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does the land document of the fantasy Demon Castle belong to? RAW novel - Chapter 328
제328화
빅토르마 므에실리고 2세의 손이 떨렸다.
분노였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가 빅토르마 므에실리고 2세의 몸과 머리를 지배했다.
“휴멜 나티는 용서를 빌어 살았죠. 추가 조사를 했나요? 아니면 정황만 듣고 추측으로 도달했나요? 그와 똑같이 행동한다. 옳은 판단이에요. 살아남은 자의 흉내를 내는 건 가장 기초적인 저주 대처법이기도 하니까요. 마르할 무느두스는 용서를 비는 사람을 벌할 수 없거든요. 그런 역사니까요.”
머리에 피가 끓었다. 빅토르마 므에실리고 2세는 지나친 분노에 죽었다는 역사상 위인들의 기록이 허언이 아님을 알 것도 같았다.
그의 심정이 그랬다. 분노로 뜨거워진 머리가 뇌를 익혀버리는 기분이었다.
빅토르마 므에실리고 2세는 휴멜 나티가 살아 돌아온 이유를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작은 제국의 뤼겐이나 제국의 정보원들이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대지주 마르할은 후환을 남겨두는 인간이 아니었다.
포섭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배신하지 못할 목줄을 채워 포섭하고, 그게 아니라면 가차 없이 죽였다.
휴멜 나티는 전형적인 후자였다. 므에트 제국의 이름에 묶여 평생을 살다 죽을 운명을 가진 인간이다.
빅토르마 므에실리고 2세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용서를 비는 사람, 혹은 살려달라고 비는 사람을 죽일 수 없다.
마냥 헛소리로 치부할 말은 아니었다.
역사를 쌓는 과정에서 특정한 제약을 떠안는 경우가 드물게 존재했다.
빅토르마 므에실리고 2세는 효율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정보에 따르면 그의 무력은 마왕을 죽인 당대 용사 일행과 비슷하거나 한 수 위라고 평가된다.
무릎 한 번 꿇어서 마르할이라는 인물의 정보를 낱낱이 알아낼 수 있다면 그건 전혀 손해가 아니었다.
그런 심정으로 우선 무릎부터 꿇고 살려달라고 빌었다.
빠드득. 이 갈리는 소리가 살벌하게 들렸다. 빅토르마 므에실리고 2세의 입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는 효율을 위해 무릎을 꿇었다.
어차피 일개 야인이다. 소문이 퍼질 일도 없고, 목적을 달성하고 인간을 초월한 후에 찾아가 죽이면 된다.
하지만 이건 다르다.
한 나라의 황제가 타국의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황제와 황제, 지배자와 지배자 사이의 행동에는 사소한 말 한마디조차 역사로서 기록된다.
바체아 제국의, 므에트 제국의 역사가 된다.
그는 지금 므에트 제국 황제였고, 그의 앞에 있는 사람은 바체아 제국 황제였다.
한 나라의 왕이 타국의 왕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조차 굴종의 표시로 받아들여진다.
하물며 그는 무릎을 꿇었다.
용서해 달라고 했다.
살려달라고 빌었다.
므에트 제국이 바체아 제국에 완벽히 굴복했다.
그런 역사가 만들어졌다.
세상이 새로운 역사를 기록했다.
므에트 제국의 역사를 다루는 빅토르마 므에실리고 2세는 그의 손에 쥐어진 거대 역사에 새겨지는 하나의 굴욕과 수치를 선명하게 느꼈다.
그건 저 앞에 있는 또 다른 황제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게요? 일어나요. 할 이야기가 많다니까요?”
마르할은 빅토르마 므에실리고 2세의 몸을 직접 일으켜주고, 옷에 묻은 먼지도 털어주었다.
왕이 신하의 노고를 칭찬하는 모습이었다.
“손해에 집착해요? 그것도 나쁘진 않죠. 하지만 제가 아는 빅토르마 므에실리고 2세는 훨씬 음험하고 유능한 사람이었는데요.”
빅토르마 므에실리고 2세는 작게 심호흡했다. 최대한 머리를 차갑게 식히며 자리에서 일어나 옥좌에 앉았다.
옥좌에 앉은 그의 모습에 처음과 같은 위엄은 없었다.
머리에 피가 과도하게 몰려 핏대가 선 눈으로 마르할을 노려보는, 그러나 한편으로 어딘가 힘이 빠져 있는 노인 한 명이 있었다.
“너를 뭐라고 불러야 하지?”
“마왕, 황제, 마르할 무느두스. 뭐든 좋아요.”
“내 질문은 단 하나다.”
“짧게 끝낼 수 있다니 저도 좋네요. 그래서, 질문은요?”
“어떻게 하면 너와 같은 힘을 얻을 수 있지? 어떻게 하면 인간을 초월할 수 있지?”
“정말 그게 다예요? 궁금한 게 많지 않아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제 안에 마왕이 있는지. 소일라 므에실리고는 어떻게 되었는지.”
팔걸이를 잡은 빅토르마 므에실리고 2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팔걸이가 부서졌고, 그의 힘에 황궁이 흔들렸다.
그가 힘을 보이면 모든 사람이 공포에 떨었다. 불사의 기사 실라 엘도 눈동자 안에 나타나는 불안을 숨기지 못했다.
그의 앞에 있는 바체아 제국의 황제는 여유로웠다. 은은한 바람과 함께 망토가 흔들렸고, 왕관이 사방으로 빛을 반사하며 보석처럼 빛났다.
공포와 두려움은 전혀 없었고, 몸에 깃든 역사는 토지의 힘을 빌려 관찰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궁지에 몰리면 몰릴수록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의 의지는, 목적을 향한 갈망은 강렬해졌다.
“다 필요 없다. 힘, 나는 오직 힘만을 원한다. 힘이 있으면 네 입도 열 수 있다. 마르 실라나티엘을 잡아 그날의 일을 알아낼 수도 있다. 뭐든지 내 뜻대로 할 수 있단 말이다!”
“그걸 본인 앞에서 말해요?”
마르할이 기가 막히다는 듯 말했다.
“너는 나를 해할 수 없지. 무해한 자에게 귀찮게 내심을 숨길 필요가 있나?”
“음. 그게 도망가지 못한다거나 가만히 죽어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거든요?”
“관계없다. 모든 건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그래서, 질문의 답은?”
마르할은 빅토르마 므에실리고 2세의 말에 엉킨 진한 살기를 읽었다.
그는 딱히 살기를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힘을 얻고 바체아 제국의 황제를 죽인다.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겠지.
분노에 눈이 돌아간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다 비슷한 법이다.
그게 세상에서 가장 자존심 강한 인간과 그 자존심을 사정없이 구겨버린 사람 사이의 일이라면 더욱 읽기 쉽다.
“인간을 초월하는 방법이라… 알고 있잖아요? 역사,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압도적이고 절대적인 업. 그게 전부예요. 특별한 방법 같은 건 없어요. 마족과 싸울 때 친정했다면서요? 그러고도 그 수준이면, 아마 더한 역사가 필요하다는 말이겠죠. 마침 저한테 좋은 게 있어요.”
마르할은 품에서 검은 상자를 꺼냈다.
빅토르마 므에실리고 2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르할의 이름을 알았을 때보다 더한 반응이었다.
“므에트 제국 황제의 예물에 대한 바체아 제국 황제의 보답이에요. 거절하진 않겠죠? 그럴 거라고 믿어요. 왜냐하면 이건 두 제국이 맺는 우호의 증표인 동시에 서부의 주인이자 서부 모든 역사를 대변하는 대변인의 뜻이거든요.”
“서부 모든 역사의 대변인이라고?”
“설명보단 보여주는 게 빠르겠죠.”
마르할이 텅 빈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바람이 수십 개의 생생한 환영을 만들어냈다.
반쯤 무너진 요새, 부서진 왕궁, 터밖에 남지 않은 도시, 그 사이에 있는 멀쩡한 바체아 제국 제도까지.
마르할이 만든 환영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모든 환영에서 똑같은 깃발이 휘날렸다.
빅토르마 므에실리고 2세는 마르할이 한 짓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건 그도 한때 하려고 했던 행동이었다.
주인 없는 서부에 미리 깃발을 꽂아둔다. 그리고 나중에 연합을 이용해 그 소유권을 인정받는다.
“연합이 사라졌나?”
“저 시계와 함께요.”
조금 떨어진 바닥에는 마르할이 처음에 들어왔을 때 부쉈던 시계가 여전히 부서진 채 굴러다녔다.
“…서부의 주인이 정해졌군.”
“바체아 제국 황제이자 서부의 주인이 주는 우호의 증표예요. 서부의 주인이자 그 역사의 인정을 받은 사람의 물건이요.”
빅토르마 므에실리고 2세는 마르할의 웃는 얼굴이 가증스러웠다.
저것은 호의를 숨길 생각이 없었다. 동시에 악의를 숨길 생각도 없었다.
빅토르마 므에실리고 2세는 역사를 원한다. 간절히 원한다.
바체아 제국 황제이자 서부의 주인이라는 역사는 무겁고 거대하다.
마르할이 든 상자도 황제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16년 전, 그가 소일라 므에실리고의 손에 들려 바체아 제국에 예물로 보낸 상자와 색만 다르고 다른 부분은 모두 똑같은 상자였다.
상자에 든 내용물도 똑같겠지.
빅토르마 므에실리고 2세는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긴장과 분노가 여전히 그의 몸을 지배했다.
빅토르마 므에실리고 2세는 떨리는 손으로 마르할이 내미는 상자를 받았다.
오동나무 관을 쓰고 바람으로 된 망토를 두른 마르할은 바체아 제국 예법으로 인사했다.
“모든 절차가 끝났어요. 약속은 지켜졌고, 세상은 조금 더 평화로워질 거예요. 즐거웠어요. 진심으로요.”
예법으로 보면 어긋난 게 없는 언사였다. 그러나 빅토르마 므에실리고 2세는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마르할은 자신이 아니라 상자를 향해 말을 건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황제가 그 기묘한 감각을 곱씹는 사이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마르할이 사라졌다.
홀로 남은 황제는 손에 들린 상자를 연신 만지작댔다.
* * *
마르할이 황제와 독대하는 사이 베이올라는 문 앞에서 가만히 기다렸다.
문을 지키는 두 명의 기사는 석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베이올라는 머리가 복잡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계략으로 바체아 제국을 멸망시킨 황제와, 멸망한 제국에서 살아남은 황제의 대면이다.
아버지, 빅토르마 므에실리고 2세는 마르할의 이름을 알고 있을까.
안다면 뭐가 달라질까.
고민하고 있던 베이올라의 머리에 잊혀진 기억이 떠올랐다.
마르할 무느두스.
세상에 잊힌 역사.
기억을 되찾은 건 베이올라만이 아니었다.
태산과 불사, 두 기사가 문을 붙잡았다. 베이올라의 시간이 느려졌다.
세상으로부터 마르할을 숨겨주던 마법이 우연으로 풀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건 마르할의 뜻이다.
멸망한 제국의 황족이 자신의 이름을 되찾기를 원했다.
대지주 마르할이 아닌 마르할 무느두스로서 해야 할 일이 저 안에 있다.
그러면 그녀는 마르할을 도울 뿐이다.
베이올라는 검을 뽑지 않았다.
불사의 기사의 행동이 이상했다. 손잡이를 잡은 문을 열지 않고, 반대쪽 손으로 검을 뽑았다.
제국 최고의 기사라는 이름답게 빠른 속도로 뽑힌 검이 향하는 장소는 태산의 목이었다.
태산은 가까스로 검을 피했지만, 그 대가로 문손잡이를 놓쳤다.
“실라 엘, 이게 무슨 짓이냐!”
“인형한테 화내도 대답은 안 돌아와요.”
“…마리나 실라나티엘.”
기묘한 아지랑이와 함께 마리나가 나타났고, 태산은 살기를 담아 마리나를 노려보았다.
마리나는 태산을 무시하고 베이올라에게 똑바로 걸어왔다.
마리나를 베려는 태산의 앞을 불사가 막아섰다.
“이건 뭐야?”
“마왕을 죽이러 가며 말했죠? 저를 세뇌해서 이용하려는 놈들이 있다고. 불사의 기사 실라 엘. 이놈도 그중 하나입니다. 제 정신을 무너뜨리려 하길래, 역으로 정신을 부수고 인형으로 삼았습니다.”
“그 말은?”
“마르 실라나티엘을 만났습니다. 그녀의 심장을 먹고, 유일한 실라나티엘이 되었죠.”
“축하해.”
베이올라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용사 일행의 후계자들은 모두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자들이었다.
고향을 잃은 마린, 평생 성황국에 이용당하다 버림받은 알라실, 그리고 베이올라와 마리나는 같은 제국 출신이면서도 제국에 발붙일 장소가 없었다.
베이올라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마리나를 내심 자신과 겹쳐 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만, 한가롭게 인사나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군요.”
“무슨 상황인지 알아?”
“그 사람의 역사는 대부분이 봉인되어 있었습니다. 이건 알고 있었겠죠?”
베이올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사로 무엇을 봉인하고 있을까 생각해 봤습니까? 용사 일행으로서 쌓은 역사를 모조리 사용해 봉인해야만 하는 무언가를요.”
“…마족이구나. 그래서 마족의 힘을 사용하던 거였어.”
베이올라의 머리에 서부에서 경험한 모든 일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먹구름과 함께 나타난 거인부터 남부에 나타났다는 도시를 폐허로 만든 마족, 분명 심장이 멈췄는데 되살아난 레벨라, 그리고 마족의 소굴이 된 성황국 안에 만들어진 검은 길.
마르할이 마족의 힘을 다루는 건 그가 마왕을 죽인 용사 일행의 일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몸에 마족을 봉인하고 있어서였다.
“사족은 여기까지 하죠. 저는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나한테?”
“실라나티엘은 황가의 보호 아래 많은 금기를 저질렀습니다. 이들이 저를 제국으로 부른 건 안전하게 금기를 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황제를 조심하세요. 황제의 목적은 당신을 먹는 겁니다.”
베이올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마리나의 말이 단순한 은유나 비유로 들리지 않았다.
“예상하는 그게 맞을 겁니다. 황제는 언어 그대로 당신을 죽이고 당신의 피와 살을 먹으려 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마왕을 죽인 용사이자 친딸. 막대한 역사를 품은 당신을 죽이고 먹어 금기를 범해 황제가 얻을 역사를 생각해 보시죠. 황제는 마족 개발을 주도한 인간입니다. 그런 인간이 무슨 짓인들 못 하겠습니까.”
“알았어.”
마리나는 불사와 대치하고 있는 태산을 향해 손을 뻗었다. 태산이 눈 코 입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마리나가 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자 태산이 끈 달린 인형처럼 흔들흔들 일어섰다.
“잠깐은 황제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겁니다. 후회 없는 선택을 하기를 빌겠습니다.”
마리나는 아지랑이와 함께 나타났을 때처럼 사라졌다.
정신을 집중하면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도 알아낼 수 있지만, 베이올라는 그럴 필요까지는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우두커니 서서 사색에 잠겼다.
마르할 무느두스.
금기를 범하려는 아버지.
제국에 재앙을 가져올 상자.
그리고 마족.
마족을 위한 역사.
이 방 안에 마족을 위한 길은 있을 것인가.
그녀가 고민하는 사이 황제와의 독대를 끝낸 마르할이 문을 열고 나왔다.
마르할의 몸을 감싸고 있던 바람이 흩어졌다. 왕관과 망토도 사라졌다.
불사와 태산을 힐끗 본 마르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마리나가 다녀갔네요.”
“꿈을 이뤘더라.”
“부럽네요. 베이는 어때요?”
“뭐를?”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족이 살 수 있는 세상.”
“할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요?”
베이올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레벨라나 유렐의 가족 같은 사람은 만들지 않아.”
“뜻을 세웠군요.”
뜻을 세우다. 많은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베이올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만 물어도 돼?”
“얼마든지요.”
“당신한테 나는 어떤 사람이야? 장난감? 이용하기 쉬운 도구? 아니면 지인?”
마르할은 대답을 망설였다.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던 마르할이 대답했다.
“저를 닮아서 보고 있으면 조금 괴롭혀주고 싶어지는 친구요.”
“그럼 됐어.”
베이올라는 시원스레 웃었다.
“그 물건은 저 안에 있지?”
“그게 뭔지 알고요?”
“네가 짊어지고 있던 마족과 마왕의 역사. 그리고… 내가 짊어져야 할 역사.”
마르할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베이올라는 스스로 문을 열고 황제가 기다리는 방으로 들어갔다.
마르할은 닫힌 문을 잠깐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말하는 것까지 그 망할 인간하고 닮아가지고.”
마르할은 눈을 감았다. 제도 성벽의 동서남북을 차지하고 있는 네 개의 거대 역사가 느껴졌다.
그리고 황궁에 있는 옛 마왕의 역사도.
“자, 다들 준비해요. 우리 예상보다 훨씬 평화로운 종막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 * *
베이올라는 빅토르마 므에실리고 2세를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황제는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녀를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도 찰나였다.
그는 바로 황제다운 위엄을 보이며 옥좌에 앉아 베이올라를 내려다보았다.
“너를 부른 이유를 짐작하고 있느냐?”
“네.”
베이올라는 짧게 대답했다.
“올라와라. 내 앞에 무릎 꿇어라. 너를 차기 황제로 임명하는 의식을 치르겠다.”
베이올라는 황제 앞에 무릎 꿇었다.
황제는 옥좌 뒤에 있는 검을 잡았다. 한때 전장을 누볐지만, 황제와 함께 나이를 먹으며 예식용으로 전락한 검이 예기를 뿜어냈다.
그의 앞에는 무릎 꿇은 베이올라가, 마왕을 죽인 용사가 있었다.
금발이 옆으로 갈라지며 새하얀 목이 드러났다.
황제는 고뇌했다. 그에게는 두 개의 수단이 있었다.
친족의 피와 바체아 제국 황제가 넘기고 간 성목으로 만든 상자.
무엇을 사용해야 보다 확실하게 인간을 초월할 수 있을까.
황제는 욕심이 많았다.
‘하나로 안 되면 둘 다 취하면 된다.’
지금 보다 취하기 쉬운 건 훤히 드러난 새하얀 목이었다.
황제는 검을 든 손을 높이 들었다.
‘단번에 자른다.’
황제의 사지에 므에트 제국의 역사가 깃들었다.
그는 제국의 힘을 담아 검을 휘둘렀다.
목이 칼날에 닿는 순간까지 베이올라는 움직이지 않았다. 검이 천천히 목을 파고들었다.
황제는 검을 멈출 기색이 없었다.
대동맥이 잘리기 직전 베이올라는 움직였다.
마왕이 된 교황의 검과 비교하면 황제의 검은 가볍고 허술했다.
베이올라는 검의 궤적에서 몸을 피해, 황제의 품에 있던 상자를 빼내 뒤로 물러났다.
황제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베이올라의 움직임을 모두 보지 못했다.
제국의 역사를 모두 짜낸 움직임이었다. 지금도 그의 몸에는 제국의 역사가 깃들어 있다.
그래서 더 화가 난 것일지도 몰랐다.
평정을 잃은 황제가 격정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게 무슨 물건인지 아느냐! 당장 놓아라!”
황제의 힘이 베이올라를 압박했지만, 베이올라는 이 세상이 아닌 저 먼 어딘가를 보는 눈으로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
“므에트의 업은 므에트에게.”
금단의 상자가 열렸다.
상자 안에서 때를 기다리던 마족의 역사가, 원한 서린 서부의 역사가 범람했다.
화산 폭발보다 뜨겁고 해일보다 장엄한 악의와 원념과 저주가 세상에 풀려났다.
황제와 베이올라는 상자의 내용물을 그대로 뒤집어썼다.
귓가에 속삭이고 뇌를 파고드는 저주 속에서도 베이올라는 태연했지만, 황제는 그렇지 못했다.
황제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이미 마왕과도 만났던 베이올라에게 저주와 원한은 익숙함을 넘어 친숙함의 영역에 있었다.
황제에게는 아니었다. 그는 너무 오래 절대자로 군림했다.
그에게 원한을 가진 이는 모두 황제의 역사를 장식하는 글귀 한 줄이 되었다.
“네가…!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느냐!”
황제가 소리쳤다. 목소리에 담긴 힘이 벽과 천장을 부쉈다. 하늘이 드러났지만, 해는 보이지 않았다.
베이올라는 굳은 의지를 담은 눈동자로 황제와 마주했다.
“당신의 욕심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어.”
“힘이 있는 자가 모든 걸 가지고, 어리석은 자는 모든 걸 잃는다. 그게 세상의 법칙이다. 바체아 제국은 어리석었다. 두 제국이 손을 잡고 세상을 나은 방향으로 이끌자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바체아와 므에트의 피가 섞이면 후에 일어날 일이 예상되느냐!”
황제가 피를 토하며 외쳤다. 저주에 침식되고, 마족의 역사에 저항하며 황제의 몸은 실시간으로 망가지고 있었다.
황제의 가슴에 붙은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더욱 거칠게 타오르며 베이올라를 향해 감정을 분출했다.
“바체아도 므에트도 서로의 권력을 두고 우리도 자격이 있다며 한 발 걸치려 하겠지! 그 뒤에는 전쟁밖에 없다. 서부와 동부를 모조리 쓸어버릴 대전쟁! 절대 권력은 오직 하나여야 한다! 단 하나의 권력! 그것만이 절대적인 진리다! 왜 그걸 모르느냐! 그 단순한 사실을 모르냐는 말이다!”
“그냥, 약해지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황제의 몸이 덜컥 굳었다.
자기도 몰랐던 사실을 지적받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바체아와 므에트의 정쟁. 바체아 제국을 멸망시키려던 당신이라면 그것까지 생각했을지도 몰라. 그런데 지금은? 성황국은 사라졌고, 공국도 예전 같지 않아. 므에트가 세계 최고야. 가장 강대한 국가의 차기 옥좌의 주인이 현 황제에게 살해당하면, 므에트 제국도 산산이 찢기겠지. 그건 무슨 의미야? 거기에도 당신이 말하는 진리가 있어?”
“…….”
“해준 것도 없는 아버지지만, 그래도 당신을 존경했었어. 현재의 제국을 만든 인물은 당신이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냥 추하네.”
“네가!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 입을 나불거리느냐! 네가 전쟁을 아느냐!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하는 사람의 심정을 아느냐! 나날이 쇠약해지는 육신의 비애를 아느냐!”
베이올라는 검을 뽑았다.
“몰라,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아.”
황제가 손에 든 검을 다급히 휘둘렀다.
수십 년을 황제와 함께한 검이 허무하게 잘렸다. 검에 지켜지던 황제의 몸도 반으로 갈라졌다.
내장을 쏟아내며 쓰러진 황제의 몸에 검은 안개가 달라붙었다.
베이올라의 눈에는 황제 빅토르마 므에실리고 2세의 역사가 검은 안개에 잡아먹히는 게 보였다.
황제는 죽었다. 그 역사조차 남기지 못하고.
땅에 떨어진 상자는 내용물을 모두 쏟아내고 텅 비었다.
대신 황궁이 악의와 저주를 가두는 거대한 상자가 되었다.
베이올라는 고개를 들었다.
강력한 신비가 황궁을 감싸고 있었다.
인간이 다룰 신비가 아니다. 그녀조차 넘보지 못할 힘이 담긴 결계였다.
이런 일이 가능한 사람은 세상에 다섯밖에 없다.
마르할은 아니었다.
결계에 담긴 역사는 마리나 실라나티엘의 것과 흡사했다. 마르 실라나티엘, 용사 일행의 마법사. 그녀였다.
‘피해가 적으면 좋은 일이지.’
베이올라의 검이 검게 물들었다.
여전히 그녀의 뜻은 변치 않고 굳건했다.
‘마족을 위한 역사.’
베이올라의 검은 점점 더 짙은 검은색으로 변해 마지막에는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어떠한 색으로 변했다.
베이올라는 마리나와 알라실을 떠올렸다.
몇 번인가 두 사람은 신비를 사용하며 주문을 외웠고, 주문이 동반된 신비는 그때마다 전투의 변환점을 만들었다.
베이올라는 차분한 마음으로, 뜻을 담아 입을 열었다.
“여기, 원수의 핏줄이 있다.”
결계에 갇혀 황궁을 떠돌던 검은 안개들이 정지했다.
베이올라는 수백만 쌍의 눈이, 서부의 역사가 자신을 훑어보는 감각에 소름이 돋았다.
서부의 원한을 한 몸으로 받으며 베이올라는 엄숙하게 선언했다.
“내가 너희의 원수다. 그리고 너희의 원한을 모두 받아줄 세상에 단 한 명뿐인 인간이다. 내 이름은 베이올라 므에실리고. 소일라 므에실리고의 동생이다.”
섬뜩하게 멈춰 있던 검은 안개가 움직였다.
그것들은 상자에서 빠져나올 때만큼이나 폭발적인 속도로 베이올라의 몸으로, 그리고 그녀의 검으로 빨려 들어갔다.
검은 안개를 따라 안개가 품고 있던 원한과 저주도 그녀의 몸으로 들어왔다.
귓가에 맴돌던 저주가 심장과 장기를 울리고 뇌를 흔들었다.
뜻을 세운 그날부터 베이올라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마법사들의 연구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들은 역사를 쌓을 줄은 알아도 바꿀 줄은 몰랐다.
신비 추적자의 마법사들은 물론이고 그녀가 따로 시간을 내서 만난 숲의 은둔자와 만년설 산맥의 얼음 일족도 이미 존재하는 역사를 뒤틀고 바꾸는 방법에 대해서는 몰랐다.
그녀의 지인 중 역사를 바꾸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딱 한 명 있긴 했다.
마리나 실라나티엘.
자기 팔다리를 제물로 바쳐가며 마왕을 죽이는 데 일조한 마법사는 말했다.
신이 된 율란과 인외의 괴물들을 제외하면 이미 존재하는 역사를 바꿀 수 있는 건 마족이 유일했고, 앞으로도 유일할 거라고.
그녀는 내심 답을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마왕은 모든 마족을 조종할 수 있다. 그 역사마저 마음대로 주무른다.
그러면, 그렇다면.
모든 마족을 구원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녀 스스로가 마왕이 된다.
모든 마족을 다스리는 자가 되어 마족의 역사를 직접 바꾼다.
그게 인간 베이올라 므에실리고가 세운 뜻이다.
형용하기 힘든 고통이 몰려들었다. 서부의 역사가 담긴 검은 안개는 몸과 정신 양면으로 그녀를 괴롭혔다.
서부의, 마족의, 세상 절반의 역사가 그녀에게 살의를 품고, 그녀를 죽이려 했다.
베이올라는 죽지 않았다. 쓰러지지 않았다. 무릎 꿇지 않았다.
세상 절반의 살의는 그녀를 죽이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를 죽이지 못하는 역사는 그녀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는 고통 속에서 베이올라는 견디고 견디고 또 견뎠다.
그녀가 세운 뜻은 여전히 그녀의 마음 안에서 부러지지 않았고, 뜻이 굳건한 이상 그녀는 무너지지 않는다.
그게 용사다.
* * *
마르할은 도둑의 기술로 몸을 숨긴 채 황궁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마르할 무느두스가 할 일은 모두 끝났다.
이제 용사 일행의 일원으로서 최후를 준비할 차례였다.
밤이슬과 레벨라가 별실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는 소리도 들렸다.
밤이슬은 예언자답게 레벨라에게 강요 아닌 강요를 하고 있었다.
베이올라가 할 선택과 그 파장을 설명했고, 레벨라는 가만히 그걸 듣고만 있었다.
예언자의 예언에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었다.
결과.
예언자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떠드는 결과가 밤이슬의 말에는 없었다.
운명이라는 틀에서 벗어난 존재들이 여섯이나 상황을 주시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황궁을 빠져나가던 마르할은 황궁을 가득 채우는 검은 안개와 황궁을 감싸는 결계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며칠은 걸릴 줄 알았는데.”
“황제가 미친 짓을 했거든.”
마르할 옆으로 아르고가 나타났다.
그는 양손에 든 단검을 손가락으로 빙빙 돌렸다. 단검에 응축된 신비가 태산마저 베어버릴 듯 강렬했다.
마르할도 오랜만에 보는 아르고의 진심이었다.
“무슨 짓?”
“황제 놀이 한다고 못 들었냐?”
마르할의 감각은 황궁 전체를 범위로 두고 있었다.
마르할이 황궁 내의 소리를 듣지 못한 건 황제와 독대하는 잠깐뿐이었다.
마리나와 베이올라가 만나 평범하지 않은 대화를 나눈 모양이었다.
“못 들었으니까, 잔말 말고 본론.”
“힘에 미친 노인이 기어이 금기를 범하려 했지. 그러다 패륜으로 뒈졌고.”
“상자를 연 사람은 누구야?”
“바스타의 제자 놈.”
옥좌 앞에서 일어난 일이 마르할의 머리에 그려졌다.
황제는 어떻게든 베이올라를 죽이고 금기를 범해 인외의 힘을 얻으려 했을 거다. 하지만 베이올라는 황제 따위에게 죽어 주기에는 너무 뛰어났다.
역으로 황제를 제압한 베이올라가 스스로 상자를 열었을 것이다.
“며칠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황제가 상자를 열고, 베이올라가 행동에 나서는 것 모두 시간이 필요하리라 예상했다.
적어도 마르할이 제도를 떠난 다음이 될 줄 알았고, 마르할도 한 번은 제도를 나가 다른 사람과 합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월은 늙은 황제에게 건강과 함께 인내심도 뺏어간 모양이었다.
이토록 빨리 일을 일으킬 줄이야.
“다른 사람들은?”
“바스타와 율란이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있고, 마르는 결계 유지.”
“형수님은?”
“대기 중. 차기 황제의 마지막 말을 듣고, 위험하다 싶으면 자기가 직접 나설 거라더라.”
마왕의 직위는 버렸지만, 소일라는 여전히 모든 마족에게 사랑받는다.
그녀는 존재 자체로 마족을 억누를 수 있는 억제제였다.
“나도 갈게.”
“가서 뭘 하려고?”
바람과 함께 마르할의 손에 오동나무 관이 만들어졌다.
관은 검게 물들어 황제의 오동나무 관이 아닌 마왕의 관이 되었다.
도둑이 눈을 끔뻑였다.
“다 상자에 담은 거 아니었냐?”
“마족의 역사랑 왕관의 역사는 별개지.”
마르할은 옥좌가 있던 방향으로 걸어가며 아르고에게 손을 흔들었다.
“왕에게는 왕을 증명하는 수단이 있어야지. 선대 마왕으로서 새로운 마왕에게 선물 하나 주고 올게.”
저건 마왕의 왕관인 동시에 바체아 제국 황제의 오동나무 관이었다.
둘은 하나고, 분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베이올라에게 왕관을 넘겨준다는 건 오동나무 관 또한 포기한다는 의미였다.
오동나무 관이 마르할에게 가지는 의미를 알기에 아르고는 놀라 물었다.
“그걸 준다고? 진짜로?”
“나는 이미 서부의 주인이고, 마르할 무느두스의 이름이 황제의 정통성을 증명해. 새로운 세계를 열려는 사람에게 주는 선물로 낡은 관 하나면 싸지.”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재수 없는 꼬맹이. 너는 왜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는 게 없냐.”
처음에는 입을 꾹 다물고 지옥과 같은 서부에서 바스타와 그의 뒤를 따라왔고, 용사 일행이 모두 모인 다음에는 온갖 불평과 잔소리를 늘어놓으면서도 끝내 그들을 마왕 앞에 데려다 놓았다.
언젠가 저놈만 빼고 넷이서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인외라 불리는 인간 넷이 입을 모아 말하기를, 마르할이 없었다면 여정은 불가능했다고 했다.
조그마한 녀석이 어금니가 부러지도록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는데 어른이 나가떨어지는 건 자존심이 상한다고 바스타조차 불평했다.
그의 앞에 있는 녀석은 그런 인간이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언제나 길을 찾아내는 세계 최고의 길잡이.
길잡이는 이번에도 길을 찾았다.
마르할이 길을 정하고, 그들이 길을 연다.
서부에서부터 이어지는 용사 일행의 역할이다.
“나도 일해볼까.”
바스타와 율란이 대피시키고 있지만, 서부 전역에 퍼져 있던 마족의 역사가 이 좁은 황궁에 집중되었다.
피해가 아예 없을 수는 없었다. 황궁에는 사람만이 아니라 식물도 있다. 검은 안개는 하나의 거대한 유물인 황궁도 먹어치울 것이다.
원념 섞인 역사에 몸을 빼앗긴 사람과 물건이 사방에서 살기를 보냈다.
아르고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서부의 망령들에게 말했다.
“여, 좆밥들. 우리가 왜 너희를 봉인했는지 아냐?”
마왕을 죽일 자신이 없어서?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11년 전 서부에서 용사 일행은 마왕을 죽일 방법이 없었고, 마왕을 죽여서도 안 되었다.
“한 20년 있으면 그냥 정면으로 싸워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거든.”
마족이 성장하듯 용사 일행도 성장한다.
시간만 주어지면 그들은 서부의 역사를 정면에서 깨부술 자신이 있었다.
용사 일행에게 필요한 건 시간과 무대였다. 시간을 벌고 무대를 마련하는 게 마르할의 일이었다.
“하여간, 길잡이를 하기 위해 태어난 놈이 아닐까 싶다니까.”
손가락 사이를 회전하던 단검이 아르고의 손에 잡혔다.
* * *
베이올라는 희미해지는 정신을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이미 그녀의 역사는 모두 잡아먹혔다.
베이올라 므에실리고의 역사, 마왕을 죽인 용사의 역사, 모두 마족의 먹이가 되었다.
자아가 희미해지고 베이올라 므에실리고라는 인간이 사라진다.
아니, 이미 사라졌다.
남은 건 마족에게 모든 역사를 잡아먹힌 또 다른 마족이었다.
베이올라 므에실리고의 껍질을 뒤집어쓴 마족은 인간이던 시절부터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소망 하나로 자의식을 유지했다.
‘뜻은 역사가 되리니. 내가 품고 있는 뜻은 역사가 된다.’
의지하는 한 베이올라 므에실리고는 마족에게 잡아먹히지 않는다.
누구도 베이올라 므에실리고를 세상에서 지울 수 없다.
“평생을 참아왔어. 앞으로도 영원히 참을 수 있어.”
손에 꽉 쥔 검이 진동했다.
마족을 위한 역사.
레벨라와 유렐의 가족, 그리고 수많은 죄 없는 사람들을 위해 버텨낼 것이다.
모든 증오를 한 몸에 품어 그들을 구할 수 있다면 베이올라의 뜻이 꺾이는 일은 없다.
베이올라는 양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잡고 허리를 세웠다.
고개를 든 베이올라는 눈을 크게 떴다. 하마터면 의식을 잃을 뻔했다. 그녀는 그만큼 놀랐다.
소일라 므에실리고가 검은 안개 중앙에 서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모든 걸 삼키는 검은 안개가 소일라가 나아가는 방향을 따라 길을 내어줬다.
“너는 늘 착한 아이였지.”
“소일라 언니…?”
“초대 마왕 소일라 무느두스. 이미 죽은 나는 사람들과 엮여선 안 되는 몸이란다. 이럴 때가 아니면 가족과 만나는 건 꿈도 꿀 수 없어.”
“정말 언니야?”
소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 길을 갈 거니?”
“응.”
“쉽지 않은 길이란다. 언제든 자신을 잃을 수 있어.”
“그래도 할 거야.”
“후회할지도 모르는데?”
“내 뜻이 곧 역사고, 역사는 곧 나야. 먼 훗날 후회할지도 모르지. 그래도 지금의 뜻과 선택과 역사가 빛바랠 일은 없어.”
“장하구나. 내 동생.”
소일라는 베이올라를 껴안았다. 전 마왕은 새로 마왕이 되어 그 무게를 견디려는 자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마족에게 사랑받는 자는, 마족을 사랑하는 자는, 그녀가 사랑하는 모든 것에게 자그마한 부탁을 건넸다.
“조금만 내 동생을 도와주렴.”
저주의 목소리가 줄었다.
원망이 사그라들고, 차갑던 검은 안개가 따스한 열기를 품었다.
베이올라는 본능으로 알았다.
사랑이었다. 소일라의 사랑이 마족을 진정시켰다.
저주의 주문 대신 다른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마왕님 납신다. 불만 있는 놈들은 떠들어봐라. 이 재앙님이 먼저 족쳐주마.
-나한테 잡아먹히기 싫으면 그녀의 말을 들어라!
목소리와 함께 마족들의 모습이 베이올라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서부에서 베이올라가 만나 싸웠던 마족과 닮은 외형을 하고 있었다.
‘저들이 원본이구나.’
교황이 만든 마족들의 진짜 모습. 그리고 그들이 품은 진짜 힘.
교황이 만든 가짜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들의 호령 한 번에 수백만 원혼이 겁을 먹고 물러났다.
홀로 일국을 통제하는, 실로 압도적인 역사였다.
베이올라는 한결 숨쉬기가 편해졌다.
하지만 아직 그녀는 마왕이 되지 못했다.
모든 마족의 역사를 통제하기에는 그녀의 힘이 부족했다.
“네 길을 만들어줄 사람이 왔단다.”
베이올라는 고개를 들었다. 소일라의 뒤편, 부서진 문 너머에서 마르할이 다가오고 있었다.
“제가 가고 바로 일을 벌일 줄은 몰랐어요.”
“빠를수록 피해자는 줄어들잖아?”
베이올라는 말을 듣지 않는 얼굴근육을 억지로 움직여 어색하게 웃었다.
마르할도 베이올라를 따라 웃었다.
마르할의 손에 검은 왕관이 잡혔다.
“마왕의 관….”
마족의 역사를 받아들인 베이올라는 마르할의 손에 들린 물건을 알아보았다.
바체아 제국 황제의 머리 위에서는 황제를 증명하는 오동나무 관이었으며, 마왕의 머리 위에서는 마왕을 증명하는 마왕의 관이 된 물건이었다.
“맞아요. 베이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물건이죠. 그런데 형태도 없는 물건을 선물로 주기는 조금 그렇죠?”
마르할은 이 상황에서도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던 성목으로 만든 상자를 땅에서 주웠다.
마족을 품고 있던 상자와 마족을 지배하는 관이 만났다.
바람이 상자를 감쌌다. 역사를 바꾸는 마족의 힘이 상자의 외형을 바꿨다.
상자가 늘어나고 휘어지며 검은 왕관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왕관을 감고 있던 바람이 왕관으로 스며들었다.
오동나무 관과 마족의 관이 하나로 합쳐져 검은 왕관에 깃들었다.
“성지에 남아 있던 마지막 성목을 재료로 바체아 제국 황제의 상징인 오동나무 관의 역사와 마왕이 썼던 마왕의 관의 역사를 담은, 당신만을 위한 관이에요.”
소일라가 베이올라의 등을 떠밀었다.
베이올라는 마르할의 앞에 섰다.
“자요.”
“이걸 받아도 돼? 오동나무 관의 역사라면….”
“이제 저도 못 써요. 이건 마왕을 위한 관이니까요.”
마르할은 베이올라의 손에 억지로 왕관을 들려주었다.
왕관을 쥔 순간 그녀의 몸 안에서 떠들던 모든 목소리가 침묵했다.
서부를 집어삼킨 마족의 역사가 바체아 황가의 권위와 선대 마왕의 사랑 앞에 복종했다.
마르할이 멍하니 왕관을 든 베이올라를 재촉했다.
“자, 어서.”
베이올라는 망설이며 왕관을 머리에 썼다.
서부에 인정받고, 동부의 정통성을 가진 마왕이 탄생했다.
세계가 진정한 마왕의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