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171
171화 로터스 1
* * *
갈피를 잡지 못한 카인이 그리 묻자 호른은 찬양하라는 듯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바야흐로 헤브니아력 6508년. 카바나가와 포다얀가, 두 가문이 첨예하게 대립할 때 한 검사가 나타나 그들의 다툼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몸소 보여 주니 그의 손에서 완전한 카바날류가 재현되었더라.”
얼쑤, 하고 추임새를 넣는 건 기본.
“이에 사람들은 그 검사를 기리며 칭송하길 흑기사라, 극적으로 화해한 두 가문도 기쁜 마음으로 수긍하더라.”
과장된 어투로 나불거린 호른이 손뼉을 쳤다.
“……라는 식으로 가주님에 대한 이야기가 제국 전역에 퍼지고 있어.”
“아.”
나지막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카인도 자신이 신나게 날뛰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언젠가 그에 대한 말이 나오리란 것도. 하지만 퍼지는 속도가 생각보다 너무 빨랐다.
하긴, 무리도 아니었다.
시대를 불문하고 영웅은 언제나 환영받는 법. 오랜만에 나온 무용담이니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일 터.
“그게 나라는 걸 의심하는 사람은 없나?”
“왜 없겠어?”
대중은 우둔하나, 바보는 아니었다.
내력이 밝혀지자마자 몇몇 사람들은 흑기사가 어쩌면 슈발체베인 공작일 수도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름이 같은 건 물론이고, 나이대까지 비슷했기 때문이다.
산불 번지듯 대두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러나―
“모두 헛소리로 치부하던걸.”
정확하게 말하면 그럴 리 없다고 비웃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그 절름발이에 반푼이가? 하여튼 허세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라는 게 정론.
“일각에서는 가주님이 흑기사의 명성에 편승하기 위해 되지도 않는 유언비어를 퍼트렸다고 보고 있어.”
“인지하기도 전에 상황이 끝난 건가.”
허탈한 기분 반, 홀가분한 기분 반이었다.
그동안 벌인 일을 축소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닌 게 호재가 된 듯했다.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
아휀의 무용담을 훔친 게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역사 속에 백기사라는 이름을 지운 것만 해도 커다란 성과라 여겼거늘, 흑기사라니.
“나쁘지 않군.”
슬슬 대외적인 평판이 필요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알아서 척척 달라붙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이는, 후일 큰 자산이 될 터.
“하지만 시기가 이르니, 거짓된 정보를 뿌려라. 아니지, 이 경우엔 정면 돌파가 더 낫겠군.”
“흑기사가 가주님일 수도 있다는 의혹을 남기라는 거지?”
“그래, 선입견만큼 좋은 방패는 없으니까.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소문이 들리면 오히려 거부 반응을 일으킬 거다.”
“그게 진실이라는 것도 모른 채 말이지.”
비릿하게 웃은 호른이 카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중요한 건 이다음인데 말이야. 공작령 내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됐어.”
“어떤 움직임을 말하는 거지?”
“로터스가 들어온 것 같아, 지금 찾는 중이야.”
카인은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로터스.’
범대륙적인 범죄 조직의 이름이었다.
전생의 마피아나 삼합회 같은 포지션에 있는 녀석들이었다. 그들에게 범죄는 비즈니스의 일환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일까. 돈이 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나타났다.
슈발체베인 공작령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그 연장선일 터.
“하지만 너무 갑작스럽지 않나?”
로터스같이 유서 깊은 조직은 오히려 무가보다 더 엄격한 구석이 있었다. 암흑가에서 실수는 오직 피로만 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력을 확장하는 건 그들에게 대사 중 하나로, 될 수 있으면 세련되고 은밀하게 진행했다.
이렇게 성난 들소처럼 이리 치고 저리 치면서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얼마 전에 로터스의 대부인 알롱 로터스가 암살되었다고 해.”
“모리아티가 벌인 짓인가?”
“아니, 완전히 다른 녀석이야. 내 예상에는 조직이 일을 벌인 것 같아.”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조사해 보니까 알롱은 대가가 필요 없는 보구를 찾아다녔다고 해. 평소에도 이 시대의 기술로는 구현할 수 없는 물건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고도 하고.”
“그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뿐이지 신기와 다를 게 없었다. 암흑가에서 나고 자란 알롱이었다. 어쩌면 조직이란 집단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퍼스널 네임이라도 나서서 그를 처리한 걸 테지. 로터스의 대부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하면서 이 시기에 일정이 비는 녀석은―
‘우라?’
갑자기 그녀가 떠오른 건 왜일까.
“아무튼 그 사건 때문에 로터스에 균열이 생긴 것 같더라고. 알롱은 특히나 많은 자식을 보았으니까. 혼란을 틈타 로터스를 먹고 싶은 녀석이 하나둘씩 고개를 치켜든 것 같아.”
“이곳에 온 녀석은?”
“로터스 내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선봉장으로 선 게 아닐까?”
“그러니까 찔러나 보자는 식으로 온 게 아니라 아예 뿌리를 내릴 각오로 왔다는 거지?”
말하자면 녀석들에게 슈발체베인 공작령은 세력을 키우기 위한 전진 기지이자 교두보란 소리였다. 리벨리온이 이곳을 장악하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런데도 구태여 노린다는 건 그만한 자신이 있다는 뜻.
“정확하게 밝혀진 건 없지만, 정황상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아마 가만히 두면 새로운 지부가 세워질 텐데, 가주님은 어떻게 할 거야?”
“당연히 일벌백계로 다스린다.”
로터스가 다시는 리벨리온의 영역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 * *
슈발체베인 성으로 돌아온 카인은 곧장 총관인 로건을 만났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선인장처럼 자란 수염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닌 그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랜만에 격무에서 벗어난 로건은 깨끗이 정돈한 차림으로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그 원인은 단순하고도 명쾌했다.
그의 업무를 덜어 줄 사람이 들어왔다는 것.
“가주님이 추천한 이브라는 아이, 정말 물건이더군요.”
“도움은 되나 보지?”
“그 이상입니다. 도대체 그런 인재를 어디에서 데려온 건지 감도 잡히지 않습니다.”
솔직히 카인이 이브를 데려왔을 때만 해도 영 못 미더웠다. 미색이 뛰어나 곁에 두려고 변명거리를 만든 건지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게 웬걸. 업무에 배정된 지 하루도 되지 않아 그녀는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다. 그 누구보다 확실하게.
이브가 들어온 덕분에 업무 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든 건 물론이고, 잔실수도 없어졌다.
거의 없는 게 아니라, 아예.
표정이 없다는 게 흠이지만, 그녀의 역량을 감안하면 단점도 되지 못했다.
“보면 알겠지만, 그녀는 여러모로 미숙하다. 그러니 옆에서 잘 보살피도록 해.”
“그렇지 않아도 주의 깊게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브는 어디에 있지?”
“이 시간이면 아마 도서관에 있을 겁니다.”
“그런가.”
로건과 헤어진 카인은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벽난로 옆에 앉아 있는 이브가 보였다. 종아리까지 자란 검은 머리카락을 곱게 늘어뜨린 그녀는 턱을 괸 채 일렁이는 불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브.”
“공작님입니까.”
“뭐 하고 있어?”
“딸감을 보고 있었습니다.”
“뭐?”
혹시 잘못 들었나 해서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브는 아랑곳하지 않고 첨언했다.
“공작님도 할 일이 없으면 한 번씩 보실 텐데요.”
“그, 그러니까…….”
마른침을 삼킨 카인이 대답하지 못하고 망연자실하게 서 있자 이브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오타가 났군요. 정정하겠습니다. 딸감이 아니라 땔감입니다.”
“오타일 리가 있냐!”
누가 보아도 고의적인 실수였다.
“저만 보면 수심에 잠긴 표정을 짓기에 제 나름대로 위트를 발휘한 겁니다.”
“사회적으로 날 매장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런 오타는 내지 마.”
“삭막하군요.”
“너는 엉큼하고.”
카인은 이브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자리에 앉았다.
“잘 지내고 있나 해서 찾아온 거야.”
“밤마다 보지 않습니까.”
“오해받을 만한 소리는 하지 말래도.”
“보고할 만한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하지만 건의하고 싶은 사안은 있습니다.”
“그게 뭐지?”
“마소에 대해 연구해 보고 싶습니다.”
초자연적인 현상을 일으키는 힘의 근원이자 물리법칙의 한계를 부수는 원소, 마소.
도서관에 있는 서적을 두루 읽은 이브가 마소에 대한 의구심을 품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누구도 마소가 어디에서 온 건지 명확하게 밝혀내지 못했던 것이다.
“마소는 완벽에 가까운 에너지원입니다. 공해가 없고, 범용성이 높으며, 그 한계가 정해지지 않았으니까요. 누군가 목적을 가지고 개발한 게 틀림없습니다.”
“흐음.”
간과했던 사실이 거론되자 카인은 침음을 흘렸다.
현대 문명의 맥을 이은 헤브니아에서 마소는 지극히 이질적인 원소였다.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났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관측소 EAR―001에서 마소가 가득 담긴 병을 보았다는 나이아의 보고가 있었다. 그녀의 고향, 미미르에 있는 호수와 색깔이 똑같아서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고.
그때 당시엔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지만 이브가 거론하니 무언가 상관관계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 마소도 현대 문명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거야?”
“그걸 밝히기 위해 연구를 해 보고 싶다는 겁니다.”
“말해 둘 테니까 원하는 게 있으면 총관을 통해 구해.”
카인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이브는 즉시 다음 요구 사항을 입에 담았다.
“이왕이면 저도 리벨리온의 활동에 참가하고 싶습니다.”
“너는 전투 능력이 없잖아.”
“싸우고 싶다는 게 아닙니다. 그저 공작님의 뒤를 따라다니며 여러 케이스를 관찰하고 싶은 겁니다. 마력과 마나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건지, 또한 어떻게 발현되는 건지.”
등을 떠밀어서라도 조사해야 할 사안을 본인이 이렇게 원한다는데,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예상도 못 한 안드로이드의 학구열에 카인은 피식 웃으며 고갯짓했다.
“대신,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면 꼭 말해.”
“알겠습니다.”
* * *
보름달이 뜬 새벽, 크리멀은 스산하게 가라앉은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그가 있는 장소는 콜만시. 슈발체베인 공작령에 복속된 마흔여덟 개의 소영지 중 한 곳이었다.
슈발체베인 공작령 최남단에 있어, 공작의 입바람이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동안 로터스는 슈발체베인 공작령 안에서 소극적으로 활동했다.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저 수익을 창출하는 데 어려움이 많아, 잠시 뒤로 미뤄 두었을 뿐이었다. 슈발체베인 공작령은 몸집이 큰 로터스가 구태여 탐낼 그릇은 되지 못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검성 라프만의 존재가 거치적거렸다. 십좌 중 한 명인 그의 눈 밖에 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난 뒤, 모든 게 바뀌었다.
“반푼이가 영지의 주인이라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지지.”
카인 슈발체베인. 무재는 없어도 상재는 제법인 걸로 알려진 인물답게 어떻게든 일감을 가져와 영지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크리멀의 눈에는 그게 눈먼 돈이 범람하는 것처럼 보였다.
방해되는 라프만도 없고, 먹음직스러운 돈줄도 새로 생긴 상황. 슈발체베인 공작령에 진출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평소라면 시간을 들여 천천히 진입했을 테지만, 크리멀은 과감하게 중간 과정을 생략했다.
로터스의 대부이자 아버지인 알롱이 죽으면서 로터스의 내부 분위기가 완전히 일변했던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잡아 다른 경쟁자를 물리쳐야 했다.
슈발체베인 공작령에 엠이라는 걸출한 경쟁자가 있다는 건 그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향후 50년을 결정하는 싸움이 코앞이었다.
변방의 범죄자 따윈 고려할 대상도 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