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194
194화
의자에 느긋하게 앉아 책 하나를 꺼내 든 진무.
그리고 그 앞에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고위직 관리 태양명.
누가 봐도 이상한 모습이었으나 태양명의 시선은 진무가 들고 있는 책자에만 고정되어 있다.
망할, 치부책이라니.
아예 이름 자체를 책 앞장에 큼지막하게 잘도 적어 놨다.
동림전장의 총관 황각수가 그동안 자신에게 바친 뇌물에 대한 내역을 모조리 적어 두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반드시 얻어야 했다.
눈 앞의 무당 도사 놈을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일단은 증거를 인멸하고 난 뒤라야만 했다.
“어이.”
어, 어이?
“자네 이름이 태양명이라고 했나?”
“…….”
어린놈의 도사 새끼.
감히 정사품 고관에게!
저 버르장머리 없는 입을 당장에 찢어 놓고 싶었지만.
“예. 그렇습니다.”
대답은 공손하기 짝이 없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진무였으니 일단은 분위기부터 파악해야만 했다.
“진회루에서는 내가 좀 심했지?”
“예? 아니, 무슨 그런 말씀을. 다 이유가 있으셨겠지요.”
양손을 모으고 간신배처럼 웃는 태양명이 진무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아니야, 내가 좀 심했어. 그래도 서안부의 수장인 자네에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말이지.”
“아이구, 당치도 않습니다.”
“그래? 뭐 자네가 괜찮다니 그럼 그 건에 대해서는 더 신경 쓰지 않음세.”
“예, 암요.”
태양명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림전장에서 받아먹은 거 말이야. 혹시 원화정이라는 곳의 뒤를 봐주는 대가로 처먹은 건가?”
진무가 슬쩍 던져 본 말에 태양명이 의아한 표정을 짓고는 적절한 대답을 찾아내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원화정이요? 황실의 사당이 왜? 당최 무슨 말씀이신지?”
태양명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어색하게 웃는다.
“그래?”
보아하니 원화정에 대해서는 모르는 눈치였다.
이 소심하기 짝이 없는 놈이 알면서 거짓을 말했다면 눈빛이나 숨소리에 변화가 있었을 테니까.
그저 동림전장의 부탁을 들어줌으로써 뇌물을 받은 것이 고작일 터다.
하긴 ‘궁’이라는 놈들도 생각이 있다면 개방도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는데 관과의 관계를 쉽게 드러낼 리 없었다.
그리고 진무가 본 태양명은 절대 그 정도 깜냥이 되지 못했다.
놈은 아마도 깃털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하면 원화정과의 문제는 접어 두고, 본래의 목적을 이룰 차례다.
동림전장에 예치되었던 돈.
유장이 동림전장에서 뒤로 빼돌린 황금 사십 관을 확보하러 갔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내가 원래 동림전장에 예치한 돈이 있는데 말이야.”
“…….”
“어떤 망할 놈들이 빼돌리는 바람에 큰 손해를 입었어.”
근데?
자기가 동림전장에서 손해 본 걸 왜 자신에게 말한단 말인가?
태양명은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진무를 바라보았다.
“치부책 내용을 보니 받아 처먹은 놈이 꽤 많더군. 내 전부 일일이 찾아다닐 수는 없고…….”
“…….”
태양명의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왠지 저 막돼먹은 입에서 나올 말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때마침 자네를 알게 되어서 어찌나 다행인지 모르네. 어떤가? 동림전장과의 연이 깊은 자네가 그곳에서 받은 뇌물로 내 손해를 좀 메꿔 주는 게.”
그럴 것 같았다.
망할 도사 놈이 탐욕이 아주…….
하지만 치부책과 교환을 한다면?
진무의 말을 듣고 있는 태양명의 눈이 씰룩거렸다.
표정을 숨기려고 했지만 잘 안 된다.
“일단 그 동천 땅 만 평 정도면 얼추 손해가 메꿔질 것도 같고.”
“…….”
이런 미친 도사 새끼가?
점점 더 가관이다.
동천의 땅, 만 평. 그리 크진 않다.
하지만 그 값어치가 다른 땅 만 평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그곳 일대의 하천에서 사금(砂金)이 채취되기 때문이었다.
광산까지는 아니어도 한 해에 채취되는 금이 상상을 초월하는 알짜배기 땅인데 그걸 내놓으라고?
“그건 안…….”
태양명의 말이 끊어지기도 전에 진무가 덧붙여 말했다.
“뭐, 내키지 않으면 주지 않아도 상관없네. 난 그저 이 치부책 하나로도 충분하거든. 잘 아는 도찰원(都察院) 감찰어사(監察御史)도 있고.”
“…….”
도찰원이란다.
황제 직속의 감찰기관이다.
그리고 감찰어사라면 품계는 낮더라도 일단 하나 걸리면 사돈에 팔촌, 돌아가신 아버님 무덤까지 파헤쳐서 비리를 찾아내는 지독한 놈들이었다.
물론 사패천주였던 진무가 그런 사람을 알 리가 없었다.
원래 궁지에 몰린 뒤 구린 놈들이 다 그렇듯, 위협용으로 슬쩍 몇 마디 던져 주면 알아서 척척 믿으니까.
“자, 잠시만요. 도사 어른.”
진무가 슬쩍 일어나려고 하자 태양명이 급히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아챘다.
“왜?”
“아니, 자, 잠시 생각을 좀.”
“뭐 생각할 게 있겠는가? 신경 쓰지 말게. 뭐, 관복 벗고 뇌물로 받은 것도 다 반납하고 평민으로 소소하게 살면 되지. 아니지. 받아 처먹은 게 많으니 모가지가 댕강 잘려 형장의 이슬이 될지도 모르겠군.”
“…….”
잔인한 말을 대수롭지 않게 줄줄 해 대며 치부책을 품에 갈무리하는 진무의 모습에 태양명의 눈이 찢어질 듯이 뜨였다.
이놈아, 내가 네놈 머리 꼭대기에 있다.
백날 머리 쥐어짜 봐라.
이런 식의 위협이라면 산전수전에 해상전까지 겪어 본 진무다.
“이거 놓으시게, 허허. 내 살펴보니 안에 적힌 내용에 별별 놈이 다 있던데. 잘하면 위협용으로도 쓸 만한 물건일 텐데 말이야.”
진무가 장삼의 끝자락을 움켜쥐고 있는 손을 뿌리치자 태양명은 점점 더 다급해졌다.
“도사 어른, 아니 대인, 대협!”
“…….”
“드리겠습니다. 동천 땅을 드리겠습니다.”
태양명의 말에 진무가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새끼, 니가 안 넘어오고 배기냐.
진무가 푸근하게 웃으며 못 이기는 척 다시 자리에 앉자 태양명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응? 자네 지금 뭐 하나?”
“예?”
“가져와야지.”
“무엇을?”
“이 사람, 참으로 답답하군. 땅문서 말일세.”
“…….”
부질없는 시간이나마 끌어 보려고 했던 태양명의 낯빛이 완전히 시커멓게 죽었다.
“어이쿠,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진무가 일부러 엉덩이를 조금 들썩거리자 태양명이 벌떡 일어나서 금고에 숨겨 둔 동천의 땅문서를 챙기려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뒤, 태양명이 가져온 동천의 땅문서를 내밀었다.
진무가 흐뭇한 얼굴로 땅문서를 접어 품속에 넣었다.
그 모습을 아까워 죽겠다는 얼굴로 보면서, 동시에 태양명은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동천의 땅과 치부책을 바꿔 그 안에 적힌 뇌물 받은 자들을 하나씩 협박해 돈을 뜯어내리라.
잘만 이용하면 서안부 지부보다 훨씬 더 높은 직책에 오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된 이상 동천 땅이 아니라 다른 것을 달라 해도 내어 주고 치부책을 손에 넣으리라.
태양명이 이제 치부책을 내어 달라 요구하려는데.
“참, 그 정무맹 갑무반 무인들이 잡혀 있다고?”
“…….”
“풀어 줬으면 좋겠는데?”
오냐, 풀어 주마.
그까짓 무림인들 따위.
태양명은 고민할 것도 없이 밖을 향해 소리쳐 명을 내렸다.
“게 누구 없느냐!”
“예!”
“옥장에게 전해 소란을 일으켰던 정무맹의 무인들을 모두 데려오너라!”
“예!”
밖에서 명을 받은 관인이 부리나케 뛰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리는 사이 눈치를 보던 태양명이 슬쩍 말을 건넸다.
“저어, 대협?”
“……?”
“치부책을 제게…….”
진무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친놈.
내가 너를 어찌 믿고 넘긴단 말이냐?
“나와 정무맹 무인들의 안전이 확보되면…….”
뒤가 흐려진 진무의 말에 태양명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두고 보자.
내 치부책만 얻고 나면.
지금의 치욕을 톡톡히 갚아 줄 것이다.
태양명이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가라앉히고 있는데, 옥에 갇혔던 무인들이 그의 거처로 들어왔다.
“어?”
막 안으로 들어선 청상과 청우가 진무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가 금세 울 듯한 표정을 짓는다.
짜식들, 꼬라지하고는.
저마다 손목은 축(杻: 수갑), 발목은 철삭(鐵索: 쇠밧줄)에 묶여 있으니 참으로 처량하다.
“사숙!”
청상과 청우가 기쁜 얼굴로 외치고.
“진무 도장.”
제갈산산이 반가운 표정을 짓는다.
나머지는 그저 소문으로만 들어 보았지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라 서먹한 표정이었다.
근데…….
“진무 도장. 빨리 오셨군요.”
“…….”
운암아, 넌 왜 그러고 앉았냐?
진무가 청상 등과 같은 모습으로 옥구(獄具)에 묶여 있는 운암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냥 가서 상황만 유지하랬더니 왜 잡혀 있고 지랄인지.
진무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고는.
“잘들 있었냐?”
“사숙. 엉엉엉.”
청우는 어린아이처럼 울기까지 했다.
마음이 짠하다.
이 새끼…… 살이 더 쪘네.
어쨌든 좀 기다리고 있어라. 밀린 회포는 조금 후에 풀자.
진무는 태양명을 쳐다보았다.
“지부 대인, 이제 오해가 풀린 듯한데 어떠십니까? 그만 풀어 주시지요.”
“……어? 아! 그, 그래야지, 암. 허허, 내 진무 도장의 말을 듣고 나니 모든 오해가 절로 풀리는 듯하구만.”
태양명이 지시를 내려 옥구에서 해방된 청우와 청상이 진무를 향해 달려왔다.
뭔지 알 것 같다.
와락!
그럼 그렇지. 이 남색 도사 놈들…….
니들이 무슨 좌청룡 우백호냐?
왜 양쪽에서 끌어안고 지랄이냐고?
아끼는 부하 일, 이 호만 아니었다면…….
그리고 운암과 제갈산산은 뭐 저리 흐뭇한 표정이란 말인가?
진무가 청상과 청우를 떼어 내고는.
“지부 대인, 하면 저희는 그만 돌아가 봐도 될는지요?”
“아니, 그…… 우리는 아직 나누어야 할 대화가…….”
대화는 무슨.
어떻게든 치부책을 얻어 보려는 속셈인 걸 내 모를까 봐?
진무가 피식 웃으며 전음을 보냈다.
[사흘 뒤.]아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태양명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무당의 도명을 걸고 맹세하지. 그게 싫으면 감찰…….]전음이 끝나기도 전에 태양명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인다.
무척이나 일방적인 통보에 이가 갈릴 지경이지만 어쩌겠는가? 이런 경우에는 칼자루 쥔 놈이 왕인데…….
어쨌든 갑무반 꼬물이들은 전부 구했고, 원금에 이자를 더해도 넘칠 정도로 받아 내었으니 이제 돌아가야 할 때다.
“내 진무 도장을 꼭 다시 뵙고 싶구먼.”
다음에 만날 때는 반드시 치부책을 가져오게. 라는 속마음을 담아 태양명이 슬쩍 손을 내민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지랄. 내가 언제 너한테 준다던?
니 멋대로 이것저것 상상을 한 것뿐이지.
준다는 말은 한마디도 안 했다.
그리고 애초에 준다고 한들 너 같은 탐관오리랑 한 약속을 왜 지키냐, 내가.
진무가 앞서 관청을 빠져나가자 뿌듯한 표정의 청상과 청우, 제갈산산을 포함한 갑무반의 무인들이 그 뒤를 따라 나왔다.
성문까지 따라 나온 태양명이 그들의 뒷모습을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또 오게! 반드시 와야 하네! 진무 도장! 내 말 듣고 있는가?”
진무는 그저 웃으며 고개만 살짝 숙여 주었다.
얼마쯤 갔을까?
“제갈 소저.”
진무가 제갈산산을 불렀다.
“예?”
“혹시 말이오. 서안부의 사정에 대해 좀 아십니까?”
혹시나 해서 물어본 말이었다.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한데 어찌?”
“그냥, 궁금해서…….”
“……?”
어찌 그런 것을 묻는지는 모르지만 제갈산산은 자신이 아는 바를 소상하게 전했다.
“관의 행정은 지부가 맡고 있으나 군권은 첨사(僉事)가 맡고 있습니다. 서로 하는 일은 다르지만 부딪히는 경우가 많죠.”
“아, 그래요?”
“예. 첨사는 지역 관리의 비리에 관련된 조사와 감찰 업무도 하고 있거든요.”
좋은 정보다.
진무는 비열한 놈들을 좋아하긴 해도 믿지는 않는다.
그것은 무림인이든 일반인이든 관부의 인물이든 모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사실이다.
써먹을 때는 마음껏, 뒤는 항상 조심해서.
특히나 태양명 같은 놈은 더더욱 그렇다.
지금은 치부책 때문에 간사하게 웃고 있으나 절대로 자신이 손해 본 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
언제고 복수를 하려 들 것이 틀림없다.
사금이 나는 동천의 땅, 동림전장이 빼돌린 황금 사십 관.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딱히 관부의 일에 끼어들고 싶은 건 아니지만.
태양명, 권력을 등에 업고 뇌물이나 처받는 탐관오리 새끼.
철저하게 무너뜨려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