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3
43화
나루를 떠난 배는 얼마 가지 않아 단강구의 수고를 벗어나 북쪽 수로로 방향을 잡았다.
일해상단이 향하는 곳은 하남성(河南城) 정주.
그들이 배에 잔뜩 실은 물목의 종류는 무척이나 다양했으나, 대부분이 미곡(米穀: 쌀)이었다. 정주 인근의 곡물 수확량이 적어 기근이 들었다는 말을 들은 일해상단이 천금을 털어 미곡을 매집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각지에서 미곡을 운반하고 있으니 시일에 맞추지 못하면 순식간에 가격이 떨어져 헐값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 * *
“가즈아!”
뱃머리에서 들려오는 호기로운 외침 소리.
진무다.
전장을 진두지휘하는 장군처럼 뱃머리에 당당히 서 있었다.
좋다.
나쁘지 않은 자세다.
그런데.
“내 격식 있는 도인이라 믿었거늘.”
상단주 강유가 화가 나는 것은 진궁 때문이었다.
여차하면 같이 가 주겠다던 그의 모습이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단강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그 악명 높은 천수채.
특히나 채주 두낙통은 제갈세가에서도 몇 번이나 토벌에 실패한 적이 있는 수적 두목이었다.
관에서 내건 현상금만도 무려 오백 냥.
그런데 그런 사파의 고수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판에 경험도 일천한 데다 새파랗게 어린 일대제자 하나라니.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격군들은 노를 저어라! 바람처럼 달려라! 내가 해신이다! 으하핫!”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잔뜩 격양되어 외치는 진무의 모습에 힘이 쭉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노는 개뿔, 돛배다.
더구나 군선도 아니고 상선에 노 젓는 격군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상행이 장난도 아니고, 어린애들 소꿉놀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강유로서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강물이라도 치고 통곡할 일이었다.
무당과 연을 맺음과 동시에 문제가 터졌다.
분명 무당에 붙은 자신들을 고깝게 여긴 제갈분가에서 이성상단을 움직인 것이 틀림없었다.
평소 안면이 있던 관리를 통해 어렵게 구한 수로 이용권이었다.
관의 순시선을 따라 안전하게 이동했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이성상단이 강짜를 부린 통에 시일은 지체되었고 수로 이용권에 관한 문제임에도 관에서도 나 몰라라 하고 있었다.
필시 이성상단에서 뇌물을 먹인 것이 틀림없었다.
‘망할. 나의 실수다, 나의 실수야.’
뱃머리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강유의 입에서 한숨이 끊이지 않았다.
뱃머리에서 이대제자들을 통솔하고 있는 진무의 모습은 흡사.
‘골목대장.’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청상아.”
“예. 사숙.”
진무가 뱃머리에 누운 채로 부르자 청상이 급히 달려가 공손하게 답했다.
“어디쯤이냐?”
“서협(西峽) 초입입니다.”
“서협이라.”
단강구의 수고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말이었다.
그 말은 곧.
‘흐흐흐. 이제 곧 수적 놈들의 영업이 시작된다.’
단강구를 주름잡는 수적의 이름은 흘러가듯 들어 알고 있었다.
배 위의 선원들이 수군대는 말에도 그들의 이름이 수차례 거론된 바 있었다.
천수채(天水寨).
일명 하늘의 물.
굳이 뜻을 알기 위해 머리를 굴릴 필요도 없었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
지극히 단순한 이름임에도 얼마나 운치 있고 뛰어난 작명인가?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고 그리운 사파의 이름이다. 수채 두목이 두낙통이라는데 그딴 건 알 리가 없고.
어쨌든 하늘의 물길을 노니는 우수한 사파의 정예들이지만, 지금은 그냥 적이다.
과거의 인연?
의리?
굳이 지킬 필요가 있나.
지금 그는 사패천의 주인이 아닌 진무다.
비열한 사파의 공격에 맞서 무당의 이름을 만방에 떨칠 일대제자.
덤으로 진궁은 자신과 스승에게 무릎을 꿇고 빌게 될 것이며.
‘흐흐, 단강구 뒷골목의 무뢰배가 아니라 사파에 당당히 이름 석 자 올린 놈을 잡아 족치면.’
대제자 경합에 필요한 업적!
문파 내의 인지도는 소폭, 아니 대폭 상승할 것이 분명하다.
어서 오너라.
사파의 잡졸들이여.
나의 업적과 평판을 위해 맛있게 먹어 주겠다.
“크하하핫!”
진무가 허리에 팔을 대고 고개를 젖히며 광소를 터트렸다.
“사형.”
진무의 모습에 청우가 낮은 목소리로 청상에게 소곤거렸다.
“응?”
“사숙께서 뭐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글쎄? 원체 속을 알 수 없는 분이니.”
“아무리 그래도 다들 이리도 걱정하고 있는데 저런 모습은 좀.”
청우가 주위의 눈치를 보자 청상이 빙긋이 웃으며 어깨에 손을 올렸다.
“청우, 사숙께서 어디 보통 분이더냐? 분명 뭔가 생각이 있으실 게다.”
“예.”
진무와 달리 청상과 청우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듣기로 사파의 수적들의 악랄함은 혀를 내두를 정도라 했다.
더군다나 명호까지 버젓이 존재하는 요절도(腰絶刀) 두낙통.
마주친 상대의 허리를 끊어 버리기에 그리 불린다고 들었다.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이름이던가?
하지만.
꾸욱.
청상은 검의 손잡이를 힘 있게 움켜쥐었다.
‘사숙의 도움으로 깨달은 경지.’
첫 전투이고, 첫 실전이자, 처음으로 검기를 사용해 보는 것이었다.
또한.
‘수적과 화적. 백해무익한 쓰레기들.’
청상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그는 어린 시절 화적에게 가족을 잃었다.
그 원한이 사무치고 사무쳐 얼마나 가슴이 아렸던가?
무당의 그 누구보다 더 열심히 무공을 익혀 온 이유.
이것은 복수다.
비명횡사한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이 더 이상 구천에 떠돌지 않도록.
검기는 그들을 위한 춤사위며, 적들의 비명은 그들을 위로하는 장송곡이 될 것이다.
청상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래며 살기를 무럭무럭 피워 올리는 사이.
일해상단의 배가 절벽을 만나 휘어지는 강줄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주변을 날카롭게 살피던 진무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청상을 불렀다.
“청상!”
“예! 사숙!”
깜짝이야.
청상의 우렁찬 대답에 진무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자식이 왜 이렇게 살기등등하지?
진무가 바라보는 청상의 모습.
눈이 살짝 돌아갔다.
흰자위가 네 곳에 보이는 것을 사백안(四白眼)이라 하던가?
사백안은 살인자의 눈이라던데.
하여간 당장이라도 뭔가를 잡아 죽일 듯한 살기로 눈동자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가족이.
근데 왜 수적한테 화풀이하려는 거지? 뺨은 화적한테 맞고 말이야.
뭐, 상관은 없다.
열심히 싸워 주겠다는데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주위를 경계해라!”
“예? 적입니까?”
“아니, 적들이 나타나기 딱 좋은 지형 같아서.”
“알겠습니다!”
더 이상의 반문은 없다.
청상은 언제나 그랬든 진무의 말이라면 전적으로 신뢰했다.
특히나 근래 현기를 깨닫게 해 준 이후로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져서 거의 맹신에 가까운 충성도를 보였다.
진무는 이내 청상에게서 관심을 끊고 시선을 다시금 절벽으로 돌렸다.
본격적으로 서협이 시작되는 곳.
딱 봐도 저기다.
절벽으로 나아갈 길이 가려졌으니 배를 숨기기에 적당한 위치였다.
원래 수적패라는 녀석들의 등장은 으레 그렇다. 무료한 일상에 깜짝 놀랄 상황을 선사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양.
그리곤 외치겠지.
“멈추어라!”
역시.
배가 강줄기를 따라 휘어 절벽의 반대편으로 들어서자 예상했던 우렁찬 외침이 울려 퍼졌다.
오랜만에 듣는 걸걸한 사파인의 목소리에 진무는 흐뭇함을 금치 못했다.
왔구나, 업적들이여.
“감히 나 천수채주 두낙통의 허락도 받지 않고 이곳을 지날 생각을 하다니.”
장비 수염에 상체를 거의 드러내다시피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상단의 사람들이 몸서리치듯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두, 두낙통.”
특히나 강유의 표정은 절망에 가까웠다.
두낙통이 직접 오지 않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아아, 그 아래에 있는 수적들이라면 일말의 희망이라도 있었을 것인데.
모습을 드러낸 천수채의 배는 모두 셋으로, 본선이 중앙을 막고 좌우로 소선이 이쪽에서 선회를 할 수 없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더욱이 본선을 제외하더라도 양쪽의 소선에 저마다 무구를 든 자들이 언뜻 봐도 십수 명은 넘어 보였다.
파각!
양측 소선에서 배를 고정시키기 위해 걸쇠를 던져 걸었다.
끼이익.
좌우의 수적들이 힘주어 당기자 소선들이 순식간에 가까워져 왔다.
그 와중에 뱃머리에 선 진무는 여전히 골목대장 같은 모습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고, 그 아래 이대제자들은 잔뜩 긴장하여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출발할 때의 신난 모습은 찾아보기조차 힘들었다.
역시 무당 따위는 믿을 수 없다. 상단은 강유 자신이 지킬 수밖에 없었다.
강유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 준비한 작은 함을 꺼냈다.
오가는 길목을 지키는 수적과 화적들에게는 관례가 있었다.
일명 통행세.
말만 잘하면 어느 정도의 돈을 상납하고 수로를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단강구 일해상단의 강유가 강상의 영웅을 뵙소이다.”
“…….”
“상행이 급하여 부득불 허락받지 못하고 배를 움직였소.”
강유가 앞으로 나서며 함을 열어 내밀자 두낙통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핫핫. 관례를 아는 상인이로군. 일단 배를 멈추고 기다리게. 내 건너가서…….”
두낙통이 햇빛을 받아 멀리서도 번쩍이는 은자를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친다.
그 순간.
“관례는 무슨. 지랄 염병을 하네.”
“……!”
갑자기 터져 나온 격조 높은(?) 비아냥.
“…….”
순식간에 주위에 정적이 흐르고.
상단의 사람들은 기겁한 표정으로 진무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수적들은 혹시나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하여 귀를 후비고 있었다.
“지, 진무 도장?”
강유는 팔짱을 끼고 당당하게 두낙통을 노려보는 진무를 바라보았다.
이런 미친 도사 새끼가!
이런 위험한 순간에 대놓고 도발을 하다니.
“자, 잠깐만요. 진무 도장.”
다급하게 소매를 잡는 강유의 손길을 뿌리친 진무가 턱을 높이 들며 두낙통을 깔아 보았다.
통행세나 내고 지나가자고?
지나갈 수야 있겠지.
그럼 수적을 처단하는 업적은? 평판은?
절대로 그럴 순 없지.
무조건 싸우고 때려잡아야 했다.
“야! 업적!”
“……야?”
업적은 무슨 소리인지 몰라도, 두낙통은 진무의 손가락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음은 분명히 알 것 같았다.
“무당 ‘검’의 이름으로 너희를 용서하지 않겠다.”
크, 달빛 아래에서 외쳤다면 거의 시조(時調) 수준이었을 텐데.
나름 멋있었다고 생각한 진무가 자신이 내뱉은 말에 만족스러워하는 사이.
‘아, 미친. 망했다.’
강유는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쟤 뭐래냐?”
두낙통은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미친놈인가 봅니다.”
“그러게요. 통행세고 나발이고 그냥 죄다 허리를 잘라 버리시죠.”
수적들이 비웃음을 터트리며 무기를 움켜쥐는 사이.
“청상 좌측, 청우는 우측. 전면은 내가 맡는다!”
진무의 외침과 동시에 청상과 청우가 고민도 없이 날개처럼 좌우로 펼쳐져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좌우에서 소선이 이미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음을 확인한 진무의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떠오른다.
“모조리 조져!”
팡!
청상과 청우가 좌우로 다가서는 소선을 향해 뛰었다.
뒤이어 이대제자 일이삼사오가 반으로 나누어져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의 난입을 막기에는 소선의 위치가 너무 가까웠다.
“뭐 저런?”
두낙통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짜고짜 공격이라니?
그것도 도사가.
이런 개 같은 경우는 수적 인생 삼십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겨우 도사 몇 놈으로 십수 명이나 되는 수적들을 공격…… 어?
“하압!”
더구나 좌측을 공격한 청상의 무위가 핏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정직함이나 화려함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실전적인 검술.
“크악!”
“으악! 내 팔!”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터져 나오는 수하들의 비명에 두낙통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뭔 손속이 도사답지 않게 저리도 잔인하단 말인가?
“크하학! 죽어라, 사악한 수적 놈들아!”
더욱이 피를 보며 좋다고 날뛰는 저 모습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수적들의 피를 뒤집어쓰고 수하들의 팔다리를 잘라 내는 모습이 지옥에서 튀어나온 악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저런 망할 도사 놈이!”
좌측의 수적들이 상선에 올라타기도 전에 지리멸렬하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사파고 누가 정파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잔인했다.
콰아앙!
청상을 보며 이를 갈아 대는 사이에 일어난 거센 충격음에 두낙통의 고개가 이번엔 우측으로 홱 돌아갔다.
보기에도 숨이 막힐 듯이 뚱뚱한 체구를 가진 도사.
“하압!”
거칠게 뻗어진 주먹과 발이 수적들을 마구잡이로 공격한다.
아니 팬다.
마치 어떤 한(恨)을 풀어내듯이 무자비하게.
“이런 개자식들이!”
당장이라도 달려가 요절을 내고 싶었으나 본선과의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었다.
“뭣들 하느냐! 노를 저어라! 서둘러 본선을 놈들의 배에…….”
두낙통이 답답한 마음에 수하들에게 소리를 지르는데.
펄럭!
뱃머리에서 깃발처럼 휘날리는 도포 자락이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어,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