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thless Regression RAW - chapter (29)
므쉬의 산-4
에리아에 살아가는 이계인들 중에서 자신의 이름을 전역에 떨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한 지역이라면 몰라도 전역에 이름을 떨칠 정도라면 대단한 실력을 가진 고수이면서, 동시에 ‘소문’을 만들어 낼 정도의 행보를 해왔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묵섬광’ 백소고는 그 둘 모두에 해당되는 고수였다. 이름과 별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무림 출신이다. 그녀의 출신지인 무림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백소고는 다른 이계인들이 그러하듯이 혜성처럼 등장하여 갑자기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묵섬광 백소고에 대해 이성민이 들었던 것은 그가 용병 일을 막 시작했을 때였다. 즉, 아무리 늦어도 백소고는 앞으로 2년 뒤에는 므쉬의 산을 떠나 세상으로 나간다는 뜻이다.
‘하지만 죽어.’
이성민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백소고의 죽음은 예지되어 있다. 그것은 절대적이라고 해도 좋다.
이성민의 전생에서, 묵섬광 백소고는 죽었다. 다름 아닌 소천마 위지호연이 묵섬광 백소고를 죽인다.
앞으로 8년 뒤에.
이성민은 앞쪽에서 걷고 있는 백소고를 보았다. 지금의 이성민은 ‘무거움’에 대한 금제를 받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백소고가 장기로 삼은 것은 ‘빠름’이다. 전생에서도 그랬다. 묵섬광이라는 별호는 백소고가 정말로, 섬광처럼 빠르기 때문에 붙었던 별호다. 이성민이 백소고를 알고 지낸 근 3주일 동안, 이성민은 백소고가 얼마나 빠른지 잘 보았다. 무거움에 대한 금제 덕분에 사냥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던 이성민과는 다르게, 백소고는 산에서 살아가는 날렵한 짐승들을 너무나도 쉽게 잡았다.
그런 백소고의 움직임은 이성민은 제대로 쫒을 수도 없었다.
[너무 느리군.]백소고가 발을 멈추었다. 그녀는 나뭇가지를 빼다가 땅 위에 글자를 적었다.
[업어줄까?]“…예?”
[봤으면서 되묻기는. 네가 너무 느리니, 내가 그냥 업겠다는 거야.]백소고가 다시 글을 적었다. 이성민은 잠깐 동안 머뭇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여자인 백소고의 등에 업히는 것이 모양새가 조금 안 좋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알량한 자존심을 챙길 때도 아니었기에, 이성민은 결국 머리를 끄덕거렸다. 백소고가 이성민을 등에 업었다. 이성민은 양 손으로 백소고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선인.
착한 사람.
자칭하기에는 조금 우스운 말이지만, 이성민이 보는 백소고도 선인이라 하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3주일 동안 이성민을 위해 대신 사냥을 해주었다. 고기만 먹는 것은 몸에 좋지 않다면서 먹을 수 있는 나물 따위를 가져다주기도 하였고, 물을 구할 수 있는 곳도 알려 주었다.
그러면서도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 백소고는… 위지호연과 비슷하면서 조금은 달랐다. 엄밀히 말하자면 위지호연이 이성민에게 베풀었던 호의는, 둘이 ‘친구’라는 관계로 얽혀 있기 때문에 베푼 것이었다.
그렇다면 백소고는?
이성민과 백소고는 친구인가?
‘모르겠어.’
친구라는 것이 둘 중 누구 하나가 선언하면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성민은 친구의 경계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모른다. 전생에서도 친구가 없었는데 그걸 어찌 알겠는가.
친구인가, 아닌가를 떠나서. 백소고는 선의는 고맙다.
한 달.
고작해야 한 달이지만, 이 산에서의 한 달은 전생의 13년을 통틀어서도 제일이라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끔찍했다. 백소고의 선의가 없었더라면 버티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죽어.’
다른 사람이 죽이는 것도 아니다. 소천마 위지호연. 이성민이 이번 삶에서 얻은 첫 번째 친구. 그 위지호연이 백소고를 죽인다.
왜?
대체 왜?
생각해 본다. 백소고가 왜 죽는가. 백소고를 죽인 사람은 위지호연이다. 그것은 오해 따위가 아니다.
소천마 위지호연의 이름을 에리아 전역에 떨치게 된 계기가, 바로 백소고를 죽이면서 부터였기 때문이다.
‘아니. 백소고 뿐만이 아니야.’
그 ‘사건’은 기억하고 있다. 이성민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일이겠지만, 그 사건 자체는 당시 하급 용병이었던 이성민조차 가슴을 떨게 할 정도로 에리아를 통째로 뒤흔들었다.
던전.
그것은 에리아 각지에 존재하고 있다. 던전은 온갖 종류의 마법이 얽혀 있는 곳이다. 던전 속의 몬스터들은 죽여도 일정 시간이 지난다면 다시 ‘만들어지고’, 던전의 몬스터는 다른 일반적인 몬스터들과는 다르게 시체를 통해 전리품을 획득할 수는 없다.
대신에, 던전의 몬스터들은 시체가 아닌 다른 전리품을 내려놓는다. 영약, 무공 비급이나 마법서적, 포션, 혹은 강력한 마법이 걸려 있는 아티펙트나 뛰어난 무기와 방어구 등이 던전의 몬스터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전리품이다.
그리고 그 던전의 끝에는 그보다 더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 마지막 보상을 얻게 된다면 던전에 걸린 마법이 사라지면서 던전 자체가 소멸한다.
8년 후. 에리아에 한 던전이 공개된다. 묵섬광 백소고 뿐만이 아니라, 그 시기에 에리아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많은 거인들이 그 던전의 보상을 얻기 위해 들어간다.
하지만 최후에 던전에서 살아 나오는 것은 위지호연 뿐이다. 위지호연이 그 던전에서 무엇을 얻었는지는 모른다. 위지호연 본인이 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상에 대해서는 침묵하였어도 위지호연은 다른 것에 대해서는 입을 열었었다.
던전에 들어갔던 이들은 모두 자신이 죽였노라고.
백소고의 걸음이 멈추었다. 이성민의 ‘무거움’은 이성민 본인만이 느끼고 있는 것이고, 백소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산길을 꽤 멀리 달렸는데도 백소고의 호흡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백소고가 등에 업고 있던 이성민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이성민은 생각을 멈추고서 땅으로 내려왔다. 바닥에 발이 닿으니 몸의 무거움에 무릎이 살짝 굽혀졌다.
“걘 또 뭐야?”
날카로운 목소리가 다가왔다. 쉭! 눈앞에서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윽…!”
여자가 등장함과 동시에 강렬한 악취가 이성민의 코를 찌른다. 이성민은 코를 일그러트리면서 코끝을 부여잡았다. 백소고조차도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것들!”
여자가 내뱉었다. 그녀의 몰골은 가관이었다. 긴 머리카락은 떡 지고 지저분하게 엉킨 뿐만이 아니라 흙먼지를 비롯한 다양한 지저분함이 묻어 본래의 색을 알아 볼 수가 없었다.
머리카락뿐만이 아니다. 얼굴도 땟국물이 좔좔 흐른다. 걸친 옷은 로브처럼 보였지만 누더기나 넝마라 부르는 것이 차라리 어울렸다.
‘뭐 이리 더러워…?’
“백소고. 이 빌어먹을 벙어리 년아. 저 꼬마는 뭐냐니까?”
여자가 입을 벌릴 때마다 시궁창 같은 악취가 풍겨온다. 깨끗하게 씻고 차림을 멀쩡히 한다면 상당한 미인일 것 같은데, 전신에서 악취를 내뿜고 몰골이 저따위니 미인다운 아름다움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백소고가 나뭇가지를 빼들었다.
[우선 소개를 해야겠군. 저 더러운 아가씨의 이름은 스칼렛. 마법사다. 이 소년의 이름은 이성민.]“이성민? 무림인이야?”
[아마도.]백소고가 글자를 적어 대답했다. 마법사라니. 수행자라고 하기에 당연히 무림인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마법사도 있을 줄이야.
“…이성민이라고 합니다.”
“스칼렛. 미리 말해두는데, 내가 받은 금제는 ‘씻지 않는 것’이야. 목욕은 고사하고 양치질도 못해. 그래서 이런 몰골이지.”
스칼렛이 내뱉었다. 그녀는 눈가를 벅벅 문질러 달라 붙은 눈꼽을 때어냈다.
“최근에는 ‘갈아입지 말 것’의 금제도 받았고. 그러니까, 알겠어? 내 몸에서 냄새가 나는 것은 금제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거야.”
“아… 알겠습니다.”
스칼렛이 쏘아붙이는 말에 이성민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뭐라고 더 말을 하고 싶었어도 스칼렛에게서 풍기는 악취 때문에 더 묻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벙어리 새끼야. 여기는 왜 온거야?”
[이 소년이 다른 수행자들에 대해 궁금해 하더군.]“하! 이상한 걸 궁금해 하네. 왜? 다른 사람들이 어떤 금제를 받고 있는가 궁금했던 거야?”
스칼렛이 이성민을 홱하고 돌아보았다. 그녀가 머리를 돌릴 때마다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스칼렛의 머리카락에서 날리는 비듬이었다.
“아니… 그건 아닙니다. 그냥, 같은 처지니까 알아나 두고 싶어서…”
“같은 처지? 이 꼬맹이 말하는 것 좀 봐. 야! 난 여기서 벌써 반 년 넘게 살고 있거든? 어디서 맞먹으려고 들어?”
스칼렛이 주먹을 들어 올리더니 이성민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콩! 그리 아프지는 않았지만 더러운 주먹이 정수리에 닿는다는 것이 불쾌했다.
[너무 그렇게 말하지는 마. 이 소년이 산에 들어온 것은 한 달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 소년은 두 개의 금제를 받았다.]백소고가 글자를 적었다. 그것을 본 스칼렛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금제를 두 개나 받아? 이거 완전 미친 또라이 새끼 아냐? 왜 그런 미친 짓을 한 거야?”
“어… 그래야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도움? 미친 새끼!”
스칼렛이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꼬마야. 이 산에서 반 년 넘게 버티고 있는 수행자는, 나랑 저 벙어리 년을 포함해서 넷이야. 그 중에서 처음부터 금제를 두 개나 건 미친놈은 저 벙어리 년 뿐이었지.”
“…예?”
이성민이 놀란 표정을 하고서 백소고를 돌아보았다. 백소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을 하고서 바닥에 글자를 적었다.
[목소리와 전음. 이 두 개가 내가 받은 금제다.]어쩐지. 절정의 수준은 넘었을 백소고가 전음을 안 쓰는 것이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런데 저 벙어리 새끼 같은 미친놈이 하나 더 들어왔네. 네가 얼마나 버틸지는 모르겠지만.”
스칼렛은 그렇게 말하고서 홱하고 몸을 돌렸다. 그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스칼렛님은 무슨 수행을 하고 있는 겁니까?”
이성민의 질문에, 백소고가 질문을 되돌려 주었다.
“…무공의 성취를 얻기 위해서요.”
[그렇지. 이 산에 들어 온 자들은 시련과 고행의 끝에 무언가를 얻기 위해 버티고 있는 거야. 나도 무공의 성취를 바라고 있고, 스칼렛은 마법의 성취를 바라고 있지.]백소고가 다시 이성민을 업었다. 백소고에게 업혀 이동하면서, 이성민은 스칼렛이라는 이름에 대해 기억해 보았다.
‘아.’
떠올랐다.
스칼렛 레시르. 전생의 이성민이 죽을 때까지 살아 있었으며, 그녀 자신의 이름을 내건 ‘레시르 학파’를 창립한 대마법사.
‘뭐 이래?’
백소고도 그렇고, 스칼렛도 그렇고.
반 년 이상 이 산에서 버틴 자들은 모두가 에리아에 이름을 떨친 거물들이었다.
“백소고. 너구나.”
스칼렛 다음으로 만난 것은 노인이었다. 그는 등을 돌리고 있었고, 까마득한 절벽의 끝에 서있었다.
“너 말고 다른 이도 있는 것 같은데. 그 아이는 누구냐. 설마 너처럼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
노인이 몸을 돌렸다. 이성민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노인의 얼굴은 상처투성이였다. 얼굴 뿐만이 아니다. 보이는 모든 피부에 상처가 얽혀 있다.
[저 노인장의 금제는 ‘시력’이야.]앞을 보지 못하는 노인. 그는 뒷짐을 진 자세 그대로 뚜벅뚜벅 앞으로 걸었다. 눈이 보이지 않을텐데, 그는 이성민과 백소고를 향해 똑바로 걸어 왔다.
[그러니 네가 내 말을 전해줘야 해. 아. 저 노인장의 이름은 독비준이야.]독비준.
독비준?
‘검귀劍鬼!’
이성민이 비명을 삼켰다.
또 다른 거물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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