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172
172화 로터스 2
* * *
그때, 문을 열고 한 사내가 들어왔다. 각진 턱과 듬직한 체구. 그는 크리멀이 아끼는 수족, 아르펜이었다.
“뭐지, 오늘은 혼자 있고 싶으니까 나가 있으라고 했을 텐데.”
“꼭 크리멀 님에게 보고해야 할 것 같아서 왔습니다.”
“뭔데?”
“학살 여왕이 이곳에 온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크리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그런 소문은 없었을 텐데?”
“소문이 돌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 걸 테죠. 동행인도 한 명밖에 없습니다. 아마 슈발체베인 공작과 대담하려고 비밀리에 발걸음을 옮긴 걸 겁니다.”
아르펜이 세라의 모습을 발견한 건 우연이라 할 수 있었다. 타지, 그것도 로터스의 힘이 미치지 않는 장소에서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일단 주위부터 잘 살펴야 했으니까.
다른 때라면 모르고 넘어갔을 행차였다.
허물어지듯이 제자리에 앉은 크리멀은 검지로 턱을 툭툭 두드렸다.
“그래, 둘의 관계가 돈독하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상식적으로 왕족은 건드리지 않는 게 나았다. 하지만 레서 왕국의 여왕, 세라 제피로스는 여러모로 특이한 인물이었다. 피아의 구분 없이 벌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덕망도 높고, 그만큼이나 원망도 많이 쌓은 여자였다.
“그러고 보니 이쪽 근방에서 의뢰를 받은 기억이 나는데 말이야.”
“로슈스토 백작을 말하는 겁니까?”
“아, 그래. 페르마 로슈스토. 그 애새끼의 의뢰였지.”
세라가 즉위한 날, 부패한 귀족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설령 귀족파의 거두라 해도 그 칼날은 피해갈 수 없었다.
물론 죗값을 치른 건 어디까지나 가주들뿐이었다. 그들이 뿌린 씨앗은 여전히 건재했다.
일부는 몰락 귀족이 되었고, 일부는 차기 가주가 되었다.
페르마도 그 씨앗 중 하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영식이었던 그는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고 졸지에 가주가 되었다.
세라바라기였던 페르마가 세라까기가 된 건 그때 즈음.
구석에 몰린 그가 로터스의 문을 두드린 건 어찌 보면 필연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때 당시엔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아 거절했지만, 이렇게 되니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이런 거물이 걸리다니, 돌아가신 아버지가 굽어살피는 것 같군.”
지금이라면 흔적도 없이 처리할 수 있었다.
비릿하게 웃은 크리멀이 입술을 핥았다.
* * *
늦은 시각, 선술집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오리올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른 아침부터 내린 폭설은 해가 저물고 어둠이 짙게 깔리고 나서야 멎었다.
혼자라면 느긋하게 가도 될 테지만, 지금 그의 곁엔 동행인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동행인이. 이런 일로 시간이 지체되면 안 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여성의 사정에 따라 나라의 시류가 바뀌었으니까.
오리올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 여성, 세라를 쳐다보았다.
카인을 놀라게 해 주고 싶다는 요청이 있어, 조용히 데려오긴 했지만 이렇게 둘만 있으니 염려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뭐라 해도 그녀는 레서 왕국의 정점. 무방비하게 나다닐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다.
“혼자 나오셔도 됐던 겁니까?”
“그러면 기사들을 장신구처럼 주렁주렁 달고 왔어야 했나? 단호하게 말하건대, 그편이 더 눈에 띄었을 거다.”
“그래도 최소한의 호위는 필요한 것 같아 말씀드린 겁니다.”
“괜찮다, 공작의 얼굴만 보고 올 생각이니. 그리고 슈발체베인 성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을 텐데? 너무 늦은 걱정이라 생각하지 않나?”
“그렇긴 하지만…….”
말끝을 흐린 오리올의 손끝이 잘게 떨린 건 한순간이었다. 선술집을 둘러싼 기묘한 움직임을 느낀 그는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렸다. 누군가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모험가였을 시절에 자주 느꼈던 시선이었다.
적의.
먹잇감을 노리는 마수가 도심지에 있을 리 없으니, 사람의 것이라 봐야 했다. 기세가 흉흉한 게 꼭 짐승 같았지만.
시중에 떠도는 절기를 익힌 게 아니라 엄선된 성절을 배운 것일 터. 결코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었다.
리벨리온의 눈을 피해 자리를 잡은 걸 보면 더더욱.
세라 또한 느낀 게 있는 건지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귀족파일까?”
그 잔당이 움직일 수 있다는 건 각오한바, 그녀는 검 손잡이에 팔을 올려놓았다.
“글쎄요. 고려해야 할 사안이 많아 뭐라 확신할 수 없군요.”
본디 슈발체베인 공작령은 범죄자들의 소굴이라는 이명이 있을 정도로 음험한 곳이었다.
카인이 리벨리온을 결성한 뒤로 수가 줄긴 했지만, 그 본질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모난 돌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오늘도 푹신한 침대에서 자는 건 무리겠군요.”
“차라리 여기에서 일망타진하는 건 어떻지?”
“하나나 둘이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설마…….”
“쉿.”
포위되었냐고 물으려던 세라는 오리올이 검지를 치켜들자 입을 다물었다.
“갑니다. 하나, 둘…….”
셋, 오리올이 외치기가 무섭게 치고 나간 세라는 검을 빼 들어 앞길을 가로막는 이를 벴다. 오리올 또한 그 옆에 있는 이의 가슴을 창으로 찔렀다.
경주를 하듯, 선술집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렸다. 동시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빠르게 따라붙었다.
예사롭지 않은 대처.
달리던 와중에, 투창 자세를 취한 오리올은 짧게 호흡을 끊이며 팔을 휘둘렀다.
세라와 대련하며 한 단계 성장한 환상도요는 더 이상 그의 손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세 번째 개념, 잔영.
아지랑이, 그리고 신기루에 이어 새롭게 깨달은 개념이 단번에 발휘된다.
난데없이 쏘아진 창에 상대방이 놀라 쓰러지자 오리올은 피식 웃었다. 투사된 건 창이 아니라 그 모습을 본뜬 허상이었다. 말하자면 기만술에 속은 셈.
“멍청하긴.”
자신은 다를 거라는 듯, 뒤이어 오던 녀석이 호기롭게 거리를 좁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태도가 패착이 되었다. 이번에 오리올이 던진 건 진짜였으니까.
콰직.
“크헉.”
외마디 탄성을 터트린 사내가 새하얀 눈밭 위를 나뒹군다.
마력을 투사하는 개념, 잔영은 언제든지 그 진위를 뒤바꿀 수 있었다. 언제든지 참이 될 수도, 거짓이 될 수도 있었다.
잔영의 진의를 눈치챈 이들이 주춤하는 듯한 기색을 보이자 오리올은 속도를 올렸다.
하루 종일 폭설이 내린 탓인지 발밑이 푹푹 들어갔다. 체력 소모가 심한 건 당연지사.
세라에게 괜찮냐고 물어보려던 오리올은 입을 다물었다. 위기 상황임에도 세라는 의연하게 대처해 나갔다.
그녀는 다가오는 살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몇몇 발이 빠른 녀석들이 세라를 노골적으로 노렸지만, 결코 꺾이지 않았다.
오더 링크.
일찍이 검성 라프만을 대표하던 성절이 그녀를 보호해 주고 있었다.
세라가 내지른 검격은 하나하나가 치명적이었다. 여력을 신경 쓰지 않고 전력을 다하면 탈진하기 마련이지만, 그녀의 연격은 처음과 똑같았다. 본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오더 링크가 그것을 가능케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마력이 부족한 게 발목을 잡았다.
차오르는 숨을 거칠게 내뱉은 세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레디샤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게 한이구나. 그게 있었다면 이런 녀석들쯤은 아무것도 아닐 텐데.”
“대신 대가가 따르지 않습니까.”
지쳐 쓰러질듯한 세라의 팔을 잡아당긴 오리올이 고갯짓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알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의 추격을 뿌리치며 골목길에 들어선 두 사람은 머지않아 공터에 다다를 수 있었다. 먹먹할 정도로 고요한 거리.
호흡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올린 세라는 두 눈을 부릅떴다.
따돌렸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마치 여기에 올 걸 알았다는 듯이.
그제야 오리올은 녀석들이 무엇을 노린 건지 알 수 있었다.
“이쪽으로 도망치도록 유도한 거였나.”
몰이 사냥이었다. 처음부터 도망칠 곳 따윈 없었다는 뜻. 오리올이 짧게 혀를 차는 것과 동시에 궐련을 입에 문 사내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다른 이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감.
눈썹과 뺨을 가로지르는 긴 검상이 그가 지나온 삶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듯했다.
“만나서 반갑다고 해야 하나?”
날것 그대로의 인사에 오리올은 창을 꽉 잡았다.
“누구지?”
“알 거 없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래도 자칭해야 이야기가 진행되겠지. 내 이름은 크리멀 로터스. 지엄하신 대부, 알롱 로터스의 셋째 아들이다.”
로터스라는 단어가 거론되자, 후드를 벗은 세라는 검으로 땅바닥을 내리찍었다. 그리고 검을 지팡이 삼아 허리를 곧게 폈다.
“내 이름은 세라 제피로스. 레서 왕국의 하나뿐인 여왕이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 무례는 사과해야 할 거다, 크리멀.”
“크크, 웃기는군. 지금 벌벌 떨어야 할 타이밍인가? 미안하지만 그래야 하는 건 너다.”
“누구의 의뢰를 받은 건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곧 사라질 거다. 그러니 포기하고 물러나거라.”
“그 소리를 들으니, 더더욱 훼방을 놓고 싶군.”
“정녕 나와 끝을 보고자 하는 건가?”
“죽더라도 잡아먹고 보자는 주의라. 솔직히 여기에서 너희 둘이 사라지면 누가 알겠어, 안 그래?”
방만한 대응에 오리올이 격분했다.
“무례하군. 이분의 정체를 알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 건가?”
“엄밀히 말하면 나는 제국민이다. 타국의 여왕이 말하는 대로 움직여야 할 책임은 없지.”
“뒷일이 걱정되지도 않는 건가?”
“탈이 나도 내가 나는 건데 왜 네가 걱정하는 거지? 그리고 너희는 이미 끝났다. 죽어도 못 벗어나.”
포위된 순간, 두 사람의 운명은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귀족파의 잔당에게 넘기면 어떻게든 해결될 터.
중간에 역모나 음해 같은 뒤숭숭한 사건이 벌어지겠지만, 알 바 아니었다.
자신은 손 털고 물러나면 되니까.
알롱이 살아 있었다면 결사반대했을 테지만, 크리멀은 그대로 밀고 나갔다. 차기 대부가 되려면 남들과는 다른 다리를 건너야 했다.
“적당히 놀아 줘라.”
크리멀이 손가락을 튕기자 그의 충실한 수족들이 오리올과 세라를 에워쌌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도 없는지라, 오리올은 부러져라 창을 꽉 쥐었다.
“여왕님, 제가 길을 열겠습니다. 그 틈에…….”
“아니, 나도 돕겠다. 함께 나가는 거다.”
인의 장막 앞에 선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손에 든 무기를 휘둘렀다. 순간, 로터스의 조직원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발을 굴렸다. 그러자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충격이 장내를 휩쓸었다.
로터스의 성절은 실드 탱크.
합격진에 특화된 절기였다.
같은 성절을 익힌 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완성도가 높아지기에 집단전에서 특히 강한 면모를 보였다.
오늘날까지 그들이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것도 이 실드 탱크 덕분이었다.
특출난 개인이 아니라 특별한 집단이 되어 상향 평준화를 꾀하는 그들의 힘은 명문 무가 못지않았다.
더구나 자리에 모인 조직원은 하나같이 정예. 로터스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였다.
“젠장.”
수레바퀴처럼 돌아가는 연격에 오리올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노도에 휩쓸려 허우적거리면 이러한 기분일까. 숨 쉬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이어지는 난타에 그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기량에서 밀리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압도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한 손으로는 열 손을 당해 낼 수 없는 법이었다.
‘리벨리온을 불러야 하나.’
품 안에 있는 신호탄을 만지작거린 오리올이 마른침을 삼켰다. 옆에 세라가 있어 경거망동할 수 없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리벨리온이 나타나면 그녀에게 해명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더구나 카인의 속내까지 드러날 수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혹을 떼려다가 하나 더 붙일 수 있었다.
하지만 오리올은 그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전보다 훨씬 지쳐 보이는 세라의 모습에 더 이상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어.’
마음을 다잡은 오리올이 신호탄을 꺼내려는 순간, 하늘에서 검은색 그림자가 떨어졌다.
쾅.
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착지한 사내는 새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