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24
24화
쫘아악! 쫘아악!
날카로운 채찍 소리가 돌을 캐는 채석장을 뒤흔들었다.
커다란 호선을 그리며 흩날리는 채찍이 예(乂) 자 모양으로 교차한 양 갈래 나무 기둥에 결박된 사내의 등을 연신 잔혹하게 파고들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수백의 사람들이 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 참혹한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모진 채찍질이 이어지는 내내 쉼 없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던 사내가 어느 틈엔가 잠잠해졌다.
“아부지! 아부지이!”
사내의 가족으로 보이는, 건장한 사내에게 머리채를 잡힌 소년과 여인이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쫘아악! 쫘아악!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데도 묶인 사내는 그저 고깃덩이처럼 들썩이기만 했다.
“그만!”
짧은 외침에 편배(鞭背: 채찍형)를 행하던 이가 멈춰 뒤로 물러나자 의원이 급히 달려가 사내를 살폈다.
하나 의원이 살펴봐서 무엇하겠는가? 이미 숨이 끊어진 것을.
그가 굳은 표정으로 몸을 돌려 고개를 내젓자 멀리 천막의 그늘 밖에 있던 사내가 그 안에 의자를 놓고 앉은 중년인에게 공손히 말했다.
“죽었습니다.”
“후우, 후우…….”
죽음.
그 잔인한 판정에도 중년인은 애도할 생각 따윈 없는 것처럼 더없이 잔잔한 얼굴로 찻잔에 피어오르는 김을 불어 내는 것에 집중했다.
“……전하. 어찌하올는지?”
“…….”
양손을 공손히 모으고 조심스레 묻는 말에 중년인이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만 가세.”
“예?”
그만 가자니. 시신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를 정해 주어야 하지 않는가?
“허허, 답답한 사람.”
“…….”
“가축 한 마리 죽은 것까지 내가 신경 써야 하는가?”
“……죄, 죄송합니다.”
담담하면서도 서늘한 말에 사내가 급히 바닥에 엎드렸다.
“이보게, 천서.”
“예. 전하.”
“기르는 가축은 가축답게 죽으면 되는 것이네. 사체를 들개가 뜯어 먹든 새가 쪼아 먹든 무슨 상관인가? 그저 남은 가축들에게 본이 되면 그만인 것을.”
“……!”
본을 보이다.
사내는 중년인의 말을 듣고 냉큼 이해했다.
묶인 사내는 채석장에서 일하는 노예. 새벽같이 일어나 밤이 늦을 때까지 꼬박 여덟 시진을 넘게 일하는 것이 그들의 일과다.
새경? 그따위 것은 없다.
감자 하나와 개울물 한 병으로 버텨야만 한다.
그들에게 희망이라고는 탈주하는 것이지만, 그마저도 짓밟히는 것이 다반사다.
가족들과 함께 탈주를 시도했다가 잡혀 와 형틀에 묶여 편배형을 당해 죽은 사내처럼…….
하나 누구도 그에 대해 반문을 가지지 않는다. 누구 하나 죽어 나가도 관에서 조사도 하지 않는다.
그들이 속한 채석장의 주인은 현 황제의 숙부인 영왕이었으니까.
“뭣 하는가? 이리 쉬게 해서야 생산량을 맞출 수 있겠는가? 가축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더욱 매질로 다스리게.”
“아, 알겠습니다. 전하!”
영왕의 말에 사내가 급히 일어나 손짓을 보내자 또다시 채찍 소리가 울려 퍼지고, 한 사내의 죽음을 바라보던 수백의 사람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남녀노소의 구분은 있었으나, 그들이 행하는 행동은 같았다.
저마다의 손에 든 괭이로 기계적으로 땅을 파헤치는 것. 그들에게 허락된 움직임은 오직 그 하나뿐이었다.
그 모습을 흡족히 바라보다 몸을 돌린 영왕의 눈에는 서늘한 살기가 어려 있었다.
미친놈들…….
뭣이 어째? 선대의 죄를 인정하고 백성으로 받아들여?
그놈들로 인해 죽은 충의지사(忠義之士)가 몇인 줄은 알고 하는 소리란 말인가?
이게 다 이 나라가 어찌 세워졌는지도 모르는 어린놈이 황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무림인과 손을 잡고, 제멋대로 한씨의 족속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절대로 그놈들을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힘닿는 데까지 찾아내 짐승이나 다를 바가 없는 삶을 살게 하리라.
희열과 살기가 뒤섞인 일그러진 미소를 지운 그가 채석장을 떠나기 위해 교자(轎子)에 막 오르려다, 멀리서 흙먼지를 피우며 달려오는 인마를 발견하고 눈을 찡그렸다.
“전하!”
“…….”
말을 멈추고 뛰어내린 무인이 다급히 영왕의 발 앞에 엎드렸다.
“무슨 일이냐?”
“이, 이것을…….”
“……?”
무슨 일이기에 이리 급해 보인단 말인가?
차라락!
그가 다급히 두 손으로 받쳐 내미는 족자를 펼쳐 읽은 영왕이 눈을 부릅뜨고 언성을 높였다.
“이, 이게 무슨 소리냐!”
“시합원에서 급전으로 보내온 소식입니다.”
“…….”
영왕의 눈 주위가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각지의 무림인들이 시합원의 지부를 습격하고 그들이 잡아 두었던 한씨의 족속들을 모조리 데려갔다는 내용이었다.
“이, 이 감히…… 무뢰배 놈들이!”
“…….”
“각지의 관리들은 이 사달이 날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다더냐! 내 분명히 뜻을 충분히 전달하였거늘!”
“이미 확인하였사오나, 무림인들이 생포한 시합원의 사람들을 구금하고, 관리들의 인계 요청을 거절하고 대치 중이라 합니다.”
“뭐라? 이 망할 놈들이! 그놈들에게는 국법도 없다더냐! 당장 서신을…… 아니다. 내 직접 가서 전서를 보낼 것이다.”
“예!”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왕이 교자를 버리고 말을 채어 자신의 장원으로 달렸다.
* * *
푸드드득!
소식을 실어 나르는 전서구가 막중한 임무를 담고 힘차게 날갯짓하며 솟구쳤다.
그 조그만 다리에 매달린 통에는 때로는 연서(戀書)가 들어 있기도 했고, 때로는 반가운 소식이, 또 때로는 위급함을 알리는 내용이 들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전서구가 그 내용을 알 리는 없다.
수없이 해 온 훈련의 결과로 생긴 그들만의 귀소 본능에 따라 그저 날갯짓만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이다.
어둠을 뚫고 높이 솟구친 전서구의 눈에 보이는 것은 언제나 똑같았다.
출발한 장원을 떠나 인근 산의 능선 위를 지나면…….
피윳! 퍼억!
……처음 느껴 보는 소리와 감촉.
유유하던 날갯짓에 힘이 빠지고, 몇 번인가 푸드덕거리던 전서구가 곧장 추락했다.
히유우우우. 턱.
떨어졌으나 다행히 땅바닥은 아니었다.
의식이 사라지던 전서구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제 몸을 손에 쥐고 생긋 웃는 앳된 소년이었다.
“잡았다.”
전서구의 불행을 기뻐하는 소년, 황신이 또다시 날아오르는 목표물을 향해 몸을 옮겼다.
그리고 그의 허리춤에는 무려 다섯 마리나 되는 비둘기가 축 늘어진 채 달려 있었다.
황궁을 떠난 진무 일행이 향한 곳은 하야한 영왕이 기거하는 하북성 남단의 한 장원이었다.
이미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장원 외곽은 하북성과 맞닿은 산서, 하남, 산동의 무인 전부에 의해 촘촘히 포위되어 있었다. 혹여 영왕이 눈치채고 도망칠 것을 우려해서였다.
진무 일행이 도착한 것은 밤이 이슥해질 무렵이었다.
때마침 사방으로 날아오르는 전서구를 죄다 잡아 오라는 말 같지도 않은 명령에, 황신과 아이들은 그 무지막지한 무공 실력을 아낌없이 발휘했다.
하늘을 나는 새를 어찌 잡냐고?
불가능에 가깝다 여겨지는 그 일을, 그들의 개천주는 단 한마디로 가능하게 만들었다.
제일 많이 잡아 오는 놈에게 ‘형’이 될 기회를 주겠다!
그리고 그 엄청난 말을 듣자마자 각출과 소동보가 광기 어린 눈을 하고 냅다 뛰었다.
망할 놈들…… 질 수 없지.
황신도 눈에 불을 켜고 뒤따라 몸을 날렸다.
특히나 그간에 형이랍시고 할 짓, 못 할 짓 구분하지 않으며 둘을 괴롭혔던 그로서는 정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동생’이라는 그 개 같은 상황에 처하지 않기 위해서는 발바닥 껍질이 벗겨지도록 뛰어다닐 수밖에…….
물론 그사이 진무는…… 쉰다.
장원이 매우 잘 내려다보이는 산자락에 앉아서 쉰다.
딱히 은밀하지도 않다. 남들 다 보란 듯이 모닥불을 피워 놓고, 운연이 놈과 함께 쉰다.
황신은 그 꼴을 보고 짱돌이라도 던지고 싶은 걸 겨우 참고 속으로만 욕을 씹어뱉었다.
시벌 진짜.
스승이랑 떨어진 놈 서러워서 살겠냐, 살겠어?
하지만 어쩌겠는가? 꼬와도 해야지.
어차피 피차 어디 갈 데도 없는 몸이니, 형이라는 지고의 위치를 고수하자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다행히 위치를 잘 잡았기 때문에 자신이 자리 잡은 곳으로 날아오는 전서구가 많았다.
슈이익! 퍼억!
푸더덕, 텁!
“좋았어! 이걸로 일곱 마리.”
땀으로 흠뻑 젖은 황신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일곱 마리면 안정권이다.
이것도 다 남다른 청력과 그간 쉬지 않고 닦아 온 경공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각출과 소동보가 자신보다 많이 잡을 가능성은 전무했다. 이걸로 형 자리는 지킨 것이다.
장원을 다시금 주의 깊게 살폈지만 더 날아오르는 전서구는 없었다. 보낼 놈은 대충 다 보냈다는 뜻이다.
황신은 씩 웃곤 보무당당하게 진무와 운연이 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윽고 산 중턱에 있는 휴식 장소 언저리에 이르자 황신이 허리춤에 있던 비둘기들을 끌러 양손에 나누어 쥐었다.
한 손에 세 마리, 다른 손에 네 마리. 합이 일곱 마리.
“천주님! 제가 일곱 마리나 잡았습니다!”
모닥불 주위에 앉아 있는 일행을 보며 황신이 자랑스럽게 외쳤다.
“…….”
뭐지? 왜 반응이 없지?
픽!
어? 각출이가 비웃었다.
그러더니 늘 들고 다니던 뼈다귀를 어깨에 걸치고 천천히 다가와서는…….
“신아.”
“…….”
시, 신아?
이 거지새끼가 뭘 잘못 빌어 처먹었나?
“쯧쯧. 일곱 마리 잡은 거야?”
“…….”
뭐지? 이 거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
이걸 확 그냥 이빨을 다 털어 내고 비둘기 발톱을 꽂아 버릴라.
“어쨌든 겨우! 일곱 마리 잡느라 수고했다, 신아.”
“…….”
겨우……라고?
얄밉기 그지없는 조롱에 황신이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이 거지새끼가 미쳤나! 처돌았어? 어? 손 안 치워?”
“어쭈? 이 새끼가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보네? 하긴, 형 생활 그만큼 했으면 적응이 안 될 수도 있지.”
“……?”
대체…… 뭐지?
“신이 이 녀석! 형님께 그 무슨 배워먹지 못한 말버릇이냐!”
“……?”
와중에 소동보까지 눈을 부릅뜨며 다가와 호통을 치더니만…….
탁!
머, 머리를!
이놈의 자식들이!
황신이 양쪽 눈을 다른 모양으로 뜨고 째려보는데, 소동보가 갑자기 손가락 아홉 개를 폈다.
“이 몸은 아홉 마리! 아깝게 한 마리를 못 채웠다.”
“……아, 아홉 마리?”
황신이 당황한 표정으로 더듬더듬 묻자 고개를 끄덕거린 소동보가 공손하게 양손으로 각출을 가리켰다.
“우리 각 형님께서는 무려 열다섯 마리!”
“여, 열다, 다, 다, 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동보와 각출이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이 잡았다고? 대체 무슨 수로?
“말도 안 돼!”
따악!
“큭!”
소동보가 또 황신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어허! 말이 안 되긴! 각 형님 열다섯! 이 둘째가 아홉! 설마 천주님께서 직접 세어서 인정하신 일에 의심이라도 할 참이냐?”
“……씨발 그러니까 지금 그, 진짜로…….”
“응, 니가 이제부터 막내.”
“…….”
“깃털 뽑고 비둘기 구워. 천주님 허기지신단다.”
“…….”
“빨리 안 움직여?”
“…….”
“하, 나 이 새끼가 진짜. 좀 맞아야 상황 파악이 되려나?”
소동보가 얼굴을 찡그리며 주먹을 우두둑 소리가 나게 꺾는데, 각출이 점잖게 그를 불렀다.
“어허! 동보야.”
“예, 형님.”
“동생 교육 전에 일단 전서구에 실려 있는 내용부터 천주님께 드려야지!”
“아! 알겠습니다. 형님.”
냅다 대답한 소동보가 멍하니 선 황신의 손에서 비둘기를 빼앗아 냉큼 진무에게로 달려갔다.
“왜, 안 믿겨?”
“…….”
“그럴 만도 하지. 암! 하하! 아하하하하!”
“어헛헛헛헛!”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각출이 어깨를 두들겼고, 전서구를 진무에게 바친 소동보까지 가세해 웃기 시작했다.
털썩.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여전히 제게 닥친 현실을 믿을 수 없었던 황신이 세상을 잃어버린 표정을 하고 무릎을 꿇었다.
“흠, 저래도 되는 건가요?”
그 순간 운연이 진무에게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각 호위가 많이 잡은 건 인근에 포진한 개방도를 이용했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더욱이 소 호위는 무릎을 꿇고 빌어서 세 마리를 얻은 건데…….”
너무 가까웠기에 듣지 않을 수 없었다.
황신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비웃는 각출과 소동보를 노려보았다.
“이런 비겁한 놈들이…….”
당장에 두 놈의 입을 찢어 놓으려 벌떡 일어나는 순간!
“멍청하긴. 주변 상황을 이용하는 것도 실력이야.”
믿었던 개천주의 한마디가 황신의 귓가를 강타하고, 움찔하며 물러섰던 각출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뼈다귀를 힘껏 움켜쥐었다.
“천주님 말씀 들었지, 이 귀 밝은 놈아. 주변을 이용하는 것도 실력이라신다, 실력! 그런데, 뭐? 이 위대하신 형님께 비거업? 이 조막만 한 새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엎어!”
“…….”
진무를 따라다니며 생긴 그들만의 불문율.
‘형’이 왕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그 불문율을 앞장서 수호해 왔던 황신으로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엎어질 수밖에 없었다.
“동보야!”
“예, 형님!”
“천주님 비둘기 좀 구워 드려라. 나는 이놈 교육 좀 하겠다.”
“암요, 형님. 누가 형인지 똑똑히 가르쳐 주십시오!”
“오오오냐!”
각출이 손바닥에 침까지 뱉으며 움켜쥔 토왕의 뼈다귀가 넋 나간 표정을 하고 바닥에 쓰러진 황신의 엉덩이에 작렬했다.
퍼억! 퍽퍽퍽!
“어어? 움직이지 말라니까? 잘못하면 뼈 뿌러져!”
그렇게, 무려 육 년 가까이 동생으로 지냈던 각출의 울분이 모조리 터져 나왔다.
물론 진무는 그러거나 말거나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애들끼리 노는데 어른이 끼어들 수야 없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 새끼, 아주 골고루도 손발을 뻗어 놨네? 관에 군부에…….”
전서에 쓰인 행선지를 바라보던 진무의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생겨났다.
덕분에 영왕과 결탁한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좀 더 세부적으로 알게 되었다.
기대해라, 영왕.
지금부터 잔뿌리 하나 남겨 놓지 않고 모조리 뽑아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