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thless Regression RAW - chapter (310)
316화 75. 마왕(2)
당황은 짧았다.
아벨은 왜 김종현이 멀쩡한 모습으로 부활했는지, 왜 자신의 마법이 김종현을 죽이는 것에 실패했는가에 대한 이유를 확실히 알았다.
준 마왕. 북쪽에서의 의식은 완전히 성공하지 못했다. 완전히 성공했더라면 김종현은 완전한 마왕이 되어 이 세상에서 추방되었겠지만. 의식이 실패한 덕에 마왕으로서의 힘을 가진 채로 이 세상에 남아 버렸다.
김종현이 가진 마왕으로서의 힘은 완전하지 않다.
마계에 군림하는 진짜 마왕들과 비교하자면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마법사로서의 능력도 아벨보다는 못하다.
방향성이 다른 것이겠지만, 카인을 노리고 대마법사 전에 수백 년을 매진한 아벨은 마법사 전투라는 분야에 있어서는 김종현보다 우월했다.
하지만 김종현보다 마법 전투가 능하다 해도, 정작 김종현이 죽지 않는 불사의 존재라면 의미가 없다.
‘마왕보다 힘은 부족해. 하지만……. 빌어먹을. 불사를 획득했단 말인가?’
아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빠르게 수인을 맺으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빠드드득! 땅바닥이 박살나고서 식물의 줄기가 김종현의 몸을 휘감으려 했다. 그러자 김종현은 웃으면서 손을 휘저었다.
푸확! 김종현을 중심으로 퍼진 회색의 빛이 식물의 줄기를 가루로 만들었다.
아르베스의 멸혼 마법이다. 그 후에 김종현이 본격적으로 그리모어의 마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왕을 위한 마도서다. 그것은 규격 외의 마법이다. 준 마왕인 김종현이라 해도 모든 것을 펼칠 수는 없다.
“금禁한다.”
김종현이 입을 열었다. 언령. 에리아에서는 드래곤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마법이다. 드래곤 따위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마왕이 사용하지 못할 리가 없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다고 해도.
아벨이 술식의 완성 직전에 개입하여 디스펠을 펼친다면, 김종현이 사용하는 그리모어의 언령은 다르다. 금한다. 다가오는 멸혼 마법을 상대로 아벨이 펼쳤던 실드가 사라졌다. 김종현의 언령에 의해 순간적으로 아벨의 마법 능력이 상실된 탓이었다.
“큭?!”
부유 마법으로 공중에 떠 있던 아벨의 몸이 크게 휘청거리더니 추락했다.
아르베스의 멸혼 마법이 아벨을 덮쳐 온다. 그리모어의 언령으로 마법을 금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몇 초. 그 몇 초만으로도 충분하다. 마법 능력이 상실 된 아벨은 죽이기 쉬운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으니까.
“야!”
프라우가 고함을 질렀다. 귀혼술의 노예가 된 좀비들이 아우성을 치며 땅을 박차 도약했다.
그들은 몸을 던져서 아벨을 노리는 김종현의 멸혼 마법을 대신 맞아 주었다.
흔적도 남지 않고 소멸한 좀비들을 보며 김종현은 혀를 찼다. 그래, 이곳에는 아벨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주술사를 굳이 이곳까지 불러 온 것은 좀비들이나 상대하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겠지.
‘주술과 마법은 방식이 달라. 그리모어의 금제로도 주술은 금제할 수가 없다.’
그것을 위해 프라우를 데리고 온 것인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아벨은 그리모어에 대체 어떤 마법이 있는지 모른다.
프라우를 데리고 온 것은, 아벨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 중에서 그녀가 가장 가까웠기에. 그리고 마법이 아닌 주술로 김종현을 압박하는 것이 가능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고맙다.”
땅에 추락 직전에 아벨은 다시 부유 마법을 펼쳤다. 순간이나마 등골이 서늘했다.
설마 그리모어의 능력으로 마법 능력을 금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아벨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했다. 대처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리에스의 결계를 사용한다면 그리모어의 금제에 저항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효율이 좋지 않다. 마왕으로서의 힘을 가진 김종현은 그리모어의 마법을 사용하는 것에 그리 큰 패널티를 갖지 않는다. 하지만 아벨은? 그리에스의 결계는 사용하는 것만으로 그의 수명을 앗아간다.
이제 와서 수명이 아까운 것은 아니다. 아까웠다면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벨의 수명은 무한하지 않다.
그리에스의 마법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종언에 대해 알아보려 한 탓에, 그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 수명을 무의미하게 소모했다가는 김종현의 마법을 빼앗는 것은 불가능해 진다.
‘프라우가 김종현을 감당할 수 있을까.’
프라우는 뛰어난 주술사다. 하지만 준 마왕으로서 불사력까지 가지고, 그리모어의 마법과 아르베스의 흑마법을 다루는 김종현을 상대로는 고전할 수밖에 없다. 아벨은 이성민을 떠올렸다. 볼란데르와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인가.
‘언제까지냐?’
지금.
다시 하늘로 날아오른 아벨은 다가오는 존재감을 느꼈다. 멸혼 마법을 펼치려던 김종현도 굳었다. 아벨을 신경 쓰느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볼란데르가 소멸했나?’
프레데터의 검은 별 중 하나가 저물었다고? 김종현은 가늘게 뜬 눈으로 아벨의 뒤편을 바라보았다.
창을 어깨에 비껴 멘 이성민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피로가 쌓인 눈으로 앞을 보았다. 멈춘 좀비의 군단과 그 위에서 검은 로브를 흩날리고 있는 김종현. 땅에 서있는 프라우와 알라두르. 김종현과 대치하고 있는 아벨.
[네가 볼란데르를 정리한 동안 이쪽의 상황도 정리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솔직히 그것을 바라기는 했다. 이성민은 쓰게 웃으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김종현은 다가오는 이성민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도 지금의 상황이 더 이상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지금의 그에게는 볼란데르도, 데스나이트 군단도 없다. 좀비들이 있기는 하지만 저깟 놈들로 자신의 적들을 위협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알았다.
“볼란데르는 어디에 갔습니까?”
“죽어서 돌아갈 곳으로.”
이성민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맙소사. 여유를 부릴 수 없는 상황에서도 김종현은 웃음을 흘렸다. 애초에 그에게 있어서 자신의 성공여무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는 그 자신이 해보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 일을 하면서 자신이 즐거워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물론, 김종현이 ‘할 수 있는 일’을 고르는 것은. 이성민이 알고 있는 전생의 자신이 하지 않았던 일로 제한되어 있기는 했다.
그렇기에 지금의 그는 이 상황에 나름의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당신에게 건넨 제안은 아직 유효합니다.”
“받아들일 생각은 없습니다.”
그 대답에도 김종현은 웃었다. 하긴, 그럴 것이라면 볼란데르를 죽이지도 않았을 테니.
“당신은 나를 막을 생각이겠죠?”
[놈은 불사를 가지고 있다.]김종현의 목소리와 섞여서, 아벨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하지만 완전하지는 않은 것 같군. 놈 자체가 완전한 마왕이 아니니까 말이야. 불완전한 불사다.]아벨은 그에 대해서는 확신하고 있었다. 만약에 김종현이 정말 불사를 획득했다면, 그는 너무나도 부조리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그 뱀파이어 퀸조차 완전한 불사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놈의 불사력에는 한계가 있어. 나로서는 그 한계를 돌파하는 것이 힘들군. 마법전으로 끌고 간다면 내가 놈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확실한데, 놈이 그리모어의 마법을 사용하는 것에 비해 내가 그리에스의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제한이 너무 확실하거든.]김종현이 금할 수 있는 것은 마법으로 한정되어 있다. 무공을 쓰는 이성민이라면 김종현의 금제에 자유롭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김종현이 방해하지 않도록 부탁하고 싶은데, 할 수 있겠나?]“예.”
그 대답은 아벨과 김종현 둘 모두에게 한 말이었다. 김종현은 빙그레 웃었다.
이성민의 그런 선택은 김종현을 분노하게 만들지 않는다. 이런 상황조차도 그는 즐거웠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종현은 충분히 즐겼으니 이제 포기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할 수 있다, 해볼까. 그는 그런 마음으로 이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아직까지 자신이 실패할 것이라는 확신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김종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하고 싶은 일을 한다.
팟. 김종현의 손끝이 아벨에게 향했다. 대응하고 있었다.
아벨은 쏘아지는 마법을 블링크로 피하고서 김종현을 뛰어넘었다. 김종현은 아벨을 따라 손을 움직였지만, 그 순간에 이성민의 속도가 바뀌었다.
느릿하게 걸어오던 중에 자색 전류가 파직거렸고,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김종현은 이성민의 최속을 겪어 본 적이 없다.
볼란데르와 이성민이 싸우던 모습은 아벨을 상대하느라 보지 못했으니까.
덕분에 그는 다시금 당황했다. 아벨이 김종현을 뛰어넘고, 김종현이 아벨을 다시 겨냥하고.
이성민의 창이 김종현의 배를 관통하고.
그 모든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김종현은 컥하고 숨을 삼켰다. 목구멍 가득 올라오는 핏물을 뱉어내면서 그는 몸이 꿰뚫린 끔찍한 통증을 무시했다.
콰드드득!
몸을 관통한 창이 회전을 시작했다. 김종현은 양손을 들어 몸 안에서 회전하는 창에 가져갔다. 키이이잉! 그가 뿜어낸 마력이 창의 회전을 멈추었다.
김종현은 관통부의 살점과 내장을 모조리 포기하고서 블링크를 펼쳐 이성민의 창에서 벗어났다.
[과연.]허주가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가 수백 년 전에 최강의 괴물로 군림했다고 해도, 마왕과 싸워 본 적은 없었다. 그것은 이성민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불사’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대강이나마 이해했다.
[너와 크게 다를 것도 없구나.]김종현의 상처가 재생되었다. 프라우가 좀비 군단을 가르고 아벨을 따라 달린다. 김종현은 멀어지는 아벨과 프라우를 보면서 큭큭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제 마법을 방해하려고? 하긴, 그리에스를 사용한다면 마법을 망치는 것은 가능하겠지요. 결국 당신들은 종언을 받아들이는 것을 선택한 겁니까?”
‘모르고 있어.’
아벨의 마법으로 차원 연결 자체를 대마계가 아닌 다른 곳으로 한다는 것. 김종현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해 보십시오. 그렇게 되는 것도 재미있을 테니. 당신은 나를 죽일 수 없을 테고, 이 세상은 종언을 맞이할 겁니다. 결국 다 같이 죽게 되겠죠.”
“이 세상을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것도 아니잖습니까.”
“물론이죠. 나는 나 자신이 즐거우니까 이런 일을 벌인 겁니다. 아, 나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할 수 있는 한 나는 계속할 겁니다.”
김종현은 꿰뚫렸던 배를 어루만졌다. 검은 로브가 그의 몸을 덮었다.
“이곳에서 당신을 죽이거나 제압하고. 나는 아벨에게 가서 그를 죽일 겁니다. 그가 마법사로서 나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나를 죽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당신과의 이야기는 나중에 차근차근 다시 할 수 있겠죠. 내가 당신을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것에 그친다면 말입니다.”
김종현이 양 팔을 펼쳤다. 검은 로브가 크게 펄럭거리며 그의 등 뒤에서 펼쳐졌다. 그리모어는 검은 빛에 휘감겨 김종현의 앞에 떠올랐고, 김종현은 스태프를 이성민을 향해 뻗었다.
“알고 있습니까? 나는 당신에게 호의적이었고, 몇 번이나 당신을 위했습니다. 흑마법사에 대해 경고한 것이 누구였습니까? 검귀를 쫓던 당신을 돕던 것이 누구였습니까? 나였죠. 그것뿐입니까? 나는 어르무리에 있었습니다. 결계를 통해 당신을 구속했었고, 당신이……. 드래곤 하트를 취해 무방비가 된 것을 보고도 무시해 주었습니다.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당신이 북쪽에서 나를 토벌하러 왔을 때. 당신과 인연이 있는 적색 마탑주를 의도적으로 보호하기도 하였지요.”
김종현은 즐거운 얼굴로 그것을 떠들었다.
“뭐, 자업자득이군요. 당신을 위해서 그런 일들을 했는데, 당신에게 티를 낸 적은 없었으니까. 만약 그랬다면 지금 관계가 조금 달라졌을까요?”
“나는 당신한테 그런 일을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하하하! 따지고 보면 그렇군요. 제가 마음대로 벌인 일들이니까. 뭐, 당신을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자, 당신은 나를 막기 위해 온 것이었지요? 좀비와 데스나이트를 넘어, 볼란데르까지 죽이고.”
그리고 이제.
“마왕과 싸우게 되었군요.”
김종현의 웃음이 진해졌다. 상대는 무공을 전문적으로 익힌 무투파다. 볼란데르마저 당해내지 못 했다. 이곳에 준비해 둔 요격 마법은 아벨에 의해 모조리 디스펠 되었다.
이 상황에서 마법사인 김종현이 이성민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자살행위다. 아무리 그의 영창이 빠르다고 해도 이성민보다 빠르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모어가 발하는 빛이 심상치 않았다. 김종현의 주변에 진동하는 빛은 마법사의 마력이라기보다는 볼란데르나 다른 데스나이트들이 발하는 사기死氣와 훨씬 닮아 있었다.
그리모어는 마왕을 위한 마법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왕이 아닌 존재가 마왕이 되기 위해 사용하는 마법. 김종현이 생각했던 대로, 마왕이 되기 위한 학습서에 더 가까웠다.
반전의 마법으로 인간을 마왕으로 바꾼다. 문을 소환해 마계와 이 세상을 오갈 수 있게끔 만든다. 그리고 차원과 차원을 연결하는 것으로 이 세상을 마왕을 위한 식민지로 삼을 수 있게 만든다.
그리모어는 ‘이상적인’ 마왕이 해야 할 일을 마법으로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모든 마왕이 마법사인 것은 아니다.
우두둑.
김종현의 몸 안에서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났다.
김종현의 몸 안에서 무언가가 일어났다. 가지고 있는 마력 대부분이 소모될 정도로 규모가 큰 마법이다.
화려한 마법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서 김종현에게는 필요한 마법이었다. 아벨을 상대로는 사용할 생각이 없는 마법이기도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아벨이 마법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성민은 마법사가 아니다. 철저한 준비를 갖춘 상태라면 모를까, 준비가 되지 않은 마법사가 무투에 능숙한 무림인을.
그것도 무림인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정점에 가까운 존재다.
뭔가가 일어남은 알았다. 마법은 잘 알지 못해 섣불리 다가가지 않았지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직감이 왔다.
볼란데르와 싸운 여파로 몸이 마음처럼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이성민은 뛰었다.
김종현의 두 눈이 붉었다. 시선과 시선이 마주치고, 창끝과 김종현의 손이 마주쳤다.
“막는다.”
김종현이 중얼거렸다.
언령. 방어 마법이 완성되었다.
쩌어엉!
이성민의 창이 방어를 꿰뚫었다. 완전하지 않은 언령이다.
공들여 영창하여 펼친 마법보다 완성도가 떨어진다. 김종현도 그것은 잘 알고 있었다.
푸확!
방어가 박살 나고 김종현의 손이 창에 뚫려 사라졌다.
김종현은 웃으면서 쭉 뒤로 물러섰다. 사라진 팔이 순식간에 재생한다.
저런 절단부의 재생은 불사력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붉게 변한 눈을 빛내며 김종현은 숙이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 시점에서 김종현의 ‘변화’는 끝이 났다. 애초에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마왕을 보다 마왕답게.
김종현이 펼친 그리모어의 마법은 이것이었다. 불완전한 육체가 일시적이나마 강화된다. 완전한 마왕의 몸을 가졌더라면 더 큰 덕을 볼 수 있는 마법이었지만, 지금의 김종현으로서는 이것이 한계였다.
그래 봤자 진짜 마왕들과 비교한다면 육체적으로 강인함이 부족하지만.
부족한 것은 마법으로 대체하면 된다. 마왕을 보다 마왕답게 만드는 이 마법은 굳이 육체만 강화하는 것이 아니다.
‘보인다.’
이성민이 뛰어드는 모습. 창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저기서 시작된 창이 어디를 노리는 것인지 김종현의 눈에 훤히 보였다. 육체와 감각이 함께 강화되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막아라.”
다시 한번 언령이 발동되었다.
조금 전의 언령은 이성민의 창을 막을 수가 없었으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카가가각!
이성민이 노리고자 했던 곳이 정확하게 김종현의 언령에 가로막혔다.
언령조차도 강화되었다.김종현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일시적이라고는 하나 마왕으로서의 힘은 매력적이었다.
‘왜 웃지?’
이성민은 김종현이 짓고 있는 웃음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는 뻗었던 창을 뒤로 당겼다.
절명섬 뇌광.
빛이 터진 순간 창이 김종현의 방어를 꿰뚫는다. 이성민은 창과 함께 몸을 쭈욱 밀어붙이면서 김종현의 몸을 노렸다.
“단단하…….”
김종현이 내뱉는 것보다 이성민의 창이 빠르다.
콰앙!
반쪽짜리 언령은 김종현의 몸을 충분히 강화하지 못했다. 그래도, 완전히 꿰뚫지는 못했다.
이성민은 김종현의 언령 마법이 어떤 식인지 대강 눈치챘다.
말로 해야 하는 것. 그것만으로 마법을 펼치는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이성민이 가진 속도 앞에서는 다른 마법과 비교해서 크게 우위를 점할 능력은 아니었다.
이성민의 창은 영창보다 빠르다. 수인을 맺는 것보다 빠르다.
‘단단하게.’
이 짧은 문장을 내뱉는 것보다 빠르다.
아무리 말을 빨리해 봤자 한계가 있다. ‘창을 쏘는’ 이성민의 동작은, 말을 내뱉는 것보다 빠르다.
[상대가 나쁘군.]허주가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였다. 흑뢰번천은 ‘쾌(快)’를 주로 삼는 무공 중에서 정점이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는 신공절학이다.
이성민은 흑뢰번천을 사마련주만큼 완벽하게 익히지는 못했어도, 사마련주의 힘을 계승하고 그의 무리를 머리에 담은 덕에 흑뢰번천의 극쾌를 어느 정도는 다룰 수 있었다.
완전하지 않다고 해도 마법을 펼치는 것이나 언령을 외는 것보다는 빠르다. 다른 무공 고수였다면 몰라도 김종현이 싸우고 있는 것은 흑뢰번천의 유일한 계승자라 할 수 있을 이성민이었다. 상대가 나쁘다.
‘생각보다……!’
김종현은 이를 악물었다. 이성민의 속도는 김종현이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오늘은 참 많이 놀라게 되는 날이다. 아벨이 엔비루스, 카인의 동생이라는 것에도 놀랐고 그가 전투 마법에 특화되어 있다는 것에도 놀랐으며 그토록 빠르게 디스펠을 펼칠 수 있다는 것에도 놀랐는데.
그것보다 이성민의 속도가 예상보다 빠르다는 것이 놀랍다.
‘그때는 당연히 전력이 아니었겠지.’
며칠 전에 이성민을 초대해서 대화를 나누었을 때를 떠올린다.
그때 이성민의 창도 빠르고 강하기는 했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때 힘을 조절했다고 해도 이건 차이가 너무 심하다.
김종현의 그런 생각은 틀렸다. 그때, 이성민은 진심으로 김종현을 죽여 버리고자 창을 쏘았다.
즉, 김종현은 이성민의 전력을 이미 보았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성민과 지금의 이성민은 다르다.
고작해야 이틀이 지났을 뿐이라고 해도 변화는 이틀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충분히 이루어진다.
아니, 이틀도 아니다. 이성민의 창이 보다 진보할 수 있었던 것은 볼란데르와 싸운 덕분이다.
볼란데르와 싸우지 않고서 바로 김종현을 만났더라면. 그의 언령 마법을 속도로 능가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마련주가 이성민에게 준 성장 가능성은 확실하게 이성민을 성장시켰다.
자신의 몸으로 겪어 보았음에도 김종현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놀랐다고는 해도 치명적이는 않기에. 마왕을 보다 마왕답게. 이 마법의 의미는 아직 발휘되지 않았다.
웃고 있는 김종현을 향해 다시 한번 이성민의 창이 빛을 발했다. 또다시 절명섬. 빠름으로 농락할 셈인가. 언령은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 수밖에.
활짝 펼친 김종현의 손이 앞으로 나왔다.
쩌어엉!
맞닿은 순간, 창은 김종현의 손을 꿰뚫지 못했다. 오히려 되돌아오는 반탄력이 이성민의 팔뚝을 뒤튼다.
꿰뚫지는 못했어도 김종현의 손 역시 똑같이 뒤틀렸다. 충격을 둘로 나누어 서로에게 돌려준 것이다.
이성민은 자신의 팔이 비틀린 것에 당황하였지만 오랫동안 동요하지는 않았다. 비틀린 오른팔을 무시하고 왼손으로 창을 잡는다.
그것을 자신 쪽으로 쭉 당기면서 동시에 질풍신뢰를 펼쳤다.
김종현은 그 쾌속을 읽을 수는 없었다.
대신에 그는 공간의 떨림을 느낀다. 마왕의 육체는 이 세상 그 어떤 육체보다 전투에 특화되어 있다.
그것은 김종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이 순간에도 마왕의 육체는 이 싸움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었다.
마왕은 마계의 군주로서 그 어떤 마족보다 강하다. 그럴 수 있는 것은 마왕이 가진 끝없는 성장 가능성 때문이다.
‘이런 몸을 가지고도 소멸되었던 칼라드라가 이해가 안 되는군.’
김종현은 한때 자신이 계약했던 마왕을 떠올리며 자그마한 의문을 느꼈다. 초월자로서의 불사력과 전투 도중 끝없이 성장하는, 육체에 주어진 막대한 성장 보정.
그 외에도 완전한 마왕으로서 강력한 권능을 가졌을 텐데. 도대체 뭔 일이 있었기에 그런 마왕이 소멸한 것일까.
그런 의문은 잠시 접어 둔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니까.
등 뒤에서 느껴지는 창이 어디를 찌를지는 안다.
‘지금’의 자신으로는 이성민의 창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못 맞아 줄 것도 없군.’
* * *
이성민이 김종현을 쓰러뜨릴 수 있을까.
그에 대해서 아벨은 그 무엇도 예상하지 않았다. 아벨은 이성민의 전력을 모른다.
사마련주가 죽지 않고 와주었다면 이런 고민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벨이 엿보았던 사마련주의 강함은 도저히 인간이라 여길 수 없는 것이었고 김종현이 준 마왕의 격을 갖추어 불사력을 획득했다고 해도 사마련주의 상대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마련주는 죽었다.
“놈이 김종현을 죽일 수 있을까?”
“당장 죽일 필요는 없지.”
아벨이 대답했다. 그는 뒤따르는 프라우를 힐긋 보았다. 김종현의 언데드와 놈의 마법에 대한 카운터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프라우를 불렀지만, 그것과는 다른 의미로 프라우는 지금 상황에 필요했다.
“우선은 놈이 벌이는 마법을 빼앗는 것이 우선이야.”
이성민의 역할은 그때까지 김종현을 붙잡고 있는 것.
‘마법이 성공한 후에는…… 성공한 후에는? 김종현은 어떻게 하지?’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정령계와 연결해서 이 세상이 종언에 벗어나게 된다고 해도, 김종현이 남아 있다.
불완전한 불사. 죽이는 것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절대로 쉽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생각하지 마라.
아벨은 걸음을 재촉했다.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이 세상을 종언의 운명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이다.
한때 게르무드이 영주가 살았던 관저는 더 이상 생존자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귀족의 죽음 따위 알 바가 아니다. 아벨이 보고 있는 것은 처참하게 시든, 한때는 화려했을 정원이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떠올라 있는 검은 구체.
“기분 나빠.”
프라우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은 아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그녀는 게르무드를 보고 혼이 ‘고여 있다’고 말했었다. 혼이 고인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수만에 달하는 혼이 저 구체를 중심으로 얽혀 있다. 아벨은 품 안에서 그리에스를 꺼냈다.
“나는 네가 보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해. 하지만 이건 알겠군. 저기서 아주 엿 같은 불길함이 느껴져.”
“다가가면 죽어.”
프라우가 경고했다.
“……내가 없었을 경우의 이야기지만. 운이 좋네. 내가 여기에 오지 않았더라면, 네가 무슨 수를 쓴다 해도 저 구체에 다가가지 못했을 거야.”
그 말에.
아벨은 심장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숨이 턱 막힌다.
그는 홱 하고 머리를 돌려 프라우를 보았다.
프라우는 하얗게 질린 아벨의 얼굴과, 부릅뜬 두 눈을 보며 머리를 갸웃거렸다.
운이 좋다.
아벨의 머릿속에서 그 단어가 엉클어진다.
운이 좋다. 그래, 운이 좋다. 프라우가 어르무리에 있지 않았더라면.
김종현이 많고 많은 지역에서 비교적 어르무리에 가까운 게르무드를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아벨이 프라우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프라우가 이 도시에 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운이 좋다.
“아.”
프라우도 아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했다.
이 세상에 우연은 없다.
“……빌어먹을.”
“잠깐…… 잠깐만. 너무 과한 생각일지도 몰라.”
프라우가 그녀답지 않게 당황하여 내뱉었다.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면? 운명에 의해 ‘이렇게’ 되도록 조정된 것이라면? 김종현이 꾸미는 짓도, 프라우가 이곳에 온 것도, 모든 것이 운명이라면.
이 세상의 운명의 끝은 종언이다.
“좆 까.”
아벨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걸치고 있던 로브를 벗어 던지고서 그리에스를 펼쳤다.
그는 주저치 않고 검은 구체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열어!”
아벨이 고함을 질렀다. 운명이니 뭐니, 그런 소리는 지긋지긋하다.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빌어먹을 형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언제 일어날지도 모를 운명, 파멸적인 죽음이라는 것이 두려워 자기 자신을 버렸던 형님이. 그 찬란한 마법의 재능도 저버리고 카인이라는 이름도 버린 병신이 떠오른다.
아벨은 그를 증오했다. 만약 나에게 형님과 같은 재능이 있었더라면.
“성격도 급하기는……!”
프라우는 투덜거리면서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위로 치솟았다. 귀혼술에 의해 혼들이 움직인다. 구체를 휘감고 있는 수만에 달하는 혼이 둘로 갈라졌다.
아벨은 프라우를 믿고서 계속해서 걸어갔다. 프라우의 귀혼술은 아벨이 구체에 다가갈 길을 확실히 열어주었다.
구체 앞에서, 아벨은 그리에스를 내려 보았다. 손을 뻗어 구체를 만져 본다. 저항이 있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거부반응은 없었다.
‘마법은 거의 완성되어 있어.’
좌표만 확정 짓고 충분한 마력만 불어넣는다면 당장 마법은 가동될 것이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으니까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이다. 아벨은 그리모어에 정신을 집중했다.
자신에게 남은 대부분의 수명을 바치면서.
구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리에스의 마법이 발동되었다. 그리에스가 이쪽 세계에서는 절대로 포착할 수 없는 차원 좌표를 포착했다.
아벨은 구체를 어루만지며 정신을 집중했다. 구체에 담긴 복잡한 마법 술식에 간섭하고, 그곳에 새겨진 기존의 좌표를 지워버린 뒤에 새로운 좌표를 입력했다.
그 후부터는 그리에스의 마법이 마법을 새로이 발현시킨다.
오색찬란한 빛이 공간을 뒤덮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