화의 검도 상대의 배를 꿰뚫고 있
었다. 자루까지 깊이 꼽히는 마지막 일격이었다.
“제길! 더럽게 강하군.”
살아남은 마지막 한 명, 비파원이 중얼거렸다. 허나 유화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미 땅바닥에 엎어진 후였으니까.
땅에 엎어진 그의 머리에서는 붉은 피와 누런 뇌수(腦髓)가
섞여 흘렀다.
하루를 아무도 찾지 않는 바닷가에서 허비한 유광은 불길한
예감에 적림 무인들을 이끌고 유화를 찾았다.
그들이 송림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세상에서 다시없는 참
혹한 광경을 목격해야만 했다.
널브러진 시신, 시신, 시신……
어느 새 시체 냄새를 맡고 찾아온 까마귀가 소나무 위에 가
득히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놀랐고, 다음에는 울분이 솟았다.
소리 없는 눈물도 흘렀다.
나중에는 기가 막혀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유광은 시신들이 죽어있는 모습을 살폈다.
그가 남다르게 무정해서는 아니다. 해남오지로 있으면서 자
신도 모르게 몸에 베인 경륜이 그런 행동을 불러 일으켰을 뿐
이다.
그는 곧 사태를 파악했다.
유화는 함정에 말려들었다.
싸움을 할 때는 공격만이 능사는 아니다. 이렇듯 매복한 적
들을 밀고 올라간다면 막대한 피해를 당한 것은 당연하다. 그
런 면에서 본다면 적이 오히려 뛰어나다. 역시 비파……
유화가 죽은 모습도 그렇다.
유화는 본신 무공만으로 상대했으되, 적은 치밀한 계획아래
연수합격했다.
유화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비파원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 죽음을 많이
본 사람들이라는 사실.
적림 무인의 시신 열 다섯 구를 모두 찾아냈다.
그들은 무섭게 싸웠다. 그들이 죽인 비파원은 모두 아흔 아
홉 명.
살인은 마음껏 해보고 죽었으니 여한은 없을 게다.
적림 무인들은 땅을 파기 시작했다.
여족인들은 야만스럽게 풍장을 지내지만 한인들은 매장(埋
葬) 풍습을 유지하고 있다. 죽은 무인들을 유가에 데려가야
옳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 우선 가매장이라도 해야
한다. 피가 같은 사람들인데 까마귀에게 뜯어 먹히도록 내버
려 둘 수야 없지 않은가.
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땅을 팠다.
##第二十二章 숨은 힘이 드러났을 때.
1
백여 명이 비가보를 급습한지 이레나 지났건만 적들은 모습
을 비치지 않았다.
비가보는 낮이고 밤이고 적막했다.
폭풍의 핵이 해남도를 지나갈 때는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고요한 날씨가 지속된다. 지금이 꼭 그때와 비슷했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적을 기다리느라고 비가보 식솔들은 바짝
긴장한 채 고요한 세월을 보냈다.
노방은 재정비되었다.
구덩이를 파고 죽창을 설치하고 거적을 덮고 흙을 덮고……
밧줄이 발에 걸리면 암기가 발사되도록 만들고……
위치가 발각난 노방은 이미 노방이라고 할 수 없다.
황유귀가 설치했던 노방은 모두 메워버리고, 새로 다른 노
방을 만들었다. 황유귀가 없어서 그가 만든 노방을 참조하여
새로운 노방을 만드는 작업은 어려웠다.
이상한 일이다.
급습이 있고 난 다음날이나 다다음날 또 다시 기습을 가해
왔다면 노방을 설치할 여력이 없었을 게다. 허나 적들은 조용
했다. 인원이 적은 비가보로써는 다행한 일이지만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적엽명은 비가보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빠질 경우, 비가보를 지킬만한 사람은 화문 한 사람
밖에 남지 않는다. 호귀가 있지만 그가 구사하는 무공으로는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도 급급하리라.
몸을 빼야겠는데 뺄 수가 없다.
한시라도 빨리 정체 모를 존재들이 누군지 알아내야겠는데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지금으로서는 황유귀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는데 그마저 소식이 끊겨 버렸다.
적엽명은 답답했다.
적도 답답할 것이다.
다른 무장들은 이쯤에서 죽었다. 죽이는데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 잔화를 죽이듯이 자연스럽게 죽일 수 있었
다. 허나 지금 그들은 백 명이나 되는 시신을 남기고도 단 세
명을 죽이지 못했다.
그들은 적엽명 일행이 아무 것도 알아낸 것이 없다는 사실
을 알고 있을까?
적엽명의 판단은 ‘모른다’였다.
화문과 한백은 빠져나오기 극히 힘든 상황까지 치달렸다.
비가보를 급습한 것 또한 방비하기 힘들었다. 그들은 기필코
죽이려는 의사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