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82
482화
냉산, 궁의 본진이 위치한 곳.
푸드득…….
먼 하늘을 지나 활기차게 날갯짓해 온 전서구가 불타 버린 갈대밭 위를 한차례 크게 맴돌다 내려앉았다.
구구구구.
전령이 모이를 쥔 손바닥을 펼치자 전서구가 부리를 내밀어 열심히 배를 채웠다.
사람 일을 모르는 전서구야 여유로웠으나, 바라보는 전령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꼬리에 달린 적색 깃 때문이었다.
전장의 위급함을 알리는 신호.
발신지는 하북, 발신자는 천력의 무향이었다.
다급히 전서구의 다리에 매인 작은 통을 끌러 내용물을 확인한 전령은 대경실색했다.
“이, 이런! 만궁 님이?”
자신이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전서를 움켜쥔 전령은 곧장 본진의 중심을 향해 몸을 날렸다.
“급보입니다!”
그의 방문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최근에야 정무맹에게 대동을 빼앗아 승전의 기쁨을 만끽하던 지휘부의 평온을 순식간에 깨 버렸다.
“이게 무슨 소리냐!”
전서를 받아든 천립의 입에서 호통이 터져 나왔으나 전령이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지 묻지 않느냐!”
천립의 호통에 전령이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묻는다 하여 자신이 어찌 안단 말인가?
“적힌 그대로입니다. 저도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이런 망할!”
천력의 무향이 보낸 전서의 핵심은 하나였다.
만궁이 사라졌다.
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이미 이틀 전 응조가 적에게 습격을 받았다는 것과 그를 지원한 만궁이 적을 섬멸했다는 전서를 받았거늘, 이 전서는 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둘 중 하나는 가짜다.
하지만 어느 쪽이 진짜라 해도 낭패임은 틀림없었다.
자금성을 치기 위해 대기하던 하북의 전력에 균열이 생기는 것이다.
“확인은? 진위 여부는 확인해 보았느냐?”
“그, 그것이 아직……. 원체 사안이 급하다고 판단하였기에.”
“닥쳐라! 이 중차대한 사안을 확인조차 하지 않다니! 속히 천력에게 확인 전서를 띄워라!”
“예!”
천립의 무시무시한 눈빛에 전령이 급히 천막을 뛰쳐나갔다.
“무슨 일이기에 이리 소란스러운가?”
“대, 대궁주님.”
전령이 나가자마자 들어온 한무화의 모습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던 천립이 급히 말을 멈추고 한옆으로 비켰다.
“이, 이것을…….”
“…….”
의자에 앉아 천립이 내민 전서의 서두를 읽은 한무화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찌 보는가?”
“그것이…… 아직 어느 것이 진짜인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흠. 만약 천력의 전서가 진짜라면?”
“만궁과 응조가 죽었을 것이고, 적의 움직임에 이틀간의 공백이 발생하니 속히 대비책을 세워야 합니다.”
천립의 대답에 한무화가 차분하게 물었다.
“어떤 대비책인가?”
“하북에 준비해 둔 전략 변경이 불가피합니다.”
“불가피하다?”
“그렇습니다. 북리도천은 신강에 있고, 정무맹은 산서와 섬서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현재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것은 사패천입니다.”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긴 한무화를 향해 천립이 빠르게 말을 이어 나갔다.
“만약 천력의 전서가 사실이라면…… 응조와 만궁을 단시간에 쓰러뜨릴 만한 인물은 무당지검뿐입니다. 그가 소규모의 별동 부대를 이끌고 직접 움직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
“하북에 대기 중인 부대 간의 거리가 대략 이백 리. 각기 하루 거리입니다. 응조와 만궁이 당했다면 천력뿐 아니 다른 곳도 위험합니다. 속히 부대를 합쳐 놈의 공격에 대비해야 합니다.”
“공격에 대비한다라…….”
“그렇습니다. 놈들의 의도를 파악하고 속히 무당지검을 찾아야…….”
한무화는 손을 들어 천립의 말을 막았다.
“천립, 내가 그의 움직임에 놀라야 하는 것인가?”
“그, 그건…….”
천립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한무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의 중앙에 자리한 전장 상황도로 다가갔다.
중원 전체를 도식화한 그곳에 적아의 전력이 표시되어 있었다.
중원 북부에 방어선을 형성한 중원 삼패와 황군.
그리고 선두에서 그들과 싸우는 열 명의 무향이 이끄는 부대와 좌군, 우군, 중군으로 나뉜 궁의 본진.
“하북이 공격을 받았다면 우리의 전력이 드러났다는 이야기일 테고, 우리의 의도를 알았다는 뜻이겠지.”
“…….”
“피해를 입었다 하여, 그리고 무당지검이 습격을 감행했다 하여 호들갑을 떨 이유는 없다. 하나 전쟁이 시작된 지 한참인 데다, 황군이 전선에 투입되고 있는 상황에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지.”
탁.
그가 손가락으로 짚은 곳에 주위의 시선이 쏠렸다.
다라락.
한무화의 손에서 합쳐진 두 개의 깃발. 천력을 제외한 두 명의 무향이 이끄는 전력이었다.
스으윽.
가볍게 밀어 내는 손짓에 두 깃발이 하북의 경계를 향해 전진했다.
“놈들이 무엇을 노리든, 의도가 무엇이든 이제 진격해야 할 시점이다. 무향 둘을 전진시켜 하북을 칠 것이다.”
“…….”
전면전의 선포였다.
오매불망 기다렸던 순간이었으나, 지금으로서는 내키지 않았다.
습격한 적을 뒤에 두고 나아간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또한 하북의 북부 방어선은 중원에게도 중요한 곳이니만큼 저들도 사력을 다해 막을 것이 분명했다.
고작 두 명의 무향으로는 무리였다.
“대궁주님, 차라리 무향들을 전부 합쳐 적들을 대비하게 하시고 좌군을 움직여 하북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 계획은 바뀌지 않는다.”
천립의 말을 칼같이 자른 대궁주가 이번엔 중군의 깃발을 전진시켰다.
스윽.
깃발은 곧장 남진을 시작해 대동에서 꺾이곤, 하북의 측면으로 움직였다.
“서, 설마?”
경악하는 천립을 힐끗 본 한무화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북의 북부에 모든 신경이 쏠린 틈을 타, 중군이 하북의 서쪽을 칠 것이다.”
“…….”
“맹부에게 정무맹을 잡아 두었다가 중군이 대동을 지나면 냉산으로 유인하라 이르라.”
“……!”
그와 함께 냉산으로 옮겨지는 선발대의 깃발.
갑자기 전략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다.
냉산으로 유인한다고? 어째서?
“좌군과 우군에게 명하라. 핵심 고수들은 지금 즉시 중군으로, 나머지는 홍건 일만을 남긴 채 순차적으로 돌아와 냉산을 방비하도록 한다. 생사가 불분명한 세 명의 무향에게도 냉산으로 복귀하라 연락을 보내라.”
“……무당지검은 어찌합니까?”
한무화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답했다.
“하북을 도우려 한다면 나와 만날 것이고, 냉산으로 온다면 내가 남긴 선물을 받게 되겠지.”
“서, 선물이라 하시면?”
“폭화멸진(爆滅火陣).”
“……!”
싸늘해진 한무화의 눈빛을 마주한 천립의 등줄기에 소름이 쭉 끼쳤다.
폭화멸진이라니.
대궁주는 지금 무당지검뿐 아니라 홍건의 무인 일만에 정무맹, 그리고 미끼가 된 무향들까지 모조리 냉산에 묻어 버릴 생각인 것이다.
과거에 그들의 조상이 그곳에 묻혔던 것처럼…….
“대, 대궁주. 희생이 너무 큽니다.”
“…….”
말까지 더듬으며 우려를 표하는 천립을 가만히 보던 한무화가 차게 반문했다.
“희생?”
“…….”
“누가 너에게 그런 생각을 허락하였더냐? 수를 두는 것은 나다. 너희는 그저 내가 정한 곳을 향해 내가 허락한 만큼 움직이는 장기 알일 뿐.”
그의 눈동자에 번들거리는 광기에 천립은 숨이 막히는 듯 목을 움츠렸다.
“……며, 명을 받듭니다.”
고개를 숙인 천립이 급히 뛰어나갔다.
대궁 예하 모든 곳에 명을 전하기 위해서…….
* * *
또다시 해가 기울고 전투가 끝났다.
휘이잉.
그림자의 길이가 전장을 채운 이들의 키보다 훨씬 길어졌을 무렵, 때아닌 바람이 먼지를 몰고 와 짙게 깔린 피 냄새를 덮었다.
사방을 수놓은 것은 부러진 창검이었고, 그 여백마다 빼곡히 들어찬 것은 피와 시신이었다.
새싹의 파릇한 물결로 싱그러웠던 풍경은 어느덧 지옥 어느 층의 단면이 되어 있었다.
쿡.
선두에서 서서 적을 쉼 없이 베어 낸 철지량이 땅에 박은 검을 지지해 겨우 몸을 세웠다.
발끝에 닿은 땅이 질척거렸다.
마른땅이 피를 함빡 머금어 진흙처럼 변할 정도였으니, 이번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짐작할 만했다.
하나 어디 축축한 곳이 바닥뿐이겠는가?
걸쳤던 의복 또한 푹 젖어 몸에 온통 달라붙은 탓에 운신이 불편할 정도였다.
“후우…….”
거칠어진 호흡을 겨우 가라앉힌 철지량이 힘겹게 허리를 폈다.
땀을 흘려 본 적이 언제였던가?
내공의 한계를 넘어 피로함을 느껴 본 것은 또 언제였던가?
검병을 쥔 손의 떨림이 가실 줄 몰랐다.
재차 숨을 고른 철지량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아, 하아…….”
모두가 극도로 지쳐 있었다.
겨우 허리를 펴고 있는 양소방과 등여평.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용봉관의 젊은 무인들과 구파의 무인들.
함께 전선에 투입된 군병들은 아예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였다.
철지량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멀리 보이는 대동의 시가지를 응시했다.
“망할 놈들…….”
전투에서는 승리했으나, 결국 이번에도 나아가지 못했다.
밀려드는 참담함에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해독약과 의원들이 지원된 덕에 이전과는 달리 독에 의한 피해는 적었다.
문제는 홍건을 쓴 이들이었다.
칼은 들었으되 무공 한 초식 모르는 이들이 불나방처럼 죽음을 향해 달려들었다.
정파 소속 무인들로서는 민간인인 이들에게 함부로 손을 쓸 수 없었다.
그것이 그들의 의였고, 평생을 지켜 온 도리였다.
전쟁을 승패로만 규정짓는 군병이나 피난민들마저 가차 없이 죽여 버린 마교와는 사정이 달랐다.
세상을 오시하고도 남을 무공을 가진 검성도 마찬가지였다.
첫 전투에서 운암이 생포한 암향이라는 자에게서 홍건을 쓴 이들이 그저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자 주저함은 더욱 커졌다.
손속에 사정을 둠으로써 무력화시켜 포로로 잡아야 했고, 간간이 섞여 있는 적의 고수를 콩나물시루에서 썩은 놈 골라내듯이 죽여야 했다.
그렇기에 피로는 쌓여 갔고, 피해는 늘어났다.
설상가상으로 날이 저물고 있었다.
이제 물러나야 했다.
어둠은 싸움에 뛰어든 그 누구에게도 이롭지 못한 법이었으니까.
일단은 돌아가 체력을 회복하고, 날이 밝으면 재개될 싸움을 준비해야만 했다.
결정을 내린 철지량은 허리를 곧게 펴고 군문의 장수를 바라보았다.
“백 천호.”
“예, 맹주.”
철지량의 부름에 곁에 있던 무장이 지친 표정으로 대답했다.
“비록 대동을 수복하지는 못하였으나…… 일단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방어진을 구축하십시다. 사망자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부상자들을 부축해 물러나도록 하시지요.”
“알겠습니다.”
비록 무인인 철지량이었으나, 무장은 군례를 갖추어 대답했다.
관무의 연합 작전이 펼쳐진 뒤, 태자의 명으로 무림인들이 전투의 수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불을 올리고 목책을 세우라!”
“예!”
백 천호의 지시에 군병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방어선을 구축했다.
시신과 중상자들을 실은 들것이 줄을 이었고, 절룩거리는 자들은 부축되어 후방으로 물러났다.
“후방에 연락을 보내게. 우리도 교대조에게 경계를 맡기고 물러나세. 이대로 가다간 계속해서 피로감만 더해질 뿐이야. 대군사와 차후의 전투를 논해야 할 듯하네.”
“예.”
철지량의 말에 양소방이 고개를 끄덕이고 휘하에 명을 전했다.
진정한 승자도 패자도 없는 텅 빈 전장에 땅거미가 짙게 깔렸다.
* * *
“맹부 님. 적들의 진형에 불이 올랐습니다.”
“…….”
수하의 보고에 등에 거대한 양날 도끼를 비스듬히 맨 사내, 맹부(猛斧)의 무향의 얼굴이 그제야 풀어졌다.
“후우, 오늘 전투는 여기까진가?”
“…….”
정무맹이 그렇듯, 대동을 지키던 이들도 동일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전투에서 죽은 대다수가 소모용으로 길러진 홍건이라고 하지만, 맹부와 그가 이끄는 무인들의 피로도 적지 않았다.
대동을 사수하기 위해 수십 차례 이상 참전해 적들과 싸운 탓이었다.
검성 철지량.
그의 무위는 과연 경탄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호승심이 동하여 일전을 벌여 보고 싶은 마음에 그와 몇 차례나 부딪혔으나…….
“망할 거지새끼.”
그때마다 양소방이 끼어드는 바람에 결착을 보지 못했다.
“철지량과의 일전은 다음으로 미루어야겠군.”
맹부가 아쉬운 눈길로 전장을 바라보다 몸을 돌려 대동의 시가지로 향하던 그때였다.
“맹부 님!”
“……?”
한 사내가 급히 달려왔다.
전령? 대체 무슨 일이길래?
“대궁주께서 본진의 진격을 명하셨습니다.”
“본진을?”
“…….”
전령이 고개를 끄덕이자 맹부의 얼굴이 희열로 물들었다.
“내일 아침이면 대동 인근에 당도할 듯합니다. 대궁주께서 정무맹의 무인들을 냉산으로 유인하라 하셨습니다.”
“냉산으로?”
“예.”
“이유는?”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흠…….”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
대궁주의 뜻에 자신들이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배워 왔고, 훈련되었으니까.
“여상!”
“예.”
“홍건들을 준비시켜라. 동이 트는 것과 동시에 공격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대궁주가 움직였다면 진격 외에 다른 것은 없었다.
애초에 퇴로 없는 전쟁이다.
적을 죽여 이 땅을 빼앗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들 모두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