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75
475화
중원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북쪽 초원의 대지.
싸아아아.
부드러운 바람이 평원에 넓게 자라난 누런 갈대를 한차례 쓸고 지나갔다.
스스슥.
갈대를 반으로 가르며 나아가다 그 중심에 멈춘 한 노인, 한무화가 길게 자란 수염을 휘날리며 중원이 있는 남쪽을 응시했다.
말없이 한참을 뒤따르던 흑건의 무인들 사이로 중년의 사내, 천립이 걱정스레 말했다.
“대궁주님, 바람이 찹니다.”
“…….”
그의 말 때문이었을까?
한무화가 갈대꽃을 쓸던 손길을 멈췄다.
“중원이 코앞이구나.”
“…….”
천립은 묵묵부답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참으로 평화로운 곳이지 않으냐? 당장에 내일을 걱정해야 하고, 살아남으려 타인의 것을 약탈해 온 우리의 삶과는 너무도 다르구나. 한가롭고 따스하고…… 당장에 여유를 부려도 내일 먹을 것이 지천으로 깔려 있으니 말이다.”
한무화가 문득 손에 닿은 갈대꽃 하나를 꺾어 입으로 가져가 씹었다.
텁텁하기는 했으나 대가 휠 정도로 거센 바람을 맞고도 볕을 머금었는지 따스한 맛이 났다.
“좋은 곳이다.”
“…….”
“그런데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아느냐?”
어찌 모르겠는가?
그들이 중원 공략을 시작하며 이곳을 교두보로 정한 이유를.
그러나 천립은 이번에도 답하지 않았다.
한무화의 감상을 방해하고 싶지 않기도 했거니와, 그가 답을 듣고자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토록 바람 좋고 아름다운 땅이 과거에는 시신으로 가득했던 냉산(冷山)이라는구나. 주씨 놈이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을 쫓아와 무참히 죽였다는.”
“…….”
“참으로 세월이라는 것이 우습지.”
한무화의 매서운 눈빛이 동토의 설원처럼 한없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백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이제는 땅을 파헤쳐도 뼛조각 하나 나오지 않게 되었구나. 이토록 아늑한 갈대밭이 되다니…….”
사가각. 투두둑.
한무화가 갈대를 한 움큼 뜯어냈다.
“홍건을 두르고 함께 뜻을 세우고자 하였던 놈들이, 평화로운 시절로 그 추악한 과거를 뒤덮은 게야. 우리를 그 열악한 곳까지 몰아내고…….”
눈빛에 어린 싸늘함에 짙은 원한이 더해졌다.
“홍건의 뜻을 이어받은 나는 절대로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
회한과 분노가 절절히 깃든 말을 뇌까리던 한무화가 천립을 돌아보며 물었다.
“천립, 상황이 어찌 되어 가느냐?”
“산서와 섬서에 도착한 선발대가 격전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다만 선발대로 나섰던 월도의 무향이 죽었습니다.”
“그가?”
한무화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진다.
쓰이고 버려질 암향과는 달리 한무화가 이끄는 대궁의 핵심 전력인 열 명의 강자, 무향.
이미 고혼이 되어 버린 네 명의 궁주에 비해서는 모자란 실력이나 능히 중원의 강자들과 겨루어 손색이 없는 자들이었다.
특히나 월도의 무향은 그들 중에서도 한무화에게 인정받은 고수 중의 고수였다.
“뼈아픈 손실이군. 허나 전쟁이다. 피해가 없을 수는 없지.”
“…….”
“신강은?”
“암향들로 피해를 입히고 있으나 소란이 크지 않습니다.”
“소란이 크지 않다?”
“예. 북리도천이 피해를 입은 다음부터 경계를 넘어오는 모든 이들을 말살하고 있습니다.”
“피난민까지 죽였단 말이지?”
“예.”
“과연 마교답다 해야 하나? 허나 그걸로 족하다. 계속하여 암향을 투입하라 전해라. 놈과 마교의 전력을 그곳에 묶어 둘 수 있을 터이니.”
“한데, 무당지검의 행방이 하북에 도착한 이후부터 묘연합니다.”
“…….”
“하오문이 하북의 방어선에 대한 정보를 철저히 차단하는 탓에 피난민으로 위장시켜 중원으로 들여보낸 암향들이 정보를 얻기 힘든 모양입니다.”
“무당…….”
어금니를 깨물며 눈가를 씰룩거리는 한무화의 눈빛은 분노를 넘어 광기로 물들었다.
백 년 전 주씨를 도와 자신들을 몰아낸 청무라는 이름의 도사와 그 뒤를 이어 궁의 세력을 풍비박산 내 놓은 진무라는 이름의 도사.
과거의 도사는 인정이라도 있었으나 현재의 도사는 철저히 자신들을 무너뜨렸다.
놈이 없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한가롭게 중원을 정벌했을 것인데…….
“하북의 공격 전선은 어찌하고 있느냐?”
“무향 다섯이 각자가 맡은 곳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다. 섬서와 산서에 더욱 암향과 홍건의 전력을 집중한다.”
“하나 새 세상의 백성이 되어야 할 그들이 입어야 할 피해가…….”
천립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하자 한무화가 서늘한 눈길로 그를 쏘아보았다.
“천립, 약한 소리 마라. 우리에게 뒤는 없다.”
“…….”
“백성? 흥, 누가 권력자가 되든 개돼지처럼 순응할 줄만 아는 놈들은 그저 너와 나, 그리고 하늘의 핏줄들을 위한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으로써 명예롭게 기억될 것이니 더 좋은 일이 아니냐.”
“…….”
한무화가 말하는 하늘의 핏줄.
일찍이 중원을 떠나온 이들 중 궁의 기반이 된 이들의 후손들을 말함이었다.
그저 이리저리 끌려다닌 이들이 아니라 중원에 대한 복수심으로 똘똘 뭉쳐 궁을 세운 이들.
지금 궁에서 무인이라 부르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더욱 밀어붙여라. 얼마가 죽어도 상관없다. 섬서와 산서에 모든 시선이 집중되고 진무라는 놈이 그곳에 나타나는 순간, 우리는 하북에 모든 전력을 투입해 자금성을 무너뜨리고 이 전쟁을 끝낼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천립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한무화는 자신의 손안에 움켜쥔 갈대꽃을 바라보았다.
추악한 과거의 살육 속에서 죽어 간 사람들의 시체를 양분 삼아 자란 갈대.
지금 이 나라에 사는 백성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 근원이 원한에 차 죽어 간 이들의 육신에 있음을 알지도 못한 채 평화를 누리고 있으니…….
“주씨…… 무당…… 홍건의 뜻을 이어받은 내가 네놈들을 반드시 응징할 것이다.”
한무화의 손에서 뜨거운 열기가 피어올랐다.
화르륵.
그의 손에서 시작된 삼매진화의 불길이 손안의 갈대꽃을 태우고, 점차 번져 들불이 되었다.
바람을 타고 무서운 속도로 번진 그 불길이 갈대밭 전역으로 번지고, 사방에서 매캐한 연기가 일었다.
그 자욱한 연기 한가운데서, 한무화는 세상을 절망으로 몰아넣는 악신처럼 흉흉하게 웃었다.
* * *
우거진 숲속을 쾌속하게 달리는 자들은 하북의 방어진을 떠난 진무와 철검단이었다.
수백에 달하는 수임에도 나뭇가지 하나 부러뜨리지 않고 달리는 그들에게 새어 나오는 것은 바람 스치는 소리가 전부였다.
“천주님!”
막 숲의 끝자락이 보이는 지점에 도달했을 때, 귀를 쫑긋 세운 황신이 선두에서 힘차게 달리던 진무를 다급히 불렀다.
“전방에 적의 움직임이 감지됩니다.”
“…….”
황신의 보고에 진무가 전방을 주시했다.
멀리 숲의 끝자락에 위치한 황무지.
하늘과 맞닿은 절벽이 보인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은 없었으나 황신의 청력이 틀릴 리는 없었다.
“모두 흩어져 몸을 숨겨라!”
“…….”
나지막한 명령이었으나 행동은 일사불란했다.
달리던 걸음을 멈춘 철검단은 조를 나누어 사방으로 흩어졌고, 등에 걸친 피풍의를 뒤집어 덮어쓰며 숲의 색깔에 동화되듯이 모습을 감추었다.
바람 소리마저 사라져 버린 고요함 속, 날카로운 눈으로 숲을 살피던 진무가 짧게 명했다.
“황신, 각출! 따라와!”
톡, 슈아아악!
자세를 낮춘 진무가 발소리를 죽인 채 나무들 사이로 뱀처럼 움직이자 황신과 각출이 그 뒤를 따랐다.
곳곳에 위치한 나무와 바위를 엄폐물 삼아 빠르게 숲의 끝자락으로 다가서던 진무가 움직임을 멈추고 기감을 활짝 펼쳤다.
쓰아아아.
태극을 이룬 후, 상대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은밀해진 기감이 순식간에 확장되고, 숲 전체가 진무의 머릿속에 각인되듯이 자리 잡았다.
나무, 바위…… 그리고 이질적인 기운.
좌측에 둘, 우측에 하나…….
척후다.
역시나 놈들이 눈을 깔아 둔 것이다.
느껴지는 기운이 고작 셋에 불과하니 본대는 필시 절벽 아래에 숨어 있을 터.
아무리 청력 좋은 황신이라고 해도 적의 규모를 상세하게 알아낼 수는 없었다.
하니 철검단에 의해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일단은 살펴야만 했다.
그러자면 놈들의 눈부터 뽑아내 장님으로 만드는 것이 좋겠지.
[황신 둘, 소리 없이 처리해라. 각출 하나, 생포해.]진무의 전음에 황신과 각출이 목표를 잡고 기척을 감춘 채 숲에 녹아들었다.
이제 잠시 기다린다.
황신과 각출이라면 웬만한 적을 상대해도 모자람 없이 강하고, 그들의 은신술이라면 저 정도 눈깔에게 걸릴 리가 없으니까.
* * *
“조용하군.”
“그러게 말이야.”
절벽 인근에 몸을 숨긴 홍건 사내 둘이 간간이 남쪽을 힐끗거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약간 마른 체구에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와 얼굴이 보름달처럼 둥근 사내.
“섬서 쪽에서는 전투가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는군.”
“쳇, 차라리 그쪽에 배정을 받았으면 중원 놈들의 피 맛이라도 실컷 보았을 것인데. 이건 한가해도 너무 한가하니 졸음이 쏟아질 지경이구만.”
둥근 얼굴의 사내가 볼살을 찡그리자 마른 사내가 히죽 웃었다.
“어쩔 수 없지. 대궁주께서 아직은 기다리라 명하셨다지 않는가?”
“쯧, 무얼 그리 걱정하시는 거지? 지금 하북에 대기 중인 전력이면 놈들을 충분히 쓸어 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전력도 전력이지만 무향 어른들이 다섯이나 대기 중이지 않은가?”
둥근 얼굴의 사내가 투덜거리자 마른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무당지검이라는 놈 때문이겠지.”
“흥, 그따위 말코 도사 놈.”
“이런 개호로 잡놈이 누구더러 말코래?”
“……뭐?”
“응?”
진무를 비웃던 둥근 얼굴의 사내가 갑자기 의아한 표정으로 마른 사내를 쳐다보았다.
“지금 뭐라고 하지 않았는가?”
“무슨 소리야?”
“아니…… 분명히…… 상당히 열 받은 듯한 욕설이…….”
둥근 얼굴의 사내가 고개를 기우뚱하며 눈을 끔벅거렸다.
혹시나 싶어서 주변을 세밀하게 살피고 기척을 탐지했지만, 이곳에는 그들 둘뿐이었다.
“잘못…… 들은 건가?”
“원, 싱겁기는…… 하긴 그럴 만도 하네. 벌써 며칠째 척후 임무만 수행했더니 나도 가끔 환청이 들려.”
“그, 그런가?”
“암, 아마 바람 소리에 나뭇가지 스치는 소리를 잘못 들었을 거야.”
별일 아니라는 듯 히죽 웃는 마른 사내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둥근 얼굴이 갑자기 딱딱하게 굳었다.
“어?”
“응?”
“자네…… 그 목에…….”
“……?”
둥근 얼굴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은 마른 사내가 손으로 목을 만졌다.
그리고…….
푸학!
갑자기 터져 나오는 핏물이 둥근 얼굴을 덮쳤다.
“이, 이보게!”
마른 사내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아챌 새도 없이 눈을 뜬 그대로 쓰러졌다.
그리고 허둥거리는 둥근 얼굴의 앞으로 왜소한 체구에 예쁘장하게 생긴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씨발 놈이, 그분이 누군 줄 알고 함부로 씨불여? 확, 눈깔에서 먹물을 뽑아다가 매난국죽을 쳐 버릴라.”
“……!”
당세령에게 배운 욕설을 시기적절하게 써먹으며 나타난 황신의 모습에 둥근 얼굴이 기겁하며 품에서 꺼낸 피리를 입에 물었다.
퓻!
스스스스.
그러나 피리 소리는 울려 퍼지지 않았다.
이미 황신의 송곳이 그의 목에 바람구멍을 만들고 빠져나온 뒤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