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Dragon Teacher RAW novel - Chapter 118
118화
모용헌과 남궁란은 뒷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허윤에게서 느껴지는 싸늘한 기운에 주눅이 들었다. 무림인에게서 느낄 수 있는 감각과는 또 달랐다. 일종의 ‘신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세 개가 전부 뒷면이 나오는 경우도 흔치 않을 텐데…….”
모용헌이 잠깐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가 물었다.
“허 형은 결과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습니까? 동전을 던지기 전부터 마음에 걸린다고 하셨으니.”
“글쎄…… 사실 평소에는 일의 시작부터 결과까지 연속으로 점을 치지는 않소. 중요한 일처럼 보이고, 또 어딘가 미심쩍은 데가 있어 다시 해 본 것이지.”
남궁란이 물었다.
“가지 않아야 한다는 건 무엇 때문인가요? 역시 위험해서 그렇겠죠?”
“위험해서일 수도 있고, 그 사람을 찾지 못한다는 뜻일 수도 있소. 혹은 가지 않는 게 더 이로운 경우라서 그럴 수도 있소이다. 꼭 나쁜 뜻만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오. 한데…….”
사실 허윤은 조금 이상했다. 어떤 일 때문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요즘 그냥 툭툭 내뱉어도 신기하리만치 잘 맞았던 걸 생각해 보면 정말로 의아한 일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점을 쳐 보아도 달리 뭘 더 알아내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일전에 부정원을 크게 느꼈을 때와 비슷했다.
‘정말로 요즘 왜 이러지?’
하나 모용헌과 남궁란은 약간 멋쩍어하면서도 수긍했다.
“그렇군요. 꼭 위험해서만은 아니라…… 잘 새겨듣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허 소협께서 말씀하신 대로 해야겠어요.”
그러면서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둘을 본 허윤은 왠지 그들이 자기 말을 따를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파심일지 몰라도, 두 사람은 내 말을 따라 주었으면 좋겠소이다.”
모용헌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그렇게 할 것이니 허 형은 우리를 너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 그럼…… 복채를 꼭 받으신다고 들었는데, 저희가 잔돈은 없고…….”
“허 소협은 과하게는 받지 않으세요.”
악영이 미리 챙겨 왔는지 육십 문을 대신 내주었다.
“하하, 소문이 다 사실이었군요. 정말로 욕심이 없으시다더니. 허 형, 존경스럽습니다.”
“그거 다 거짓말이오.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딨겠소이까.”
“세상 사람들이 다 허 형 같기만 하면 분란도 싸움도 없을 겁니다.”
껄껄거리는 모용헌의 웃음소리가 예민해진 허윤의 골을 울렸다.
허윤이 호리병을 들었다.
“잠시, 한 모금만 하겠소.”
모용헌이 약간 과장된 어조로 말했다.
“엄청 독한 주향이 나는 걸 보면 허 형도 술꾼이구려. 그러지 말고 우리도 같이합시다. 괜찮겠지요?”
모용헌이 악영에게 눈짓으로 부탁했다.
“그래요. 원래 모임에는 술이 필요하죠. 일단 점괘는 잠깐 미뤄 놓고요.”
허윤은 그렇게까지 하려는 생각이 없어서 거절하려 했다.
“아니,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이건 그냥…….”
* * *
빈 술병이 순식간에 늘어 갔다.
허윤은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지만, 사실 호사가들 사이에서 그는 신비로운 신진고수로 알려져 있었다.
사문도 무공 내력도 알 수 없는데 실력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대단하고, 점술도 거의 신기에 가까웠다.
모용헌과 남궁란이 호감을 갖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직접 만나 보니 말투는 희한한데 외모는 병약한 서생의 모습이라 더 호기심을 자극하는 부분이 있었다.
허윤도 모용헌과 남궁란에게 작은 호감이 생겼다. 어리지만 강호의 정세에 관심이 많고, 그 안에서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 청년들이었다.
허윤도 그 나이에는 그렇게 열심히 살고 꿈도 있었다. 서른이 넘어가면서부터는 포기했지만.
적잖이 취한 모용헌이 한숨을 크게 내쉬며 물었다.
“그래서…… 사천은 정말 안 되겠습니까?”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점괘로 나온 그게 다요. 다만, 변할 수 있는 부분은 있소이다. 아까는 북서 방향에 있었으나, 지금은 또 다른 곳에 있을 수 있소.”
악영이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하지만 허 소협의 말도 일리가 있어요. 섬서성에는 화산파와 종남파가 있으니까.”
“그렇소?”
“성도인 서안을 중심으로 칠 할은 마도가 점령했지만, 나머지 삼 할은 여전히 화산파와 종남파가 지키고 있지요.”
“그러니까 그쪽에 도움을 청하려고 갔을 수도 있다는 거구려?”
“그럴 가능성도 있을 거예요.”
악영이 갑자기 툭 던지듯 물었다.
“허 소협은 만약 제가 마도에 잡혀가면…… 절 구하러 와 주실 건가요?”
모용헌과 남궁란이 눈을 가늘게 뜨고 휘파람 소리를 냈다.
허윤은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으나 확실히 선을 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악영이 상심하지 않도록 좋은 말로 달랬다.
“최선은 다해 볼 것이오. 하나 나는 백도맹에 계약되어 있어서 함부로 운신하기 어려운 입장이니, 부디 잡혀가지 마시오.”
악영은 허윤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핏, 하고 입술을 삐죽인 뒤 술잔을 기울였다.
모용헌과 남궁란이 야유했다.
“우리 악영 누이의 어디가 어때서 그리 철벽을 치십니까.”
“에이, 정 없네요. 술이나 마셔요.”
남궁란은 술을 할 줄 모른다고 모용헌에게 자기 술을 다 몰아주었다. 모용헌은 거절하지 않고 넙죽넙죽 다 받아 마셨다.
술자리가 깊어 갔다. 허윤은 세 사람이 나누는 무공에 대한 얘기와 강호의 정세를 잘 귀담아들었다. 그중에는 쉽게 접하기 어려운 고급 정보들도 있었다.
술에 취했지만 열띤 토론을 하기도 했다.
허윤은 잘 모르는 분야라 조용히 듣기만 했다.
그런데도 그들 사이에 그러고 있으려니 왠지 자기까지 이십 대로 돌아간 듯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잃었던 꿈과 열정이 조금씩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지난번에도 그랬고, 오늘도.
* * *
“오늘은 영 시원찮구먼. 육단금을 넘더니 해이해졌어? 술 마시고 놀고. 잘한다. 족자는 또 어디에 두고 왔나?”
낙락이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는 허윤을 보고 질책하듯 말했다.
허윤은 크게 말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저 어딘가 서운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냥. 후회하지 않으려 하는데도 자꾸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왕 사는 거 좀 더 열심히 살았으면 좋았을걸.”
“그랬으면 자네는 나를 만나지 않았겠지. 불성실하게 살아서 온몸에 독소를 가득 채우고 나를 만나게 된 게 아닌가.”
“맞습니다.”
그래서 도진이도 만날 수 있었다. 지켜 내지는 못했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안 되겠군그래. 전혀 집중을 못 해. 오늘은 그냥 쉬게.”
허윤은 낙락에게 공손히 읍을 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낙락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 *
다음 날, 허윤은 모용헌과 남궁란 둘이 일찌감치 떠났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허 소협께 감사했다고 전해 달랬어요. 고맙지만 우선은 원래 계획대로 사천으로 가 보고, 그 뒤에 섬서로 넘어가겠대요.”
“말려도 들을 것 같지 않더라니, 결국은 그리로 가 버렸구려.”
악영이 한숨을 쉬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나 봐요. 어쩐지 점괘 얘기를 더 안 하더라니. 그런데 왜 나는 빼놓고 둘만 갔을까요…….”
악영이 허윤에게 부탁했다.
“두 사람은 저와 친한 친구예요. 뭔가 도울 길이 없을까요?”
“나는…….”
허윤도 두 사람의 모습이 떠올라서 안타까웠다.
하지만 청성파도 그렇고, 모용헌과 남궁란도 그랬다.
허윤이 아무리 점을 치고 앞날을 내다보아도 소용없었다.
허윤의 힘이 닿지 않거나, 본인들이 거부하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허윤이 그들을 일일이 쫓아다니면서 뜯어말리고 도와줄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렇게 온 세상 사람들에게 다 오지랖을 피우는 건 불가능…….
어?
불현듯 허윤은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 제발 도와주시오, 제발.
― 나라에서도 돌봐 주지 않는데 누가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서 주겠소이까! 뒷배경도 없고 인맥도 없는 우리를 누가 도와주겠냔 말이오!
― 살려 주십시오. 제발 내 아들 좀 살려 주십시오. 어르신께서는 정파의 협객이심이 분명하니, 제발 좀 도와주십시오!
가슴 한편이 내려앉는 듯했다.
그건 도진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허윤이 온갖 사람들에게 부탁했던 말들이었다.
허윤에게는 절절한 절규였지만, 그들에게는 그저 일일이 도와줄 수 없는 남의 일에 불과했다.
지금 허윤이 다른 사람들을 일일이 어떻게 돕냐고 생각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도윤을 그렇게 생각했으니.
허윤은 울컥했다.
“모두를 살릴 수는 없소. 하지만 나와 연이 닿은 사람마저 내치면 안 되겠소이다.”
“허 소협?”
허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제 두 사람에게 가지 말라고는 했지만, 실패할 거라고는 하지 않았소. 왜 가지 말라는 점괘가 나왔는지 알아봐야겠소.”
허윤은 급히 점을 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얼마 되지도 않아, 갑자기 악가장의 시비가 허윤에게 달려왔다. 시비는 놀라서 말까지 더듬었다.
“허, 허 소협! 허 소협을 찾는 사람들이!”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단의 사람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허락도 받지 않고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무인들 여럿이었는데, 허윤은 한눈에 그들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어제 보았던 모용헌과 남궁란의 복장과 거의 똑같았기 때문이다.
하나 허윤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손가락으로 그들을 가리키며 냉엄하게 소리쳤다.
“들어오지 마시오!”
모용가의 사람들이 멈칫했다가 한 명이 눈에 불을 켜고 허윤을 쳐다보았다.
악가장의 사람들도 뒤늦게 찾아왔다.
그들이 두 가문의 사람들을 말렸다. 순식간에 방 밖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악가장의 가주 악정후가 사람들을 물리도록 했다.
“모용강 대협, 남궁철기 대협. 아무리 급해도 순서가 있소이다. 여기 이 소협은 우리의 손님이니 함부로 찾아와 무례하게 하면 안 됩니다.”
원래 아는 사이인 듯, 모용강이 악정후를 마주하자 자연스레 포권을 했다. 그러나 적잖이 화가 났는지 좀처럼 언성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어제 분명 이곳에 들렀다고 했소이다. 그리고 저 방사와 만났다잖소! 당최 저자가 무슨 말로 꾀어냈기에 내 조카가 일언반구도 없이 떠났는지 알아야겠소이다.”
남궁철기도 말했다.
“분명히 임무는 철회됐고 돌아오라고도 전했소. 우리 란이는 어른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굴 아이가 아닙니다.”
악정후가 무거운 표정으로 답했다.
“두 분의 심정은 이해하나, 어제 두 아이하고는 나도 인사를 했소이다. 이곳으로 오던 중에 임무가 철회됐으니 우리 영이와 가볍게 인사라도 하라고 내가 허락하였소. 그러니 책임이 있다면 내게 말하시오.”
“악 가주!”
“책임은 됐으니, 우리 애들이 어디로 갔는지 그것만 알려 주시오!”
그때, 허윤이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게 말했다.
“세 분만 들어오십시오.”
모용강이 성큼 들어왔다.
“자네인가? 자네가 대체 내 조카에게 뭐라고 했기에 아이들이 여태 돌아오지 않는 게야.”
남궁철기도 악영을 나무랐다.
“영이 너도 동조했느냐? 저 정체도 모를 자의 말만 믿고!”
그때, 허윤이 손을 들었다.
“잠시 괜찮다면 제가 몇 가지만 좀 여쭙겠습니다.”
그러자 모용강과 남궁철기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허윤을 쳐다보았다.
“네가 우리에게 여쭐 일이 아니라 우리가 네게 물어야 할 일이다!”
허윤이 순순히 대답했다.
“그럼 물어보십시오.”
“우리 아이들은 어디로 갔느냐.”
“사천으로 갔습니다.”
“지금 사천이 어떤 지경인 줄 알고! 대종사의 수하들이 온통 깔려 있어서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다!”
“두 사람은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걸 알고도 결정한 일입니다.”
허윤은 고개를 끄덕이곤 성이 나 있는 모용가와 남궁가의 이들을 보며 되물었다.
“두 사람은 왜 사천으로 가려 했습니까?”
“뭐?”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냐!”
허윤이 팔괘판의 점괘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사천으로 간 건 두 사람인데, 점괘를 보니 세 사람입니다.”
그 순간, 모용강과 남궁철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허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은 것이다.
“한낱 방사 따위가 명성을 좀 얻었다고 보이는 게 없구나!”
“함부로 아무 소리나 내뱉다니.”
허윤은 딱히 화가 나진 않았다. 그도 한 아이의 아비로서 아이가 없어졌을 때의 절망감을 절절히 느껴 보지 않았던가. 아마 저들의 눈엔 지금 제대로 뵈는 게 없을 터.
하나 그렇다고 이대로 그냥 둔다면 언제까지고 소란스러울 것이다.
따 악!
해서 허윤이 팔괘판을 탁자에 힘껏 내려놓으며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조카들을 찾으러 오셨으면 점괘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시고, 분풀이하러 오셨으면 거기 가주님께 하십시오.”
악정후가 흠칫하며 허윤을 힐끗 보았다.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는 투로 말은 했지만…….
모용강과 남궁철기가 발끈했다.
“우릴 놀리는 건가!”
하지만 허윤은 진지했다.
“중요한 점을 준비 중이니, 방해하지 마시란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