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Dragon Teacher RAW novel - Chapter 91
91화
第二十五章 악가장의 산명선생
고요…….
이 정도로 조용해질 줄 몰랐기에 허윤은 자기가 너무 대충 얘기했나 싶어서 긴장했다.
하지만 그 직후.
“와하하하!”
가주 악정후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태상장로 악리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것이었다.
“……응?”
허윤은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렸다.
그때, 악영의 콧대가 우쭐하는 게 보였다.
“내 말이 맞죠?”
“그래. 영이가 말한 대로 아주 근래에 보기 드물게 욕심이 없고 청렴한 소협이로구나.”
악정후가 허윤을 바라보는 눈빛이 왠지 흐뭇해 보였다. 악정후가 허윤에게 말했다.
“자네가 받기 싫어할 거라고 이미 영이가 말했다네.”
“아, 예…….”
“하지만 우리 악가의 체면이 있지, 어떻게 빈손으로 은인을 보내겠는가.”
딱!
악정후가 손가락을 튕겼다.
“준비한 것을 가져오너라!”
시비 몇 명이 큰 쟁반을 하나씩 들고 왔다. 쟁반에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올려져 있었는데, 족히 수백 냥은 되어 보이는 은자 한 뭉텅이, 값비싸 보이는 비단 한 필, 말을 의미하는 등자 한 쌍, 용이 조각처럼 새겨진 듯한 보검과 보도 각각 한 자루, 날붙이를 막을 수 있도록 비늘이 꿰어진 보갑, 고급스러워 보이는 작은 상자, 그리고 붉은 비단으로 싼 서신…….
하나같이 허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드는 물건들이었다.
“이게 다 뭡니까?”
“적당해서는 받지 않는다는 걸 알았으니, 성의껏 준비했네. 영이의 말을 듣고 미리 준비하지 않았으면 아주 난처할 뻔했어.”
시비들이 쟁반을 모두 허윤의 앞에 내려놓았다.
“허어. 이걸 전부 다요?”
쟁반의 은자만 해도 허윤이 평생 만져 본 적이 없는 금액이었다. 고귀해 보이는 보검과 보도 역시 어디에 맡기면 짭짤하게 돈을 받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부족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과분합니다.”
허윤이 그중의 하나를 보고 물었다.
작은 상자?
“이건 뭡니까?”
“본 가에서 제조한 단약일세. 신죽환(神竹丸)이라 하여, 몸을 건강하게 하고 질병을 물리치며 내공의 증진 효과도 있지.”
시비가 작은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금박으로 싼 작은 단약에서 향긋한 냄새가 확 풍겨 왔다.
허윤도 약초로 약을 많이 달여 봤지만 이런 건 본 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어디 가문에서 몰래몰래 숨어서 만든다는 비전의 단약이 이런 게 아니겠는가!
“비단도 마음에 들 걸세.”
시비가 비단을 가져와 허윤이 만져 보게 해 주었다. 은은한 옥색의 광택이 흐르는 비단감이었다. 허윤은 손으로 비단을 쓸어 보았다. 부드럽기가 마치 천상의 것과도 같았는데, 그 안에는 놀랍게도 은색 실로 짠 한 마리의 용이 숨어 있었다. 불빛에 비추니 장엄한 용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허어.”
감탄이 절로 나오는 비단이었다. 허윤이 지금 입고 있는 것도 큰맘을 먹고 사서 꽤 가격이 나가는 것이었는데, 비교도 되지 않았다.
“영이가 직접 골랐다네.”
허윤이 힐긋 악영을 쳐다보았더니 악영이 살포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 네…….”
허윤은 다음 물건을 보다가 흠칫했다.
붉은 비단으로 싼 서신이 있었는데, 가운데에 맨 띠에 사주 근봉(四柱 謹封)이라는 글자가 써 있었다. 보통 이것은 신랑 측에서 신부에게 신랑의 사주를 적어서 보내는 사주단자(四柱單子)인데…….
왠지 신랑이 아니라 신부의 사주가 적혀 있을 것 같았다.
허윤은 슬쩍 악정후와 악리, 악영의 눈치를 보았다. 은연중에 허윤이 그것은 뭐냐고 묻기를 기대하고 있는 눈치였다.
허윤은 무시하고 마지막 물건을 보았다.
“엇, 이것은!”
허윤이 추첨을 하거나 산가지를 담아 둘 때 쓰는 것처럼 생긴 둥근 통이었다. 그런데 대나무가 아니라 거북의 등껍질을 둥글게 엮어 만들었고, 겉에는 팔괘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굉장히 오래되어 보이는 듯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반짝거렸다.
악정후가 웃었다.
“역시 방사는 방사의 물건에 관심이 많은 건가. 그 물건을 구했을 때 백 년은 묵은 폐가에서 주워 온 듯했다네. 깨끗하게 닦느라 고생 좀 했지. 우리 조·카·딸이.”
하, 그냥 그대로 좀 주지. 그걸 또 깨끗하게 다 닦아서 유약 같은 것까지 새로 칠해 놨네.
너무 깨끗해서 모조품같이 보일 지경이었다.
이런 건 불에 그을리고 손때도 타 시커멓고 좀 그래야 있어 보이고 효과도 좋은 건데.
허윤은 일단 통을 집어 보았다. 손에 닿는 순간 묘한 기운이 손끝을 타고 올랐다.
찌릿찌릿!
귀한 물건에는 영험한 효과가 있다고 했는데, 실제로 그 힘을 느껴 보기는 허윤도 처음이었다.
“허!”
허윤은 감탄하며 산통을 들어 보았다. 안쪽에 연(衍)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이것은 아주 오래된 고대의 산통입니다! 이 연이라는 한자는 전국 시대에 주역점을 이르던 말이었습니다. 굉장한 보물이군요!”
악정후가 놀라워했다.
“보물은 임자가 있다더니, 그것이 자네의 물건이 되려 했나 보군그래.”
허윤이 산통을 들고 흡족해하며 읍을 했다.
“저는 이것으로 족합니다. 다른 것은 필요치 않습니다.”
나중에 폐가라도 찾아가서 묵은 먼지를 입히고 하면 아주 멋들어진 산통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허윤이 산통만 선택하니 악영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악정후가 악영의 표정을 보더니 허윤에게 은근히 말했다.
“이보게, 소협. 지금 든 것은 우리 조·카·딸이 장사에서 힘들게 수소문해 구한 물건인데, 옆의 비단첩과 한 쌍이라네.”
사주단자와 한 쌍이라고…….
굳이 조카딸이라는 단어를 강조해서…….
허윤은 살짝 갈등했다.
악가장 같은 대단한 가문이 가문의 여식과 혼인까지 시켜 주겠다는 건 실로 파격적인 제안임이 틀림없었다.
만약 악가장의 사위가 된다면 허윤으로서는 아주 큰 힘을 얻게 된다. 추후 마도와 싸울 때도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사사로운 복수 때문에 남의 가문을 전화(戰火)에 끌어들인다는 것도 좀 그렇고, 여전히 허윤은 자신의 외모와 속 나이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하고도 있었다.
게다가…….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이글이글한 눈동자의 처자가 생각이 나기도 했다.
― 복채. 받으셔야죠.
허윤은 머리를 긁적였다. 언제부터 자기 머리에 떠오르는 게 ‘산 사람은 살아야죠!’가 아니라 ‘복채. 받으셔야죠.’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변한 것인가.
허윤이 갈등하자 악정후가 농담 반 진담 반 섞인 말투로 물었다.
“우리가 모자란가? 아니면 질녀가 부족하다 생각하는가?”
허윤은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나 저와 같은 점술가들에게 과분한 호의는 오히려 독이 되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욕심을 부려 본래 가져야 할 것보다 많이 얻으면 하늘의 벌을 받아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악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악정후를 만류했다.
“가주. 허 소협의 말이 맞네. 욕심이 없는데 무리한 복을 맡기면 그게 화가 되는 것일세.”
“그렇다면야 할 수 없지요. 그냥 보내기에 너무 아까운 인재라 제가 욕심을 부렸나 봅니다. 하나, 정 그렇다면 이 비단이라도 받아 주게. 그것까지 마다하진 말게. 조카딸 아이가 고르고 고른 것이니.”
“알겠습니다.”
“자, 그럼.”
악정후는 순식간에 감정을 털고 웃으며 술잔을 권했다.
악정후가 은으로 만든 배 모양의 술잔에 따른 술을 시비가 허윤에게 가져왔다. 허윤은 사양하지 않고 잔을 들어 건배를 하며 마셨다.
평소에 먹던 싸구려 술맛과는 차원이 다른 그윽한 풍미가 감돌았다. 이것도 굉장한 명주였다.
허윤은 예전에 점을 치고 약을 팔아 돈을 좀 모으면 한 번씩 비싼 술을 사 마시곤 했는데, 그때에도 이런 건 맛보지 못했다.
“하아, 좋습니다.”
악리도 허윤에게 잔을 권했다.
한데 이번에 시비가 허윤에게 악리가 따라 준 술잔을 가져왔을 때, 허윤은 깜짝 놀랐다. 잔 아래에 비단첩 비슷하게 사주를 적은 쪽지가 놓여 있던 것이다.
허윤은 놀라서 술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심지어 쪽지가 한 장도 아니고 두 장이었다.
악리가 웃으며 말했다.
“소협은 너무 놀라지 마시게. 사실 이 노인네가 부탁이 한 가지가 있어 보내었네.”
“예.”
“우리 가문에 남아는 많이 없으나, 혼기가 찬 여아들은 전에 없이 많이 있다네. 하여 곳곳의 가문들이 사주를 보내 오는데, 이번에 보내 온 사주일세. 그 사주와 우리 가문의 아이와의 궁합이 어떤지 한번 봐 줄 수 있겠는가?”
“궁합…… 이요?”
허윤은 난데없는 궁합 얘기에 떨떠름했지만 악씨 가문의 식솔들이 재미있어했다.
“그렇군요!”
“허 소협의 실력이라면야.”
궁합이라…….
궁합은 사주팔자와 함께 허윤의 주 수입원 중 하나였다. 장터에서 종이나 수피(樹皮)를 손에 쥐고 서성거리는 중년의 아낙들을 보면 대부분이 궁합을 보러 온 손님이었다.
술을 약간 마시긴 했어도 궁합을 보는 건 별문제가 없을 터였다.
“좋은 조건을 가진 가문의 자제라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으나, 재미 삼아서 보면 어떻겠는가. 복채는 두둑하게 줌세.”
“잔치의 흥을 돋우기 위해서라도 거절할 수 없겠군요. 알겠습니다.”
허윤은 흔쾌히 수락했다.
그러곤 휴대용 지필묵을 꺼내어 탁자에 올렸다. 이어 쪽지에 적힌 두 명의 태어난 연월일시를 확인하고, 붓으로 휘적휘적 글을 쓰며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궁합이란 것은 무엇이냐. 궁(宮)은 집[宀] 아래에서 두 입[口]이 합(合)쳐지는 것이올습니다. 남편이 될 사람과 아내가 될 사람이 합쳐지는 것이오, 남이었던 사람이 내 부모가 되는 것이오, 결국 두 집안이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악씨 식솔들은 허윤의 현란한 말솜씨에 감탄하며 지켜보았다.
“사람의 사주는 연월일시로 되어 있어서 연주(年柱)는 집안이요, 월주(月柱)는 부모 형제요, 일주(日柱)는 나와 배우자요, 시주(時柱)는 자녀 운으로 봅니다. 궁합은 이 사주가 하나가 되었을 때를 의미하니…….”
휘적휘적.
“따라서 궁합은 가문 간의 외궁합과 부부간의 내궁합까지 함께 따지게 되는 것이지요.”
내궁합이란 말에 악씨 여식들이 괜히 얼굴을 붉히며 까르륵 웃었다.
“이에 궁합을 보는 방법도 여러 가지로, 팔괘를 이용한 구궁(九宮)법, 외궁합으로 길흉을 보는 납음오행(納音五行)법, 살(煞)을 풀이하는 신살(神殺)법, 사주를 면밀히 살펴 오행의 상생으로 보는 사주(四柱) 궁합 등이 있는데, 저는 오늘 여러 면을 살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남자들보다 여식들이 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허윤의 말을 들었다.
무림인들은 대개 점술을 믿지 않는 편이었지만, 아무래도 혼사는 가문 간의 일이다 보니 궁합 정도는 보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나 악가장에는 혼기가 찬 여식들이 많아서 제법 많은 사주단자가 들어오는 중이었다.
거기다 점술로 악가의 숙원을 해결한 허윤이 궁합을 본다 하니, 혼기가 찬 당사자들은 더욱 관심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 보자. 남자 쪽이 신사(辛巳)년 신묘(辛卯)월에 갑오(甲午)년생이고, 여자 쪽은 계미(癸未)년에 경신(庚申)월…….”
허윤이 손가락을 꼽으며 셈을 하였다. 그러다가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렸다.
허윤이 악리에게 물었다.
“혹시 둘 중에 한쪽은 어디 몸이 불편한 데가 있습니까?”
“그렇다네.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는가?”
악리가 혀를 내둘렀다.
“궁합은 어떻게 나왔는가? 좋아도 나빠도 개의치 않을 터이니 가감 없이 그대로 얘기해 보게.”
“한쪽은 금(金)이고 다른 한쪽은 목(木)이니 금극목(金克木)이라, 매사에 한쪽이 이기려 드는 형국입니다. 또 사주에 토(土)가 많아 토생금으로 금을 더욱 강하게 하니 목의 기운이 많이 상하겠습니다.”
“흠. 그렇게 좋지 않은가?”
“좋다 나쁘다를 따지기 전에. 부부의 인연은 만나기 전부터 전생에 결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남녀 간의 감정을 누군가 말린다고 해결되지 않는 것도 그러한 이유이지요. 그러니 반드시 혼사를 치러야 할 이유가 있다면야…….”
악리가 솔깃해했다.
“방법이 있는가?”
“흠흠. 세상에 해결할 방법이 없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허윤이 행낭에서 괴황지(槐黃紙)를 꺼냈다. 부적을 쓸 때 사용하는 종이인데 홰나무로 만든 누런 종이였다.
“자. 어떻게…… 부적 한 장 써 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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