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78
78화
삼 층으로 지어진 거대한 전각에 내리쬔 해가 만든 짙은 그늘이 연무장을 가득 채웠다.
그 그늘의 끝.
담벽 근처에 담녹색 비단옷을 입은 노인이 정성스럽게 땅을 고르고 있었다.
벽을 따라 둘을 이은 두 줄기의 고랑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고랑마다 각종 채소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이런, 이런.”
노인은 그중 하나가 힘을 잃고 시들시들한 모습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뿌리가 약한 녀석이었는지 물기를 빨아들이지 못해 볕에 말라 버렸다.
“옆의 놈들이 남의 것까지 죄다 빨아 먹었나 보구나.”
노인이 시들한 녀석 옆에 왕성하게 잎을 피운 채소들을 째려보았다.
고작 채소인데 그 눈빛에 진한 살기마저 서린 듯했다.
“아이구, 대인. 또 이러고 계십니까요?”
지나다 노인의 모습을 본 아낙이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달려왔다.
“아, 치삼 애미 왔는가?”
노인이 얼굴에 주름이 지도록 밝게 웃자 아낙이 한숨을 쉰다.
“대관절 ‘아’가 뭡니까요. 어서 일어나세요. 누가 보면 어쩌시려구요.”
“허헛, 이 사람아. 누가 나보고 뭐라 한다고.”
“뭐라 합니다. 대인 보곤 아무도 말을 안 하지만 저희 아랫것들에게 손가락질한단 말입니다.”
“엥? 어떤 놈이 말인가!”
노인이 짐짓 화를 내듯 매섭게 주위를 노려보았지만 아낙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다요. 전부 다요.”
“이 사람, 흰소리 말게. 내 집에서 내가 뭘 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노인이 장난스럽게 웃자 아낙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노인은 과거 대학사를 지낸 인물이다.
정쟁에 밀려 초야에 묻혔으나 그 선정이 하늘에 닿아 세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자였다.
성주가 그의 이름을 흠모해 직접 찾아와 가르침 받기를 청해도, 성도를 쥐락펴락하는 무가에서 만나 보길 청해도 초야에 묻힌 야인이라며 거절할 만큼 그 위세가 높았다.
하지만 그 성정이 소탈한 것은 물론 인정이 많은지라 자신이 가진 드넓은 대지를 소작농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기근이며 홍수 때마다 구휼미를 풀었기에 상관평의 집 인근 삼백 리에 굶는 자가 없다 했다.
그러면서도 삼백 리 밖의 흉작을 걱정하니 그에 대한 존경심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저 보게. 불쌍치 아니한가?”
“뭐가요?”
노인을 억지로 끌고 대청에 앉아 과일을 깎고 있던 아낙이 의아하게 물었다.
“저 중간에 있는 놈 말일세.”
“…….”
“옆에 있는 망할 놈들이 물기를 죄다 뺏어 갔어. 나누어 먹으면 좋으련만 욕심도 많지.”
하여간 인정도 많다.
이제는 한낱 채소에게까지 안타까움을 드러낸단 말인가?
“아휴, 대인 어른. 세상이 다 그런 것을요. 잘난 놈이 있으면 못난 놈도 있고, 힘센 놈이 약한 놈 것을 뺏어 먹는 것이 세상 아닙니까?”
“엥? 이 사람 어딜 가서 몇 자 배운 모양일세?”
노인이 짐짓 놀라는 표정을 하자 아낙이 으쓱하며 웃는다.
“서당 개 노릇이 삼 년이 넘었는데요.”
“응? 하핫. 제법일세. 제법이야. 이거 무지렁이 아낙이라 무시할 게 아니야. 말에 제법 현기가 있어.”
“과찬이네요.”
노인의 말이 농임을 아는 아낙이 피식 웃었다.
“참 안타까운 세상이 아닌가? 다들 저리 시든 놈을 솎아 내지만 실상은 저리 뺏어 먹는 놈을 솎아야 하는 것이지.”
“그랬다간 다 굶어 죽겠죠.”
“그런가?”
“암요. 시든 놈은 어차피 죽을 놈인데 그놈 살리자고 실하고 좋은 놈을 솎아 버리면 뭘 먹는답니까?”
“그렇구만. 자네 말이 정답일세. 하지만 말이야. 저 옆의 놈을 솎아 사람들에게 나누면 다들 배부르고, 시든 놈도 살아날 수 있지 않겠는가?”
노인의 말에 아낙이 그도 그렇다면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대인.”
“응?”
“채소 걱정만 하지 말고 제 걱정도 좀 하시면 어떨까요?”
“뭐가?”
그의 물음에 아낙이 물끄러미 담녹색 비단옷을 바라본다.
“…….”
흙이 묻어 지저분하다.
빨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은 눈앞에 있는 치삼 어미의 몫이 분명하다.
“정말 하루에도 몇 벌씩 빨아야 한다구요. 차라리 옷을 더 사시든가 하시지, 몇 벌이나 된다고.”
“음, 아…… 미안하네.”
“그리고 제발 좀 체통을 지키세요. 마님 돌아가신 후로는 잔소리를 하실 분이 없으니 원.”
“허허.”
“허허가 아니구요! 대관절 이 위세 높은 전각에 밭이 웬 말입니까! 그리고 저런 일은 아범에게 맡기세요.”
“아니, 소일거리를…….”
“어르신!”
“…….”
빽하고 소리를 지르는 치삼 어미의 표정에 노인이 입을 다물었다.
꼭 잔소리 듣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성격이 여실히 드러나는 모습이었기에 지나며 그 광경을 보는 사람마다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근방에서 가장 위세 높은 사람이지만 허드렛일을 하는 아낙과도 스스럼없이 지내는 그였다.
“자, 이제 들어가서 옷 벗어 주세요.”
“아니, 아직 입을 만…….”
“어서요!”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눈을 찌푸리는 통에 노인은 ‘허참.’을 연발하며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치삼 어미가 돌아가고 난 것을 확인한 그는 몰래 텃밭으로 다시 나왔다.
그리곤 시든 채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삼궁주님.]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
분명 그곳에는 노인뿐이었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목소리는 선명하게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귀신이라며 놀랄 법도 하건만, 노인의 표정은 너무나 담담했다.
[형주의 일이 실패했습니다.]“……!”
그 말에 노인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팬다.
“꼬리를 밟혔더냐?”
[아닙니다. 우청이 죽었으니 꼬리는 밟히지 않을 것입니다.]잠시 말을 멈춘 노인이 무언가를 고민했다.
“아이는?”
[정무맹에서 조사 중입니다.]“양소방이냐?”
[아닙니다. 누구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허공 중의 목소리에 송구함이 느껴져 왔다.
“죄송할 필요 없다. 실수도 할 수 있는 게지. 다른 아이로 대체하면 될 일이다.”
[하면 정무맹에 있는 아이는 어찌할까요?]“…….”
노인의 걸음이 채소께로 다가갔다.
“죽여야지.”
허공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잠시 끊어졌다.
“주저되느냐?”
[아닙니다.]“새로운 세상을 위해 희생되는 것이다. 불쌍하다 해도 반드시 흘려야 하는 피가 있는 법.”
[알겠습니다.]둘 사이에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양의를 찾는 일은 어찌 되어 가느냐?”
[여전히 행적이 묘연합니다.]“그것은 반드시 찾아야만 한다.”
[알고 있습니다. 일단 무혈(無穴)의 행방을 찾았다고 하니 그것만 확보되면 청성의 비밀은 풀릴 것입니다.]“무혈은 누가 가지러 갔더냐?”
[적해가 가지러 갔습니다. 확보되는 즉시 청성에 잠입해 있는 귀영(鬼影)에게 전달하라 전했습니다.]“알겠다. 하면 대랑에게 지원하라 해야겠구나.”
[예? 대랑께요?]“음.”
[혹, 대랑의 휘하에 있는 청랑대도 움직인 것입니까?]노인은 무언으로 긍정했다.
[삼궁주님. 허나 그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대규모의 인원이 움직이면 당가가 눈치챌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만에 하나 그들과 마찰이라도 생긴다면.]“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물건이다. 혹여 당가와 청성을 피로 씻는 한이 있어도.”
[삼궁주님.]“그만 돌아가 보거라.”
[……예.]허공의 목소리는 대답을 끝으로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노인의 시선은 물끄러미 채소를 바라보았다.
“머지않았다. 새로운 세상이. 그때가 되면.”
뿌드득!
시든 놈 옆의 채소 두 개가 뿌리째 뽑혔다.
먹기에도 충분할 만큼 체구가 불어난 녀석이라 숙수에게 가져다주라 할 만도 한데 노인은 고민 없이 발로 짓밟았다.
“이놈이든 저놈이든 그저 세상에 백해무익한 놈들에 불과하다.”
짓밟힌 채소가 그의 발에 으깨져 흙투성이로 변했다.
“세상의 고름 같은 놈들. 기다려라. 세상의 환부와 같은 네놈들을 모조리 도려내 줄 터이니.”
초야에 묻힌 이후에도 그 인덕으로 칭송받는 대학자.
짓밟아 으깬 그의 두 눈에 어울리지 않는 핏빛 살기가 가득했다.
* * *
콰아아아.
거대한 물줄기가 시원스럽게도 흐른다.
예로부터 통천하(通天下)라 불리운 강.
청해성에서 발원해 구만 육천 리를 지나 여덟 성을 아울러 굽이치는 거대한 물길은 강소성 끝자락에서 대해로 빠져나간다.
그 사이사이 갈래가 각지와 연결되어 흐르니 가히 천하로 통한다는 말이 적절했다.
그곳은 중원의 역사와 더불어 흘러 왔고, 만들어질 미래와 함께 흘러가는 장강(長江)이었다.
정무맹이 무한에 위치한 이유도 이 장강의 흐름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로를 타고 중원의 각지로 물자와 사람을 나를 수 있으니 더없이 좋은 곳이라 할 만했다.
무한에서 배를 띄워 장강에 오르면 청해까지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곳이 있다.
중원의 중심 호남성 끝자락의 거대한 호수.
바로 동정호(洞庭湖)가 그것이다.
장강이 천하제일의 대천이라면 동정호는 천하제일의 호수였다.
그곳은 중원의 중심을 관통한 기다란 줄기에 달려 진한 단내를 풍기는 과실수처럼 지나는 모든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사시사철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중원의 모든 상단과 표국이 거쳐 가는 강호의 중심.
호수의 연안을 따라 즐비한 객점과 주루가 수백에 달해 그것만으로도 일성이라 불릴 만했고, 휘황찬란한 불빛이 밤낮을 가리지 않으니 불야성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곳에는 주인이 없었다.
그것은 암묵적인 약속과 같았다.
정사의 무림 모두가 욕심내고 있으나 누구도 차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막대한 이권이 몰려 있는 그곳은 오랫동안 강호인들이 탐욕스럽게 욕심을 내어 온 각축장이나 다름없었다.
강호의 은자들이 가장 많이 기거하고 수많은 정사의 문파들이 자신의 분파를 자리 잡게 한 곳.
하루가 멀다 하고 사건 사고가 일어났지만 그곳을 차지하려는 대규모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곳은 무법의 대지이자 가장 치안이 강한 법치(法治)의 대지였다.
동정호 외곽 우시장 뒷골목.
소와 돼지를 비롯한 가축이 거래되는 곳이기에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도려내는 도축장이 가득했다.
툭! 처억! 탕탕! 사각, 사각.
커다란 도마 위를 누비며 고기를 써는 두툼한 칼.
직사각 반듯한 칼질에 큼지막한 소 갈빗대가 잘리고 순식간에 뼈와 살이 분리되어 서로 다른 광주리에 나누어 담겼다.
“이야!”
능숙한 손놀림에 고기를 받으러 온 더벅머리 소년, 우칠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칼을 잡은 손은 쉬지 않았다.
“정말 동정호 근방 소백정 중에는 형님이 최고라니까요?”
“…….”
“아니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몸을 하고 소 한 마리를 그리도 쉽게 발골(發骨)해 내시는지.”
우칠은 묵묵히 자신의 일만 하는 사내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발골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짜 맞춘 듯이 덥수룩한 수염에 여인의 허벅지만 한 팔 근육을 가지고 있다.
그 덩치도 웬만한 사람 둘은 될 정도로 크다.
그런데 눈앞의 사내. 백표.
애처롭다는 말이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표현을 하자면 말랐다.
그것도 뼈만 앙상해서 그 커다란 칼을 들게 하는 것도 미안할 정도였다.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이고 초점 없는 눈동자로 걷는 모습을 보면 누가 툭 건들자마자 뼈가 와그르 쏟아질 듯하다.
더욱이 퀭한 눈동자에 숨은 또 왜 그리 가쁘게 쉬는지.
몇 걸음 걷다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모양새였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발골은 기가 막히게 잘한다.
그저 들고 있을 때는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다가 발골이 시작되면 마치 칼춤 추는 무희(舞姬)처럼 변한다.
수천 마리의 소를 해체하고도 그 칼이 여전히 날카로움을 유지했다는 전설적인 소백정 포정(庖丁)이 환생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이무후입무간(以無厚入無間).
즉, 두께 없는 얇은 칼로 소의 골절 사이 틈새를 헤집고 다닌다.
백표의 칼질은 딱 그 모양새였다. 소뼈에 그 흔한 칼집 하나 내지 않고 발골을 끝냈다.
탁!
“다 됐다.”
“와! 진짜 빠르네요.”
우칠의 감탄에 칼을 놓은 백표는 힘겹게 주저앉아 갸르륵 소리가 나도록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