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273
273화
표국을 벗어난 진무가 객잔으로 돌아온 것은 멀리서부터 밝아 오는 여명(黎明)에 잠들었던 삭주가 깨어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쪼르륵.
진무가 돌아오자 잠에서 덜 깬 어린 점소이가 새벽 공기에 차가워진 몸을 달래라며 따뜻하게 데운 술을 따라 주었다.
진무는 눈곱마저 떼지 않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고맙다.”
“뭘요.”
“…….”
피곤했을 텐데.
아직 어둠이 칙칙하게 깔려 있어 아무도 깨지 않았는데도 아이는 자신이 맡은 직분을 충실하게 다하고 있었다.
해야 하니까. 먹고살아야 해서.
아이가 층을 내려가고 난 뒤 진무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잔을 바라보았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이 종이를 타고 오르는 물처럼 온몸으로 번져 나간다.
꿀꺽.
단숨에 술을 삼킨 진무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산서상회.
산음표국을 다녀온 이후로 그들의 숨겨진 모습이 머릿속에서 조금씩 그려진다.
삭주에 자리 잡은 상가와 무가, 표국과 민초들에게 이르기까지 방대하게 행해지는 억압.
반기를 드는 행위는 그렇다 치더라도 언행까지 통제한다, 이거지.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진무가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하, 그러니까 이 새끼들 지금 왕 노릇 하는 거네.
뭐, 좋은 방법이다. 공포를 이용한 통치.
북리도천 그 새끼가 잘 쓰는 방법이다. 무척이나 효율적이기도 하고.
그런데 감히 산서에서?
미친놈들이 누울 자릴 보고 다리를 뻗어야지, 감히 내 땅에다가 말뚝을 박아?
간덩이가 부어도 너무 부었다.
오냐, 그래. 어디 두고 보자.
니들이 궁이든 뭐든 이제 상관없다. 돈? 그거야 어차피 뺏으면 내 거고.
내가 자리싸움에서 져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모조리 박살 내고 누가 진정한 주인인지 뼈 마디마디에 똑똑히 새겨 주마.
파삭.
은은한 분노가 담긴 기세에 진무의 손안에 있던 술잔이 산산이 부서진다.
곧장 병째로 들이부은 술의 따스함이 목 안으로 넘어가 오장육부로 퍼져 나갈수록 진무의 눈빛은 점점 더 서늘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천주님.”
홀로 기다린 지 한참이 지나고, 멀리서 산 너머에 몸을 숨겼던 해가 빛을 뿌리기 시작하는 시각.
삭주를 둘러본 황신과 소동보가 돌아왔다.
“이런 굼벵이 같은 것들. 뭐가 이렇게 늦어?”
“……!”
어? 개천주가 갑자기 왜 이렇게 화가 났지?
살벌하기 짝이 없는 진무의 표정에 황신과 소동보가 다가서다 흠칫하며 걸음을 멈췄다.
“알아봤어?”
“예! 산음표국처럼 모두가 경계를 강화했더군요.”
소동보가 답하자 황신이 고개를 끄덕여 같은 뜻을 표현했다.
“그렇단 말이지…….”
전체적으로 움직였다는 이야기다.
경계를 지금처럼 매일 해 왔을 리는 없다. 지독한 피로감에 시달려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이유가 뭘까?
진무가 턱 언저리를 쓸며 생각을 정리하는데 막 세상이 깨어나는 이른 시간에 어울리지 않는 소란이 객점 밖에서부터 들려왔다.
“황신.”
진무의 짧은 명령과 동시에 황신이 귀를 쫑긋 세운다.
“……음.”
가만히 듣고 있던 황신의 얼굴이 차츰 일그러졌다.
“곱상하게 생긴 소년…… 단정한 차림의…… 놈들이 저희를 찾고 있는 것 같은데요?”
벌써? 산음표국이 신고를 한 건가?
그럴 리가. 산음표국에 흔적을 남기지 않았고, 남겼다고 해도 이렇게 빨리 찾을 리가 없는데?
대체 어떻게 알…… 젠장, 그렇군.
소동보와 황신이 산서상회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한 것이 문제가 된 모양이다.
“천주님, 서둘러 자리를 옮겨야 할 것 같습니다. 관병들입니다.”
“……하아! 와중에 관병이야?”
상단 무인들이 아니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더욱이 돈을 얼마나 처발랐으면 그 굼뜬 관병 놈들이 이 새벽에 자신들을 찾으러 움직였단 말인가?
그래, 좋다. 내 지금은 물러나 주마. 하지만 조금만 기다려라.
산서상회를 처리하고 나면 니들이 뇌물을 받아 처먹은 정황까지 샅샅이 찾아내서 모조리 털어 주마.
“……일단 물러난다.”
화가 아무리 나도 관이 걸려 있는 이상 완벽한 증거를 찾아내거나 완전한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부딪혀서 좋을 것이 없었다.
진무는 소동보에게 자신이 챙겨온 장부를 챙겨 들게 한 뒤 곧바로 창문을 통해 객점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쿵쿵쿵쿵.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소리와 함께 창검으로 무장한 십여 명의 관병들이 진무가 있었던 이 층에 나타났다.
“이거 뭐야?”
텅 비어 썰렁함이 느껴지는 객점 이 층의 모습에 관병을 끌고 온 관리가 눈썹을 팔자로 찌푸린다.
“방금까지 있었다며?”
“암요. 저놈이 술을 데워서 가지고 올라가는 걸 제가 똑똑히 보았다니까요?”
객점주가 진무의 술 시중을 들었던 어린 점소이를 가리켰다.
“야, 어떻게 된 거야?”
“……저는 잘.”
관인의 위세에 놀란 아이가 겁에 질려 목을 잔뜩 움츠리며 답했다.
“이런 쌍! 이것들이 장난하나?”
육두문자를 남발한 관인이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이놈들이라도 잡아가라. 고신을 해 보면 뭐라도 토하겠지.”
“……예? 대, 대인. 고신이라니요? 저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시끄러워. 그건 우리가 알아서 판단해.”
“대, 대인!”
객점주와 어린 점소이가 관병들의 손에 잡혀 발버둥 치며 끌려 나갔다.
휑한 방 안을 바라보던 관인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다들 옆 객점으로 간다! 수상한 놈을 찾기 전에는 퇴청 못 하니까 그리 알아!”
“예!”
관병들이 빠져나간 객점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지붕.
객점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지켜본 진무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진다.
자신들이 자리를 피하는 바람에 애꿎은 객점주와 점소이가 잡혀간 것이다.
망할 관인 놈들, 썩을 대로 썩었구나. 뇌물을 처받은 것도 모자라서 죄 없는 사람들까지 괴롭혀?
예상은 했으나 직접 보니 화가 치밀어서 당장이라도 전부 때려눕히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무가와 무가의 싸움이 아니다. 상계도 연결되어 있고, 관청도 연결되어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대처해야만 했다.
둘은 무사할 것이다. 약간의 고초야 있겠지만 나중에 구하면 된다.
진무가 불이 활활 타오를 듯한 눈으로 노려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신, 동보.”
“예, 천주님.”
“일단 삭주를 벗어나 인적이 드문 숲을 찾는다.”
“예!”
명령의 내용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진무의 표정이 너무 무서웠기 때문인지 황신과 소동보는 군말 없이 곧바로 몸을 날렸다.
* * *
파라락!
장부가 빠르게 넘어간다.
팔짱을 끼고 앉은 진무의 표정이 당장이라도 사람을 씹어 먹을 듯 화가 나 보였다.
파라라락!
장부는 점점 더 빠르게 넘어간다.
의심 가는 모든 물목을 찾아라.
진무는 그렇게 말했고 황신과 소동보는 장부를 빠르게 넘기는 와중에도 세세하게 훑고 또 훑으며 수상한 것들을 모조리 표시했다.
그런데 뭔 장부를 이렇게나 많이 가지고 오셨는지.
별 쓸데없는 내용이 태반인 것 같았지만 무서워서 말도 꺼내지 못했다.
파라라락!
황신이 능숙하게 무언가를 찾아 적는다.
하오문 소속으로서 정보를 분석하는 능력이야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으니 소동보보다 빠른 것은 당연했지만, 소동보는 뒤처질 때마다 조바심이 느껴졌다.
원하는 만큼의 성과를 보이지 못해 구타당할까 겁이 나는 것보다도, 황신에게는 그 어떤 것도 지고 싶지 않았다.
와중에 진무 쪽을 힐끗 보았더니 표정이 더욱 험악하게 변해 있다.
젠장, 웃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무섭다.
달이 뜨지 않은 밤의 어둠처럼 칙칙하게 가라앉은 눈을 마주칠 때마다 손이 발발 떨리고 오금이 저려 왔다.
벌떡!
“헉!”
갑자기 진무가 일어나더니 무서운 표정으로 황신과 소동보를 향해 다가왔다.
“잘못했습니다!”
“…….”
소동보가 갑자기 넙죽 엎드리자 진무가 물끄러미 쳐다본다.
“뭘?”
“……뭐든요.”
“…….”
이 새끼는 또 왜 지랄인지.
진무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황신과 소동보의 생각과 달리 진무는 아까부터 자신의 품속에 있는 서신이 신경이 쓰였다.
묘하게 머릿속에 자리 잡은 찜찜함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산서상회주에게 보내려 했던 서신의 내용. 분명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지금쯤 표국에서 만난 여인이 깨어났을 터.
서신이 없어진 것을 확인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무언가 조치를 취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게 무엇이든 찜찜함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확인이 필요했다.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
“……?”
“어디를……요?”
황신과 소동보가 장부를 살펴보던 행동을 멈추고 진무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우옥현(右玉縣) 추가장.”
“……?”
처음 듣는 곳이다.
황신과 소동보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자신들이 조사해 본 바로는 삭주상단과 연관이 있는 곳이 아닌데?
“내가 다녀올 때까지 여기서 계속 장부를 살펴보고 있어. 최대한 많은 것들을 찾아라.”
“예!”
소동보와 황신이 동시에 대답했다.
“그럼 다녀오마.”
말을 마친 진무는 곧장 북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달려갔다.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소동보가 퍼뜩 생각을 지우고 뒤지지 않기 위해 장부를 살펴보려는데 황신이 품에서 휴대용 지필묵을 꺼내 무언가를 빠르게 적는다.
“뭐 하……시는? 장부를 살펴보라고 하셨는데?”
“씨발, 니가 저 양반을 몰라서 그래. 내가 전에 저 표정을 본 적이 있거든. 분명히 사달이 나도 크게 날 거야.”
“……예?”
서열이 정해진 이후로 둘의 대화는 이전과 극명한 차이가 났다.
소동보는 황신을 깍듯하게 형으로 대접했다. 그까짓 호칭, 언젠가 돌려받으면 되니까.
그리고 그게 편해서였는지 진무가 없는 곳에서는 평소와 달리 말이 많은 황신이었다.
“넌 안 봐서 모른다니까. 와, 그때 마을 하나를 통째로 날려 버린 걸 생각하면…… 분명히 한둘 죽는 정도로는 안 끝날걸?”
“…….”
마을을 통째로 날려 버렸다고?
소동보가 눈을 끔벅거리다가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렇게 위험한 상황이면 서둘러 천주님을 쫓아가 봐야 하지 않습니까?”
“지랄하지 마. 따라가면 너나 나나 순식간에 뒈질지도 몰라. 그땐 운이 좋았지. 그런 괴물이 한 명뿐이었거든. 지금이랑은 다르다고.”
“……?”
황신의 말에 소동보의 의문이 점차 커진다.
“그리고 너도 들었잖아. 장부를 살펴서 의심나는 것들을 찾으라고 하신 거.”
“……예? 그게 무슨.”
“우린 명령에만 따르면 돼. 그리고 우리가 가 봐야 아무 도움도 안 된다고. 씨발, 내가 이럴 줄 알고 미리 대비해 둔 게 있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가운데 황신이 자신이 작성한 쪽지를 찢어 어딘가로 전서구를 날렸다.
“대체 어디에 연락을?”
“우리 따위보다 훨씬 도움이 될 사람들을 추가장으로 보내야지. 지원이 필요하다고 보낸 지 오래됐으니까 아마 지금쯤 근처에 와 있을 거고.”
“……그러니까 그게 누구란 말입니까?”
“누구긴. 니네 할머니, 우리 단주님, 그리고 천우명 단주님.”
“……예?”
사패오왕의 셋을 불렀다고?
“휴, 어쨌든 연락은 보냈으니까 장부나 찾아. 괜히 돌아오셔서 만족스럽지 못한 보고를 했다가는 너나 나나 죽도록 맞을 테니까.”
파라락!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다시 장부에 집중하기 시작하는 황신을 소동보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기.”
슥슥, 파라라락!
“…….”
황신의 장부에 표식이 빠르게 늘어 갈수록 소동보는 다시 조바심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경쟁하듯이 장부 넘어가는 소리가 숲에 울려 퍼진다.
파라락! 파라라락!
마치 폭풍이 휘몰아치기 전, 세찬 바람이 시작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