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124
124화 혼담 1
* * *
이리도 집착하는 걸 보면 구역질이 날 정도로 구차한 망상일 게 분명했다.
항상 그랬다.
그가 지향하는 건 보다 자극적인 쾌락이었으니까.
권리만 행사할 뿐, 그에 뒤따르는 책임은 철저하게 외면하는 마크를 떠올린 세라가 눈살을 찌푸리고 있자니, 문이 열리면서 한 청년이 들어왔다.
백금발을 곱게 길러 한 갈래 묶은 귀공자.
얼굴만은 대륙 최고라 해도 부족하지 않을 남자의 등장에 세라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세르듀스, 노크는 하고 들어오라고 했을 텐데?”
“왜 이래. 같은 남매끼리.”
“존댓말.”
세라의 경고에도 세르듀스는 듣는 둥 마는 둥 그녀를 지나 그 뒤에 있는 네베티에게 다가갔다.
“네베티, 오늘도 아름다운걸. 어때? 내 첩으로 들어오는 건?”
세르듀스가 은근히 제안하며 머리카락을 매만졌지만 네베티는 매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저는 공주님의 것. 공주님의 의향을 따를 뿐입니다.”
그 말이 맞다는 듯 세라가 끼어들었다.
“세르듀스, 네베티는 내 전속 시녀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너도 잘 알 텐데?”
“누님이야말로 왕세자의 첩이 어떠한 자리인지 잘 알 거 아냐? 말이 첩이지 나중에는 왕의 후궁까지 될 수 있어. 적어도 받을 거 하나 없는 전속 시녀보다는 나을 거야. 안 그래?”
“내 사람 정도는 챙겨 줄 수 있으니 떨어져라. 마지막 경고다.”
“누님이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세라가 손을 휘휘 젓자 세르듀스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바스톡 자작의 영애가 그렇게나 미색이 곱다면서? 누님이 소개시켜 줬으면 해. 귀족파와 친한 건 내가 아니라 누님이잖아?”
고운 얼굴에 비친 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적나라한 욕망. 마치 알아서 내놓으라는 듯한 어투에 세라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번이 벌써 네 번째였다. 그것도 보름 사이에.
세르듀스의 방만한 태도엔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파트너는 적당히 바꿔라. 그녀들에게 미안하지도 않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도통 없어서 말이야. 누님을 보고 자라서 그런가?”
“듣지 않은 걸로 하겠다.”
“아니, 그러지 말고 정 걱정되면 누님이 내 파트너가 되는 건 어때? 누님 정도면 나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순간, 섬뜩한 시선이 다리를 훑고 지나간다.
정욕에 가득 찬 눈빛.
가족을 여자로 보는 파렴치한 세르듀스의 행동에는 세라도 진저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아무리 망나니로 알려졌다 해도 왕실파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후계자가 된 건 그녀가 아니라 세르듀스였으니까.
“시답잖은 소리가 하고 싶거든, 어마마마에게 가서 해라. 아니면 불러 줄까?”
“하하, 농담 좀 한 거 가지고 까칠하게 구네. 기분이 별로인 거야? 어쩔 수 없지. 오늘은 이만 물러갈 테니 내일 보자고.”
능글능글하게 대꾸한 세르듀스가 후다닥, 소리를 내며 사라진다.
가슴 속에서 치솟는 분기를 억누르며 세라가 한숨을 내쉬자 네베티는 그녀에게 다가가 두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공주님,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 왕세자님이 저러는 것도 하루 이틀 일이 아니잖아요?”
조심스럽게 퍼지는 온기에 지끈거리던 머리가 한결 나아지자 세라는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괜찮은데 네가 혹시나 못된 짓을 당할까 걱정이다.”
“왕세자님도 장난삼아 하시는 말씀일 거예요. 다른 분들도 많은데 굳이 저를 택하겠나요?”
“그렇지만…….”
세르듀스를 믿을 수 없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돌변하는 게 왕실 남자들의 특징이었으니까.
아버지란 사람은 절친의 약혼녀를 빼앗은 광인.
동생이라는 녀석은 순간을 즐기는 쾌락주의자.
어렸을 때부터 보았던 이들은 세라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때문에 그녀에게 남자란 혐오스러운 생물에 불과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특이한 사람을 만났다. 카인 슈발체베인이라고 했던가.
‘이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면 웃기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물어보고 싶군. 우리 어디에서 보지 않았나?’
질리도록 들어 본 멘트였기에 반사적으로 독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는 정말 궁금해서 물은 듯했다. 확실했다. 기억을 훑듯, 저 먼 곳을 바라보았으니까.
“후.”
혹시 마음에 상처가 되진 않았을까? 아직 수도에 있을 테니 가서 사과해야 하나? 아니면 곧 있을 생일 파티에 직접 초대해?
부산스러운 머릿속에서 여러 상념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고개를 저으며 잡념을 털어낸 세라는 이윽고, 결론을 내렸다.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 * *
왕궁 안에는 항상 특이한 기류가 흘렀다. 모방하고 싶어도 모방할 수 없는 그런 기류가.
지배 계층 특유의 고압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피지배 계층 특유의 긴장된 분위기가 섞여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물며 왕궁은 국가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곳이었다.
걷는 것도 신경이 절로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입궁하자마자 카인은 자신의 뒤에서 속닥이는 이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저게 라프만 님의 뒤를 이어서 백작이 되었다는 평민인가.”
“호랑이도 짝이 없어지면 결국 개를 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까.”
“오더 링크의 명맥은 끊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군요.”
“변방에 사는 반푼이일 뿐입니다. 신경 쓸 거 없습니다. 저 보십시오. 다리마저 절뚝이지 않습니까.”
노골적인 뒷담에 귀가 간지러울 지경이지만, 싸그리 무시한다.
항상 밑바닥에서 지낸 카인이었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화제만 생겼다 하면 물어뜯는 습성은 여전하군.’
어쩔 수 있겠는가. 기득권층에 발을 들였으니 감내하는 수밖에.
시종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에 들어간 카인은 짧게 탄성을 터트렸다.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듯 집채만 한 방 안에는 온갖 종류의 집기와 예술품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 속에서 홀로 앉아 있으니 외딴섬에 떨어진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때, 세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마크 제피로스, 라일 알펜마, 그리고 로제 미티어벨.
왕실파 하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전부 올 줄은 몰랐던지라 카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크의 얼굴을 보니 그런 놀라움도 사그라들었다.
그의 눈동자 안에 있는 건 철저한 무관심.
빨리 이야기를 끝마치고 싶다는 마음만이 가득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마크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환대였다.
“자네도 바쁠 테니 자질구레한 통성명은 건너뛰도록 하지.”
그렇게 말하며 슬쩍 지팡이를 쳐다본다.
“몸은 여기에 있었지만, 그간 자네의 이야기는 빠짐없이 들었네. 기사단장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그때 다친 다리는 여전히 불편한가 보군.”
“빠르게 치료했지만 원체 몸이 안 좋았던지라 후유증이 남았습니다.”
“어쩔 수 없지. 믿었던 가신의 배신은 언제나 갑자기 다가오니까. 몸에 새겨졌으니 자네에게도 큰 교훈이 되었으리라 믿네.”
일견 매정하게 들릴 수도 있는 덕담을 내뱉은 마크가 고갯짓했다.
“그래, 그 기사단장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말이야. 혹시 요 근래 들은 소식은 없나? 자네라면 갚아야 할 빚도 있으니 항상 예의 주시하고 있을 텐데 말이야.”
흥미 삼아 묻는 듯한 질문. 언뜻 신변잡기처럼 보이지만 카인은 그게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어제 엠이 신전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저런 질문을 하는 걸 테니까.
예나 지금이나 마크는 자신의 자리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인물이었다. 라프만이 구국의 영웅이 될 것 같자 아예 그가 있을 자리를 걷어차 없애 버렸지 않던가.
제 영역에 들어온 맹수를 좌시할 리 없었다.
“실은 도망치면서도 무언가 믿는 게 있는 듯한 눈치였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언제든지 레서 왕국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투로 말했으니까요. 실제로 종종 국경선 근처에서 그의 흔적이 발견되곤 했습니다.”
마크가 의아하다는 듯 라일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금시초문인 듯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자세히 말해 보게.”
“아시다시피 리벨리온은 거대합니다. 당연히 그런 조직을 유지하는 데 지불해야 하는 비용도 어마어마하겠죠. 확실히 말해 일개 기사단장이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필시 그를 지원해 주는 귀족이 있을 겁니다.”
“이 레서 왕국에 말인가?”
“네, 제 예상으로는 꽤나 높은 자리에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기사단장도 그렇게 호언장담을 한 걸 테죠.”
“흐음, 그래. 백작의 고견은 잘 들었네.”
이제 그만해도 된다는 듯 손을 든 마크가 라일과 눈빛을 교환한다.
카인은 아무도 모르게 히죽 웃었다. 어차피 매튜를 지원한 건 두 사람이지 않던가.
지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끝내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크는 라일을 의심할 거다. 그와 동시에 그를 정녕 믿을 수 있는지 고심할 테지. 그리고 이내 도달하게 되리라. 일찍이 로제를 짝사랑하던 남자 중 한 명이 바로 그였다는 걸.
마크에게 아무런 반응이 없을 수도 있지만, 일단 미끼를 걸어야 뭐든 잡히는 법 아니겠는가.
마크가 엠을 라일의 검으로 인식하기만 하면 만사형통이었다. 알게 모르게 그의 행동을 제약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카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크는 짐짓 진중한 어투로 화제를 돌렸다.
“근황도 들었으니 슬슬 자네를 이곳에 부른 이유를 말하고 싶은데 말이야. 혹시 예상이 가는 게 있나?”
“글쎄요. 공주님의 성년식이 멀지 않았으니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맞네, 내 딸아이와 관련된 이야기지.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네만, 이번 성년식에 함께 갈 파트너가 있나?”
“아쉽지만, 그렇게 친한 영애는 없군요.”
“그러면 내 딸아이의 파트너가 되어 주었으면 하네. 이왕이면 앞으로도 계속 친근한 관계를 유지했으면 좋겠군.”
잘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마크가 은근하게 말끝을 늘렸다. 그게 말 그대로의 뜻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카인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들은 걸로 판단하건데 국왕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그 파트너가 단순히 성년식의 파트너만은 아닌 것 같군요.”
“상황 파악은 빠른 것 같아 다행이군. 구태여 첨언하지 않아도 되고 말이야. 그래, 내가 말하는 건 딸아이의 반려 자리를 말하는 거네.”
말은 길게 했지만 이게 마크의 속셈인 듯싶었다. 솔직히 제일 먼저 떠올린 술수이긴 했다.
과거야 어찌 됐든 슈발체베인은 대대로 왕실을 지지해 온 가문이었다. 장애물이라 할 수 있는 라프만도 죽었으니 잘 꼬드겨 자신들 편으로 다시 편입시키려는 것일 터.
무언가 엄청난 사건이 터질 것 같아 기대했건만, 역시는 역시였다. 세라가 좋은 혼처를 구하지 못하도록 막는 돌덩이로 부른 걸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야말로 쓰기 좋은 반푼이 취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