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188
188화 오의 1
* * *
마힌의 얼굴 위에 떠오른 감정이 많은 걸 보여 주었다.
인생은 불합리한 법이었다. 똑같은 주제일지라도 서 있는 위치에 따라 관점이 바뀌었으니까.
한때 나이아는 이해하지 못했다. 대화로 끝낼 수도 있는 걸 어째서 다투는지. 무엇이 그리 중요하다고 피를 흘리는지.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선의라고 해도 때로는 강압적인 방법을 취해야 할 때가 있다는 걸. 원하는 걸 쟁취하기 위해선 싫어도 무기를 겨눠야 한다는 걸.
세상에는 말만으로는 전할 수 없는 것도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극단적인 처방이 필요하겠구나. 미리 경고하마. 내가 주는 사랑의 매는 조금 무거울 테니까.”
“자신감을 가지는 건 좋은 일이다. 물론 그만한 실력이 된다는 전제하에.”
“그래,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겠지.”
순간, 둘 사이에 정적이 흐른다.
나이아가 활시위를 당긴 것과 마힌이 튕겨 나가듯 질주한 건 거의 동시.
궁수에게 거리를 주는 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마힌은 자신의 공격 범위 안으로 상대방을 끌어들인다, 는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그건 나이아도 예상하고 있던바, 그녀는 빠르게 손을 놀렸다.
동시에 5개의 화살이 일렬로 쏘아졌다. 마치 다섯 명의 궁수가 합을 맞춘 것처럼.
기예에 가까운 속사였다.
거기에 보구 하늘바라기의 보정을 받아 소리도 없이 나아가니, 눈으로 모든 걸 판단해야 했다. 본의 아니게 반응이 한 박자 느려지는 건 당연지사.
피할 여지조차 주지 않는 맹공에 마힌은 지면에 코가 닿을 듯 자세를 낮췄다.
그가 노예에서 근위대장이 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압도적인 실력 덕분이었다.
수습 기사가 익힐 법한 가장 기본적인 성절을 가지고 톨란이 신임한 기사를 꺾은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가 흘린 피와 땀이 모든 걸 증명했다.
“흡.”
미끄러지듯이 이동한 마힌의 머리 위로 5개의 화살이 스쳐 지나갔다.
찰나의 순간, 몸의 중심을 앞으로 옮긴 마힌은 독사가 먹잇감을 무는 것처럼 검을 휘둘러 나이아의 다리를 노렸다.
싸늘한 예기가 느껴지자, 나이아는 펄쩍 뛰어올라 칼날을 밟고 공중제비를 넘었다. 그리고 허공에 뜬 상태로 다시 한 번 활시위를 당겼다.
언제 어디에서든 최고 속도를 유지할 수 있는 그녀에게 어떠한 자세를 취하느냐는 문제가 아니었다. 어떠한 순간을 고르느냐가 문제였을 뿐.
빨려 들어가듯이 활대에 걸린 화살이 창졸지간에 쏘아졌다.
마힌은 무덤덤하게 화살을 쳐내며 토끼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도망치는 나이아의 뒤를 거칠게 추격했다.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화살 5개는 뿌리쳐야 했다.
하나하나가 바윗덩어리를 걷어내는 것 같아 아릿한 통증이 전신을 내달렸지만, 마힌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위력적이지만 위협적이진 않았다. 위치가 발각된 궁수는 더 이상 궁수가 아니었다. 나이아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화살통에 담겨 있는 화살은 유한했으니까.
“초장거리 사격이었다면 승산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상 네게 남은 건 패배밖에 없다.”
화살통에 남아 있는 화살이 몇 개 없다는 걸 확인한 마힌이 나이아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활대와 활시위 사이에 검을 욱여넣었다. 함부로 겨냥하지 못하도록.
하지만 이게 웬걸.
구석에 몰린 나이아의 대응은 마힌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아예 검 손잡이까지 활을 내려 잡아당긴 것이다.
“뭣?!”
절로 자세가 흐트러진다. 검사가 궁수에게 근접전을 걸어도 궁수가 검사에게 근접전을 건다는 발상은 해 본 적도 없는지라, 마힌은 나이아가 당기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마힌의 허벅지를 발판 삼아 뛰어오른 나이아는 그의 어깨 위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다리를 십자로 교차해 목을 압박했다.
“크흑.”
자그마한 체구에서 나왔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힘이었다. 하지만 극복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검 손잡이를 거꾸로 쥔 마힌은 옆구리 틈 사이로 칼날을 찔러넣었다.
불식간에 일어난 반격.
아래에서 불쑥 검이 튀어나오자 나이아는 재빨리 다리를 풀었다. 가만히 있으면 배가 꿰뚫릴 판이었던 것이다.
휙.
그 빈틈을 놓칠 마힌이 아니었다. 나이아가 했던 것처럼 그녀의 로브 자락을 거세게 잡아당긴 그는 주저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검은 애꿎은 천 조각만 베고 지나갔다. 허물이라도 된 양 가볍게 로브를 벗어던진 나이아가 거리를 벌렸던 것이다.
“그런다고 이길 수 있는 것 같나!”
마힌은 쏘아지는 화살을 모두 걷어 내며 맹진했다.
3, 2, 1, 그리고 0.
나이아가 가진 화살은 이제 없었다. 빈 화살통이야말로 승리를 알리는 청신호. 이 지긋지긋한 싸움에 마침표를 찍을 때였다.
“이걸로 끝이다.”
위에서 아래로. 검을 높이 치켜든 마힌은 장작을 패는 것처럼 내리찍었다. 그가 낼 수 있는 전력을 다해.
“정말 뭘 모르는 녀석이구나. 내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 간격을 내주었을 것 같더냐.”
피식, 웃은 나이아가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은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의미 없는 퍼포먼스라고 생각한 마힌의 표정이 일그러진 건 한순간이었다. 흐릿하지만, 곧게 뻗은 물체가 분명 그곳에 존재했다.
‘화살!’
한 박자 늦게 그게 마력으로 이루어졌다는 걸 눈치챈 마힌은 터져 나오는 숨을 참아야만 했다.
궁기.
그건 검기나 창기에 비견되는 기술 중 하나였다.
경지에 영향을 받아 개념이 있지 않아도 재현할 수 있지만, 그렇기에 사용할 수 있는 이가 적었다.
재능과 경험이 월등한 강자만이 지닐 수 있는 특권.
저 어린 나이에 궁기를 발출할 수 있다는 게 믿겨지지 않지만, 엄연히 현실이었다. 그것도 콤마 단위로 이루어질 현실.
황급히 마힌이 검을 세웠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화살은 이미 활시위를 떠난 뒤였으니까.
쾅!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튕겨져 나간 마힌은 벽에 처박혔다. 방패 대신에 사용했던 검은 두 동강 난 채 차가운 땅바닥 위를 나뒹굴었다.
“말했지 않더냐.”
호흡을 가다듬은 나이아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궁기는 그녀도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아 여러모로 불확실한 기술이었다. 준비하는 데 시간도 걸리고, 명중률도 형편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확실한 사랑의 매는 없었다.
“내가 주는 사랑의 매는 조금 무거울 거라고.”
* * *
귀귀영보를 익힌 카르비나에게 경비나 경계는 의미가 없는 단어였다. 이브와 함께 수직 하강한 그녀는 지하에 발을 들이자마자 목표 지점을 향해 내달렸다.
몸은 바삐 움직이고 있지만, 머리는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목적을 이루고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정보를 받아들인 탓이었다.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했던 짝은 사실 조직의 귀신이었고, 자신은 지금 대륙구 범죄 조직의 수장과 손을 잡고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쉬이 감당할 수 없는 것뿐이었다.
카르비나는 자신의 뒤에 바짝 붙어 따라오고 있는 여성을 바라보았다.
“엠 말이야.”
“네, 걸리는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괜찮을까?”
“혹시 걱정되시는 겁니까?”
목소리의 높낮이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무미건조한 반응이었다. 괜히 저 혼자만 과민하게 물은 것 같아 카르비나는 발개진 귓불을 숨기며 손을 저었다.
“하아? 누가 그런 녀석을 걱정한다는 거야.”
조직의 저력은 쉬이 볼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리벨리온이 요즘 급부상하는 단체라고 해도 그 한계가 명확했다. 하물며 그 위에 선 카인은 이제 막 성인이 되었을 뿐인 공작이었다.
“파르발이 이겨 버리면 내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니까 하는 말이잖아.”
“그분은 지지 않을 겁니다.”
“나도 그렇게 믿고 싶지만, 세상 일이 내가 바란 대로만 풀리라는 법은 없잖아.”
저번에 견식한 괴력으로 보아 하건대 카인이 강하다는 건 얼추 추론할 수 있지만, 그것뿐이었다.
그 나이에 오를 수 있는 경지는 정해져 있었다. 세기의 천재가 아니라면 상식의 범주 안에 뛰어놀기 마련이었다.
검성 라프만의 제자라 알려진 카인이 권술에 심취한 것 또한 신뢰가 가지 않는 이유 중 하나였다.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이브가 입을 열었다.
“대장님이 싸우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군요.”
“그건 또 무슨 말이야?”
“한 번이라도 보셨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이브 또한 많이 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카인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수련을 하는 건지 알고 있기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신체 능력만큼은 이미 괴물이라고.
“일단 서두르죠. 케이, 당신의 말처럼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요. 우리가 맡은 일이라도 성공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직이 신기를 독차지하는 건 이브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맨 처음 카인에게 발견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사상에 감화된 게 아니었다. 그저 정체도 알 수 없는 집단이 과거의 잔재를 휘젓고 다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엔지니어도 요주의 대상이었다. 이브는 알고 있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문명의 이기가 어떠한 결과를 낳는지.
[계정 확인 완료. 환영합니다. q1w2e3r4 님.]과연 엔지니어라고 자칭할 만한 실력은 있는 듯했다. 단말기를 조작하는 게 제법 능숙해 보였으니까.
척척 난관을 헤쳐 나가는 카르비나의 뒤를 따라가다 보니 점점 통로가 넓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중장비가 오고 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공동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끝에 한 물체가 보였다.
크기는 기차만 할까?
중간중간에 박혀 있는 동그란 구체, 부분부분 난립해 있는 기기. 합금으로 이루어진 내골격 위엔 파이프가 혈관처럼 울퉁불퉁 솟아나 있었다. 외피도 없이 내부가 훤히 드러난 모양새였다.
이곳이 특수 목적 격납고라는 건 알고 있는바, 온전치 못한 기억을 지녔다고 해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구형이긴 해도 안드로이드의 구조를 수십 배나 불린 모형이었다.
“이래서 이걸 거인의 팔이라고 부른 겁니까?”
“정확하지?”
“과연. 크기가 이래서야 누구도 사용하지 못하겠군요.”
그렇다고 옮길 수 있는 수준도 아니었다. 카르비나가 즉시 처분하고 싶다고 말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백팩을 벗은 카르비나가 덮개를 활짝 열었다.
“그건?”
“내 비장의 무기.”
안에는 이브에게 익숙한 도구가 잔뜩 들어 있었다.
“명칭은 따로 있지만, 폭탄이라는 물건이야. 폭발 계열의 마법이 여기에 응축되어 있다고 보면 돼.”
“그렇군요.”
모르는 척 의뭉스럽게 대답한 이브는 내용물을 면면히 살펴보았다. 다행히 사제 폭탄 같은 건 아닌 듯했다. 정식 인가를 받은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 군용이라는 글귀까지 쓰여 있는 걸 보면 성능은 확실할 터.
이런 물건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지만, 그런 걸로 따지자면 그녀의 존재가 으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