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611
81화
“천수 님, 정말 이래도 되는 것입니까?”
“…….”
비사(毘沙)가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앳된 얼굴과는 달리, 극락정토의 사천왕인 다문천왕의 후계로서 야차를 통솔하며 무수히 많은 요와 괴를 손에 쥔 몽둥이로 계도해 온 그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몹시, 아주 몹시 주눅이 들어 있었으니…….
불과 얼마 전.
인계의 환란에 참여치 못한 것을 내내 분통하게 여겼던 비사는 인계로 가자는 천수를 망설임 없이 뒤따랐다.
비록 같은 제자 신분이나, 평소 거침없이 불법(?)을 전하던 그녀의 모습을 높이 사 흠모해 온 바다. 더 무슨 고민이 필요할까?
인계를 더럽힌 지계의 마귀들을 쓸어버릴 수 있다는 희망에 불타, 천수를 따라 노군이 열어 둔 틈으로 향했다.
그곳을 지키던 선인들이 격렬하게 저항하였으나, 천수는 화사하게 웃는 얼굴로 이름답게 많은 손을 꺼내 하늘을 채워 보이는 신기를 선보였다.
빠바박!
쉴 새 없는 타격음과 함께 선인들이 뒤통수를 얻어맞고 죄 드러누웠다.
역시 거침이 없다.
조금 과한 면이 없잖아 있었지만, 죽인 것도 아니고 잠시 정신을 잃게 한 것뿐이다. 불선에 올랐다고 한들, 악을 처단하는데 어찌 머뭇거릴 수가 있으랴.
존경스러움이 무럭무럭 자랐다.
덕분에 수월하게 틈을 지나 인계에 도착할 수 있었기도 하고.
다만, 방향이 조금 틀어지고 말았다.
아무래도 선인들의 인도를 받지 않고 강제로 틈을 통과한 영향이 큰 듯했다.
불타 버린 검은 대지.
가득한 음기 속 세상을 유린하는 요귀들.
하나 비사가 분노의 상(相)을 짓기도 전에 천수가 먼저 움직였다. 그리고 비사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수, 수월도?
극락정토의 여섯 상제 중 한 분이시자 천수의 스승인 관음의 보물인데? 관음께서 마귀들로부터 인계를 정화코자 하는 그녀의 뜻을 좇아 친히 내주신 건가?
놀란 비사의 눈동자에 수월도의 궤적이 그려졌다.
푸른 물결 위로 천수의 법력이 은은한 달빛처럼 흐른다. 사방에 금빛 서광이 비치고, 요와 귀는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듯한 표정으로 아스라이 소멸했다.
하나 고작해야 상선급 법력을 지닌 그녀였다. 떼로 달려드는 마귀들을 온전히 막지 못한 그녀의 옆구리에 독기 어린 검 하나가 닿았다.
까앙!
“천수…… 응?”
깜짝 놀랐던 비사의 눈빛이 일순 멍해졌다.
까앙?
생각지 못한 소리에 어리둥절해하던 비사는 곧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검에 맞고도 웃음을 잃지 않은 천수의 몸에서 영롱히 피어나 햇살처럼 뿜어지는 검은 광채. 마치 개화한 연화(蓮花)에 보호받는 듯한…….
“배, 백련의까지?”
비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간악한 마귀 놈들!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
불선을 이룬 천수가 요와 귀가 무색할 정도로 사악하게 웃으며 하늘을 또다시 제 손으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 손에는…….
금강저, 독고, 운판, 금종에 요령과 화만까지.
평소 신물이라 여기며 보관해 왔던 극락정토의 보물들이 남김없이 쥐어져 있었다.
그때 알았다.
천수…… 이런 미친…….
차마 말을 끝까지 하지 못하고 제 입을 틀어막은 비사였다.
불선이 되어 욕을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오호호호호!”
산발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웃는 그녀의 모습은 숫제 마왕 같았다.
그런데 불선에 이르렀다 해도 비구니다. 머리카락이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대체 가발은 언제 준비한 거지?
단번에 주위의 요귀를 죽이고 음악했던 대지를 정화시킨 천수가 산정에 서서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비사는 전율에 온몸을 떨었다.
그녀가 강해서? 세상을 구했기 때문에?
그럴 리가.
그녀가 극락정토의 보물들을 모조리 훔쳐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뒤 없는 성격이라지만 불선이라는 자가, 관음의 뒤를 이어야 할 제자가…… 보물을 훔치다니.
절대로 씻을 수 없는 대죄다.
“아아…….”
허망한 표정을 지으며 힘없이 주저앉는 비사를 자애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천수가 당당히 걸어 다가와 어깨를 쓰다듬었다.
“비사여.”
“……?”
따뜻한 손길, 말로 통하지 아니하고 마음만으로 마음을 전한다는 염화미소(拈華微笑)였다.
“나를 따른 것을 책망하는가?”
“그, 그것이 아닙니다. 천수께서 가져오신 것은 극락정토가 소중히 모셔 온 보물들이 아닙니까? 어찌 허락도 구하지 아니하시고.”
“비사여, 보물이 그리 중요한가?”
“그건…….”
“집착일 뿐이다.”
“천수 님…….”
“탓한다면 나는 돌아가 죄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인계를 구할 것이다. 설령 이 보물들이 모두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
그 말이 옳다.
옳게 쓰이지 못하고 찬양만 받는 보물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부서지더라도 세상을 구할 수만 있다면 훨씬 더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극락정토의 수장이신 아미타께서 이런 행동을 용서할까?
고뇌에 빠진 비사를 온화한 눈길로 바라보던 천수가 그 손을 잡아 이끌어 펼쳤다.
툭.
힘없이 딸려 간 비사의 손에 올려진 것은 그녀가 요와 귀를 도륙하던 금강저였다.
만마를 티끌처럼 부순다는…… 극락정토의 보물.
“이걸 왜 제게?”
비사가 황당해하며 물었지만, 천수는 그저 웃으며 손을 이끌어 금강저를 꼭 움켜쥐게 했다.
“옴…….”
“지, 진언을? 자, 잠깐만요, 천수 님!”
금강저를 든 비사의 손을 꼭 쥐고 눈을 감은 천수가 외는 것은 진언(眞言)이었다.
신들의 언어, 인간들에게는 불도를 닦고 죄를 사함받고자 하는 염원의 주(呪)이나, 신들에게는 힘을 일깨우고자 하는 주였다.
“……움, 사바하.”
“……!”
당황한 사이에 진언이 끝을 맺는다.
우우웅!
동시에 비사의 손에 들린 금강저가 요동치듯 떨리며 환한 빛을 뿜어냈다.
“아, 안 돼!”
비사가 다급히 거부해 봤지만, 이미 빛이 쑥 하고 그 몸에 빨려 들어간 뒤였다. 금강저의 기운이 비사의 몸에 스민 것이다.
그리고 그걸 바라보던 천수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제 너도 공범이야.”
“…….”
“이를 테면 가서 일러. 한편이라고 바득바득 우겨서 같이 죄를 받고 말 테니까.”
“…….”
소, 속았다.
인계를 구원하지 않으면 보물이 다 무슨 소용이냐며 정신을 흩트려 놓고는…… 강제로 법구를 자신에게 흡수시킬 줄이야. 어떻게 미쳐도 이렇게 악랄하게 미칠 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젠 변명도 안 통할 듯싶었다.
누구도 가져서는 안 될 극락정토의 보물이 몸 안에 스며 버렸으니, 돌아가 변을 한다고 누가 믿어 주겠는가?
“자, 이제 그만 가자, 비사.”
“……하아.”
천수의 말에 비사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허망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모든 것이 팔자대로 흐른다지만 어쩌다 제 운명이 이리도 기구해졌는지. 이젠 피할 수 없다.
보물도 뭐…… 이왕지사 훔쳐 온 김에 좋은 곳에 쓰면 그만이다. 나중에 벌이 내려지겠지만.
“응? 어딜 보는 거야?”
“예?”
평소 그녀의 성격을 알고 있었던 터라 빠르게 체념한 비사가 무당산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천수가 짜증스럽게 고개를 꺾었다.
“방향이 틀렸어.”
“……?”
황당했다.
방향이 틀리다니? 가자면 응당 무당산으로 가야 하지 않는가?
청상선인이 신령터로 잡은 곳으로 가서 천계에서 올 지원군을 기다려야 함이 당연한데, 천수는 전혀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수 님, 그쪽은 무당산이 아닌데…….”
“알아.”
“……아는데 왜?”
“처음부터 이쪽이었어.”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머금는 것이, 몹시도 불안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저런 음흉한 미소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비사와는 달리, 천수는 확고했다.
가야 할 곳은 무당산이 아니다.
바로 지계의 마왕 사타의 터.
그곳에 자신이 찾고 있는 인물이 있기 때문이다.
천계를 떠나기 전에 틈을 지키고 있던 선인을 통해 이미 그 행방을 알아 두었다.
“……진무, 너 이 새끼.”
“……?”
멀리 운무로 가득한 산자락을 노려보는 천수의 입에서 나온 이름…… 진무?
비사는 의아해했지만, 그 이름이야말로 천수가 인계로 온 이유였다. 아니, 애초에 미친 듯이 불법에 매진하여 천계에 올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녀의 생전 이름은 당세령.
진무가 죽은 뒤, 아버지인 당위에게 강제로 잡혀가서 머리 깎고 아미파의 비구니가 되었다.
세상이 허망했다. 수많은 번민에 시달렸다.
하지만 다행히 불법에 심취해 마음이 편안해졌고, 극치에 이르러 극락정토에 오게 되었다. 이런저런 자리들을 거치고, 극락정토의 촉망받는 유망주로서 관음의 제자가 되었다.
그 높은 뜻을 이어받기 위해, 말하지 않고 듣지 않으며 보지 않는다는 삼불(三不)의 수련을 시작한 그녀였다.
신마전쟁이 시작되고, 천계가 문을 걸었으며 인계가 고통받았지만, 그녀는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 모든 것에서 초탈해야만 상제에 오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천계를 들썩이게 한 이름 하나가 만사를 등진 그녀의 귓가에도 닿았다.
진무.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천수는 당세령이 되었다.
잊었던 연들을 새록새록 떠올리며, 수련을 멈추…… 아니 때려치웠다. 지금 그딴 게 중요한가? 다른 이도 아니고 진무라는데? 그렇게 매달렸는데…… 혼례도 안 해 주던 그놈 소식을 들었는데!
사실 진무가 등선했을 것이라고 예상조차 못 했다.
미리 알았다면 당장에 선계로 찾아갔을 것이다. 불가의 특성이 원체 속된 것과의 인연을 멀리하는지라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이 크나큰 실수였다.
하지만! 이제 상관없다.
불선이면 뭐?
이 경우엔 곧바로 환속(還俗)이지.
보자마자 알아보라고 가발까지 준비해서 쓰고 왔다. 입은 옷도 생전에 입던 녹의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꿈을 이루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 방해꾼들부터.
멀리 산 어림을 바라보는 천수의 눈빛이 살기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마귀 놈들. 니들 큰 실수한 거다.
인계 따위를 손에 넣자고 관음의 제자로서 잠자던 나를 깨워?
내가 니들 조지려고 극락정토의 보물이라는 보물은 전부 챙겨 나왔다. 힘이 모자라니 다른 걸로 채우려고.
이제부터 똑똑히 보여 주마.
이 구역에서 가장 미친 게 누군지.
“크핫핫핫핫! 나는 당세령이다!”
“…….”
별안간 터져 나온 앙천광소에 비사가 화들짝 놀라 눈치를 살폈다.
당 뭐?
저거, 진짜 미친 건가? 어찌 불선이 속세에 머물 때의 이름으로 돌아가려 한단 말인가?
와중에 저 눈빛…… 살기는 물론이거니와 속된 감정이 가득한…….
“가자! 비사! 지계의 악적들을 쳐부수자!”
“…….”
“지금부터 사타의 터까지 휴식 없이 달릴 것이다! 크핫핫핫!”
막을 틈도 없이, 당세령이 금빛 광채를 내뿜는 꼬리를 단 채 내달렸다.
비사는 그 꼬리마저 불안했다.
* * *
사륵, 따악!
가만히 앉아 있자니 몸이 찌뿌둥했는지, 진무가 폭풍 같은 마귀의 틈새를 여유롭게 노닐었다.
따악, 딱!
내키는 대로 가볍게 휘둘러진 막대기에 얻어맞은 마귀들이 재처럼 흩어져 바람에 날린다.
괴와 요, 귀들이 악착같이 덤벼들었으나 남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협비의 도움이 컸다. 그들이 없었다면 넘치도록 많은 수에 꽤 고전했을 것이다.
이미 신령들이 법진을 만들어 지계와 통하던 틈을 막은 뒤라 마귀들의 수는 더 늘지 않았다. 사타의 터는 봉인된 것이다.
“사숙!”
“음, 끝났느냐?”
“예.”
“그럼 이제 다음 장소로 가자. 멀지 않은 곳에 혼천의 터가 있다고…… 어?”
별안간 진무가 멈칫하며 다급히 자신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 팔에 오소소 돋은 소름을 본 청상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어찌?”
“무, 무언가 오고 있어.”
“예? 그게…… 서, 설마!?”
청상이 눈을 힘껏 부릅떴다.
조화의 힘을 깨달아 신들에 근접해 버린 진무의 기민한 감각을 일깨우고 소름마저 돋아 오르게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마왕입니까!?”
“……으음.”
청상의 질문에 진무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 그놈들도 오고 있겠지.
지들이 강림해야 할 터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데다, 협비가 자신에게 종속되었다는 것쯤은 이젠 알았을 터.
열이 잔뜩 받았으니 안 오면 이상하다.
하지만…… 이 소름은 뭐랄까, 그보다 훨씬 더…… 본능적인 것에 가까운…… 뭔가 몸서리칠 정도로 귀찮은 느낌?
아, 불안한데?
귀모가 오고 있는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