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256
256화
화공이 그림에 먹을 더해 가듯 회색에서 검은빛으로 변하며 몸집을 키운 구름이 이내 푸른 빛을 잡아먹는다.
쿠르릉.
구름 사이로 빠르게 돌아다니며 천둥을 만들어 낸 섬전이 어느 순간 세상을 밝은 빛으로 물들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쏴아아아아!
먹구름이 그 무게를 더 이상 품고 있지 못해 뱉어 낸 물기가 손가락만큼이나 굵게 변해 무섭게 쏟아져 내렸다.
비는 말라 있던 땅을 순식간에 축축하게 적시고 대기를 습윤하게 만들어 놓았다.
산서성의 어느 산골, 어느 장원.
열어 둔 창문으로 빗발이 들이치고 있었지만, 방 안에 앉은 노인은 딱히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쪼르륵.
다례(茶禮)에 익숙한 듯 차가운 인상의 사내가 맑은 차를 따라 그의 앞에 공손하게 내민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이 이리저리 흩어져 형체를 감출 때쯤 노인이 창밖에 무섭게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우기도 아닌데 비가 과하게 쏟아지는군.”
“예. 근래에 들어 이리 비가 많이 오는 것은 처음인 듯합니다.”
“음…….”
노인이 사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작게 한숨을 내쉰다.
“상관평이 소궁주와 손을 잡았다고?”
“예.”
“흐흠.”
노인이 목젖 근처까지 내려온 미염(美髥)을 쓸며 눈을 감는다.
노인의 이름은 송여방, 산서 상권을 장악한 상계의 거두이자 일궁주라는 신분을 가진 자였다.
그리고 차를 따르며 그의 옆에 공손하게 앉은 자는 송여방의 전령이자 호위인 유굉이었다.
“확실히 내궁주가 죽은 것은 의외였어.”
“…….”
“덕분에 정무맹에 잠입한 삼궁의 세력까지 날아가 버리다니 말이야.”
“욕심이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알아. 뛰어난 여인이기도 했지.”
“…….”
“소궁주로서도 상관평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을 게야. 그는 아직 너무도 약하니까.”
송여방이 피식 웃으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그나저나 상관평의 행동이 조금 의외로군.”
“어찌하여 그렇습니까?”
“상관평은…… 후, 아니야. 다 생각이 있겠지.”
“…….”
송여방이 다시 고개를 창밖으로 돌린다.
“쉽게 그치진 않을 모양이야.”
“예. 기세가 매섭습니다.”
“번천계는?”
“얼추 마무리되었습니다. 사패천의 본성은 이제 일궁의 손아귀에 놓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군. 유월청은 꿈에도 생각 못 하겠지.”
“예.”
유굉의 말에 송여방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한 가지 추가로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
“근래, 유월청이 실권을 나누어 준 녹림, 수채, 야금당의 예하가 의문의 인물들에게 습격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호오? 관의 토벌인가?”
“아닙니다. 저희 쪽에서 알아본 바로는 조금 특이합니다.”
“특이하다? 자세히 말해 보라.”
송여방이 흥미가 동한 듯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 유굉을 바라보자 급히 고개를 숙여 엎드린 유굉이 찬찬히 보고를 올린다.
“예. 산적들의 말로는 습격자가 스스로를 산적이라 했고, 수적들의 말로는 하백(河伯)이라 했답니다.”
“하백? 그 민간 설화에 나오는 강의 신을 말하는 것인가?”
“예.”
송여방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잇는다.
“야금당을 습격한 놈은 어떤 놈이라더냐?”
“……그쪽은 흉수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흔적이 없단 말이냐?”
“예.”
그 말에 송여방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진다.
지금의 사패천 영역에서 그가 모르는 정보는 없어야 한다.
“혹, 천웅방인가?”
“확실치 않습니다.”
“흐음…….”
송여방은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감았고, 유굉은 가만히 기다렸다.
천웅방, 사패천의 반란 세력. 언젠가부터 그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는다.
그렇다는 것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흐리고 있다는 뜻. 더욱이 유굉의 눈조차 피할 정도라면.
“섬서성의 사패천 세력이 습격당한 경로가 어찌 되느냐?”
“부현, 감천, 연안, 자장을 지나 산서성 흥현 인근을 지났습니다.”
“북으로 가고 있다?”
“예.”
“흐음.”
송여방의 눈이 감았다 뜨였을 때, 그의 얼굴에는 이전과 다른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천웅방주가 제법이군.”
“…….”
“하오문. 그들을 포섭한 게야.”
“예? 설마……. 이제까지 움직임이 없던 이들입니다.”
“그럴 테지. 일부러 드러내지 않은 게야. 천웅방에 하오문이 포섭되었을 확률은 구 할 이상이다. 아니, 확실하다고 봐야겠지.”
그의 말에 유굉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오문이 천웅방에 붙어 버리면 꽤 곤란해진다.
세력의 균형은 힘의 크기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보를 쥐고 있는 하오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승패가 뒤집어질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천웅방, 철검단, 거기에 하오문이 붙고 섬서의 사패천이 습격을 당했다. 그리고 습격 경로가 북으로 이어진다면?”
허공의 한 곳을 응시하며 중얼거리는 송여방의 말에 유굉이 눈을 부릅뜨며 외친다.
“설마 저들이 살막을 노리는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확실하겠지.”
“그런!”
각기 떨어졌을 때는 상관없지만 뭉치게 되면 곤란해진다.
이미 사패오왕 중 셋이 뭉친 상태였다. 거기에 살막까지 붙어 버리면 사파인들의 여론이 움직일 것이고, 높은 확률로 천웅방 쪽으로 세력이 결집된다.
균형이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패천의 붕괴가 진행되는 것이다.
그것은 일궁이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누가 이기든지 상관없지만, 승리자는 자신들의 손에서 나와야 했다.
유굉의 눈동자는 불안감으로 물들었지만 송여방의 얼굴은 담담하기만 했다.
“흐흠, 원공후나 천우명 놈이 세운 계획일 리는 없고…… 그렇군. 천웅방이 제법 재미있는 책사 놈 하나를 영입한 모양이구나. 잘하면 사패천의 주인이 바뀔 수도 있겠어.”
“예?”
유굉이 의문을 드러냈지만 송여방은 한동안 무언가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난 후에야 유굉을 향해 입을 열었다.
“유굉.”
“예.”
“살막을 처리해야겠다.”
유굉은 차분히 결정을 내리는 그의 얼굴을 조금 커진 눈으로 바라보다 궁주의 생각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하오문이 붙은 것도 우려할 일인데 살막까지 붙어 버리면 천웅방 쪽을 통제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마군(魔軍) 어른에게 즉시 전달하겠습니다.”
“……마군 하나로는 부족하다. 광도(狂刀)도 함께다.”
“그분까지 보내시는 것입니까?”
유굉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마군과 광도.
그들은 일궁이 보유한 최강의 고수다. 중원의 강의 고수들에 비해서도 조금의 모자람이 없는.
“유굉.”
“…….”
“다른 이도 아니고 소약벽이다. 그녀는 까다롭지. 그리고 반드시 죽여야 한다.”
송여방의 말에 유굉이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인다.
야화(夜花) 소약벽.
그 이름이 주는 의미는 매우 크다.
지금의 중원에서 가장 은밀하고 무서운 조직을 이끄는 여인. 살막의 주인이며 또 다른 사패오왕의 일인이자 중원 살수의 맥을 이어 가는 밤의 여제.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천웅방 쪽에 은밀하게 기별을 넣어라. 한번 만나자고.”
“벌써 말입니까?”
“머뭇거릴 필요 없겠지. 이리도 빨리 세력을 결집시켰으니 더 커지기 전에 손을 써야 하지 않겠느냐. 너무 커지면 손을 떠나 버릴 터이니.”
“알겠습니다. 일단 기별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패천 본성에 잠입해 있는 암영대에게 연락을 취해라. 우리가 천웅방과 접촉할 때까지 사패천의 본 전력이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예.”
유굉은 고개를 숙이며 뒷걸음으로 물러나려다가 멈칫했다. 한 가지 내용에 대한 답을 아직 듣지 못한 것이다.
“야금당, 녹림, 수채를 공격한 습격자에 대한 것은 어찌할지. 대궁으로 보낼 아이 수급에 차질이…….”
유굉의 말에 송여방이 찻잔을 쳐다보며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유월청이니 모자란 수는 알아서 채워 올 것이다. 그리고 습격한 놈들이 천웅방 쪽이라면 반드시 살막과 접촉하려 할 테니 마군에게 처리하라 전하라.”
“예!”
“그만 물러가거라. 나는 모처럼 비를 즐겨야겠구나.”
“예.”
송여방의 축객령에 유굉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물러났다.
쪼르륵.
빈 찻잔이 다시 채워진다.
“산적에 하백이라니……천웅방이 새로 얻은 책사가 꽤나 젊은 놈인가 보군. 하긴 경험이 모자란 어린놈일수록 우리에겐 더없이 좋은 일이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며 송여방이 피식 웃는다.
* * *
푸드득.
밥을 먹고 있던 도중에 전서구가 날아왔다.
황신이 내민 쪽지에는 한 곳의 지명이 적혀 있었다.
살막, 산서 최북단 하곡(河曲) 다동루(多同樓).
“……!”
기다리던 소식이 왔다.
드디어 하오문이 살막의 위치를 찾아낸 것이다.
“황신.”
“……?”
“하오문에 전서구를 띄워. 수채의 재물을 회수해 가라고. 그리고 멀쩡한 배 한 척 찾아 와라. 하곡이면 배를 타고 가는 게 빠를 테니까.”
진무의 말에 황신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주변을 바라본다.
그들이 위치한 곳은 강가였다.
산서와 섬서를 가르는 거대한 황하의 물줄기, 그 중심 강변.
그리고 지금 그들이 식사하고 있던 곳의 옆으로 흐르는 강가에는 참 많은 것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부서진 나뭇조각들, 거꾸로 처박혀서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크고 작은 배들, 정신을 잃은 채 둥둥 떠다니고 있는 어피복을 입은 사람들…….
그렇다.
그들은 몇 시진 전, 황하의 물줄기에 자리 잡고 있는 수채 중 한 곳인 우황채를 찾아왔다.
이미 두 번의 전례로 수적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지만, 진무가 어디 보통 괴물이던가?
앞서 수채를 습격한 것과 같이 스스로를 ‘하백’이라 이라 자처한 진무의 투항 경고를 비웃은 수적들은 정말 불쌍할 정도로 처맞았다.
구타만 했으면 다행이었다. 도망치지 못하게 한다면서 배라는 배는 모조리 때려 부쉈다.
그래 놓고는 지금 와서 뭐? 멀쩡한 배 한 척을 찾아 오라고?
제정신인가?
휙, 휙휙!
황신이 저것 좀 보라며 가라앉고 있는 배들을 향해 미친 듯이 손가락질을 했다.
“아참, 내가 다 부숴 버렸구나? 흐음, 그럼 어떻게 한다? 하오문에서 우황채의 재물을 회수하러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고.”
그래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주인을 만나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 황신이 가슴을 쓸어내린다.
“뭐, 어쩔 수 없지. 수적 놈들이 말을 기를 리는 없으니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뛰어가는 수밖에.”
당연히 그래야지.
그런데 다음 순간 살벌한 한마디가 황신의 귓가를 파고든다.
“황신, 그냥 가면 밋밋하니까 이번엔 경공이랑 은신술을 같이 수련하면서 갈까? 뭐? 좋다고? 그래. 수련은 언제나 즐겁지, 암. 자, 그럼 열까지 셀 테니까 하곡까지 잘 도망쳐 봐. 알겠지?”
“…….”
싱글싱글 웃으며 눈까지 찡긋거리는 진무.
파핫!
황신은 전광석화 같은 몸놀림으로 급히 주변을 뒤져 두 아름이나 되는 나무를 위아래로 잘라 내고 세로로 반을 갈라 그 속을 미친 듯이 맨손으로 파내기 시작했다.
존경해 마지않는(?) 천주님께서 쉴 공간까지 만들어 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