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301
301화
“불이 올랐습니다.”
적생의 보고에 진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전방을 주시했다.
와, 진짜 무서운 새끼.
이젠 소름마저 끼친다.
이리될 것이라고 전부 예상한 것인가?
성동격서의 책략이야 그렇다 치자. 아마 사패천의 본성에서도 충분히 예측했을 법한 전략이다.
그런데 돌격조를 내부로 잠입시키기 위해 세운 전략이 실로 기막히다.
연을 타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 계획 하나를 위해서 적들의 움직임마저 자신의 의도대로 흐르게 했다.
거리를 재고, 내부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수차례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적의 경계심을 한껏 끌어 올리고, 공격 시기를 그믐으로 택해 적이 주변을 환하게 밝혀 두게끔 했다.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그로 인해 적생의 계획은 더욱 탄탄해졌다.
놈들이 은신자들의 잠입을 막기 위해 불을 피운 것은 크나큰 실수였다.
어둠만 있다면 눈이 적응해 사물을 좀 더 명확하게 바라볼 수 있지만 밝음에 적응된 눈은 쉽사리 어둠을 꿰뚫어 보지 못하게 되는 법이다.
삽시간에 불타오른 마른 짚들이 성 주위를 대낮처럼 환하게 밝히며 어둠을 밀어 내고, 솟구치는 연기가 하늘을 자욱하게 채웠다.
“솟구친 불이 쉬이 꺼지지 않는 것을 보면 밑에 장작이라도 쌓아 둔 모양입니다. 아마 밤새 연기를 피워 낼 것입니다.”
바람의 방향은 북풍.
불이 밤새 타오르면 시간이 지날수록 솟구친 연기가 성안으로 흘러 적의 머리 위를 가릴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연을 이용해 잠입하기에 더없이 좋은 상황이었다.
“적생.”
“예?”
“만약에 말이야, 혹시나 네가 적에 가담한다면, 그래서 우리가 적이 된다면 말이지.”
“예?”
“반드시 너부터 죽일 거야.”
“……예에?”
진무의 말에 적생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천주님, 제발 그런 표정으로 농담하지 마세요. 진짠 줄 알겠습니다.”
진담이야. 살막을 총동원해서 널 죽일 거야.
적생이 머쓱하게 웃거나 말거나 진무는 재차 다짐하듯 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크흠……. 천주님, 지금쯤이면 남문을 담당한 원 방주도 공격을 시작했을 터입니다.”
“그렇겠지.”
“준비를 마치면 사패천 성내에서 돌격조가 내려설 자리를 확보하고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
사패천 내부?
이 음흉한 놈이 뭔가 또 꾸민 게 있는 모양이지만 진무는 따로 묻지 않고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천주님.”
“……?”
“절대로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천주님은 그저 고강한 무인이 아니라 새로운 사패천의 주인임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적생의 거듭되는 당부에 진무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진다.
“걱정 마.”
“…….”
하지만 대답이 영 못 미더웠는지 적생이 진무를 수차례 힐끗대다가 말 위에 올랐다.
“적생.”
“……?”
“깊이 들어가지 마라.”
“알겠습니다.”
심상한 어조였으나 그 속에 진한 걱정이 담겨 있음을 안다.
누군가의 걱정거리가 된다는 것이 이리도 기분이 좋은 일이었던가.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진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적생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채찍을 거칠게 휘둘러 어둠 속으로 질주해 나간다.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진무는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똑같은 흑의로 갈아입은 백여 명의 무인.
살막, 하오문, 철검단.
조장급 무인을 제외하고 최상위 실력을 가진 무인들로 추린 돌격대였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큼지막한 타래를 각기 손에 든 역사(力士)들.
“다들 준비됐지?”
“예!”
“이번 전투의 승패는 너희들에게 달렸다.”
“…….”
“연을 띄운다.”
간략한 그의 명령에 돌격조가 바닥에 깔아 둔 직사각형의 시커먼 연을 등에 단단히 고정한다.
“가자!”
진무가 앞장서 사패천의 본성을 향해 빠르게 달리다 세차게 몸을 솟구친다.
파앗!
뒤이어 돌격조가 동시에 몸을 솟구치자 역사들이 타래를 힘껏 잡아당겼다.
풍!
바람을 한껏 받은 연이 하늘로 떠오르자 타래의 실이 끊어질 듯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한계까지 버티던 줄이 팅팅거리는 소리를 내자 역사들의 수좌가 외쳤다.
“풀어!”
촤라라라라!
타래가 빠르게 돌고 실이 풀린다.
바람의 흐름을 탄 연의 무리가 밝은 공간을 벗어나 어둠으로 가득 찬 하늘을 향해 모습을 감췄다.
* * *
“저게 뭐냐?”
북문 상단 보루의 수장 고겸이 어슴푸레한 곳에서 달려오는 한 떼의 무리를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야금당, 녹림, 수채의 무인들입니다.”
“…….”
수하의 보고에 고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어째서 저들이 밖에서 들어온단 말인가?
그리고 성문 보루의 수장인 자신은 어째서 그 사실을 까맣게 몰랐단 말인가?
짜증이 극에 달한 고겸이 어느새 불타는 짚단이 만들어 낸 어둠과 밝음의 경계를 넘어 당도한 그들을 향해 거칠게 외쳤다.
“누구냐!”
“나다! 야금당주 정목립이다!”
“정 당주님? 아니, 대채주님과 녹림의 총표파자까지? 전쟁 중에 어찌 외부로 나가셨단 말입니까? 제게 알리지도 않구요?”
고개를 쳐든 정목립과 두 세력의 수장을 알아본 고겸이 그들을 의아하게 쳐다본다.
꼬락서니가 딱 봐도 쫓기는 모양새였고, 그들을 쫓아 멀리 추격대가 달려오는 소리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그건 나중에 설명하마! 어서 문을 열어라!”
“…….”
고겸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민했다.
의심스럽지 않은가?
전투 중에 적진 쪽에서 온 자들이다.
높디높은 성벽 위에서는 그들이 진짜인지 반란군이 역용술로 위장을 한 것인지 확인조차 되지 않았다.
“한데 진짜 정 당주님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어찌 믿소?”
“……뭐?”
“반란군의 위장일지도 모르는 상황에 어찌 성문을 연단 말이오.”
“이런 개…….”
고겸의 말에 정목립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유월청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를 상황이었음에도 북문으로밖에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이었다.
나중에 추궁을 당하더라도 일단은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고겸! 나를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나 주천걸이야.”
“얼굴은 이미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위장한 적일지도 모를 상황에서 문을 열 수는 없습니다.”
“…….”
고겸의 단호한 태도에 다급함이 극에 달한 주천걸이 망설임 없이 칼을 들어 제 볼을 그었다.
안 그래도 험악한 얼굴에 상처 하나 보탠다고 대수겠는가?
어쨌든 베인 상처에서 피가 흐르자 고겸이 깜짝 놀랐다.
“보게! 역용을 했는데 이리 피가 나겠…….”
피융!
그 순간 어둠을 뚫고 들려오는 파공성.
“끅!”
고겸을 설득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던 주천걸의 목을 관통한 화살이 성문에 퍽 소리와 함께 박혔다.
“화, 화살?”
고작 화살에 녹림의 지배자인 주천걸이 당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이 알 리 없었다.
화살을 쏜 이는 다름 아닌 대궁이었다. 은위단의 조장이며 의기의 경지인 그의 궁술은 진무가 인정할 만큼 신기에 이르러 있었다.
“총표파자! 이, 이런 젠장할!”
단 한 발의 화살이 녹림 지배자의 명을 끊어 버린 것이다.
쓰러지는 주천걸의 모습에 급히 고개를 돌린 정목립의 크게 뜬 눈동자에 자신들의 뒤를 쫓으며 시위를 당기는 대궁과 하오문 소속 궁수들의 모습이 담긴다.
피피핑! 파파팍!
달리던 그대로 쏘아 낸 화살이 직선으로 날아와 주위에 박힐 만큼 가까워지자 기겁한 정목립이 핼쑥해진 얼굴로 외쳤다.
이젠 주천걸의 죽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제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누가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고, 고겸! 문! 문을 열란 말이다! 천걸 형님이 죽은 걸 보고도 모르겠는가!”
사색이 된 정목립의 외침에 고겸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거렸다.
“이놈아! 일단 열어라! 이러다가 다 죽는단 말이다! 내 살기만 하면 야금당에서 한밑천 단단히 떼어 평생 호의호식하게 해 주마! 어서! 문 좀 열어 다오, 제발!”
“…….”
정목립의 애걸복걸에 더해 주천걸이 죽는 모습까지 목도한 고겸이 휘하에 명했다.
“젠장, 문을 열어 줘라. 궁수들은 화살을 쏴라! 추격하는 놈들이 더는 다가오지 못하게 하라!”
핑! 피피피핑!
고겸의 명령에 성벽 위에 대기하고 있던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파파파팍!
추격대는 성벽에서 날아온 화살을 피해 뒤로 물러났고, 그사이 열린 성문으로 정목립과 함께 살아남은 무인들이 재빨리 성안으로 뛰어들었다.
“허억, 허억…….”
겨우 안전하게 된 정목립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둘러보니 살아남은 이들이 열 명도 되지 못했다.
정목립 등이 퍼질러 앉은 모습을 성벽 위에서 확인한 고겸은 서둘러 다시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추격대가 물러선 자리에 새로운 인물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화살이 효력이 있었음인지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다만 이전의 자잘한 전투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반란 세력의 무인들이 어슴푸레한 곳에 일렬로 늘어서며 북문 앞을 가득하게 채운다.
그리고 그 뒤로 겹겹이 줄지어 쌓이는 많은 수의 무인들.
고겸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어둠에 가려져 있는 이들의 숫자를 정확하게 셀 수가 없었다.
분명 남문 쪽에도 적들이 진을 쳤다고 했건만, 모조리 북문으로 몰려온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많은 수였다.
“남문 쪽은?”
고겸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돌려 보니 멀리 남문 쪽에서는 벌써 전투가 벌어진 것인지 소란스러움이 들려온다.
이미 성내의 무인들이 그쪽으로 몰려가고 있었고, 서문 쪽에서도 일부의 무인들이 남문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제길…… 대체 얼마나 끌어모아 왔길래.”
하지만 남문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은 눈앞의 적에 집중해야 할 때.
“조장님. 놈들이 성문을 향해 총공세를 펼친 모양입니다.”
“음.”
수하의 말에 고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도의 숫자라면 다른 곳으로 갔을 확률은 거의 없었다.
“동문에 연락을 취해 경계병 일부만 남기고 북문 쪽으로 증원을 서두르라고 하고, 북문의 뒤쪽에 축대를 추가로 세우고 기관을 작동시켜라. 놈들이 성문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상, 가용한 모든 전력을 집중해 방어한다!”
“예. 조장님.”
수하가 발 빠르게 움직인다.
하지만 북문 앞에 포진한 적들은 못 박은 듯이 그 자리에 멈춰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도무지 그들이 무엇을 노리는지 알 수가 없었던 고겸이 다시 한번 궁수에게 명했다.
“일단은 놈들에게 위협을 가한다. 궁수들은 준비하라!”
찌이이익!
고겸의 명령에 성벽의 궁수들이 시위에 살을 걸고 당겼다.
“거리! 오십 장!”
무인들의 손에 들린 활이 일제히 위쪽을 향해 쳐들린다.
“발사!”
피피피핑!
시위가 놓이고, 화살이 하늘을 시커멓게 물들인다.
통상적으로 무인들이 활을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나 사패천은 달랐다.
오랫동안 정파의 중심에서 성을 지켜 온 그들은 무공이 약한 무인들을 모아 네 곳 성문의 방어를 위해 전문적으로 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 * *
“총사님!”
화살이 날아오는 모습에 대궁이 다급히 외치고 어느새 대열의 맨 앞에 도착했던 적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흑익선을 높이 들었다.
“방패!”
척, 처처처척!
순식간에 대열의 무인들이 등에 메고 있던 방패를 꺼내 견고한 방어막을 구축한다.
퍽! 퍼퍼퍽퍽!
수없이 꽂히는 화살들.
“큭!”
“으윽!”
곳곳에서 팔다리에 화살을 맞은 무인들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으나 정작 쓰러지는 이는 없었다.
“와아아아!”
첫 번째 화살을 막아 낸 무인들이 방패를 내리고 함성을 질렀다.
“총사님, 첫 번째 공격이 끝났습니다.”
“피해는?”
“자잘한 부상입니다.”
“좋습니다. 좀 더 기다립니다. 일 열과 이 열을 교대해 부상자들을 뒤로 물리고 치료를 시작하세요.”
“예!”
적생의 말에 미리 전략을 숙지한 대궁이 고개를 끄덕인다.
사패천 본성에서 일어나는 전투는 무림에서 벌어지는 것들과는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공성과 농성 자체가 군문의 전략이다.
그런 전술을 선택한 이상, 적생은 더없이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
그는 한때 낙방 학사였으며 군문에 몸담았던 유능한 전략가였기 때문이다.
공성전?
그따위 건 이미 수도 없이 치러 봤다. 이런 경우 다가서는 적의 전력을 줄이기 위한 원거리 공격은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말까지 꿰뚫어 버리는 군문의 쇠뇌도 아니고 고작 화살이다.
방패로 막으면 그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포로들을 안으로 들였다는 사실이었다.
이젠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사패천 본성 내부에서 신호가 올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