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83
483화
동이 트기 시작한 시각.
가시거리가 십여 장이나 될까 말까 하게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숲.
경계 임무를 수행하던 홍건의 하급 무인, 괴유는 이상한 광경에 열심히 눈을 비볐다.
일렁이는 안개 사이에 희뿌연 그림자 하나가 나타난 것이다.
“귀, 귀신……이 나타날 시간은 아닌데.”
등줄기에 순식간에 소름이 돋았다.
괴유는 초월적인 존재를 애써 부정하며 세차게 고개를 저어 댔다.
그래. 해가 뜨고 있는 시간에 귀신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럼 저게 뭐지? 헛것인가?
밤샘 경계 임무로 몸이 피곤해서?
경계용 호각을 입에 물고, 혹시나 싶어 다시 눈을 비벼 보았다.
“응?”
없어졌다.
고개를 획획 돌려 주위를 살폈지만 역시나 보이지 않았다.
“휴우…… 몸이 허하긴 한 모양이네. 교대하고 나면 푹 자야겠어.”
비로소 안심하고 호각을 품에 넣은 괴유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 순간 다시 나타났다.
귀신…… 아니 그림자가.
인사를 건네듯 손을 흔드는 그림자에게 무심코 마주 손을 흔들려던 괴유는 우뚝 멈췄다.
점점 가까이 다가와 형체가 선명해지는 그것은 헝클어진 머리를 아무렇게나 묶고, 옷을 대충 걸쳐 입은 채 검 하나를 어깨에 걸친 약관의 사내였다.
“대체…… 누구?”
괴유가 의아하게 쳐다보는 순간, 씩 웃은 사내가 어깨 쪽에 걸치고 있던 검을 허리춤으로 가져가며 자세를 낮췄다.
저건…… 발검을 하려는 것 같은데?
어울리지 않는 상황은 때로 황당함을 주는 법이었다.
희한하지 않은가?
궁의 본진에서 삼백 리 떨어진 좌군의 동쪽 끝단 숙영지.
인적이 드문 숲, 혹여 모를 적의 습격을 대비해 외곽에 갖가지 진법과 장애물들을 설치한 그곳에 홀로 나타나서 발검세를 취하는 인물이라니?
“서, 설마?”
화등잔만 해지는 눈동자와 함께 정신을 차린 괴유가 호각을 꺼내려 품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사내는 기다려 주지 않았다.
손을 흔들어 반갑게 인사를 나눈 사이에 호각 불 시간 정도는 줄 만도 한데…….
뽑는가 싶었던 검이 이미 포물선의 끝점에 다다라 멈춰 있었다.
화아악!
눈이 시리도록 차가운 검광이 번쩍이는 순간, 세상이 반으로 갈라졌다.
아직…… 아직 호각을 꺼내지도 못했는데.
그것이 괴유가 본 마지막 세상의 모습이었다.
쿠드드득, 콰아아앙!
검광은 괴유의 몸뿐 아니라 숲을 이룬 모든 것들을 갈랐다.
거친 폭음과 함께 숲이 뒤흔들리고, 잠들었던 세상이 비명과 함께 깨어났다.
“크아악!”
“적이다!”
“동쪽이다!”
삐이익!
때아닌 습격을 받은 홍건의 무인들이 야단법석을 떠는 와중에 일검으로 세상을 가른 사내가 뽑았던 검을 집어넣었다.
찰칵.
부드러운 쇳소리.
그리고 그의 입에서 새벽의 싸늘함에 어울리는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흘러나왔다.
“사정 봐주지 말고 조져.”
퓻!
하나에서 시작된 섬전이 사방에서 나타나 동시다발적으로 안개를 꿰뚫고 진무를 지나쳤다.
일격에 박살 난 방어선을 통해 숙영지를 관통하며,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마주한 모든 생명을 말살했다.
막 잠에서 깬 홍건의 무인들이 부랴부랴 막아 보았지만, 안개를 뚫고 나타난 적의 무지막지한 돌파력에 비명 한마디 못 지르고 아스러질 뿐이었다.
약관의 사내는 진무였고, 난입한 적들은 천우명을 필두로 내달리는 철검단이었으니까.
홍건이고 나발이고 상관없었다.
그래, 니들 중에는 일반 백성도 있겠지.
하지만 전쟁에서 칼을 든 이상 서로가 죽고 죽여야 하는 적에 지나지 않는다.
어쭙잖은 인정을 베풀다가 내 사람이 뒈지는 것만큼 뼈아픈 일은 없으니까.
그들은 그들이 선택한 길을 걷고 있었다.
자신과 길이 다를 뿐이었다.
그리고 이럴 땐 오히려 더욱 악랄하게 적을 공격하는 것이 나았다.
심기가 약한 놈들은 지레 겁을 집어먹고 도망칠 테니까.
그들은 쫓지 않는 것이 진무가 그들에게 베풀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였다.
“신.”
“예, 천주님.”
“적의 식량을 찾아서 불태워라!”
“예.”
황신이 소리 없이 쏘아져 나가고, 진무는 철검단이 열어 놓은 살육의 길을 여유롭게 걸었다.
“이놈!”
“…….”
진무가 경계점을 넘어 숙영지의 안쪽으로 발을 들이려는 순간, 제법 지위가 있어 보이는 놈이 달려들었다.
쉬이익! 트드득!
언제 들어도 익숙지 않은 소음.
검은 진무의 근처에 닿지도 못했고, 공격한 적은 어느새 움직인 능서현의 손길에 목이 반대로 돌아가 있었다.
“놈을 막아라!”
“…….”
막으려면 천우명을 막아야지.
돌파당하고 나서 뒤늦게 가세한 놈들이 어찌 날 공격한단 말인가?
그런데 많기도 많다.
무슨 들개 새끼들도 아니고…….
진무는 각자의 무기를 들고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가련한 이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다 각출을 불렀다.
“각출아…….”
쉬이이!
늘 그래 왔듯 이름이 불리자마자 본능적으로 튀어 나가며 손에 든 뼈다귀를 휘두르는 각출.
그의 현란한 손놀림을 따라 수백, 수천 개의 뼈다귀가 하늘을 뒤덮었다.
빡, 빠바바바박!
각출의 뼈다귀가 소복하게 떨어져 내릴 때마다 뼈다귀 부서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골신합일(骨身合一)의 경지로 펼쳐지는 천하무구라니.
녀석, 그동안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천산설묘가 살아 돌아와도 제 뼈다귀인 줄 모를 게야.
그래, 세상천지 개새끼는 니가 다 잡아먹으렴.
나중에 개방에 말해 명호라도 하나 지어 주라 해야겠다.
개 구(狗), 원통할 원(怨).
개들이 원통해하며 미워하는 거지, 구원개.
이 얼마나 좋은 이름인가?
어쨌든 진무가 딱히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능서현과 각출이라는 자동 방어 장치가 실시간으로 가동되고 있었고, 적들 대부분은 천우명과 철검단을 막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그들이 적의 진형을 휘젓는 동안 황신이 식량을 찾아 불을 놓으면 끝이다.
그사이 전장을 살펴서 퇴로나 만들면…… 어?
그런데 어째 좀 이상했다.
습격한 지 꽤 지났음에도 딱히 고수랄 만한 놈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전의 전투를 비추어 봤을 때, 홍건 놈들 사이에서 다른 색의 건을 쓴 놈들이 모습을 보여야 했다.
색깔 구분이 확실한 놈들인데, 뭐지?
좌측 끄트머리에 불과한 지역이라서 핵심 전력을 배치하지 않은 것인가?
그럴싸한 가정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진무는 눈으로 철검단이 있는 쪽을 가늠하고는, 능서현과 각출을 불렀다.
아무래도 적들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을 테니 핵심적인 고수들이 나타난다면 그쪽일 터였다.
“서현! 각출!”
“예!”
“확인을 해야 할 게 있다!”
“……?”
진무가 갑자기 걸음에 속도를 더하는가 싶더니, 이내 지면을 밟고 쏘아져 나갔다.
파아앙!
* * *
“으핫핫핫! 이놈들! 모조리 박살 내 주마!”
쿠르릉! 콰아앙!
천우명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리고 철검단이 호쾌한 주먹질로 달려드는 적을 모조리 피떡으로 만들어 버리는 천우명을 꼭짓점 삼아 쐐기형으로 뒤따르며 적들의 육신을 쉬지 않고 갈랐다.
“우명!”
“천주님!”
순식간에 그들의 뒤를 따라잡은 진무가 큰 목소리로 천우명을 부르자 돌파가 일순 정지했다.
쉬이이익!
그 주위로 달려드는 적들을 향해 각출의 뼈다귀가 춤을 추고, 철검단이 진형을 바꾸어 원방진을 펼치자 순식간에 적진의 중앙에 공터가 생겨났다.
“건(巾)의 색이 다른 놈들은 없었느냐?”
“……뭔 건요?”
“…….”
이놈에게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진무가 한쪽 눈을 치켜뜨자 모원려가 급히 대답했다.
“아직 적의 수뇌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아?”
어찌 된 일이지?
진무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던 때였다.
“불이다!”
“식량이 습격당했다!”
멀리 거대한 불길이 혀를 날름거리며 피어올랐다.
황신이 임무를 마친 모양이었다.
그리고, 적들이 점점 더 철검단의 주변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제길…… 생각은 나중에 하라 이거지.”
적이 쌓이는 것은 좋지 않다.
전투 시간이 길어지면 아무리 홍건을 상대한다고 해도 지치기 마련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기습을 한 상황.
계속 달려서 빠르게 치고 빠져야 하니만큼 체력의 소모가 일반적인 전투의 몇 배에 달했다.
진무는 눈을 빠르게 굴려 적절한 지점을 물색했다.
퇴로를 만든다.
안전한 곳으로 벗어나 적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봐야만 했다.
“우명! 우측 계곡 방향, 천착(穿鑿)!”
“예!”
전장에서 굳이 다른 설명은 필요 없었다.
오랜 훈련을 거친 몸은 약속된 한마디에 알아서 움직였다.
진무가 외친 천착은 방어진에 구멍을 내는 것.
퇴로를 만들라는 명령에 따라 철검단이 즉시 원방진을 해제함과 동시에 우측으로 몸을 날려 새로운 진형을 갖췄다.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이들을 중심에 둔 원추진(圓錐陣)이었다.
“가자!”
진무가 선두에 서자 철검단의 돌파력이 순식간에 배가되었다.
“놈들이 도주한다! 막아라!”
움직임을 알아차린 적들이 도주를 막기 위해 겹겹이 몰려 방어막을 쌓았다.
우우웅!
진무의 손을 떠난 일휘가 검명을 토하며 쏘아졌다.
쐐애애액!
스걱.
이기어검으로 적을 통솔하는 수좌의 머리를 잘라 버린 진무가 더욱 속도를 높여 몸을 띄워 올렸다가, 적진의 방어진 앞에 포탄처럼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앙!
진각, 용보가 일으킨 거대한 폭발에 방어진의 선단이 날아가고.
진무의 손안에서 순식간에 응축된 검은 구체가 방어벽을 향해 섬전처럼 쏘아져 나갔다.
콰아아앙.
하늘을 찢어발기는 이빨, 천교열에 갈가리 찢긴 방어선에 구멍이 뚫렸다.
“각출! 확장시켜라!”
폭발의 여파가 가시기도 전에 명을 받은 각출이 뛰어들어 천하무구를 날려 적들을 쓰러트렸다.
“서현, 우명, 지지대!”
명이 내려짐과 동시에 행동하는 일사불란함.
굴을 뚫고 나면 그보다 중요한 것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지대를 세우는 것이었다.
좌우를 나누어 맡은 천우명과 능서현이 확보된 도주로가 좁혀지지 않도록 적들을 막아섰다.
“철검단 퇴각!”
그 사이로 철검단이 진형을 흩트리고 가진 모든 힘을 다해 내달렸다.
“서현, 우명!”
진무의 외침과 함께 천우명과 능서현이 닫히는 도주로의 끝점을 빠져나왔다.
“쫓아라! 놓쳐서는 안 된다!”
“…….”
적들이 도주하는 철검단의 꼬리에 따라붙었다.
선두를 맡은 혁련무강이 적진에 구멍을 내면 철검단이 뛰어들어 적을 유린한다.
전장을 살핀 혁련무강이 명을 내리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사불란하게 도주로를 향해 뛰어든다.
철검단이 오랫동안 혁련무강과 해 왔던 퇴각 전략이었다.
그리고 항상 그들의 마지막을 지키는 것은 혁련무강이었다.
철검단에 이어 능서현과 천우명이 지나간 자리, 진무가 적을 마주 보고 섰다.
우우웅!
검은 기운이 진무의 주먹을 회오리처럼 타고 올라 겹겹이 감싸는 순간…….
슈우우우, 콰드득.
주먹이 대지를 뚫고 틀어박혔다.
응축된 강기가 대지를 뒤흔들고, 온통 금이 간 대지가 일제히 폭발했다.
묵룡혼원공, 대지창파.
드드드드, 콰아앙.
그리고 그 폭발의 끝에서, 진무가 새까맣게 번들거리는 눈을 하고 나지막이 으르렁거렸다.
“쫓아와 봐. 시체도 못 찾게 찢어 줄 테니까.”
“…….”
검은 심연의 중심에서 흘러나오는 포악한 묵룡의 위협이 전장 곳곳으로 퍼져 나가자 일순 추격이 멈췄다.
뇌리에 선명하게 쑤셔 박히는 본능적인 두려움.
그들의 모습을 스산히 노려보던 진무가 천천히 몸을 돌려 사라질 때까지, 그 누구도 그를 뒤쫓지 못했다.
수천의 적들을 유린한 철검단의 무공도 무공이었으나, 자신들을 노려보던 진무의 눈빛은 마치 현세에 강림한 사신(死神) 같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