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20-second songwriting genius, a 200,000-second monster RAW novel - Chapter 114
20초 작곡천재, 200,000초 괴물 되다 114화
선지자와 사도(4)
노년까지 한 업계에 종사하여, 이른바 ‘달인’이라고 불리는 자들은 크게 두 갈래의 스탠스를 취한다.
첫 번째는 끝까지 자신의 위치를 지켜내려고 하는 자.
이제껏 쌓아 왔던 모든 것을, 그대로 가슴에 묻으려는 자.
두 번째는 자신의 위치를, 누군가가 대체해 주길 바라는 자.
즉, 제자를 키워내고 싶은 자.
야닉 게프하르트는 후자였다.
딱히 직업이 교수라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학생들을 잘 대해주고 잘 가르치는 교수라 하더라도 전자인 경우는 많으니까.
일종의 타고난 성향이었다.
혼자 안고 죽는 것보다는, 자신의 영향을 받은 누군가가 성장해 나가는 것을 보며 대리만족을 강하게 느낀다고나 할까.
뭐, 어찌 되었건 간에.
그런 야닉은, 오래전부터 김도일이라는 사내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이유는 간결하다.
대학에 입학할 때가 되면 자신이 손을 내밀어, 가르침을 주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기 때문.
이게 허황되어 보이는가?
결코 아니다.
교수다 교수.
마음에 드는 학생이 보인다면, 부르면 된다. 대개 기꺼이 받아들이고 기뻐할 것이다.
다만,
‘…다르구만.’
역시나 김도일이라는 사내는 달랐다.
일반 학생들처럼 대학 입학을 권유하거나, 그를 한 편의를 제공한다고 해서, 그가 자신을 따라올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그의 연주는 ‘학생’의 범주를 뛰어넘고, ‘프로’를 제치고 있으니까.
들려오는 황홀한 멜로디는, 현대까지 이어져왔던 ‘피아노 연주’의 개념 자체를 왜곡시키고 있었으니까.
‘적어도 그의 앞에서는, 허황된 꿈이군.’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양손 양발을 사용하여 만드는, 혼자서 하는 협연.
그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는, 단 한 인간의 완벽함.
이것을 앞에 두고, ‘교수’라는 직함을 내세울 수 있는 자가 과연 있을까.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은, 어디에나 있는 중년 남성이었다.
삶에 치이고 치이다가, 잠깐의 일탈을 시도하는, 아주 약간의 호기로움이 돌아온 사내 말이다.
그는 썩 풍경이 좋은 공원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참이나 구름 흘러가는 걸 쳐다보니 좀 질리기도 하여, 땅으로 시선을 돌려 개미를 관찰하기도 하고.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냈다.
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나서부터 줄곧, ‘의미 없는 시간’을 철저히 배제하여 살아왔건만.
지금은 마치 시간 빌게이츠라도 된 모양새.
다만,
그것에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가슴을 꽉 메우고 있던, 피로의 슬러지가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표정이 밝아지는군….’
점심시간이 도래하고.
사내는 어렸을 적 자주 들렸던 식당에서, 가격만이 바뀐 메뉴를 주문해 보았다.
야닉은 눈앞에 차려진 음식에 손을 뻗으면 잡힐 것도 같아 도전해 보았지만,
소용은 없었다.
환상이니까.
할 수 있는 것은, 눈앞에 비치는 이 모든 것이, 한 사내의 두 손과 두 발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에 감탄을 토하는 것뿐.
‘….’
중년 남성은 계속해서 낡은 골목을 돌았다.
초등학교 근처에 있는 매점에서 서성거리다가 애들 무리에 섞여 같이 들어가 보기도 하고.
와서는 안 될 놈이 왔다는 표정을 짓는 가게 주인을 무시하며, 자신의 아이한테는 절대 먹이지 않을 싸구려 과자를 혼자 입에 쑤셔 박고.
…세간의 시선으로는, 분명 ‘이상한 놈’이었다.
‘나잇값 못 하는 인간’이었다.
다만, 그럼에도.
사내는 가슴 깊은 곳까지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그의 얼굴을 뒤덮고 있는 것은, ‘행복’의 감정이 맞았다.
다만….
아주 당연하게도. 그것이 영원히 이어지는 일 따위는 없었다.
태양이 떠오르며 하루가 시작하고, 저물며 끝나듯이.
노을이 쏟아짐과 함께, 그의 일탈도 슬슬 마무리를 강요받았다.
“….”
느껴지는 것은, 진득한 아쉬움.
길어진 그림자만큼, 늘어지는 발걸음.
이대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일탈을 더 느끼고 싶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내일도 몰래 연차를 내어 이 주변을 배회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저벅.
그가 발걸음을 멈추었을 때,
눈에 익은 빵집이 시야에 비치자, 사내의 술렁이는 감정의 물결은 곧 잠잠해졌다.
그곳은, 어렸을 때 가끔 먹은 적이 있었던 체인점이었다.
나이가 들며 소화력이 떨어져 이젠 아주 맛있게는 느껴지지 않지만,
그때 그 시절만큼은 양도 많고, 달콤하고.
한때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케익.
남자는 홀린 듯 그곳에 들어가 무심코 과일이 잔뜩 올려진 케익을 포장해 손에 들었다.
그리고 향하는 곳은,
집.
자신을 반겨주는 사람이 있는 집.
사내의 일탈은 밤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저녁노을이 사라지기 전에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에.
손에 든 이것은, 저녁 먹기 전에 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도 이런 적이 있으셨을까.’
시간의 체감은 연속적이지 않다.
중년 사내는 자신이 애 둘 있는 아버지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지만, 가슴 속 한구석에는 언제나 코와 흙을 퍼먹던 어린애가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곤 했다.
…그리고 본래 어린애들이란, 이기적으로 보이면서도 동시에 이타적이다.
친구, 형제 몰래 혼자 맛있는 것을 차지하면 한순간은 기쁘면서도, 손가락만 빨고 있는 얼굴을 떠올리자니 가슴이 아려오곤 한다.
그래,
혼자 맛있는 걸 한입 먹다가, 결국 안 되겠다 싶어 나누는 것이다.
그러고서는 가슴을 쭉 펴며 나 잘했지? 라며 당당해지는 것이다.
지금 처럼 말이다.
-와! 케익이다!
천진난만한 아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리는 듯했다.
그것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던 사내의 작은 일탈을 마무리 짓는 소리이기도 했다.
그리고,
동시에.
팅-!
청명한 고음과 함께,
연주가 끝났다.
“….”
시야에 물들어 있던 색채가 사라진다.
환상의 세계가 끝나고, 현실이 눈앞에 비쳤다.
그곳에 있는 것은 발가벗은 남자였다.
중요 부위만이 가려진 채, 어느새인가 피아노 앞에 당당히 서 있는 모습.
그가 말했다.
“99%.”
매우 높지만,
그렇다고 완벽하지는 않은 숫자를.
“[어… 네?!]”
“[100%가 아니었어?!]”
밀려드는 놀람과 혼란이 섞인 목소리들,
그리고 그에 맞서는,
“[100%는, 목욕탕이나 연인 앞에서만.]”
아주당연하기 그지없는 대답.
“아.”
모두가 엇비슷한 탄성을 내뱉었다.
그에는 허무함과 아쉬움이 섞여 있었다.
주로 남정네들이 그랬다.
그리고 야닉 게프하르트는….
‘…저자를 뮌헨 음대의 교수로 초빙한다면… 같이 목욕탕에 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이젠 ‘괴상한’ 발상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계획을 세웠다.
* * *
…연주를 끝마치자마자 느낀 것은, 장딴지와 허벅지 근육의 저릿함이었다.
비밀 연습을 할 때에도 비슷한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실전에 들어가니까 고통의 강도가 좀 더 심하더라.
‘개인 리사이틀을 연다면… 처음부터 양손 양발을 사용할 수는 없겠구만.’
신체는 물론이요, 두뇌에도 확실한 과부하가 걸리는 것이 느껴졌다.
다만,
“[…아아.]”
“[왜… 대체 왜 이렇게 짧은 거지…?]”
심사위원, 관객들의 넋이 나간 듯한 반응을 보고 있자니.
파괴력 하나만큼은 대단하다는 것이 절절히 체감된다!
“후우….”
나는 숨을 골랐다.
그리고, 마치 정지되어 있는 듯한 공간을 일깨우려, 단 한마디를 내뱉었다.
“[협주 준비해 주시죠.]”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독주곡이 끝났으니, 이제 오케스트라와 함께 협주곡을 연주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힉…!”
각기 다른 악기를 든 연주자들은 얼핏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얼굴에 ‘부담감’을 띄우고 있었다.
듣기로는 이 악단은 브리쉘에서 방귀좀 개세게 뀌는 듯한 양반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하던데.
그런 이들조차, 나와 같이 협주하는 것을 꺼린다는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안 잡아먹습니다.]”
부담감이 서서히 공포심으로 바뀌어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달래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네… 네에!]”
이러나저러나,
대회는 이어졌고, 나는 연주를 계속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꽤나 재밌었다.
오케스트라 속에. 녹아드는 맛이 아주 좋더라.
내 개인 오케스트라가 있으면 진짜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물론 관객들은 계속해서 고장 난 태엽 시계처럼 박수만을 연발할 뿐이었다.
그리고,
2일차 세미 파이널이 끝났다.
넋이 나가 있던 이들이 하나둘 돌아오고, 웅성거림과 소란은 커지고.
내 연주를 다시 듣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있던 기자에게 복사본을 내놓으라 겁박하는 이들까지 생기고.
완전 개판이라고나 할까.
물론,
“[김도일 씨… 아니, Lord!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발, 제발요!]”
기자들도 여전히 달라붙었다.
“[이미 할 말은 다 했습니다.]”
“[예…?]”
나는 기자들을 상대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넋이 나가 있는 앙리 또한 상대하지 않고.
곧바로 호텔로 돌아갔다.
‘…이젠 티배깅이 무의미하다.’
도화선에는 이미 불이 붙었으며, 물과 흙을 끼얹어도 이제 내 힘으로 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나는 사흘 동안 정말,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었다.
틀어박혀 있는 동안 백 기자는 막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던데.
잠깐씩 마주칠 때마다 웃음꽃이 얼굴에 활짝 피어 있더라.
그리고,
사흘이 지나, 세미 파이널 라운드의 마지막 날이 되어 보자르 홀로 돌아왔을 때,
-와아아아아아아!
엄청난 환호성이 맞아주는 걸 보고 있자니,
계획이 완벽하게 성공한 걸 체감했다!
“Lord of Music!”
꽉 매운 관객석 이곳저곳에서, 내 두 번째 이름이 연발된다.
나는 척-!
멋들어지게 손을 들며, 카메라를 든 새로운 팬들을 맞이했다.
그 수는 원래 대회에 상주하는 이들보다 훨씬 많았는데, 이제는 내 얼굴과 이름이 실릴 신문란이 ‘가십, 예능’ 부문이 아닌, ‘사회’면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듯했다.
“[…파이널 라운드의 진출자를 발표하겠습니다. 앙리 르페브, 닉 번스타인, 그리고….]”
파이널 라운드에 올라갈 이름이 호명되었다.
그저 ‘진출한다’는 것만으로 큰 의미가 있는 게 파이널 라운드이다.
다들 감동에 젖어 울먹여야 정상인 분위기였지만.
올해만큼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모두가 나에게 시선을 쏟아부었으며, 내가 입을 열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그러므로 나는,
“[김도일 씨, 당신은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피아니스트’의 범주를 아득히 벗어난 연주를 보여주었습니다.]”
심사평을 읊기 시작하려는 심사위원의 말을 미안하지만 고의로 끊고서,
“[예. 범주를 벗어났으니, 아직 벗어나지 않은 사람들을 이끄는 게 제 역할이겠지요.]”
매우 거만하면서도, 또 자비로운 표정으로 계획을 읊었다.
“[파이널 라운드에 앞서, 지정된 장소에서 일주일 감금당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 전 제게 배움을 청하는 이들을 가르치겠습니다.]”
“[예…?!]”
술렁이는 분위기.
“[제 콘서트 아닙니까. 게스트를 잘 챙기는 게 주최자의 의무입니다.]”
나의 태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일관되어 있었다.
이 타이밍에서는 거만하기 짝이 없다는 비난과 함께 미친놈을 보는 듯한 시선이 날아와야 정상이겠지.
다만,
이제는 아니다.
“[저… 저요!]”
“[저도!]”
파이널 라운드 진출자들이, 한 걸음씩, 내 앞에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유재호부터 시작하여 콧대 높아 보이던 거구의 다비드까지.
‘가르침’을 요청하는 인간들이 줄을 섰다.
그것은 마치 주인을 따르고자 하는 사도의 모습이었으며,
그 끝자락에는,
21세기 최고의 피아노 천재,
앙리 르페브의 모습 또한 비쳤다.
“[저도… 망령이 아닌 영혼을 가질 수 있을까요?]”
나는 그때 처음 들었다.
따라쟁이가 아닌, ‘음악가’인 앙리 르페브의 목소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