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304
304화
소약벽의 손에 들린 소도가 움직일 때마다 그녀가 만들어 낸 분영들 주위로 혈화(血花)가 만개한다.
한 줄기 미풍이 살랑이는 듯 가볍고 유연한 몸놀림과 수많은 무인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는 극도로 간결한 손놀림.
지금 이곳은 전장이 아닌, 그녀가 아니면 누구도 펼칠 수 없는 독무(獨舞)이자 군무(群舞)의 시연장이었다.
“끄으윽…….”
완숙한 강의 경지라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어느 곳에 있어도 돋보이며, 어떤 전쟁에서도 그 흐름을 바꾼다.
그녀의 냉혹한 춤사위에 점차 팔이며 다리에 상처를 입고 쓰러지는 무인들의 수가 늘어났다.
하지만 좀처럼 포위한 적의 숫자는 줄지 않았고, 전투가 이어질수록 그녀는 빠르게 지쳐 갔다.
겹겹이 둘러싼 무인들의 공격을 피해 내기 위해 쉬지 않고 움직여야만 했으며, 상대가 목숨을 잃지 않도록 배려해야 했기에 더더욱 그랬다.
퉁!
다섯 개의 검격을 교차한 소도로 막은 소약벽의 신형이 뒤로 물러나자 포위망의 벽이 똑같은 거리만큼 물러난다.
“후우, 후우…….”
지친 숨소리가 전장을 울리고 살기 충만한 눈빛이 자신을 향해 다가서는 무인들을 쏘아본다.
환영미리보를 극상으로 펼쳤으나 모든 공격을 막아 내지는 못했다. 칼날이 스치고 지나간 무복은 넝마처럼 변해 있었고, 수많은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온다.
목숨을 노리고 있는 상대를 배려해 싸운다는 것은 오만에 가까운 행동이었으나 그것이 그녀의 의지이자 노력이었다.
그나마 돌격조가 내려설 곳으로 가는 행로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랄까.
“뭣들 하느냐! 증원해라! 무인들을 더 부르란 말이다!”
소약벽의 무위에 질려 버린 듯한 표정으로 마구 고함을 지르며 뒤로 물러나는 단경주를 바라보는 소약벽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수하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장로라는 놈들이 나서서 이끌 생각은 하지 않고 뒤에 숨어 입이나 나불거리다니.
다른 이들은 몰라도 네놈들은 목숨을 부지할 자격이 없구나.
파학!
빠르게 전진한 소약벽이 날아온 공격을 피해 자세를 낮추고 소도를 횡으로 그었다.
“크악!”
발목에 상처를 입은 무인들이 주저앉자 그들의 어깨를 밟고 솟구친 소약벽이 소도에 담은 기운을 세차게 뿌린다.
슈아아악!
대기를 가르며 날아오는 강기의 위력에 단경주와 장로들이 급히 검을 뽑아 휘둘렀다.
떠어엉!
“크으윽!”
피할 틈이 없어 강기에 맞섰던 단경주와 장로들이 반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쭉 물러나 고통스럽게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장력을 날렸던 소약벽의 신형이 포위망 위를 넘어 장로들을 향해 쇄도해 오고 있었다.
“이, 이런 젠장! 뭣들 하느냐! 저년을 막아라! 어서!”
정신없이 물러나는 단경주의 외침에 수십 개의 공격이 소약벽의 전면을 향해 쇄도했다.
까가가강!
공격의 수가 너무 많았기에 모두 피할 수 없었던 소약벽이 어쩔 수 없이 근접한 무기들을 튕겨 내며 뒤로 물러난다.
뿌드득.
영악한 놈들. 좋다. 언제까지 네놈들이 수하들의 뒤에 숨어 있을 수 있는지 보겠다.
짧게 이를 간 소약벽의 살기가 극한으로 치달은 순간이었다.
“……어? 저게?”
포위망의 누군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드는 모습이 소약벽의 시선에 잡혔다.
그녀는 무언가에 이끌린 것처럼 그가 바라보는 곳으로 급히 시선을 옮겼다.
쿠우우우.
하늘에 변화가 생겼다.
대기가 떨리는 듯한 마찰음이 천둥소리처럼 진해져 대지에 내려앉는다.
하늘의 진노와도 같은 그 소리에 모두가 전투를 멈추고 고개를 쳐들었다.
퓩!
동시에 본성 하늘 위를 가득히 채우고 있던 연기가 무언가에 꿰뚫리고, 원형으로 밀려난 구멍으로 검은 밤하늘이 드러난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소약벽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어렸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반짝이는 검은 기운.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살이 떨릴 정도로 거대한 존재감으로 지상에까지 압박감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인물은 단 한 사람뿐이다.
천주.
하지만 소약벽과 달리 호법부의 무인들의 얼굴에는 경악이 쉬이 가시질 않았다.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형체를 알 수 없으리만큼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리는 물체, 아니 사람이라니.
고오오오.
와중에 세차게 낙하하는 속도가 만들어 낸 진공의 틈 때문이었을까?
원형을 그리며 물러난 연기가 나선 모양으로 회전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그 속도를 더하며 진공의 틈을 빼곡히 메우고는 그 끝을 뾰족하게 세워 진무를 뒤쫓는다.
그것은 천제(天帝)가 세상을 향해 거대한 나선의 창을 내려찍는 것처럼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바, 방향이?”
어느 순간 회오리의 길을 만들던 진무의 속도가 둔화되는가 싶더니 방향을 바꿔 허공에 사선을 그려 내었다.
쿠우우우!
경로가 바뀐 탓에 성이 났을까? 아니면 뒤쫓는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기 때문일까?
진무를 뒤쫓던 연기의 회오리가 방향이 꺾어진 지점에서 대기에 충돌해 뭉개졌다가 우레와 같은 용음을 토해 내며 거칠게 변했다.
“저, 저건…….”
용(龍)의 모습이었다.
끝이 뭉개진 천신의 창이 용틀임을 하듯이 방향을 바꾸며 아가리를 벌린 용처럼 흉포하게 변해 떨어져 내린다.
그런데 방향이…….
“이, 이쪽으로 온다! 용이, 용이 떨어진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전투를 치르고 있다는 것조차 잊고 멍하니 쳐다보던 호법부의 무인들이 놀란 외침을 토해 낸다.
과장된 표현이었으나 지금의 상황을 그 이상으로 잘 묘사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런데 회색의 용에 쫓기듯이 하늘에서 날아오던 진무가 별안간 손바닥 펼치듯이 팔다리를 활짝 뻗더니 순간적으로 붕 떠오르고, 뒤쫓은 용이 그를 집어삼킴과 동시에 대지에 거칠게 충돌했다.
쿠구구구.
용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머리부터 으스러지며 대지를 진하게 울리고, 형체를 잃어버린 연기는 장쾌하게 쏟아져 내린 폭포가 일으키는 포말(泡沫)처럼 변해 세찬 바람과 함께 휘몰아쳐 세상을 뒤덮었다.
대지를 뒤흔든 진동이 멈추고, 쏟아지던 연기의 흐름이 잔잔해지도록 전투의 현장에 있었던 이들은 한마디도 내뱉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 소란스러움으로 가득했던 격정 어린 전투의 현장이 고요로 물든다.
탁.
어느 순간 살포시 땅에 닿는 발소리.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천처럼 지면에 내려선 진무가 고요를 산산이 조각내고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휴, 이거 생각보다 쉽지 않네.”
치열한 전쟁과는 어울리지 않는 감상이었으나 꽤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부욱.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은 채 덧입고 있던 비석서의 옷을 찢어 내는 진무를 바라보는 호법부의 무인들은 얼어붙듯이 멈춰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너, 너는?”
단경주의 눈동자에 어렸던 의아함이 경악으로 바뀌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청년의 얼굴.
진무는 그들의 놀람에 답하듯 피식 웃었다.
하긴, 어찌 모르겠는가? 이 몸이 좀 유명해야지.
“무, 무당지검이라고?”
그의 말에 모두의 표정에 의아함이 어린다.
당연한 상황이다.
정파와 경계를 맞대고 있으니 정보의 최전선에 있는 장로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호법부의 무인들 또한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진무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무인들의 의아함은 살기로 바뀌어 쏘아진다.
사방에서 뿜어내는 농도 짙은 살기에 진무의 눈이 찡그려졌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의 자식들이 어디 어른에게 눈을 부라리고 지랄이야?
그리고 고작 이따위 살기?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지어지자 가공할 만큼 거대한 기운이 일어나 대기를 짓누르고, 숨쉬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압박감이 사방을 채웠다.
“크윽…….”
쏘아 냈던 살기가 거대한 압력을 더해 되돌아오니 사방에서 신음이 새어 나오고, 호법부의 무인들의 얼굴에 경악이 떠오른다.
그저 강의 고수가 뿜어내는 압박감 때문만이 아니었다.
잊을 수 없는 익숙한 기운.
어째서? 그의 얼굴은 무당지검이라 알려진 도사의 것이 분명한데.
사패천에 소속되어 있는 자라면 잊을 수가 없었던 존재감이 머릿속에 한 인물을 연상하게 했다.
두려움과 경외의 상징이자 존재 자체만으로 사파를 대변하는 무인.
“사, 사황…….”
비록 젊은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같은 사람이라고 느낄 만큼 흡사한 기운이었다.
또한, 그가 뿜어내고 있는 검은 기운은 오직 사황만이 가졌던 묵룡기가 분명했다.
보는 이의 뇌리에 미증유의 공포심을 심어 주는 눈빛마저도 사황과 똑같지 않은가?
분명 죽었는데.
사패천에 그의 묘지까지 버젓이 있는데.
모두의 경악 속에 나타난 진무는 순식간에 모두에게 과거의 기억을 일깨우며 혹자에게는 그리움으로, 또 혹자에게는 두려움으로 다가섰다.
암영대가 위장한 장로들은 모르겠지만, 호법부의 무인들 눈에 비친 진무는 이미 무당지검이 아닌 사황의 전인이었다.
“뭘 멍하니 있는 게야! 어서 공격해라!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게냐, 이놈들아!”
분위기에 동화되어 머뭇거리고 있던 단경주가 호법부의 무인들을 향해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자 눈길을 주었던 진무가 짧게 웃는다.
“거 새끼, 더럽게 시끄럽네.”
“……뭐, 뭣이?”
“일단 좀 닥치고 있어 봐. 내가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터라…… 감회를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거든.”
진한 살기에 입을 다물어 버린 단경주를 뒤로하고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사패천의 모든 곳을 눈동자에 담아 넣던 진무의 입가가 문득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사패천은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긴, 자신이 죽은 지 고작 삼 년이 조금 넘었으니…….
경치를 구경하듯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린 진무가 소약벽을 향해 다가간다.
“천주님!”
“제법 상했구나.”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진무는 물끄러미 소약벽을 응시했다.
넝마로 변해 버린 옷,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수많은 상처.
답답한 녀석.
소약벽의 생각을 알 것만 같았다. 굳이 살리려 했을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달려드는 놈들을 상대하면서도 사정을 봐준 것이다. 아마 전쟁 이후에도 사패천의 전력이 보존되기를 바랐겠지.
하여간 늙으면 잔정이 많아진다더니…… 누가 알아준다고.
“그냥 죽이면 될 것을 뭐 하러 상처를 입으면서까지 살려 둔 거냐?”
“천주님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제가 어찌 감히…….”
“쯧쯧, 고집하곤. 내겐 쓸모없는 것들보다 네가 천 배, 아니 만 배는 더 중요해. 그러니까 앞으론 그러지 말아.”
“……예.”
진무가 속으로 혀를 차며 어깨를 두들기자 소약벽이 은은한 미소를 띠며 공손히 물러났다.
“어쨌든 고생했다. 이제부턴 내가 맡도록 하지.”
“하면 옆에서 돕겠습니다.”
소약벽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옆에 서려 하자 진무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전투가 오래되면 죽는 이들이 계속 늘어날 거야. 어차피 이 전쟁은 월청이 놈만 잡으면 끝난다.”
“하지만 천주님 혼자 둘 수는…….”
소약벽이 걱정 어린 눈빛에 답하듯 진무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다.
뒤늦게 황신과 소동보를 선두로 백여 명의 돌격조가 나선을 그리며 하나둘 날아내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돌격조와 함께 동문과 서문을 열어라. 양쪽이 뚫리면 저들도 더는 버티지 못할 거야.”
“……알겠습니다. 부디 주의하십시오.”
잠시 고민하던 소약벽이 대답을 마치고 바닥으로 내려서는 돌격조를 향해 몸을 돌렸다.
소약벽이 돌격조와 합류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진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멀리 천중전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거처.
자신이 죽음을 맞이했던 곳.
사패천의 상징과도 같았으며, 가장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보기 위해 만든 곳.
하단에서부터 천천히 쓸어 올리던 진무의 시선이 창을 열고 자신을 바라보는 인물에게 머문다.
멀어도 험악하게 일그러진 그 표정이 선명히 보인다.
월청아,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니 소식은 건너건너 많이도 들었단다. 곧 그리 가서 볼기가 터지도록 때려 줄 것이니 궁둥이를 까고 조금만 기다리거라.
너도 알고 있겠지? 이 싸움은 결국 너와 나의 싸움임을.
“자, 대충 감상은 접어 두고…….”
진무가 시선을 내려 그의 앞을 막아선 호법부의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래, 니들이 무슨 죄가 있을까?”
“…….”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나른한 목소리와 함께 가볍게 발을 떼어 한 걸음 내딛자 묵직한 존재감이 사방을 집어삼키며 번져 나간다.
호법부의 무인들은 숨소리마저 집어삼키고 진무가 다가온 만큼의 거리를 물러났다.
“막아도 좋아. 너희의 선택을 존중해 주지. 다만, 한 가지만 명심해라. 나는 소약벽처럼 무르지 않아.”
“…….”
“지금부터 거치적거리는 놈은…… 모조리 죽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