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182
182화 괴도 1
* * *
회색빛으로 물든 세상이 오색찬란하게 불타오른다. 시야를 두드리는 색의 폭력.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넓은 바다가 함께하니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여태 쌓였던 걱정과 근심이 사라지는 듯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크롬의 폭거도 조직의 임무도 잊을 수 있었다.
‘……성녀, 님?’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사색에 잠길 때면 항상 엠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마치 각인된 것처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자문한 아리아는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롬이 벼르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묘하게 애달프던 엠의 태도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그렇게 믿고 싶었다.
메마른 가슴 위로 퍼진 메아리가 어떻게 될지 아리아도 궁금하던 참이었으니까.
무어라 형언할 수 없지만, 한 번 싹트기 시작한 감정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진하게 울려 퍼졌다.
그건 석양을 볼 때 느꼈던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울림이었다.
그때, 낯선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난간에 올라온 건 한 사내.
거동이 불편한 건지 지팡이를 짚고 있었지만 범상찮은 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는 기세가 흘러넘치고 있었으니까.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찰나에 불과한 감상.
다른 사람이라면 무시하고 넘어가겠지만, 아리아는 자신의 감을 믿었다. 허투루 열 가지나 되는 인자를 부여받은 게 아니었다. 그녀의 육신은 때때로 인지를 초월한 직관을 보여 주었다.
순간, 사내와 눈이 마주친다.
“아.”
선객이 있다는 걸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걸까.
남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얼굴. 기괴하지만 그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것 같아 아리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 *
일찍이 아리아는 명당을 찾아다녔다. 석양을 오롯이 볼 수 있으면서, 가만히 상념에 잠길 수 있는 장소. 그녀는 그런 곳이 있다면 뒷골목 천막이라도 명당이라 부르길 서슴지 않았다.
카인도 그런 그녀를 따라 명당을 이곳저곳 기웃거렸다.
그중에는 그가 발품을 팔아 직접 찾은 곳도 있었다.
네메시아에도 하나 있었다.
이곳에서 그녀가 아낀 장소는 시계탑. 도시의 정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었다.
사실, 발걸음을 옮기면서 카인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시계탑에 가는 건 어디까지나 추억을 반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니까.
“아.”
하지만 이렇게 마주치고 나니 머리가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린 아리아라도 아리아는 아리아라는 걸까.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우연에 카인은 무언가에 홀린 듯 아리아에게 다가갔다.
숨결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바라 마지않던 이가 있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아리아를 데려가고 싶었지만, 근방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기척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누군가 이쪽을 주시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성급하게 반응하는 건 금물이었다.
“석양 좋아, 해?”
낮춤말이 입에 붙지 않지만, 그래도 해야만 했다. 연장자, 그것도 귀족이 갑자기 다가와 존대하면 경계할 테니까.
이 정도 거리가 딱 적당했다.
그리고 친해지려고 애걸복걸하지 않아도 되었다. 적어도 아리아에게 석양이라는 주제는 마법의 단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아리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에 카인은 칭찬이라도 받은 것 같이 활짝 웃었다.
“나도 좋아해.”
“이유가 뭡니까?”
“내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이가 아낀 광경이니까.”
따라다니다 보니 옮았다는 표현이 정확하리라.
카인의 눈빛이 그윽해지자 아리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 보는 것만으로 가슴 한쪽이 간지러워지는 느낌이었다.
세간의 평과는 다른 사람인 것 같아 아리아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듣던 것과는 많이 다르시군요.”
“그래? 말하는 걸 보니 내가 누구인지 눈치챈 것 같은데 말이야. 어떤 소문을 들었는지 알 수 있을까?”
“…….”
“부담스러워하지 않아도 돼.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니까.”
카인의 미소에 사심이 없다는 걸 파악한 아리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드는 여자는 어떻게든 품어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반푼이로 위장한 게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이야. 속이 꽉 찬 직구에 카인은 올라갔던 입꼬리를 다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정말 믿는 건 아니지?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지만, 그거 다 헛소문이야. 호사가들이 푼돈 챙기려고 퍼트리는 이야기니까.”
“그건 제가 판단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날이 선 듯 냉혹한 의견.
혹시나 싶어 아리아의 안색을 살핀 카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호의적인 시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경멸하는 시선도 아니었다. 그저 넋이 나간 듯, 맹한 표정을 유지할 뿐.
분위기가 어색해지려고 하자, 카인은 특단의 대책을 내렸다. 아리아에 대한 거라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알고 있는 그였다.
해결책을 내는 건 일도 아닌바, 품 안에서 사탕 하나를 꺼낸 카인은 그대로 아리아에게 던졌다.
“이런 걸로…….”
그다음에는 초콜릿.
“제가…….”
마지막으로 젤리.
“좋게 볼 것 같습니다.”
오물오물.
입안 가득 간식을 털어 넣은 아리아가 햄스터처럼 뺨을 부풀렸다. 그 모습에 카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아는 아리아는 식도락을 즐기는 성격이었다.
“마음에 든 것 같아 다행이네. 그래도 나이에 비해서 체구가 작은 편인 것 같은데.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 거야?”
“괜한 참견은 사양하겠습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남은 건 어떻게 할래, 먹을래?”
“의도가 미심쩍지만 받겠습니다.”
아직 미식이 무엇인지도 모를 나이. 자신의 기호조차도 파악하지 못할 시기니, 허점을 공략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아까 보니까 고민이 많아 보이던데.”
“별거 아닙니다.”
“별거 아니라면 말해 줄 수도 있겠네, 안 그래?”
“이제 보니 별거인 거 같습니다.”
아리아가 뚱하게 받아치자 카인은 히죽 웃으면서도 씁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기억하는 아리아의 마지막은 비참하기 그지없었으니까.
이런 식으로라도 재회하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저기…….”
카인이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불청객이 나타났다.
“아리아?”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묶은 여자가 다가와 아리아의 앞에 가리듯 섰다. 언뜻 보면 어미새가 아기새를 보듬는 듯한 모양새였다.
아리아는 그녀의 행동에 맹한 표정을 지으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카인은 진정하라는 듯 두 손을 들었다.
“수상한 사람이 아니다, 내 이름은…….”
“알고 있습니다, 공작님. 그저 이런 곳에 계실 분이 아닌지라 저도 모르게 신경을 쓰게 되는군요.”
“그 아이의 보호자인가 보군.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나?”
“엘리제라고 불러 주시길.”
“엘리제인가.”
크롬과 항상 짝을 이루는 귀신의 이름이었다. 그녀에게 임무 중에 죽은 동생이 있다는 건 카인도 익히 알고 있었다. 회귀 전에도 몇 번 만난 적이 있었으니까.
‘방금 전까지 느꼈던 기척은 이 녀석의 것이군.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 건지 본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과민한 반응이었다.
‘아리아에게 죽은 동생을 투영해서 보는 건가?’
있을 법한 얘기였다.
정중하게 대하면서도 벌레를 쳐다보는 듯한 눈길을 거두지 못하는 게, 그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였다.
“취미가 비슷한 사람을 만난 게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다가간 것뿐이다. 다른 의도는 없었으니 안심해라.”
“그렇습니까. 그러면 해도 저물기 시작했으니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명백한 경계.
아무래도 이쯤에서 헤어져야 할 것 같았다. 이 만남 자체가 예상치 못한 이변이었다.
섣부르게 움직이면 자신이 엠이라는 걸 알리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더구나 아리아는 열 가지의 인자를 부여받은 천재. 그녀가 사력을 다해 도망치면 놓칠 가능성이 높았다.
아리아가 잘 지내고 있다는 걸 확인한 것만 해도 소기의 성과라 할 수 있었다.
“그래, 만나서 반가웠다.”
두 사람이 멀어진다. 아리아는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엘리제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 모습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본 카인은 한 박자 늦게 탄성을 터트렸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아리아는 더 이상 성녀가 아니라는 거였다. 당연하다는 듯 미소 짓지도 않고, 남을 배려하는 듯한 행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2급 살귀였을 때 보인 모습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과거가 바뀌면 미래도 바뀌는 법.
모든 사건은 인과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당장 나이아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에렌디아 부족을 잃지 않은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복수귀가 아니었다.
아리아 또한 마찬가지. 성황교에 들어가지 않은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성녀가 아니었다.
‘그 시절로는 돌아갈 수 없겠군.’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니, 설정된 관계도 바뀔 수밖에 없었다. 아마 아리아가 조직을 벗어난다고 해도 예전처럼 돌아가는 건 불가능할 터.
진작에 예상했어야 하는 미래였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대신, 추억은 전부 버리라는 거냐.”
야멸찬 등가교환이었다. 하지만 카인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엇갈린 인연이라도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 함께할 날이 올 테니까.
그렇게 시계탑 아래로 내려온 카인의 눈에 붉은 머리카락을 짧게 동여맨 소녀가 보였다. 오페라 하우스에서 길 안내를 해 준 말단 단원, 쥬시였다.
모르는 척 등을 돌린 순간,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뉴후후, 한 나라의 공작님이 호위도 없이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는 거예요?”
“네가 더 조심해야 할 텐데. 으슥한 골목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그리 가볍게 뛰어다니는 거지?”
때아닌 염려에 쥬시는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카인을 올려다보았다.
“제게 추파를 던지는 걸 보니 선배랑은 잘 되지 않았나 봐요?”
“다른 볼일이 있어서 만났을 뿐이다. 네가 바라는 상황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거지.”
다 알고 있다는 듯, 의뭉스럽게 웃은 쥬시가 뒤를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시계탑엔 무슨 일로 올라가신 거예요?”
“석양이 보고 싶었다.”
“저와는 정반대네요. 저는 해가 지는 게 정말 싫은데, 뉴후후.”
“그야 어린아이는 집에 돌아가서 자야 하니까 그런 거 아니겠나.”
“저도 알 건 다 아는 나이라구요.”
“그래.”
“아이 참. 매정하게 가지 마시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오붓한 곳에 가서 저녁 식사라도 해요. 생각해 보니 길 안내를 해 주고 받은 게 없단 말이에요.”
“애석하지만 오늘은 선약이 있다. 다음에 시간이 나면 상대해 주지.”
“보나 마나 시간이 지나면 공작님은 영지로 돌아가실 거잖아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여기.”
끈덕지게 달라붙는 쥬시의 머리를 밀어낸 카인이 저 먼 곳에 있는 왕궁을 쳐다보았다.
오늘이 바로 괴도 케이가 롤랜드 왕실에서 가장 아끼는 보물을 훔쳐가겠다 공언한 날이었다.
* * *
도시 국가, 네메시아의 중심에 우뚝 선 왕궁은 다른 곳과 다를 게 없는 양식을 지니고 있었다.
주시할 만한 게 있다면 그건 성 주위를 빙 둘러싼 해자였다. 왕궁과 왕궁이 아닌 곳을 정확하게 가르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된 강줄기는 그 깊이부터가 남달랐다. 더욱이 가까운 곳에 바다가 위치해 있으니, 쉬이 넘보기 힘든 요새라는 건 당연지사.
왕궁 안으로 들어가려면 도개교를 지나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일반적인 경우의 얘기일 뿐. 숙련된 무인이라면 그 한계조차 뛰어넘을 수 있었다.
왕궁의 구석. 해자의 끄트머리에 선 카인은 가볍게 뛰어오르며 몸을 풀었다. 오리올과 나이아를 위시한 리벨리온은 주변에서 대기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