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159
159화 잘못된 만남 2
* * *
풀 한 포기 자라나지 않는 슈발체베인 공작령에 훈풍이 들이닥쳤다. 시간이 흘러도 가지 않는 겨울은 이제 단점이 아닌 장점이 되었다.
북적이는 거리에는 얼음꽃이 피어나 영원히 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뿜어냈으며, 특별한 장식 없이 밋밋하던 성벽에는 얼음덩굴이 자라나 반짝였다.
도시 하나를 테마파크로 꾸미는 데 드는 인력과 자금은 천문학적인 수준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바로 시간이었다.
전문가들은 몇 년이 걸려도 모자랄 거라고 예측했지만, 로이나는 그런 이들의 생각을 모조리 박살 냈다.
“이다음에는 저쪽 거리를 봐주세요.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쿤달락에게 말하고, 시간마다 현황 보고하는 거 잊지 마세요.”
그녀가 진두지휘하자, 모든 일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대륙에서도 유명한 거상, 고딘 판토마의 옆에서 자란 사람이 바로 로이나였다. 그녀는 돈만큼이나 사람을 굴릴 줄 알았다.
아직 성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틀이 잡혔으니 그 위에 쌓는 건 쉬울 터.
더 이상 손댈 게 없다고 판단한 카인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지하 정원에 내려갔다.
사업을 확장하고, 돈을 긁어모으는 건 즐거웠다. 매초마다 불어나는 자산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미소가 지어졌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었다.
‘성녀님.’
아니, 이제는 아리아라고 불러야 할 소녀를 쫓는 게 우선이었다. 애석하게도 아리아의 흔적을 찾는 건 어려웠다. 비단 그녀만 그런 게 아니었다. 다른 귀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조직 전체가 은밀하게 움직였다.
그래도 리벨리온이 성장하면서 조사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진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한참 후에나 밝혀졌을 정보가 열흘 내외로 줄어들었으니까.
호른이 밤낮없이 뛰어다닌 덕분이었다.
“아흐레 전, 라스쿨 공작령에서 한 마차가 목격되었다고 해. 조직원의 말에 의하면 전이문을 타고 다음 장소로 넘어갔다고 하던걸.”
“크롬은 자신의 마차를 무척이나 아끼니까 수로를 건너는 건 지양할 테지. 아마 험한 길이 있다면 멀리 돌아갈 수도 있다. 그러니 놓치더라도 주위를 한 번 더 조사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전파할게.”
“그리고 행적을 찾는 속도가 너무 늦다. 사흘 이내로 줄여라. 그래야 늦게나마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 테니.”
“그렇지 않아도 증원할 계획이었어. 요즘 가주님의 벌이가 괜찮잖아?”
“그러면 세 배까지 늘려라.”
“그렇게나?”
“중요한 건 어떻게 찾느냐가 아니라 언제까지 찾느냐다.”
그렇게 지시한 카인이 턱을 괴었다.
아리아에게 걸린 족쇄를 풀 방법이 없다고, 크롬보다 약하다고, 핑계를 대며 상황을 가늠하는 건 죄악이었다. 되도록이면 빨리 마주쳐야 했다.
인간의 감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정말 별것도 아닌 것에 꺾이고, 정말 이유도 아닌 이유에 불탔다.
그래서 두려웠다. 시간이 지나면 아리아를 생각하는 마음이 흐려질까 봐, 어쩔 수 없다며 그녀를 놓아주게 될까 봐.
나태한 본성을 다잡기 위해서라도 자신을 채찍질해야 하는 시기였다.
“그보다 여왕님에게 편지가 왔어.”
“가져와라.”
레서 왕국의 여왕, 세라와는 즉위식 이후에도 서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시시콜콜한 일상에서부터 남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민까지, 편지에 적힌 내용은 다양했다.
이번에 온 편지에는 검기를 다루게 되었다는 소식이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놀라울 건 없었다. 재능 있는 검사라면 누구나 가진 기술이었으니까.
하나, 그걸 익히는데 걸린 시간이 경이로울 정도로 짧았다. 그동안 받지 못했던 혜택을 몰아서 받기라도 하겠다는 듯한 행보였다.
아휀에 버금가는 천재를 깨운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정무를 보기에도 벅찰 텐데 성취가 남다른 걸 보면 역시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는 걸까.
[추신, 요즘 성취가 지지부진한 것 같은데 좋은 상대가 있다면 추천해줬으면 하는구나.]아니나 다를까, 끄트머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글귀가 쓰여져 있었다.
고개를 든 카인은 조용히 오리올을 쳐다보았다.
과거에 퍼스널 네임으로 활동한 그였다. 도중에 죽지만 않았다면 능히 십좌의 자리에 올랐을 터. 재능이라면 그도 뒤지지 않았다.
“오리올.”
“네, 가주님.”
“벽에 가로막혀 있다고 했었지. 며칠 동안 왕성에 다녀오는 건 어떻지? 세라가 대련 상대를 원하는 것 같은데 말이야.”
분명 서로에게 좋은 자극이 될 터.
“여부가 있겠습니까, 당장 다녀오겠습니다.”
“가는 길에 이것도 챙겨가라.”
답장을 받아든 오리올이 밖으로 나가자, 나이아는 엄한 눈으로 카인을 쳐다보았다.
“저번에는 로이나, 이번에는 여왕이라니. 대체 어디까지 마수를 뻗칠 셈이더냐.”
“뚱딴지같은 소리군. 갑자기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로이나는 그렇다 해도 세라가 내 동생이라는 건 너도 잘 알 텐데?”
“그쪽에서 너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아서 하는 말이다. 혼담도 오고 간 사이가 아니더냐. 혹시라도 여왕이 너를 마음에 들어 하면 어떻게 할 거지? 그때 가서 새삼스레 전대 가주님을 들먹일 수도 없지 않더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점이었기에 카인은 침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하긴 가보도 주고, 성절도 넘긴 상황이었다. 세라의 입장에서는 구원자로 보일 수도 있을 터.
“그럴 가능성은 적지. 처신을 이렇게나 잘하고 있으니까.”
“그러면 타나 님과 단둘이 호텔에 머무른 건 어떻게 설명할 것이더냐? 그것도 처신의 하나더냐?”
어디에서 들은 게 있는 건지 날카롭게 몰아붙이는 나이아의 말에 카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슬쩍 눈동자를 굴리니 헛기침하는 호른의 모습이 보였다. 부자연스럽게 옷깃을 매만지는 게 의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추궁하기도 우스운지라 카인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밥만 먹고 나왔다.”
나이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곤란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답답하구나, 답답해. 사방에서 하이에나가 돌아다니는데 정작 당사자는 아니라고 하니, 내가 어찌 안심하고 너를 물가에 내놓을 수 있겠더냐.”
“내 엄마라도 된 듯한 어투네.”
“흥, 네 엄마였다면 말로 안 끝났다.”
콧방귀를 낀 나이아가 고개를 돌린다. 카인도 그녀가 무엇을 경계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상상처럼 달콤하지 않았다.
우연치 않게 만난 인연이야 많지만, 이렇다 할 진전은 없었다. 하물며 손도 잡은 적 없는데 더 말해 뭐할까.
“엄한 사람 잡지 말고 네 할 일이나 해.”
“듣거라, 내 말 아직 안 끝났다.”
“계속 주절거리면 오리올 대신에 너 보낸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이아는 휭, 하고 사라졌다. 화살에 맞은 사슴도 저리 뛰진 않을 터.
어깨를 으쓱인 카인은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언제 웃었냐는 듯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그리고 호른을 향해 고갯짓했다.
“장비는?”
“여기 있어.”
* * *
베리타 제국의 동쪽, 카바나 백작령에 도착한 카인은 허리춤에 걸린 검을 두드렸다. 그는 지금 공작 카인이 아니라 동급 모험가 카인이 되어 이 자리에 서 있었다.
리벨리온이 아리아를 뒤쫓는다 해서, 하염없이 슈발체베인 공작령에서 기다리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훈련소를 뒤집었다고 해도 직면한 과제가 사라진 건 아니었으니까.
훈련소에서 얻은 정보가 단말기 안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는 건 틀림없지만, 그걸 해석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별도의 장치가 필요했다. 이 시대의 기술로 재현할 수 있을 리 없으니, 또 다른 신의 무덤을 찾아야 하는 건 당연지사.
다행히 카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신의 무덤을 알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은혜를 입었다고 해도 좋았다. 그곳에 투입된 덕분에 아리아와 만나게 되었으니까.
‘갑급 신의 무덤.’
조직의 일부가 동원되었는데도 공략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 넘어간 마의 소굴. 난이도만 보면 하늘을 찌르다 못해 달까지 닿을 거다. 홀로 왔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그 이상도 될 터.
하지만 카인은 자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만능열쇠가 깃들어 있었으니까. 어려울지 몰라도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이미 검증은 끝난 상태였다. 가서 여는 일만 남았다.
14년 먼저 찾아가는 게 되겠지만, 그게 어쨌단 말인가. 먼저 먹는 사람이 임자인걸.
카인은 서둘러 선착장으로 걸어갔다.
이곳, 카바나 백작령에서 포다얀 백작령으로 가려면 제국의 젖줄이라 불리는 데몬트강을 타고 반대편으로 이동해야 했다.
육로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러려면 저 멀리 하류까지 가야 했다. 코앞에 지름길이 있는데 빙 돌아서 가는 건 천치나 하는 짓.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배가 오고 갔기에 자리가 모자랄 걱정은 없었다. 아무거나 골라서 타면 될 터.
하지만 그 기대는 얼마 가지 않아 송두리째 무너졌다. 수십, 수백 척의 배가 정박된 채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과거에도 본 적 없는 광경에 카인은 머리를 긁적였다. 하나,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법.
이리저리 돌아다닌 그는 정박장 구석에 앉아 술을 푸는 늙은 선원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영지전이 끝날 때까지 넘어갈 수 없다는 겁니까?”
“글쎄, 그렇다니까 그러네.”
초장부터 일정이 엉키자 카인은 침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난데없이 영지전이 일어났다니. 슈발체베인가를 떠날 때만 해도 그런 소식은 듣지 못했으니, 오는 도중에 터진 일이 분명했다.
어찌 됐든 일단 저편으로 넘어가야 했다. 신의 무덤이 있는 곳은 포다얀 백작령이었으니까. 카바나 백작령은 건널목에 불과했다.
“꼭 가야 하는 사정이 있습니다. 어떻게 개인적으로 배를 구할 수 없겠습니까?”
“이 시국에? 자살하고 싶다면 혼자서 하게. 다른 사람들까지 물귀신으로 만들지 말고.”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다른 곳에 가서 호소한다 해도 변하는 건 없을 것 같았다.
“대체 두 영지 간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뭐긴 뭐야, 집안싸움이지. 카바날류는 자네도 알지?”
어찌 모를까. 카바나가과 포다얀가의 전신이 된 유파인데.
데몬트강을 사이에 두고 이웃으로 있는 두 무가에 대한 이야기는 꽤나 유명했다. 세월이 흐르며 두 가문이 지닌 카바날류의 성향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포다얀가는 속도를 중시했고, 카바나가는 힘을 떠받들었다. 성절의 개념 또한 몇 개인가 교체되었다.
이는 대륙에서도 보기 드문 현상이었다. 그게 인접한 무가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더더욱.
그 결과, 서로가 서로를 분파 취급하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다. 자존심 빼면 시체인 게 무인이었다. 잡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설마 누가 원류인지 겨루겠다는 겁니까?”
“그래, 영지전에서 승리하는 쪽이 그 영예를 가져가기로 했지.”
결국, 참다못한 두 무가가 충돌하며 영지전으로 번졌다는 소리였다.
“잠깐만…….”
어디에서 많이 들어본 듯한 기분이 들어 카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기본 교육을 받던 시절에 일어난 사건을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는 건 어느 정도 중요한 분기점이라는 소리.
무언가 석연찮은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카인?”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눈앞이 환해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과 그보다 더 깨끗한 피부.
순백의 갑옷으로 무장한 사내는 티 없이 맑게 웃었다.
“역시 당신이 맞군요. 오랜만입니다.”
그제야 카인은 떠올릴 수 있었다. 백기사 아휀의 일대기가 시작되는 곳이 바로 이 장소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