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Dragon Teacher RAW novel - Chapter 272
272화
출발을 점검하는 사이 이진휘는 백룡회에 가입한 이들에 한해 회비를 걷었다.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놨다면서 굳이 돈을 받느냐!’ 항의를 할 법도 하건만, 그런 사람은 전혀 없었다.
허윤이 돈 계산에 철저하기로 유명한 데다가 백룡회의 분위기가 워낙 압도적이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압도적으로 괴상했다.
방금도 도귀가…….
“본인은 폭력을 매우 멀리하는 사람일세. 협상으로 다 해결이 가능하지. 하니 나와 함께 다니려면 날붙이를 꺼내지 말게. 아니, 아예 한 사람에게 맡기지.”
그러면서 번산을 시켜 칼을 비롯한 온갖 무기를 걷어 간 것이다.
대신 목검 같은 걸 나눠 주었다.
심지어 자기는 도경을 두께별로 잔뜩 챙겼다.
이래도 되나?
마도며 사파가 득시글거리는 데를, 무기도 없이?
졸지에 창날을 빼앗긴 양가장의 양걸이 조심스레 말했다.
“대선배께 여쭙기 죄송스러우나, 사마의 고수들을 상대로 목검과 목봉은 아무래도…….”
“껄껄껄. 그래, 의심스럽나? 그럴 수도 있지. 한데, 나 도귀야. 내가 있는 이상 누구도 백룡회원들에겐 손을 댈 수 없네.”
그 말에 백룡회에 가입하지 않은 이들은 더 불안해졌다.
아까는 백룡회 아니어도 된다고…….
하여 십여 명은 결국 포기하고 돌아갔다.
다른 방법을 모색하려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스무 명 가까이가 도귀와 남아 있었다.
“자. 우리는 인원이 많으니 먼저 출발함세. 이진휘 부총관, 이리저리 챙겨 주어 고맙네.”
그러곤 마치 문파의 대선배가 뭇 제자들을 이끌고 유람을 하듯 느긋하게 떠났다.
“저희도 가겠습니다, 형님.”
장용과 쾌도, 대홍랍강, 용우가 떠나고, 호천도 별다른 얘기 없이 눈짓으로 인사만 하고 떠났다.
“그럼, 우리도 슬슬 움직여 보세.”
허윤과 공세연, 명승기와 남궁민, 진승과 서덕이 모두 한 조였다.
고우사와 이진휘, 약왕이 손을 흔들며 그들을 배웅했다.
고우사는 정말로 허윤과 함께하기가 두려웠다.
* * *
남궁민은 아무래도 공세연과 친해지고 싶은지 그쪽으로 다가갔다.
“언니, 무정화(無情花) 맞죠. 최근 활약이 대단하시다고 들었어요.”
공세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간결하게 대답했다.
“고맙군요.”
“소문보다 표정이 굉장히 밝으신데요? 그래서 처음엔 무정화 언니가 아닌 줄 알았어요.”
약간 뒤처져 걷고 있던 허윤이 물었다.
“응? 별호가 무정화였소?”
진승이 대답했다.
“저희 또래이신 걸로 아는데, 요즘 활약이 굉장하고 또 미인이시기 때문에 젊은 무인들로부터 인기가 많으십니다. 하지만 말수가 적고 냉랭하여 섣불리 다가가기 어려운 편이라 무정화라 불리고 있습니다.”
어쩐지 허윤이 알고 있는 공세연과는 다른 인물인 듯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나마 허윤을 챙겨 준 게 공세연이었는데.
공세연이 힐끗 허윤을 보더니 좀 더 빠르게 속도를 높였다.
“앗, 언니. 같이 가요.”
남궁민이 따라갔다.
한편, 형산파의 명승기는 뒤에서 중얼거리며 따라오는 서덕이 못내 궁금했다.
“귀하께서 정말 장강용왕이 맞으시오?”
서덕은 귀찮은 표정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귀하가 장강용왕이라면 마도와 손을 잡은 강호의 공적이오. 한데도 이렇게 우리와 함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걷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소이다.”
명승기가 표정을 굳히고 던진 말에, 서덕은 물끄러미 명승기를 바라보다가 쯧쯧 하고 고개를 저었다.
“혈기왕성하구나. 나도 예전엔 그랬다만, 다 옛날 일이야. 부질없어.”
왠지 힘 빠지는 대답에 명승기는 더 인상을 굳혔다.
“우리에겐 옛날 일이 아니오. 똑바로 대답하시오.”
“맘에 안 들면 그냥 죽여. 귀찮게 굴지 말고.”
그 말에 허윤이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야 죽을 마음이 들었소? 그럼 거기 형산파 제자에게 정식으로, 제대로 좀 죽여 달라 하시오.”
명승기는 자기를 놀리는 줄 알고 검을 뽑았다.
챙!
형산파에서 대대로 가장 뛰어난 후기지수에게 물려주던 보검이라, 날의 예리함이 보통이 아니었다.
“내가 못 할 거라 생각하고 그런 말을 하는 거요?”
남궁민과 진승, 공세연이 놀라 걸음을 멈췄다.
“명 형!”
명승기가 서덕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검날이 서덕의 목에 닿기 직전, 쨍!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부러졌다.
서덕은 쾌도가 준 소수를 들고 있었다.
거기에 부딪힌 검이 깨진 것이다.
오른팔을 들어서 막았는데, 손 모양은 왼손이라 보기에 굉장히 기괴했다.
“아…… 내가 왜 막았지. 부질없는 인생. 이나마도 살겠다고. 쯥.”
명승기는 반 토막이 난 보검을 보며 망연자실했다.
사실 본때를 보여 주려고 했던 거라 진짜로 치려던 건 아니고 마지막에 멈추려고 했다.
그리고 솔직히 진짜 장강용왕이라면 알아서 피하겠지 싶은 것도 있었다.
그런데 문파의 보검이…… 댕강……?
명승기는 나중에 돌아가서 이걸 뭐라고 해명해야 할지 머리가 멍해졌다.
서덕이 고개를 흔들었다.
“인생이 다 그래.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그 검처럼 부러지면 순식간에 버려지는 거야. 아무것도 안 남아.”
그러면서 소수를 내밀었다.
“줄까?”
“주시오!”
명승기가 화가 나서 달라고 손을 뻗었으나, 서덕이 손을 회수했다.
“아니다. 아무것도 안 남은 삶, 이거라도 갖고 있으련다. 수백만 금을 쌓아 둔들 부질없구나. 남은 건 손 하나야.”
명승기가 욱해서 약간 빈정대듯 말했다.
“잘린 손 대신인데 그게 왜 남은 거요? 본전이지.”
서덕이 왼손으로 왼손 소수를 들어 보였다.
“왼손이 두 개니까 하나 남잖아.”
명승기는 어처구니가 없어 대꾸하지 못했다.
* * *
광서성 주성부의 조가장.
불에 탄 장원은 죄다 무너져서 폐허나 다름이 없었다.
본래 형체를 알아보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마도의 무사 둘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으나, 명승기의 부러진 칼에 둘 다 제거되었다.
실력 하나는 나쁘지 않았다.
진승이 말했다.
“혈마가에서 이미 초토화하고 갔군요.”
남궁민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여기 사람들은 미리 피했다고 하던데, 그것만도 다행이에요.”
말을 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이곳에 백룡회의 안소방이 왔었다고 들었다.
“아? 설마 허 형이 알려 준 거였어요?”
“그렇다네. 그래도 큰 액은 피한 듯하구먼.”
일행들은 허윤의 점술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서덕이 은근슬쩍 허윤의 옆에 와서 말했다.
“내 운명도 좀 봐주지. 난 언제나 되어야 잃어버린 길을 찾게 되나?”
“댁은 알아서 좀 하시오. 방해하지 말고.”
구박을 받은 서덕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명승기의 옆으로 갔다.
“이쪽으로는 왜 오셨소? 저리 가…….”
명승기가 허윤처럼 구박을 하려 입을 연 순간, 서덕과 시선이 마주쳤다.
공허한 눈인데 왠지 그 안에서 당장이라도 살기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하여 명승기는 입을 다물었다.
서덕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하얀 손으로 바닥을 긁었다.
긁긁.
“하, 인생…….”
하필 자기 손도 아닌 허연 남의 손으로 바닥을 긁고 있어서 더 신경이 거슬렸다.
명승기는 애써 못 본 체하며 허윤에게로 갔다.
“뭐 나온 거 없소?”
허윤은 불탄 흔적들을 보며 말했다.
“안소방은 똑똑한 친구요. 그냥 떠나진 않았을 거외다. 단서가 남아 있는지 찾아봐야겠소.”
피식.
“그런 게 있으면 마도가 진작 찾아냈겠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공세연이 무언가를 찾아냈다.
예전 현천신월대 시절에도 추적술이 뛰어났던 그녀다.
“이쪽으로 와 봐요.”
서덕을 제외한 일행은 공세연이 부르는 쪽으로 갔다.
잿더미를 들춰내고 그 아래의 디딤돌을 뒤집자, 거기에 급히 칼로 새긴 듯한 글자들이 보였다.
“천마본첩…… 이라고 쓰여 있군요. 마도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만.”
진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 이게 혹시 암호 같은 겁니까?”
“아, 뭐 그런 건 아닐 걸세. 소방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겠지. 천마본첩이라…… 그게 비급의 이름인가.”
“어디로 갔는지, 어디서 만날지 그런…… 내용이 아니구요?”
“그건 사실 적어 둘 필요가…….”
그런데 그때.
일단의 무리가 어디선가 나타났다.
“이래서 사람들이 점술가를 그리 찾는군. 남들이 다 남령산맥으로 갈 때 우린 점괘대로 이곳에 와 보길 잘했네.”
점술가를 앞세운 무림인들이었다.
그중 노인 한 명이 나와 포검했다.
“귀하가 백룡회의 허 선생이신가? 우리는 호광성에서 왔네. 나는 금가보(金家堡)의 김동화라 하지.”
허윤이 읍으로 답인사를 했다.
“허윤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함세. 얼핏 들으니 무언가 단서를 발견한 듯한데, 우리에게도 알려 줄 것을 요구하네.”
“……뭐요?”
한데 곧 다른 이까지 나타났다.
“멈추시오! 여기 상오문(上五門)도 있소. 우릴 빼놓을 수 없소이다!”
그들도 점술가를 데리고 있었다.
* * *
안소방은 조홍선, 야율령과 함께 남령산맥으로 들어섰다.
조가장 고수들이 혈마가를 유인하고, 나머지 식솔들은 안전하게 다른 곳으로 피한 상태였다.
조홍선이 다소 의문스러워했다.
“소방이. 왜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는 쓰지 않고 천마본첩이란 글자만 남겼나? 혹시 글자 사이에 뭔가 암호라도…….”
“아닐세. 그냥 비급 이름만 적으면 되네.”
“응? 이해가 안 돼.”
내내 까칠하게 굴던 야율령도 의아했는지 안소방의 말에 슬쩍 귀를 기울였다.
“이 친구야, 우리 회주님이 점술가 아닌가. 그것도 엄청 대단한 점술가. 그러니까 무엇을 찾으셔야 할지만 적어 두면 알아서 찾아오실 걸세.”
“아…….”
조홍선은 감탄했다.
“말로만 들었는데, 진짜였나 보군. 대단하이.”
야율령이 어이가 없다는 듯 둘을 흘겨보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름만으로 어딨는지를 찾는다고?”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이 일이 끝나 보면 알겠지.”
“어차피 그전에 우린 다 죽을걸.”
“글쎄. 난 우리 회주님을 만나고부터는 어떤 상황에서도 죽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안소방의 표정을 본 야율령은 왠지 기분이 나빠져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 * *
금가보와 상오문이 서로 먼저 보겠다며 다퉜다.
“내가 먼저 왔네.”
“같이 보는 게 뭐 그리 어렵소이까? 혹시나 먼저 본 뒤에 지워 버리려는 것 아니오?”
“사람을 뭘로 보고 그러나!”
“비급의 가치가 금가보보다 더 높다는 건 아오.”
“감히! 도저히 못 참겠군!”
두 문파가 무기를 뽑아 들었다.
허윤은 눈만 끔벅거렸다.
아니, 나는 보여 준단 말도 안 했는데.
둘이 제 것처럼 뻔뻔하게 구는 바람에 다소 황당하긴 했지만, 일단 내용 자체는 별 게 아니니 얘기해 주려 했다.
한데 그때, 또 한 무리가 나타났다.
남궁민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와…… 아직 남령산맥에 발도 들이지 않았는데 벌써 시작이야?”
명승기가 떨떠름한 투로 말했다.
“남령산맥 안으로 들어가면 더욱 찾기 어려워지니 뭐라도 미리 알아내고 싶은 거겠지.”
허윤은 그들이 모두 점술가와 동행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래서 부정원이 그리 많았군.’
아주 실력이 없는 점술가들은 아니었는지 용케도 제시간에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허윤이 조용히 말했다.
“무얼 찾아야 할지 알았으니, 우린 갑시다.”
벌써 네 무리가 옥신각신 싸우고 있던 터라, 허윤 일행이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것도 알지 못할 정도였다.
남령산맥에서의 분위기는 이보다 심할 터라는 걸 단적으로 보여 주는 광경이었다.
* * *
“감옥이 이렇게 편할 수가 없네. 살이 찐다, 살이 다 쪄.”
한쪽 눈에 안대를 한 이가 짚단 위에 누워서 감옥 안의 동료 죄수들에게 말했다.
그런데 그때.
돌연 간수가 오더니 문을 열었다.
“황금안, 이리 나와.”
“뭐야, 또.”
간수가 황금안의 족쇄와 쇠사슬을 풀어 주었다.
“왜 이래?”
“널 풀어 주라신다.”
“갑자기? 누가?”
황금안은 어리둥절했다가 금세 뭔가를 깨닫고 좋아했다.
“아이고, 우리 형님들이 또 이 아우를 위해 손을 써 주셨구나.”
그가 감옥 안의 동료 죄수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잘 있어라. 나 간다.”
그러면서 감옥 문을 잠그는 간수에게 물었다.
“그런데, 정확히 누가 와서 내 몸값을 낸 거야?”
“나도 몰라. 하나는 얼굴이 길쭉하고 칼자국이 나서 살벌하게 생긴 사람이고, 다른 한 명은…….”
간수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뒷모습만 봤는데 머리가 엄청 찰랑거리더라고.”
순간 황금안의 안색이 하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