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181
181화
“하악, 하악…….”
진무가 턱까지 차올라 거칠어진 숨을 고른다.
복마동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가 알 리가 없었고, 신경을 쓸 수도 없었다.
그의 걸음 뒤로 강기로 부숴 버리고 온 기관의 복도가 흉물스럽게 펼쳐져 있었다.
정말 엄청난 곳이다. 강의 경지를 깨달은 무인이 목숨의 위협을 느껴야 할 정도라니.
이 정도로 악랄하니 공동의 제자들이 들어갈 생각도 못 했지.
입고 있던 의복은 넝마가 되었고, 몸에 생긴 생채기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복도를 지났다.
다음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첫 번째 관문은 통과한 셈이었다.
복도가 끝난 곳에 도착하니 어두컴컴한 굴이 보였다.
더 이상의 야명주는 없었고, 안력을 최대한 돋워 보아도 그 어둠의 안쪽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막상 발을 들이려고 살짝 뻗자 공간이 살짝 일그러지며 막대한 위화감이 느껴져 왔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건드리는데 일렁이는 변화가 생기는 것을 보면.
“하아, 이제 환영진이냐?”
들어올 때는 앞뒤 가리지 않았지만, 이렇게 되니 짜증이 절로 치민다.
아니 왜!
그냥 가지고 있다가 무당 제자가 오면 돌려주라고 대대손손 전하면 될 일이지.
뭐하러 거금을 들여서 이딴 기관을 만들어 놓는단 말인가?
어차피 줄 거였으면서. 돌려주라고 말도 해 놨다면서!
차라리 청성처럼 아주 안전한 곳에 보관해 놓든지.
곤륜처럼 믿을 만한 사람에게 구결을 전하면 문파의 격이 떨어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지랄이다. 어떻게 봐도 너무나 돈지랄이다.
정말이지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공동 놈들의 과소비에는 신물이 날 지경이다.
“후우…….”
하지만 계속 짜증 내며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못 먹어도 가는 수밖에.
진무가 소모된 내공을 회복하기 위해 운공을 마치고 눈앞의 어둠을 향해 다시금 천천히 발을 들이밀었다.
화악!
발을 내디딤과 동시에 눈앞의 공간이 변화했다.
그것도 절묘하게…….
* * *
“천주님!”
“…….”
이 상황을 뭐라고 해야 하지?
그냥 한 발 내디뎠을 뿐인데 너무도 익숙한 상황이 등장했다.
불타는 도관. 사방에 즐비한 시체.
그리고 자신의 앞에 기다리고 있는 지금보다 젊은…… 한창때의 천우명?
……무당?
그래, 무당이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십칠 년 전, 정사대전이 일어난 틈에 혁련무강이 철검단과 함께 습격했던 무당의 모습이 틀림없었다.
분명 환영진에 들어온 것일진대, 뭐가 이리 생생하단 말인가?
심지어 시각적인 효과에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
혹시나 해서 만져 본 천우명.
오, 살아 있네?
머리카락이며 살결의 촉감이 너무 생동감 넘치게 손끝에 닿아 온다.
“어찌?”
갑자기 만졌기 때문일까?
천우명이 기억 속의 멍청한 표정 그대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환영진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깜빡 속아 넘어갔을 정도였다.
환상에 불과한 주제에 뭐가 이리도 능동적인가?
“천주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감히 천주님을 욕한 놈들이니 당장에 멱을 따 버리겠습니다.”
살기가 진득히 어린 천우명의 목소리.
그의 뒤로 전투에 지친 도포 차림의 인물들이 보인다.
기억이 점차 선연해진다.
무당의 전대 장문인 현우자. 그가 장로들과 함께 검을 곧추세우고 길을 막고 있다.
“천주님! 명을 내리십시오!”
이 자식은 뭘 자꾸 내리라고 재촉을 해 대는지.
그러고 보니 당시 진무는 곧장 현우자의 양다리를 자른 뒤 목을 잡아 뽑고, 천우명에게 장로들을 모조리 참하라 명했다.
하지만…….
“그냥 놔둬.”
자신도 모르게 진무가 중얼거리자 천우명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예?”
“그냥 놔두라고.”
“…….”
과거라면 몰라도 지금은 그들 모두가 사문의 어른들이 아닌가?
“천주님, 저들을 어찌 용서하시려는 겁니까? 감히 담지 말아야 할 말을 뱉은 놈들입니다. 천주님을 개자식이라고 욕했으니 당연히 혀를 뽑고, 손가락질을 했으니 팔다리를 꺾어 놓아야 합니다.”
“…….”
굳이 또 상기를 시켜 주네, 저게.
“하아, 그냥 두라니까?”
진무의 말에 천우명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하여간 실물이나 환영이나 똑같이 멍청한 놈 같으니.
하지 말라는데 왜 자꾸 지랄인가?
그리 길진 않아도 무당에서 이 년이다.
없던 정도 싹틀 만한 기간이지.
같이 먹고 자고 했던 놈들을 너 같으면 도륙하라고 할 수 있겠냐?
어차피 도동 놈의 기억 때문에 맘대로 그러지도 못해.
참 질겨 빠진 기억이지.
그리고 쟤들 불쌍한 놈들이야.
그래, 예나 지금이나 도사 놈들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매한가지긴 한데, 그래도 지금은 어차피 환영진이잖아.
한 번 정도는 그냥, 아량을 보여 준다고 생각하자.
어울리지 않게 착한 척해 볼 수도 있는 거잖아.
내가 그래도 지금은 명색이 도사 거죽을 쓰고 있는 사람인데.
그리고 좀 부대끼고 살아 보니 애들이 나쁘진 않더라.
가난해서 그런지 다른 도문 애들과는 다르더라고.
청우는 딱 너같이 무식하긴 해도 순박하고 우직한 녀석이야.
뭐 하나 가르쳐 주면 딴생각 없이 곧이곧대로 한다니까? 그 녀석 아마 내 말이면 팥으로 메주를 만들어 올 거다, 너처럼.
청상은 또 어떻구.
화적한테 부모 형제 잃고 마을 사람들까지 잃었는데도 애가 참 바르게 컸어.
그뿐인 줄 아니?
나이 어린 사부는 술도 잘 처먹고 고기도 잘 처먹지만, 항상 내 걱정만 한다니까?
아마 혁련무강이 아닌 진무에 대한 걱정이겠지만 말이야.
태청신단을 취했을 때, 뼈에 찬바람 들까 봐서 방에 밀어 넣고는 제자 보신할 짐승 사냥을 다니더라. 몸도 성치 않은 주제에 말이지.
내 지금도 사부의 거처였던 오룡궁을 태워 버렸던 게 좀 걸려.
다시 짓는다는 말을 듣고 그 양반 아이처럼 좋아하던 얼굴이 선하거든.
뭐, 나쁜 새끼도 하나 있긴 하지. 진혜라고, 스승인 명공은 참 좋은 사람인데 음흉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야. 싹수가 아주 샛노랗…….
아, 몰라. 다 됐고, 그냥 놔둬. 놔두자, 야.
진무, 아니 혁련무강은 고개를 저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분명 이곳을 지나면 그가 있을 터였다.
“천주님! 위험합니다!”
위험하긴, 환영진인데.
얼마쯤 다가가자 현자 배의 제자들이 일제히 검을 날려 왔다. 예전이었다면 검을 뽑는 순간 모조리 모가지를 꺾어 버렸을 터다.
어휴, 아무리 착한 척이라고 해도 그렇지, 참 많이도 관대해졌다. 이 꼴을 그냥 두고 보네, 내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신을 노리고 날아든 검들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어떻게, 이것들만 좀 치워?
화악!
잠깐 고민하던 사이에 눈앞의 환영이 사라지고, 또 다른 광경이 펼쳐진다.
돈을 많이 들인 것인지 참 잘도 만들었…… 어?
변해 버린 풍경.
그의 앞에 지친 기색으로 서 있는 도사.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를 입고도 의기가 짙은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인물.
“스, 스승님?”
명진이다.
십칠 년 전 그때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던 모습 그대로를 재현하는.
“사파의 악적! 내 죽더라도 끝까지 싸울 것이다.”
“…….”
저 말 들으니까 전의 기억이 다시 새록새록 떠오른다.
분명 무당의 도사 놈 중 하나가 사패천주는 부모 형제도 모르는 개잡놈이라고 했었던가?
그 때문에 열 받아서 무당을 확 불 싸질러 버리려 찾은 걸음이었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른다.
착한 척이고 뭐고 봐주기 싫어진다. 싹 다 죽여 버릴까? 과거처럼?
기껏 고기 처먹여서 살려 놨더니.
진무가 얼굴을 찌푸리는데 천우명이 또 다가와서 속삭인다.
“저런 망할 놈이! 속하에게 맡겨 주십시오. 당장에 목을 뽑아 가져오겠습니다.”
악마냐?
안 그래도 죽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인데 왜 자꾸 귀에 대고 충동질하고 지랄이냐?
멍청한 것도 모자라 간악한 놈 같으니.
니가 사람이냐?
잠깐이라도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사람이다. 어떻게 제자더러 스승을 해하라 한단 말이냐, 이 사악한 놈아.
너 같으면 눈앞에서 스승 모가지 뽑히는 장면을 보고 싶겠냔 말이다.
“비켜.”
“내 절대로 비킬 수 없다. 나는 목숨을 다해 본산을 지킬 것이다.”
명진이 두 눈에 독기를 토해 내며 외쳤다.
이봐, 그런 게 아니라.
진무가 다가설수록 명진의 눈동자에 어린 독기가 강해진다.
아, 섭섭하네.
내가 제 놈한테 어찌했는데.
그런데 그의 뒤.
자소궁.
전에는 보지 못했던 광경이 보인다.
환영진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망할 도동 놈의 기억 때문에?
얼굴을 찌푸린 진무의 눈에 창밖으로 고개를 빼꼼하게 내민 어린 이대제자들이 보였다.
아, 이거였냐?
그때 목숨을 걸고 자소궁을 지키려고 했던 게?
무당의 미래가 될 이대제자들을 지키고 싶어서?
진무는 한숨을 내쉬며 스승을 향해 다가갔다.
혁련무강으로서의 기억뿐만 아니라 도동의 기억도 함께 가지고 있었던 진무는 명진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는지 알고 있었다.
십 년을 누워 지낸 터라 등창이 생겼을 때도 있었고, 지독한 좌절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 고민했다. 자신이 비루한 삶을 비관해 죽어 버린다면 제자들이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대해.
또한, 언제나 걱정했다. 자신을 돌보는 어린 도동이 홀로 남겨질 것을.
“멍청한 위인 같으니. 진작에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무공을 폐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진무가 씁쓸하게 웃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스승을 향해 다가갔다.
당시의 명진은 무공이 폐해진 와중에도 끝까지 진무를 향해 검을 들었다.
지금도 그때처럼 그가 다가감에 따라 기세가 날카로워진 명진이 검을 곧게 뻗어 왔지만, 이미 환영임을 알고 있는 진무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똑바로 걸었다.
푸욱!
검이 진무의, 아니 혁련무강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
그런데 그 순간, 이상한 광경이 진무의 눈을 스친다.
희뿌연 그림자.
진무의 몸에서 빠져나온 그것이 가슴을 찌른 명진을 감싸 안는다.
뭘까, 그의 기억에 이런 건 없었는데.
쉬이이…….
진무가 의아함을 품는 와중에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먼지가 날리듯 스승의 모습과 환영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 * *
“…….”
진무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수많은 법문이 새겨진 어린아이만 한 목상이었다.
환영이 전부 걷히자 공간이 환하게 밝아지고, 원래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거대한 공동. 그 안을 가득 채운 목상들.
그것이 환영진의 정체였던 모양이다.
덜컹.
진무가 회상에 젖어 있는 동안 어디선가 투박한 개폐음과 함께 환한 빛이 느껴졌다.
“어?”
문이다.
그리고 그 문에서 낮의 그것처럼 밝은 빛이 쏟아져 나왔다.
진무는 마치 이끌리듯 문으로 향했다.
한 장 크기의 네모반듯한 서늘한 공간.
천장과 바닥, 삼면이 창 없는 벽으로 이루어진 그곳에 작은 탁자가 놓여져 있었다.
탁자 위에는 빛바랜 서신 하나와 옥갑이 있었고, 그 뒤로 한 눈에도 기품이 넘쳐 보이는 백색 검이 놓여 있다.
진무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가장 먼저 서신을 펼쳤다.
연자(緣者)에게…….
놀고 있네. 오다가 뒈질 뻔했구만.
노인네들은 어째서 서신마다 이딴 말들로 시작하는지 모르겠다.
일단 시작하는 글 자체가 너무 예스러워서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래도 써놓은 정성을 생각해서 읽어 준다.
서신은 공동 장문인이었다는 무령자가 직접 작성한 내용이었다.
서두는 당시 청무의 부탁으로 양의심공 후반부의 일부를 공동에 봉인했으며, 다른 도문의 장문인들과 달리 언젠가 무당에서 다시 찾으러 올 것이라 생각하고 이런 기관을 만들었다는 내용.
그냥 다른 도문보다 돈이 많아서 만들 수 있었던 걸 가지고 주저리주저리 설명은. 차라리 대놓고 자랑을 하지.
어쨌든 복마동은 공동의 제자들이 수련을 할 수 있게 만들어진 곳이 아니라 무당에서 온 자를 시험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첫 번째 기관은 무공의 경지를 시험하기 위함으로, 강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이는 절대로 통과할 수 없도록 제작하였으며…….
사실이다. 강의 경지에 오른 진무였음에도 몇 번이나 죽을 뻔했으니까.
다시 생각하니까 열 받네. 망할 놈의 자식 같으니.
아무튼, 그리고 두 번째 기관인 환영진은 공동의 법술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찾아온 자의 성정을 살피고자 깔아 두었단다.
들어온 자에 따라 보는 바가 다를 것이며, 가슴속에 가장 맺혀 있는 일을 보여 준다 하였다.
맺혀 있었다고?
무당을 습격했던 것이?
진무는 스스로의 기억을 의아해하며 서신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만약 심지가 굳지 못하여 환영에 취한다면 영원히 그 속에 갇히게 될 것이고, 살심을…….
“살심을 품어 무공을 사용했다면 기관 전체가 무너졌을 거라고?”
거기까지 읽은 진무의 눈썹이 역팔자를 그렸다.
어이가 없다.
연자는 개뿔. 길게도 말했으나 결국 무공이 모자라도 뒈지고, 환영진에 빠져도 뒈지란 이야기다.
어떻게 돼먹은 인성이길래 도사라는 놈이 이렇게 악독하기 짝이 없는 기관을 만들었단 말인가?
섬뜩하지 않은가?
만약에 진무가 환영진 속의 천우명에게 ‘죽여!’라고 말했다거나, ‘과거와 똑같이 행동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고 무공을 펼치거나 했다면…….
와자작.
진무는 더 읽을 것도 없이 서신을 구겨서 바닥에 던져 버렸다.
“빌어먹을 도사 놈이 개소리를 해도 씨발, 아주 논리적으로 해 놨네.”
한두 마디 욕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는다. 지나온 기관에서 겪은 무수한 죽을 고비를 떠올린 진무가 구겨 버린 서신을 마구 짓밟아 비볐다.
그러고도 한동안 씩씩대던 그의 손이 길이가 한 자 정도 될 법한 옥함을 향하고.
딸깍.
태청신단처럼 맑은 향기가 나지는 않았지만, 그 안의 물건을 확인한 순간 진무의 눈동자가 진한 희열로 물들었다.
양의심공 후반부, 주해본의 첫 조각.
드디어 세 번째 조각을 찾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