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thless Regression RAW - chapter (232)
“이야기는 건너 들었습니다. 적색 마탑주님의 친구분이시라죠?”
“그렇습니다.”
왼팔이 잘리기는 했지만 취걸은 쾌활했다. 팔이 잘리고서 몇 년이나 흘렀으니 외팔이 신세에 제법 익숙해진 것이리라.
취걸은 오른손을 내밀어 이성민에게 악수를 청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직 토벌을 위해 출발하지는 않았으니, 그때까지 많이 친해졌으면 좋겠군요.”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취걸이 날이 선 태도를 보이지 않았기에, 이성민도 빙그레 웃어주면서 취걸과 손을 맞잡았다.
악수가 끝나고서 취걸은 이성민을 지나쳐 아래로 내려갔다.
이성민은 내려가는 취걸의 등을 힐긋 보고서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방은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깨끗했다. 풀을 짐이란 것도 딱히 없었기 때문에, 이성민은 창가 쪽에 서서 아래를 보았다.
널찍한 뒤뜰이 훤히 보였다. 뒤뜰에는 모용세가의 무복을 입은 남자들이 똑같은 동작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합격진이로군.’
생각해 보면 제대로 된 검진을 상대해 본 적은 없다. 진법에 대한 경고는 몇 번인가 들었던 적이 있기는 하다.
아무리 초월지경의 고수라고 해도, 뛰어난 진법을 상대로 한다면 고전하게 된다는 경고.
진법을 내려다보던 이성민은 더 이상 관찰하지 않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만약 정체가 들통난다 하더라도, 이성민은 모용세가와 충돌할 생각은 없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역시 정체가 탄로 나지 않고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이지만.
만약에 들키게 된다고 하여도, 충돌하는 일 없이 몸을 뺄 생각이었다.
물론 생각대로만 잘 풀릴 것이라고 과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세찬 눈바람 덕에 창문은 텅텅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런 시끄러움 속에 이성민은 정좌하고 앉아 명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해가 저물 즈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이성민은 감고 있던 눈을 뜨고서 몸을 일으켰다.
“예.”
열린 문 너머에는 앳된 얼굴의 소년이 서 있었다.
이성민은 소년의 얼굴이 어쩐지 낯이 익다고 느꼈다.
“누구십니까?”
“모용찬이라고 합니다.”
모용세가주의 막내아들이다. 이성민은 살짝 머리를 끄덕거리며 울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슬슬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혹시 식사를 하셨나 여쭤보러 왔습니다.”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만……?”
“가주님께서 함께 식사를 하지 않겠느냐 물으셨습니다.”
그 말에 이성민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같이 밥을 먹자, 는 것은 호의의 표시일 터.
초면인데 식사 자리에 초대한다는 것은…… 앞으로 더 친분을 쌓고 싶다는 뜻일까?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이성민은 모용찬의 얼굴을 응시했다.
아끼는 친아들을 직접 보냈다.
잠깐 고민하던 이성민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이런 노골적인 호의를 거절하는 것은 무례한 일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따로 준비할 것은 없었기 때문에, 이성민은 방문을 닫고 나왔다. 모용찬은 아직 초절정의 수준에 들지는 못했으나, 가진 자질도 뛰어나고 모용세가의 소공자로서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테니 이십 대에 초절정에 당연히 입문할 것처럼 느껴졌다.
‘모용서진의 동생.’
모용서진에게 특별한 인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다만, 남궁희원이 모용서진을 연모하였으니까. 그리고 괜한 누명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 전부다.
모용찬은 기억 속의 모용서진의 얼굴과 많이 닮아 있었다.
모용세가주인 모용대운에게 자식은 모용서진과 모용찬 둘뿐이다.
모용서진이 죽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모용찬뿐이다. 하나뿐인 아들을 위험할지도 모르는 토벌전에 데리고 왔다는 것은, 이 토벌전이 모용세가가 보기에는 그리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일까.
모용찬이 이성민을 데리고 간 것은 여관에서 멀지 않은 식당이었다. 모용찬은 식당으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갔다.
“무례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
식탁 너머에 앉아 있던 모용대운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 말에 이성민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헤도르. 이 도시에 온 것은 오랜만이지만, 나는 이 도시에 올 때마다 항상 이 식당에서 식사를 하곤 하네.”
모용대운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음식 맛이 꽤 좋아. 내 딸아이도 이곳의 음식을 제법 좋아했었지.”
“……안타까운 일이었지요.”
“괜찮네. 벌써 몇 년 전이니까.”
모용대운은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말하는 주제에 그는 여전히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상복 같은 검은 옷을.
모용찬은 모용대운의 옆자리에 앉았고, 이성민은 모용대운이 권하는 대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대라고 할 것까지야.”
이성민의 말에 모용대운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단순히 말동무가 필요하여 부른 것뿐이네.”
말 그대로의 의미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말동무라면 이성민을 제하고도 얼마든지 있을 것 아닌가.
이성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용세가의 무사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취걸을 비롯한 다른 무림맹의 무사들은 보이지 않는다.
‘뭘 바라는 걸까.’
음식이 나왔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갈한 음식들이었다. 식사가 시작되었다. 말동무가 필요하여 불렀다지만, 모용대운은 식사하는 동안 이성민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이거야 원.”
식사 도중, 모용대운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자네의 이름도 묻지 않았군.”
“이민철이라고 합니다.”
이성민은 미리 생각해 두었던 가명을 말했다. 그 말에 모용대운은 잠깐 동안 침묵하였다. 이민철이라는 이름에 대해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군.”
“소문이 날 법한 행동은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 정도 실력의 고수라면 소문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을 텐데?”
“가진 재능이 대단하지 않아, 대부분을 무공을 단련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스칼렛 님과 만나 인연을 맺었지요.”
“재능이 대단하지 않다…… 그 말은 솔직히 믿음이 잘 안 가는군. 자네 나이가 몇이지?”
“이제 스물일곱입니다.”
“그 나이에 초절정 고수가 되었다면 결코 재능이 부족하지 않아. 평생 무공을 단련해도 초절정에 들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하지 않나.”
모용대운이 큭큭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지. 나는 자네에게 무척이나 관심이 있고, 또 욕심을 갖고 있네.”
“욕심…… 말입니까?”
“만약 나에게…… 다른 딸이 있었다면. 자네와 혼인하게 했을 정도로 말이야.”
그 말에 이성민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에 대해 고민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에게는 딸이 없지. 아들 하나만 남았을 뿐이야.”
“……음. 아직 혼인 생각은 없습니다만.”
위지호연이 죽이려 들 것이다.
“그만큼 자네가 욕심이 나는 인재라는 것일세. 소속된 문파도 없으니 더욱 욕심이 나는 것이지. 초절정 고수라는 것이 이 세상에 제법 많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무시 받을 정도는 아니지 않나? 특히나 자네는 아직 이십 대니까 가능성이 무궁무진해.”
“높이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을 말하는 것뿐일세. 그래서 욕심이 나는 것이야. 모용세가의 식객이 될 생각은 없나?”
모용대운이 넌지시 물었다. 그 말에 이성민은 잠깐 주저하다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어딘가에 정착할 마음이 없습니다.”
“아쉽군…… 정말 아쉬워. 혹시라도 생각이 바뀐다면 모용세가를 방문해 주게. 자네라면 최상의 대우를 해줄 테니까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모용대운은 진심이었다.
“아니면, 내 핏줄은 아니어도 모용세가 내에는 모용씨를 가진 여아들이 많아. 외모가 출중한 아이들도 많지.”
“괜찮습니다.”
“하하! 너무 칼같이 거절하는 것 아닌가? 그래도 말만이라도 하게 해주게. 혹시 모르지 않나, 모용세가의 아이들 중에서 자네의 마음이 동할 만한 아이가 있을지도.”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모용세가를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모용대운이 태도를 굽힐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이성민은 한발 물러서서 모용대운의 말을 받아주었다.
그러자 모용대운이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식사를 끝내고서, 이성민은 모용찬과 함께 식당을 나섰다.
바로 건너편이 여관이니까 데려다줄 필요는 없다고 말했지만, 모용대운은 굳이 자신의 아들을 보내어 이성민을 배웅하게 만들었다.
그 나름대로 호의와 친분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려는 것이리라.
“가주님의 말은 깊이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식당을 나섰을 때, 모용찬이 말했다. 이성민은 쓰게 웃으며 머리를 끄덕거렸다.
“짓궂은 농담을 즐기시는군요.”
“농담으로 하신 말은 아니겠지만…… 누님의 죽음 이후로 가주님은 많이 변하셨습니다. 언제나 검은 옷을 입으시고, 억지로 웃음을 지으시고.”
가주이기 전에 친아버지이기에, 모용찬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열다섯이라는 나이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모용공자는, 왜 이곳에 온 겁니까?”
“예?”
내심 궁금했던 것에 대해 묻자, 모용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성민을 보았다.
“이 토벌전. 제법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제 한 몸 지킬 무공은 가지고 있습니다.”
이성민의 말에 모용찬이 정색하고서 대답했다. 아무래도 이성민이 한 말을 잘못 이해한 듯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성숙하다고는 해도, 대뜸 자존심을 세우는 면을 보면 열다섯답게 느껴지긴 했다. 이성민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모용공자의 실력이 부족하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위험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모용서진과 제갈공자 때의 비극도 있었고.”
“……그렇다고 귀창이 이곳에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만약 귀창이 눈앞에 나타난다면, 저는 귀창을 죽여버리고 말 것입니다.”
[잘도 그러겠다.]허주가 이죽거렸다.
“그리고, 이 토벌전은 그리 위험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인 사람들도 많으니 흑마법사 하나는 어렵잖게 죽일 수 있겠지요.”
“……그렇습니까?”
모용찬이 덧붙이는 말에 이성민은 머리를 살짝 끄덕거렸다. 저들은 김종현을 우습게 보고 있다.
하긴, 우습게 보일만도 할 것이다. 토벌을 위해 모인 세력만 해도 마법병단에 무림맹, 모용세가, 교회, 용병까지 해서 다섯이다.
이미 이 마을에 김종현을 잡기 위해 모인 이들만 해도 수백 명에 달하고 있다.
식당에서 여관까지의 거리는 짧다. 그 얼마 되지 않은 짧은 거리. 여관까지 도착하기 전에, 이성민은 걸음을 멈추었다.
모용찬은 갑자기 걸음을 멈춘 이성민을 의아하다는 얼굴로 보았다. 이성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서 어두운 골목을 응시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모용찬이 머리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성민은 골목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그리 대단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아닌데. 왜 엿듣고 계십니까?”
그 말에 골목 너머에서 크흠, 하는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어둠 속에서 걸어나온 것은 착 달라붙는 검은 옷을 입은 당아희였다.
당씨 세가주의 딸인 독접. 모용찬은 당아희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의 실력으로는 당아희가 모습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냥, 밤 산책을 나왔다가.”
“밤 산책을 희한하게 하시는군요. 차라리 은신술을 수행하고 계셨다 하지 그러십니까.”
“은신술도 수행하고 있었답니다.”
이성민이 이죽거리는 말에 당아희가 뻔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용찬이 정색하고서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왜 엿들으신 겁니까?”
“엿들었다고 할 만한 내용도 아니었잖아요? 그리고 뻔히 들리게 말했으면서 뭘 엿들었다는 거예요?”
“그건…….”
“모용세가 쪽의 볼일은 끝나셨나 보죠?”
당아희는 모용찬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이성민을 보았다. 그녀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이성민을 향해 시선을 날렸다.
“식사는 이미 하신 모양이고, 사실 저도 이미 먹었거든요. 밤공기가 좋으니까…….”
싸늘한 북쪽의 바람에 눈발이 섞여 있었다.
“어때요? 술이라도 한잔하시는 것이. 마침 저한테 좋은 술이 있거든요.”
“아.”
좋은 술, 하니 떠오른 것이 있었다. 예전에 허주의 보물을 챙겼을 때, 무한한 미주가 나온다는 호리병을 챙겨두었던 기억이 났다. 그것을 떠올리자 허주가 발작하여 외쳤다.
[맞아, 호리병! 이 개새끼, 왜 그걸 한 번도 안 쓰는 것이냐?!]‘술 먹을 시간이 없었잖아.’
[술은 없는 시간을 내서라도 마시는 것이다, 이 잡놈아!]‘술 안 마셨다고 그런 욕까지 들어야 하나?’
[닥치고 오늘 밤에는 그 술을 마셔보도록 해라. 나도 술맛 좀 보게!]이성민은 머릿속에서 날뛰는 허주의 목소리를 외면하면서 머리를 가로저었다.
“저는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만.”
“어머…… 술을 그리 즐기지 않으시나 보죠?”
“예.”
왜 쓸데없이 철벽이야? 당아희는 미간을 찡그리면서 이성민을 보았다.
“그래도 한잔하시는 것이 어때요? 처음 만났으니까 친해도 질 겸.”
“술로 친해지는 것은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그냥 어울려 주시는 게 어때요?”
“죄송합니다.”
이성민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거절했다. 그 말에 당아희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그러면 차라도 한잔하죠.”
“목이 마르지는 않은데…….”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몰라서 그러시는 건 아니죠?”
“알죠. 저랑 친해지고 싶다는 것 아닙니까.”
“아는데 왜 그래요?”
“당소저가 왜 저와 친해지고 싶어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관심이 있으니까.”
“나한테? 아니면 내가 소속 없는 고수라는 것에?”
이성민이 웃으며 묻자, 당아희의 말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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