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Dragon Teacher RAW novel - Chapter 4
4화
돗자리와 앉은뱅이 탁자는 갈기갈기 찢겼고, 좌우로 꽂힌 깃발 두 대는 모조리 부러진 상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엄청난 핏자국이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만복자는 돌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한동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자리에 서서 처참한 광경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곳은 도진이 있던 자리였다.
하지만 도진은 없었다. 도진이 쓰던 점구들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만복자는 다리에서 힘이 쭉 빠졌다. 손이 덜덜 떨렸다. 핏자국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도, 도진아? 도진아?”
그때 멀리서 있던 노인이 만복자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러곤 낮은 목소리로 만복자를 불렀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만복자가 고개를 돌아보니 전에 어제 옆자리에서 자리를 폈던 동업자 점쟁이였다.
만복자가 점쟁이 노인을 붙들고 소리쳤다.
“내 제자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점쟁이 노인이 화들짝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입에 손가락을 올렸다.
“쉿, 쉿. 아직 놈들이 이 근처에 있을지 모르니 목소리 좀 낮추시구려. 이, 이것 좀 놓고.”
“그러니까 그놈들이 누구고 무슨 일이 생긴 거냔 말입니다!”
“조용히 하라니까. 당신까지 죽고 싶소?”
노인이 만복자를 끌고 뒷골목으로 갔다.
겁에 질린 얼굴의 노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마도(魔道) 사람들일 거요. 얼마 전에 이 근방에서 정파와 육대마가(六大魔家) 사람들의 싸움이 있었다고 했으니까.”
만복자는 기겁했다.
“뭐요? 마도가 왜!”
“그건 나도 모르오. 내 볼 땐 그냥 지나치던 길이었던 것 같은데 자세히는 모르겠고. 아무튼, 선생네 제자가 무엇 때문인지 그 사람들과 얽힌 모양이오. 뭐라 말을 잘못했는지 아니면 심기를 거슬렀는지 여럿이 둘러싸더니…….”
노인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
“선생네 제자의 양팔을 잡고…….”
“허…… 허어…….”
당시의 끔찍한 상황이 절로 연상되었다.
“게다가 선생네 제자와 얽힌 자는 아주 고위급인 것 같았소. 복장도 그렇거니와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인상을 가진 자였소. 내 살면서 그런 관상은 처음 봤소이다.”
만복자는 망연자실해서 말이 안 나왔다.
노인이 말했다.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살아 있길 기대하지는 않는 게 좋을 것 같소. 뭘 어떻게 했는지 눈, 코, 입, 귀의 칠공(七空)에서 피가 분수처럼 나와 가지고…… 사람이 그렇게 피를 많이 흘리는 건 처음 봤소. 미안한 말이지만 선생네 제자는 아마…….”
“도진이는 살아 있을 거야, 이 영감탱이야!”
만복자가 노인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눈물이 차올라서 억지로 참았지만, 입에서 끅끅 소리가 나왔다.
만복자는 흰나비가 공자묘의 주위를 돌던 광경이 떠올랐다. 흰나비가 보인 이유가 그것이었을까.
“백분접……. 망할 놈의 백분접이…….”
만복자가 백분접을 거론하자 노인이 흠칫했다.
“백분접을 봤소?”
노인도 점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라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으으음…… 하필이면…….”
노인은 한숨을 쉬며 만복자를 밀어내곤 고개를 흔들었다.
“포기하시오. 설사 살아 있다고 해도 알다시피 마도에 한번 잡혀가면…….”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았다. 마도는 폐쇄된 집단이라 잡혀가면 다시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멀쩡한 사람들을 데려다가 노예로 부리거나 제물로 바친다는 얘기도 떠돌았다.
그러니 도진이 잡혀갔다면, 십중팔구는 살아 돌아오기 어려울 것이다.
“그나마 백분접을 봤다니, 선생의 제자가 찾아와 마지막 인사를 한 모양이구려.”
“흐어어어…….”
만복자는 얼이 나가서 이상한 소리만 냈다.
노인이 고개를 돌리고 작은 소리로 그들의 욕을 했다.
“에에이, 나쁜 놈들. 지들이 뭐라고 백주에 함부로 사람을…… 에이, 에이.”
“허어어, 허어어어…….”
노인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미안하오……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없어서.”
“흐어어어…….”
만복자는 이미 더 이상 노인의 위로를 들을 수 없었다.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털썩 주저앉았다.
노인은 만복자의 어깨를 툭툭 치고 몇 번 더 위로의 말을 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돌아가 버렸다.
만복자의 눈앞에 도진의 웃는 얼굴과 흩어진 핏자국들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내 탓이야, 내 탓이야. 아직 혼자 자리를 펴면 안 되는데, 내가 지레 겁먹어서 도진이를 혼자 내버려 둔 탓이야. 차라리 같이 갈 걸 그랬어. 같이.”
만복자의 눈에 눈물이 가득해지더니 금세 주르륵 흘러내렸다.
만복자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손으로 땅바닥을 쳤다.
“도진아…… 도진아, 내가 잘못했다. 도진아. 네가 나 때문에 이런 꼴이 되었구나.”
체면이고 뭐고 던져 버리고 서럽게 울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말해 줄걸. 내가 아비라고! 도진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아들아!”
만복자의 눈에선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눈물이 계속 줄줄 흘러내렸다.
옛날 생각이 났다.
나이 서른 초반.
기존 점술계의 텃세를 이겨 내지 못해 자포자기하고 방탕하게 살 때였다.
천지신명에게 올리던 의식도 빼먹고, 술을 마시며 노름을 했다. 점괘도 성의 없이 보고 가끔은 손님에게 바가지도 씌웠다.
한 여인을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그저 하룻밤의 혈기로 맺은 인연이었다.
떠돌이였던 만복자는 다음 날 여인을 떠났고, 당연히 그 여인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후 정말로 우연히, 아주 우연히 그곳을 다시 방문했는데 여인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대신 남겨진 서신을 읽고 자신의 아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게 도진이었다.
제대로 돌봐 주지도 못했는데 이만큼 잘 커 준 게 너무 기특하고, 또 미안해서 만복자는 이제껏 자신의 정체를 말할 수가 없었다.
그건 역설적으로 도진이 자신에게 너무 잘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을 말했다가 미움을 받고 도진이 떠날까 봐 두려워서였다.
그런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렇게 떠나보내고야 만 것이다…….
허망한 표정의 만복자는 불현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니야. 도진이는 아직 죽지 않았을 거야.”
그리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살아 있다면?
만에 하나라도 도진이가 살아 있다면?
“그러면 내가…… 내가 이러고 있으면 안 돼!”
만복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도진이 어느 방향으로 끌려갔는지 물어본 뒤, 황급히 관청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관리는 마도라는 말을 듣자마자 난색을 보였다.
“마도인들이라고 하지만 증거가 없고, 또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지 않나.”
“본 사람도 있고 어느 쪽으로 갔는지도 아오. 지금이라도 따라가면 잡을 수 있을지 모르잖소.”
“설사 육대마가에서 한 일이라 해도 그들의 세력은 어마어마하네. 병부(兵部)에서도 나서지 못하는 일을 우리 관원 몇으로 어떻게 그들을 찾아내고 조사할 수 있겠는가.”
마도의 전성시대.
육대마가를 필두로 사악사교(邪惡四敎), 지옥이궁(地獄二宮), 일사삼종(一寺三宗)까지.
마도는 나라에서도 차마 건드리지 못할 만큼 엄청난 세력으로 무림의 반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었다.
만복자도 그런 흐름은 알고 있었다. 하나 그렇대도 그냥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럼 백주에 사람을 해친 작자들을 그냥 모른 척 내버려 둘 것이오? 자, 돈이 필요하다면 여기 있소!”
만복자가 가진 돈 전부가 든 주머니를 내밀었지만, 관리는 고개를 저었다. 관리가 돈을 받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정말로 해 줄 일이 없다는 뜻이다.
“사정은 안 됐네만, 우리 말고도 다른 지역에서 이미 비슷한 일로 몇 차례나 고발을 하고, 상부에 진정한 적이 있다네. 그런데 별다른 말이 없는 걸 어쩌나. 우리가 뭐 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가? 뭘 어떻게 더 할 수가 없으니 이러는 거지.”
만복자가 애원했다.
“제발 도와주시오, 제발.”
관리가 애처롭다는 듯한 표정으로 만복자를 바라보았다.
“정 그렇다면 방법이 한 가지 있기는 하네.”
“그게 뭐요?”
“무림 문파에 도움을 청해 보게. 특히나 정파는 마도와 적대하고 있으니 어쩌면…….”
“어쩌면?”
만복자는 눈이 돌아가서 소리를 질렀다.
“나라에서도 돌봐 주지 않는데 누가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서 주겠소이까! 뒷배경도 없고 인맥도 없는 우리를 누가 도와주겠냔 말이오!”
만복자는 피를 토하듯 외침을 내뱉고는 이를 악물었다.
관리에게 더 하소연해 봐야 소용이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그냥 발길을 돌려 관청을 나왔다. 그러곤 도진이 끌려갔다는 방향으로 직접 뛰어가기 시작했다.
* * *
“헉…… 헉! 헉헉!”
만복자는 숨이 차서 무릎을 짚고 숨을 몰아쉬었다. 나이가 들어 시원찮은 무릎 관절이 이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조급한 마음에 무작정 쫓아오긴 하였으나 마을을 벗어나면서부터는 좀처럼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추격술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발 빠른 무림인을 뒤쫓는다는 게 쉬운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앞은 갈림길이었다.
만복자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필사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저 앞은 사천성으로 가는 방향이고 옆길은 섬서성의 서안으로 가는 길이었지.”
아까 점 보는 노인이 말하길, 육대마가 사람들일 거라고 했다. 하나 육대마가의 장원들은 각기 떨어져 있고 장원 위치도 알려지지 않았다. 사천이나 섬서나 마도의 세력이 득세한 곳이라 어디로 갔는지 장담할 수 없었다.
혹시나 해서 바닥을 살펴보았지만, 핏자국도 보이지 않았다.
“아……!”
분명히 둘 중 한 길인데 잘못 선택하면 영 다른 길로 가게 된다. 무림인들은 흔적도 잘 남기지 않아서 도무지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만복자는 전전긍긍하고 있다가 소매를 뒤져 작은 동전 주머니를 꺼냈다. 거기에는 점을 치기 위해 사용하는 고대의 엽전이 담겨 있었다.
“제발…….”
엽전을 손에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지금 만복자가 믿을 거라고는 점괘밖에 없었다.
“천지신명이시어. 도진이는…… 제 모든 것이었던 아입니다. 사사롭다 무정하게 내치지 마시고, 불민하게 여기시어 부디 그 아이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살아오면서 셀 수도 없이 점을 쳤지만, 지금처럼 간절하게 점괘가 맞기를 바란 적이 없었다.
만복자는 몇 번이고 소원을 빈 후 엽전 세 개를 던졌다.
“제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그 아이를 찾을 수 있을지 알려 주옵소서!”
짤그랑거리며 엽전들이 흩뿌려졌다.
엽전의 앞면은 양효(陽爻)로 [⚊] 라는 실선으로 표시하고, 뒷면은 음효(陰爻)로 [⚋] 라는 점선으로 표시한다.
그리하여 효를 세 줄 만들면 이른바 내괘(內卦)라는 것이 만들어진다.
☰ 건乾 ☱ 태兌 ☲ 이離 ☳ 진震
☴ 손巽 ☵ 감坎 ☶ 간艮 ☷ 곤坤
총 여덟 개의 모양이 나오므로 팔괘(八卦)다.
이 팔괘는 천지 만물의 성질과 형상, 이치를 의미한다. 하늘과 땅, 산과 연못…… 큰 것과 작은 것, 오르는 성질과 내려가는 성질. 성실함과 게으름, 기쁨과 슬픔……. 그리고 여덟 방향의 방위.
방금 만복자가 엽전을 던졌을 때 세 개가 모두 앞면이 나왔다.
양효가 세 개. 이는 곧 건괘(☰)다.
“건괘는 북서쪽 방향이다!”
방향을 찾아냈으니 그 방향으로 가면…….
만복자가 고개를 들어 갈림길을 확인했다.
“…….”
갈림길은 서쪽과 북쪽에 있었다. 그 중간인 북서쪽에는 길이 없었다.
“아아!”
그토록 간절히 빌었건만.
하필이면 점괘가 나와도 어쩌면 이렇게 전혀 맞지도 않는 방향으로 나와 버린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