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Heaven Sword RAW novel - chapter 65
어쩌면 이것이 황유귀와 마지막 만남이 될 지도 모른다.
말은 가볍게 했지만 황유귀가 찾아가는 길은 죽음의 길이나
진배없다. 도주한 자들을 찾아가는 길.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
내는 것. 이 길은 적엽명이 걸어야 할 길이다. 화문이나 한백
이 황유귀를 대신했어야 옳다.
적엽명은 또 다른 습격을 대비해 남았다.
너무 충격적인 싸움인지라 방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하고
있는 화화부인과 취영, 그리고 불구가 된 형과 형수. 병자가
되어버린 취채와 한백. 그들 모두의 목숨이 적엽명에게 달려
있지 않은가. 이제 비가는 공격대상이 되어 버렸으니.
“잘 다녀와.”
호귀가 중얼거렸다.
그 음성이 어찌나 쓸쓸한지……
* * *
유소청 장문인의 방문을 받자 퍼뜩 한광이 떠올랐다.
한광이 집무실을 다녀간 후로는 마음이 한시도 편하지 않았
다.
‘차는 나중에 마시지. 그대와 혼인하는 날.’
‘아버님을 만나서 혼인에 대해 상의를 하겠지? 혼인예물을
준비해야 하는데 무엇이 좋을 지 고민 좀 했어.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적엽명의 목은 어떨까?’
한광이 남기고 간 말이 가시처럼 틀어박혀 떠나지 않았다.
유소청은 집무실 문이 열릴 적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혹시 장문인이 부르는 것은 아닐까? 아버님이 들어오시는
것은 아닐까? 아버님의 전갈을 가진 누군가가……
그런데 장문인이 몸소 집무실을 찾아온 것이다.
“왜 그렇게 놀라니.”
“아닙니다.”
“허허! 내가 반갑지 않은 손님인가? 그런 줄은 몰랐는데?”
근엄하기만 하던 장문인이 농담을 건네는 것도 심상치 않
다.
유소청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혼인 이야기를 꺼낸다면 단호하게 거절하리라. 그러나 예상
하고 있는 대로 적엽명의 목숨을 담보로 들고 나온다면 어떻
게 해야 하나.
“힘드니?”
“아닙니다.”
“딱딱하게 그러지 말고 앉아라. 오늘은 편히 이야기하고 싶
어서 찾아왔어.”
유소청은 장문인 옆에 앉았다.
“아이가 한 명 있다고 들었는데?”
“서가에서 책을 읽고 있습니다.”
“글을……”
“네.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도 좋겠지. 하지만 여족인이, 그것도 계집아이가 글을
익힌다면…… 포기하는 법부터 가르쳐야 할 게다.”
글을 익히면 머리가 사고(思考)가 깊어진다. 생각도 많아지
고 사물을 보는 눈도 달라진다. 좋은 일이다. 허나 좋지 못한
경우도 있다. 리아가 그런 경우다.
유소청은 리아에게 글을 가르치면서도 회의(懷疑)를 느끼곤
했다.
글을 익혀서 무엇할 것인가. 머리는 깨쳤으나 빠져나갈 구
멍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오히려 불행한 결과만 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푸대접을 받으면서도 푸대접을 받는지 모르는
사람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들 중 누가 불행할까. 개선
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르지만 그렇지도 않은데. 결국은 우화
와 같은 행동으로밖에 나타나지 않으리라.
“이것 참…… 아무리 불청객이라 하더라도 차 한 잔 안 주
는구나.”
장문인이 화제를 바꿨다.
유소청은 화들짝 놀라 일어서서 황급히 차를 내왔다.
그녀는 집무실에 시녀를 두지 않았다.
언제 그만둘지 모르는 입장에서 시녀의 시중까지 받는 것은
과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적엽명도 시녀가 없지
않은가. 그는 지금도 칼날 위를 걷고 있지 않은가. 헌데 자신
만 편해서야 말이 되는가. 유소청은 요즘 들어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적엽명과 견주어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장문인은 맛있게 차를 들었다.
사실 유소청이 차를 다리는 솜씨는 형편없었다.
어려서부터 무공에만 전념했기 때문에 학문과 무공을 제외
한 일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더군다나 여자가 해야하는
음식 만드는 일, 자수(刺繡), 옷을 만드는 일 같은 것은 더욱
형편없었다.
“조금 진하게 다렸구나.”
“배운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허허허! 배웠느냐?”
유소청은 볼을 붉혔다.
배우려야 배울 사람이 없다. 유가 같으면 배울 사람이라도
있으련만. 유가에는 돌아갈 수 없고, 해남파에는 아예 접촉하
는 사람도 없는 형편이다.
“너를 한 가족으로 맞았으면 하고 오래 전부터 생각했지.”
유소청은 손이 달달 떨렸다.
기어이…… 일이 그렇게 되는구나. 아버지는 쉽게 응낙했으
리라. 적엽명과 만나는 것을 수치로 여기시는 분이니. 그것보
다 적엽명과 연관하여 살인을 저지른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혼기가 지나도록 혼인 말씀은 입밖에도 꺼내
지 않던 아버지이셨는데.
유소청은 이를 악물고 말을 꺼냈다.
“저…… 말씀드릴 게 있어요.”
“그래? 뭔데? 어서 말해봐.”
“저…… 혼인하지 않겠어요.”
“응?”
“이미 마음을 준 사람이 있으니…… 마음에 없는 사람과 혼
인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어요.”
유소청은 양볼을 발갛게 상기시킨 채, 하지만 당당하게 말
했다.
장문인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다 하라는 뜻이 눈빛에
담겨있었다. 포근한 눈빛이었다. 아버지가 보내주던 눈빛하고
똑 같았다.
유소청도 가만히 있었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하고 싶은 말
을 했지만 장문인과 아버지가 이미 결정한 사항을 번복한다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았다.
한참만에야 장문인이 입을 열었다.
“해남오지에서 물러날 뜻도 있겠구나.”
“죄송합니다. 제 마음은…… 한시라도 빨리 비가로 돌아가
고 마음뿐이에요. 죄송합니다.”
“허허허! 신념이 있으면 되는 거야. 너를 보면 꼭 옛날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구나.”
“……?”
유소청은 느닷없는 장문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이다. 기다리다 보면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장문인이 지금 한 말은……
그럼 한광과 혼인하라는 말이 아니었던가.
장문인은 다른 말도 했다.
“허허허! 너를 불렀을 때는 솔직히 적엽명에게서 떼어놓기
위해서였다. 그 점은 부인하지 않으마. 기왕이면 내 자신과
연을 맺었으면 하고 바랬던 것도 사실이고. 물론 적엽명에게
는 잘못이 없다. 지난 죄는 세월이 용서했고, 해남고수들을
많이 죽였지만 모두 정상적인 비무로 이루어진 것이니 탓할
수 없지. 그렇다고 적엽명과 편한 관계가 될 수는 없지 않겠
니?”
“예.”
“그래서 너를 불러들였다만…… 지금 비가는 폭풍의 핵이
야.”
폭풍의 핵? 폭풍의 핵이라면 핵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
게 말하기에는 너무 심하지 않은가. 해남 무인들이 그를 가만
히 내버려두었으면 절대 먼저 검을 뽑았을 적엽명이 아니다.
“돌아가고 싶니?”
“예……?”
“허허! 비가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물었다.”
“네.”
“그럼 준비해라. 나도 비가에 볼 일이 있으니 같이 가자꾸
나.”
유소청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장문인이 비가를 방문하겠다니? 그건 그렇고 정말로 해남파
에서 물러난다는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단 말인가? 가
벼운 징계도?
“네. 준비할 것도 없어요. 바로 출발하면……”
유소청은 너무 기뻐 조금하게 서둘다가 장문인의 웃는 얼굴
을 보고서야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기쁜 마음은 어디 견줄
데가 없었다.
장문인은 한 시진 후에 전용마차를 함께 타고 가자는 말을
남기고 돌아간 뒤, 유소청은 마음이 들떠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리아를 불러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힌 다음, 자신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을 하나씩 차곡차곡 챙기기 시작했다.
이제 해남파 본문에는 들어올 일이 없으리라.
수련총도 마찬가지다. 다시는 집무실을 기웃거릴 일이 없
다. 수련총 통령은 향후 사 년 간 공석이 될 것이고, 사 년이
지나면 범위나 한광, 석불 중에 한 사람이 임명되리라.
손때가 묻은 물건을 깨끗이 치워주는 것이 다음 통령을 위
한 예의일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물건을 치우기 시작하자 장문인이 말한 한
시진은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렸다.
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장마라서 뜨거운 햇볕은 들지 않았지만 워낙 더운 지방인지
라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제 다 됐다. 가자.”
그녀는 리아를 보며 방긋 웃었다.
“집에 가는 거야?”
“그럼.”
“집에 가도 돼?”
“그래. 요 꼬맹이야.”
“집에 가도 아저씨를 괴롭히지 않아?”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인 줄 알았는데 모든 걸 다 알고 있
나 보다.
유소청은 몹시 걱정스러운 듯 쳐다보고 있는 리아의 머리에
알밤을 먹였다.
“괜찮다니까. 여기서 제일 높은 사람이 괜찮다고 했는걸.”
“장문인께서?”
“그래.”
“히히! 그럼 빨리 가, 언니.”
리아는 비로소 어린아이다운 모습을 찾았다.
그러고 보니 해남파에 들어온 다음 리아는 무척 위축되었
다. 비가보에서 같으면 밤에 측간 가는 것도 무서워했는데,
여기서는 무섭다거나 엄마가 보고 싶다는 말 같은 것은 일절
하지 않았다.
영특하고 눈치가 빠른 아이. 거기에 글까지 익혔으니……
마구간에서 장문인과 만나기로 한 정오가 되었는데도 유소
청은 수련총 집무실을 나서지 못했다. 리아도 명랑하게 활짝
웃던 모습을 지우고 감정 없는 얼굴로 돌아가 집무실 한 구석
에 쭈그리고 앉아있다.
유가주 유질과 금잔서생 유광이 방문한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문이었다.
유소청은 차 대신 다과를 내왔지만 아버지와 사촌오빠는 손
도 대지 않았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흐른 지도 벌써 일다경이 지나간다.
유가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비가보로 간다고 들었다.”
“……네.”
“우리 가문에 어떻게 너 같은 아이가 태어났는지.”
“죄송해요. 아버지.”
유소청은 또 설움이 북받쳐 눈물이 방울졌다.
“죄송할 것 없다. 나쁜 뜻으로 한 말이 아니니. 하나만 약
속해라.”
“……?”
“너는 이미 피로 얼룩졌다. 휴우! 너뿐 아니라 유가 전체가
피로 얼룩지겠지. 집안이야 나도 있고, 네 오라비도 있다
만…… 이번 일이 끝나면 살인을 하지 마라. 어떠한 경우라
도. 약속할 수 있겠니?”
“네, 약속드릴게요.”
유소청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러나 유가주의 얼굴은 그
리 밝지 않았다.
“적엽명에게 살인을 못하게 할 자신이 있단 말이냐?”
“……”
유소청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살인이라면 아버지가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두 번 다시 할
생각이 없다. 적엽명이 제일급관찰대상자로 선정되지만 않았
더라도 살인을 하지 않았을 게다. 하기는 그 덕분에 적엽명과
다시 사랑을 맺을 수 있었지만.
적엽명까지…… 라면 문제가 다르다.
그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끝없는 도전을 받게 될 게다. 좋
다. 모든 일이 완결되고 해남도를 벗어났다고 하자. 그는 사
람을 죽이는 것이 직업인 군인이다. 더욱이 운남도사라면 남
만을 장악하고 있는 묘족(苗族)들과의 분쟁이 끊이지 않는 곳
이다. 어떻게 살인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답을 못하는구나.”
“아버지……”
‘그 사람은 장군이에요. 그런데 어떻게.’라는 말이 입 밖으
로 튀어나올 뻔했다. 그것만은 발설해서는 안 된다. 적엽명이
장군이라는 사실은 오직 자신과 황함사귀 밖에 모른다.
그녀는 적엽명이 일을 빨리 매듭짓기 위해 사귀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화문과 한백이 공격당한 사
실도. 만약 그런 사실을 알았다면 마음이 조급해서 가만히 앉
아있지도 못했으리라.
“가주, 조금만 더 물러서시지요.”
유광이 웃으면서 끼여들었다.
유소청은 비로소 사태가 돌아가는 것을 눈치챘다.
아버지는…… 아버지는 자신을 용서하려고 찾아온 것이다.
아버지가 마음을 돌리시다니. 그렇게 법도에 엄격하신 아버지
가. 가문의 최대금기인 살인을 저질렀는데. 아버지는 날고환
을 거두어 가고 소도로 당신의 배를 찌르기까지 하셨는데.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이다. 기다리다 보면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장문인은 아버지의 마음을 이미 알았던 것일까. 그래서 그
런 말씀을 남기신 것일까.
“음……! 좋다. 네 오라비가 이렇게 말하니…… 네 자식들
은 살인을 못하게 할 자신이 있느냐?”
유소청은 글썽이던 눈물을 기어이 떨구고 말았다.
“네. 자신 있고 말고요. 못하게 하겠어요. 죽어도 못하게
하겠어요. 아버지.”
유가주는 품에서 주머니 한 개를 꺼내 유소청의 손에 쥐어
주었다.
“날고환이다.”
“아버지. 흑!”
유소청은 기어이 유가주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트
렸다.
“날고환을 주는 이유는…… 의미를 잘 새겨들어라.”
“네.”
유가주는 유소청을 감싸안고 등을 토닥거렸다.
“세상에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너무 많단다. 어떤 때는
차라리 죽는 게 속 편하겠다 싶을 때도 있지. 그럴 때마다 날
고환을 입에 물어라. 이 아비가 한 말을 기억하고, 날고환을
입에 물고 무공에 전념했던 때를 생각해라.”
“아버지…… 흑!”
“어렵게 맺은 인연이니,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유소청은 설움이 더욱 치받쳐 올랐다.
장문인은 퉁퉁 부은 얼굴로 나타난 유소청에게 충격적인 한
마디를 던졌다.
“유가주는 큰 결단을 내렸어. 옛날…… 해적을 소탕했을 때
보다 더 많은 피를 봐야 할거야. 힘든 싸움이 될 지도 모르
지.”
유소청은 당장 마차에서 내려 아버지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어쩐지 불안한 말씀만 하셨다.
아버지의 안위가 걱정스러운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무공은
장문인과 버금간다고 할 수 있다. 검에 살기만 곁들인다면 남
해제일검이 되고도 남을 분이다.
유소청이 정작 걱정스러운 것은 아버지의 심기(心氣)였다.
그토록 살인을 만류하신 당신께서 살인을 하시게 되었으니
마음이 오죽 불편하실까.
그래서 용서하신 게다.
당신조차 살인을 하게 되었는데 무슨 면목으로 딸을 구박하
랴 싶은 심정에서.
유소청은 집무실에서 곧바로 유가로 떠난 아버지를 떠올렸
다.
제발 마음을 편히 잡수셔야 할 텐데.
무사하시겠지. 그럴 거야.
3
청심전(淸心殿).
유가 무인들 중 득검(得劍)했다는 무인들이 모여 검담(劍
談)을 주고받는 곳이다.
청심전은 몇 백년을 이어온 듯 고색이 창연했다. 서른 명이
동시에 무예를 수련할 만큼 큰 전각이지만 여타의 전각들처럼
화려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초라하다 싶을 만큼 검박했다.
단청(丹靑)도 되어 있지 않았다.
색칠되지 않은 굵은 기둥만이 오랜 세월을 굳건히 버텨왔다
는 듯 낡은 색조를 드러냈다.
안으로 들어가면 이곳이 정말 전각인가 싶을 만큼 텅 빈 공
간이 나타난다.
벽을 따라 각종 병장기가 놓여있는 점도 다른 전각들과 다
르다.
검(劍), 도(刀), 창(槍), 편(鞭), 과(戈), 궁(弓), 련(鍊:
쇠사슬), 부(斧), 월(鉞:큰도끼), 극(戟), 파(爬:갈고리)……
사방에 빙 둘러져 있는 병장기의 종류만 해도 오십여 종은
넘을 것 같았다. 거기에 크기와 무게가 다른 것까지 셈한다면
능히 이백여 종이 넘어 보인다.
병장기 밑에는 조그만 목패(木牌)가 세워져 있었다.
가장 오래된 목패는 태초(太初) 일년(一年) 흑살신검(黑殺
神劍) 공노지(孔露蜘)라 적힌 목패고, 가장 근래에 만든 듯한
목패도 지원(至元) 십육년(十六年) 섭심마도(攝心魔刀) 구철
보(具徹甫)라고 적힌 목패다.
태초 일 년이라면 한(漢) 무제(武帝) 때이다. 지금으로부터
물경 천 오백년 전. 지원 십육 년도 송(宋)이 멸망할 무렵이
다.
대단히 오래된 목패들은 무슨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까?
그렇다. 청심전에 진열된 병장기는 유가무인들이 상대를 제
압하고 빼앗은 병장기다. 전리품인 것이다.
조상들은 이 병기들과 어떻게 싸웠을까?
이 병기를 사용한 흑살신검이나 섭심마도는 누구이며 병기
를 빼앗긴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청심전에 있는 사람은 병장기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병장기를 호기심에 들떠서 쳐다보는 사람은 이제 갓 청심전
의 출입을 허가받은 무인들뿐이다.
그들은 누구나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그들도 기회만 주어
진다면 병장기를 빼앗아 이곳에 진열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
지고 있다.
유가 사람들은 청심전을 다른 말로 부르기도 한다.
적림(赤林).
그들은 싸우기를 원한다.
그들은 자신이 익힌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입증하고 싶어한
다.
강한 자가 등장하면 밤을 새워가며 투지를 불사르는 사람들
이기도 하다.
청심전 사람들이 모여 앉았다.
근 삼십여 명에 이르는 사람이 마루바닥에 빙 둘러앉아 있
다.
모두 날카로운 기세가 역력했다. 눈빛이 날카롭고 몸이 강
건해서 범상치 않은 검공을 지녔다는 것쯤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유생차림을 하고 있으되 유생이 아니라는 것도.
몇 사람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다.
그들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무인들 속에 섞여있는
유생이라니. 정말 그래 보였다. 그들은 어디를 가던 간에 무
인이라기보다는 유생 쪽에 가까웠다.
정중앙 앉아 있는 유가주 유질이 그렇다. 그 오른쪽에 앉
아있는 금잔서생 유광도 검을 익힌 사람 같지 않다. 유가주의
왼쪽에 앉아 있는 사람도 그렇다. 눈을 반개(半開)하고 몸가
짐이 조심스러워 보이는 사람. 귀영검(鬼影劍) 유화(劉華)다.
유가주, 유광, 유소청과 함께 남해삼십육검에 거론된 사람.
그들은 유가주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자로(子路)가 성인(聖人)에 대하여 묻자 공자께서 견리사
의(見利思義)하며 견위수명(見危授命)이라고 말씀하셨다. 누
가 뜻을 설명해 봐라.”
그러자 모인 사람들 중 한 명이 대답했다,.
“논어(論語) 헌문편(憲問編)에 나오는 말로 이익이 있으면
의로움인가 생각을 하고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이라도 내놓아
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럼 자(子) 위정(爲政)에 언용살(焉用殺)이리오. 자(子)
욕선(欲善)이면 이민(而民)이 선의(善矣)리니 군자지덕(君子
之德)은 풍(風)이오 소인지덕(小人之德)은 초(草)라. 초상지
풍(草尙之風)이면 필언(必偃)하오 라는 말이 있다. 그 뜻은?”
이번에는 다른 무인이 대답했다.
“논어 안연편(顔淵編)에 나오는 말입니다. 계강자가 공자님
께 악인을 죽여서 기강을 바로잡는 것이 어떠냐고 묻자 공자
께서 ‘그대가 정치를 한다고 사람을 함부로 죽이려고 하느냐.
그대가 선을 추구하면 백성도 따를 것이다. 군자의 덕은 바람
과 같고 소인의 덕은 풀과 같으니, 풀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
드시 바람을 따르기 마련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인(仁)의 중
요함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 우리 유가는 인을 중요시 해왔다.”
청심전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했다.
모두 당금의 사태를 잘 알고 있었다. 우화가 살해당한 것은
그들도 긴장할 만큼 중요한 사건이니까. 굳이 그런 사실을 모
르고 있다 하더라도 요즘 한참 술렁이고 있는 여족인들의 동
태를 지켜보면 이건 뭐가 잘못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로 반감이 두드러졌다.
유가주가 하려는 말은 중요한 것임이 틀림없다.
“맹자(孟子)께서는 불기살인자능일지(不嗜殺人者能一之)라
하여 사람 죽이기를 즐겨 하지 않는 자가 천하를 통일 할 것
이라고 하셨다. 나는 지금도 사람은 제 아무리 악인이라 할지
라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더욱 조용해졌다. 그리고 긴장했다. 모여 앉은 사람들은 가
주의 말에서 진한 피비린내를 맡았다.
“그러나 인과 더불어 중요시 해야할 덕목이 의(義)다. 정의
(正義). 너희는 검을 뽑아라. 정의를 위해서.”
대답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은 짐작하지만 막상 검을 뽑으
라는 말을 듣자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남들은 우리 유가의 검에 살심이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해남제일검이 되지 못한다고. 살심이 없는 것과 억누른 것은
다르다. 모두 똑같은 검이거늘 살심이 없을 수가……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은…… 살아 돌아와라.”
말을 마친 장문인은 주담자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적림무인들에게 손수 차를 따라주었다.
열 다섯 명은 금잔서생 유광이, 다른 열 다섯 명은 귀영검
유화가 이끌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를 죽여야 하는 지 알게 되었다.
비파.
장문인의 눈과 귀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을 왜 죽여야 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죽이러 간다.
가주가 장문인에게 반기를 든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검을 뽑았
으리라. 적림 무인들에게 가주의 명은 장문인의 명에 우선한
다.
비파는 장문인 곁을 떠났다. 그리고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
졌다. 그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을까? 본문에서 무슨 일이 벌
어진 것일까. 하파가 죽고, 비피가 떠나가고…… 불필요하다.
불필요한 것은 돌아볼 필요가 없다. 죽이면 그만인 것이다.
그들은 한시도 쉬지 않고 길을 재촉했다.
앵가해와 해구소는 극과 극에 위치한다.
서남부 최남단인 앵가해와 최북단인 해구소.
보통 사람이라면 나흘은 족히 걸릴 거리를 그들은 하루 반
만에 질러왔다.
유광은 유화의 손을 잡았다.
유화는 씩 웃는다.
그 외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같이 검을 익
혀왔기에 서로의 마음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유화가 먼저 손을 놓고 적림을 이끌었다.
이에 뒤질세라 유광도 적림을 이끌고 해안을 향해 치달렸
다.
해남도를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야 한다. 그럼 어디
서 배를 타는 것이 가장 빠를까. 물을 것도 없이 해구소다.
해구소에서 뇌주반도 해안소로 가는 길이 가장 빠르다.
그러나 도주하는 인간들이 낯내놓고 해구소에서 배를 탈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