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123
123화 제피로스 3
* * *
눈앞이 아찔해진다. 하지만 여기에서 당황하는 건 하수나 하는 짓. 카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단검은 아이가 겨누길래 빼앗은 거고, 동화 주머니는 원래 내 거다. 조금만 살펴보면 알 텐데?”
“흐음, 그런가. 사정은 대강 알 것 같구나.”
여인의 시선에 아이가 몸을 움츠린다. 아무래도 일면식이 있는 듯했다. 역시 진심은 통하는 법. 어설프게 변명했으면 더 귀찮아질 뻔했다.
“알 것 같다니 다행이군. 고지식해 보여서 변명이 통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오늘 처음 보는 사람에게 선입견을 가지다니, 빈말로도 좋은 습관은 아니구나.”
그래도 평소에 많이 듣던 말인지 여인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일단 아이부터 챙겨라.”
순간, 그녀의 등 뒤에서 경비대로 보이는 이들이 나와 아이를 데리고 갔다. 굳이 나서지 않더라도 훈방 조치든 엄벌 징계든 알아서 할 터.
그렇게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여인의 얼굴이 조금 더 또렷하게 보였다. 처음에는 마냥 예쁘다고 감탄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다시 보니 어딘가 모르게 익숙하게 다가왔다.
보면 볼수록 묘하게 낯이 익었다.
“이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면 웃기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물어보고 싶군. 우리 어디에서 본 것 같지 않나?”
“진부한 말이구나. 듣기만 해도 진저리가 날 정도로. 그리 말하면 내가 너에게 관심을 가질 줄 알았나?”
혐오스럽다는 반응이었다. 벌레를 보는 눈빛도 저것보다는 상냥하리라.
하긴 속셈이 있는 것처럼 들릴 수밖에 없는 멘트였다. 물론 그걸 감안하더라도 각별하고도 유별난 반응이었지만, 카인은 그러려니 했다.
그때, 여인이 입을 열었다.
“일단 확인 차 이름부터 묻지.”
“카인 슈발체베인이다.”
“아…….”
여인은 대답 대신 외마디 탄성이 터트리며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날 알고 있나?”
“조금은. 지금 수도에서 너보다 더 유명한 귀족은 없을 테니까. 검성 라프만이 죽은 이후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지?”
그렇게 말을 마치며 여인은 힐끗 카인이 들고 있는 지팡이를 바라보았다. 백 마디 말보다 더 직접적인 언급이었다.
“다른 사람의 입으로 그 사연을 들으려니 조금 가슴이 아픈걸.”
“그래도 소문과는 다르게 건강한 듯하구나. 백작이나 되는 사람이 좀도둑을 잡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걸 보면 말이야.”
“그거야…….”
순간, 태평하게 답하려던 입이 닫힌다. 귀족이라는 걸 밝혔는데도 변하지 않는 여인의 태도에 위화감을 느낀 탓이다.
고개를 갸웃거린 카인은 여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궁금했던 거지만, 왜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으로 말하는 거지?”
“당연한 소리를 하는구나.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비단 너뿐만이 아니라 알펜마 공작도 내 앞에서는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극소수였다. 하물며 여인이라면 더더욱. 그제야 카인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소개가 늦어서 미안하구나. 내 이름은 세라 제피로스. 레서 왕국의 하나뿐인 공주다.”
* * *
저택으로 돌아온 카인은 족쇄처럼 들고 다녔던 지팡이를 내팽개쳤다. 그리고 곧장 큼지막한 소파에 몸을 던졌다.
“집이 최고군. 남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도 없고 말이야.”
예상치 못한 만남이 치명타였다. 종국엔 오해가 풀려 웃으며 헤어졌지만, 찜찜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니 긍정적이라고 봐야 할 터.
그렇게 쉬고 있자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안으로 들어온 호른이 보고서를 펼쳐 놓았다.
“이게 뭐지?”
“가주님이 듣고 싶었던 정보. 임금님과 전대 가주님의 관계를 알고 싶어 했잖아.”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다.
“드디어 결론이 나온 건가.”
이럴 때면 리벨리온이 성장했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2년 전에는 꼬리도 잡을 수 없었던 정보가 물밀듯이 들어왔으니까.
“일단 배경 설명부터 할게.”
“마음대로.”
카인이 손짓하자 호른이 보고서 중 한 페이지를 가리켰다.
“임금님, 공작님, 전대 가주님, 그리고 왕비님. 이 네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다고 해.”
마크 제피로스, 라일 알펜마, 라프만 슈발체베인, 그리고 로제 미티어벨. 네 사람은―
“전부 왕실파군.”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무리였다.
“이 사람들을 보고 떠오르는 감상은 없어?”
“남자가 셋인데, 여자는 하나군. 설마 삼각관계나 사각관계였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왜 아니겠어. 지금은 잊혀졌지만 그때 당시엔 세 사람 모두 왕비님을 좋아했다는 풍문이 돌았다고 해.”
“하지만 가장 먼저 이어진 건 아버지겠군.”
“아무래도 그렇게 되겠지?”
줄곧 의문이었다. 아무리 대륙 전쟁이 터졌다고는 하나, 전시에 납치혼을 하는 건 지극히 비정상적인 작태였던 것이다.
하지만 사정을 듣고 나니 어떻게 마크가 로제를 취할 수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말고도 라프만의 불행을 원하는 이가 있었던 것이다.
“보아하니 라일이 마크를 도와줬겠군.”
“그런 정황도 있긴 해.”
“조사할 것도 없지. 지금까지 마크의 옆에 붙어 있으니까. 그때부터 둘만의 비밀이 생긴 거다.”
젊은 시절엔 라프만의 강력한 호적수였으나, 십좌가 되고 나서는 소원해졌다고 했던가. 알 만했다. 보나마나 열등감에 사로잡혔겠지. 검술로나 사랑으로나 이긴 적이 없었으니까.
마크를 따르는 자답게 추악한 인간 군상의 전형이었다.
“아무튼 조사한 게 맞다면 전대 가주님을 향한 두 사람의 열등감이 이 사달을 만든 것 같아.”
“쌓이고 쌓였던 감정이 3차 대륙 전쟁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는 건가. 아버지가 쫓겨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군.”
자그마치 레서 왕국을 이끄는 쌍두마차가 바랐던 일이었다. 이뤄지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전대 가주님이 십좌의 힘을 쓰지 않는 건 의외지만 말이야.”
그건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라프만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발견할 수 있을 터.
“그러면 로제에 대해 한번 말해 봐라.”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끌려가 아이를 둘이나 낳은 비운의 여주인공. 그 뒤에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처음에는 적응하지 못하고 한참 헤맸다고 해. 임금님에게 종종 달려들 때도 있었다고 하니까 뭐, 뻔하지. 하지만 공주님을 낳은 뒤로는 마음이라도 다잡은 건지 순종적으로 변했다고 하던걸.”
없던 모성애라도 생긴 걸까. 아니면 운명에 순응한 걸까. 어느 쪽이든 흥미로운 변화였다.
“미티어벨가는?”
“귀족파 사람들과도 술잔을 기울일 정도로 인망이 두터운 가문이지만 사실 왕실파에서 차지하는 입지는 그리 크지 않아. 그래서인지 별말이 없었다고 해.”
“그렇게나 아끼던 여식이 마크에게 끌려갔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고?”
“들리는 말로는 공작님이 뒤에서 손을 썼다고 해. 허튼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그에 대한 내용도 조사했는데 들어볼 거야?”
“아니, 됐다.”
들어 봤자 속만 터지는 이야기일 터. 짧게 혀를 찬 카인은 손을 휘휘 저었다.
“다른 특이 사항은?”
“지금은 왕비님이 임금님을 엄청 믿고 따른다는, …데?”
자기가 말하고도 믿기지 않는지 호른은 보고서를 몇 번이나 훑어보았다. 하지만 잘못 본 게 아니었는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누락되거나 수정된 부분은 없다는 뜻일 터.
호른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리일지 모르나 카인에게는 의심 가는 가설이 하나 있었다.
“스톡홀름 증후군, 비슷한 건가.”
백로도 까마귀와 있으면 물드는 법이었다.
“스톡홀, 뭐?”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공주 쪽은? 동생이 망나니로 자랐으니 적지 않게 영향을 받았을 것 같은데.”
“차라리 왕자로 태어났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던걸. 각종 행사에 참가해 얼굴을 비추는 건 물론이고, 요즘에는 몸소 경비대까지 나간다고 하던데? 망나니인 왕세자와는 다른 행보라 또래들 사이에서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해.”
“……경비대에도 나간다는 건가.”
“대민 지원? 공개 시찰? 뭐, 그런 거겠지. 범죄자들은 다른 녀석들이 알아서 잡아 올 테니까.”
남부러울 것 없는 공주가 3D 업종에 뛰어들었다는 게 좀처럼 믿기지 않지만, 직접 당하고 온 입장이었다. 마냥 부정하는 건 어려웠다.
하지만 세라의 목적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마크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았다면 그녀의 행동은 그럴듯한 전략이 될 테지만,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는 이미 임자가 있었다.
“의도를 알 수가 없군. 왜 힘든 일을 자처하는 거지?”
“사실, 왕세자가 공주님을 싫어한다는 소문이 많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고 하던걸.”
그제야 세라가 무엇을 노리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상대방이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아예 눈에 띄는 행동만 골라서 한다는 건가.”
“갑자기 사라진다면 사람들은 왕세자를 의심할 테니까. 다른 세력이 공주님을 해하려고 해도 왕세자가 먼저 나서서 구해 줘야 할 판일걸.”
“영악하군.”
카인이 피식 웃자, 무언가 생각난 듯 짧게 탄성을 터트린 호른이 손뼉을 쳤다.
“그나저나 내일 입궁하지?”
“그래. 어지간히도 날 보고 싶어 하는 눈치더군.”
“속셈이 있는 걸까?”
“이쯤 되면 없는 게 더 섭섭할 거다.”
소파에 드러누운 카인은 호른이 말했던 내용을 복기했다. 사전 조사도 끝났겠다, 이제 무서울 건 없었다.
* * *
“어서 오세요, 공주님.”
전속 시녀, 네베티가 다가와 망토를 받아 가자 세라는 한결 가벼운 몸짓으로 걸쳤던 장비를 하나둘씩 벗을 수 있었다.
“오늘은 유난히 덥던데 힘들진 않으셨나요?”
네베티가 종달새처럼 지저귀자 세라는 그녀를 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내가 힘든 건 없지.”
“그래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고생을 하시잖아요.”
“그걸 고생이라 할 수 있을까.”
경비대에 나가긴 해도 거기에서 고된 업무를 하는 건 아니었다.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번화가를 배회하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일단 목욕부터 하고 싶구나.”
“네, 이쪽으로 오세요. 물은 미리 준비해 뒀어요.”
가볍게 씻고 나온 세라가 화장대 앞에 앉자 네베티는 빗을 들었다. 그녀는 기다란 머리카락을 빗으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제 허리에 닿을 정도로 조그마했던 분이 어느새 이렇게…….”
비단처럼 고운 백금발과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 그리고 상의를 멀리 밀어낼 정도로 훌륭한 발육까지. 흠 잡을 데가 없었다.
“세월 참 빠르네요. 언제나 아이로만 남아 있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꽃도 부럽지 않은 미녀가 되셨어요.”
어렸을 때부터 지켜봤기 때문일까.
나이 차이는 얼마 나지 않지만, 장성한 세라를 보고 있노라면 입가에 절로 미소가 맺혔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세라를 보는 게 네베티의 유일한 즐거움이라 해도 좋았다.
하지만 세라는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왕궁 안에서 그녀는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것이다.
외견이 아무리 보기 좋다 한들 결국 인형에 불과했다. 어차피 제일 높은 값을 부르는 곳에 팔려 갈 꽃.
여느 때처럼 쓰게 웃은 세라가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는?”
“오침 중이세요.”
말이 오침일 뿐이었다. 아마 다음 날이 될 때까지 깨지 않을 터. 며칠 전부터 항상 이런 식이었다. 마크가 처리하지 못한 정무는 지금 세르듀스가 처리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왕세자를 밀어주기 위한 수작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그녀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정말 마크는 자는 게 하루 일과였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는 로제가 가지고 온 신기에 푹 빠져 있었다. 새로운 장난감이 생기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논다지만, 이건 심해도 너무 심했다.
‘원하는 꿈을 꾸게 도와주는 신기라고 했던가.’
무슨 꿈을 꾸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크는 꿈속에서 헤어 나올 줄 몰랐다.
생각해 보면 희한한 일이었다.
일개 평민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마크는 일국의 왕이었다.
뜻만 있으면 하지 못할 것이 없는데 그는 굳이 잠을 청했다.
꼭 꿈에서만 이룰 수 있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