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197
197화 고향 1
* * *
그건 헬라도 많이 고민한 주제였다.
“그이가 죽은 이상, 제가 더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사실, 찾아보면 한두 가지 정도는 있을 거다. 군부의 독재에 저항하는 세력에 힘을 실어 주거나, 다른 귀족들의 정에 호소하는 얼굴마담이 되거나.
하지만 그러려면 많은 걸 포기해야 했다. 재수가 없으면 그렇게 하고도 더 나빠진 현실과 직면할 수도 있었다.
“피아는 지금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 줬으면 해요. 이제 와서 일국의 공주라고 한들 그 아이만 힘들어질 테니까요.”
“그런가.”
카인도 동의하는 바였다.
피아가 적응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군부가 권력을 쥐고 있는 게 문제였다. 부딪치면 설전이 아니라 바로 난전으로 이어질 테니까.
“더욱이 장군들이 손을 쓰지 않았을 리 없어요. 아마 저희 모녀가 입궁할 수 있는 방법조차 모조리 없앴을 테죠.”
가장 좋은 예시가 얼마 전에 나왔다.
‘피아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공주. 군부가 그녀를 준비한 건지, 다른 집단에서 그녀를 보낸 건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건 바로 그녀를 밀어내려면 엄청난 기력을 소모해야 한다는 것.
그만큼 진실 공방이란 지지부진하고, 구구절절한 경주였다.
“원한다면 도와줄 수 있다.”
세라를 여왕으로 추대한 사람이 바로 카인이었다.
상황과 인물, 그리고 배경이 우연이 맞아떨어져 어거지에 가깝게 성사시킨 결과물이지만, 그렇다고 그 경험까지 거짓이 되는 건 아니었다.
“아니요, 마음만 받을게요. 그저…….”
그렇게 헬라가 한마디 더 하려던 찰나, 창문이 깨지며 로브를 뒤집어쓴 무리가 들어왔다.
슉, 슉, 슉.
동시에 날아오는 표창.
지팡이를 휘둘러 날붙이를 걷어 낸 카인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장내를 둘러보았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상황이었다. 가짜가 득세하려면 진짜를 죽이는 수밖에 없을 테니까.
“바질 경.”
“네, 가주님.”
“헬라를 데리고 성으로 가라. 여기는 내가 처리하지.”
“알겠습니다.”
차라리 자신이 여기에 남겠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카인이 암흑가에서 얼마나 흉맹한 위명을 떨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바질이었다. 괜히 시간을 지체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헬라는 바질을 나무랐지만, 그는 우직하게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무리 중 몇몇이 두 사람을 따라가려고 했지만, 그걸 가만히 두고 볼 카인이 아니었다.
콰직.
그가 지팡이를 빠르게 내지르자 달려가던 괴한들의 가슴에 바람구멍이 뚫렸다.
“하, 내 영지에 진흙 발로 들어온 것도 모자라 내 앞에서 등을 돌린다고? 하나는 알겠군. 너희들 보통 머저리가 아니구나.”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이들이 카인을 노렸지만, 의미 없는 발악이었다. 카인에게 걷어차인 괴한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반대편 건물에 처박혔다.
눈밭을 나뒹구는 이들의 곡소리가 줄어들 즈음, 오리올이 기사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대응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가주님.”
“괜찮으니 이 녀석들부터 압송해라. 죽지 않은 놈들은 바로 지하 감옥에 처넣고.”
* * *
“피아는?”
“괜찮아, 평소처럼 일하다가 지금 막 잠들었어.”
잠든 게 아니라 자는 척하는 걸 테지만, 카인은 첨언하지 않았다. 그녀를 중심으로 바쁘게 돌아가는 사태를 정리하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어떻게든 매듭이 지어져야 운이라도 띄워보지 않겠는가.
“피아의 귀에 괜한 소리가 들어가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쓰도록 해.”
“당연한 말씀을.”
카인은 과장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는 호른을 쳐다보았다.
“성에 침입하려고 했던 녀석들은?”
“모두 지하 감옥에서 자고 있을 거야.”
“놓친 녀석은 없겠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가주님이 놓치면 놓쳤지, 나는 놓치지 않는다고?”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었다. 호른은 6계위 마법사. 그런 그가 공방처럼 활용하고 있는 슈발체베인 성은 일종의 결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비책이 없다면 허투루 움직일 수 없는 장소.
“하지만 뚫렸단 말이지.”
짜증 나는 일이 아니지 않을 수 없었다.
리벨리온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단체는 적었다. 영지 내에 들어와서 암살을 감행할 정도면 더더욱.
오래전부터 은밀하게 준비했다는 뜻이니, 흔적을 남겨 두었을 리 없었다.
그렇기에 카인은 하루아침 만에 꼬리를 잡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해답은 의외의 곳에서 풀렸다.
성에서 거주하는 암성의 제자, 자넷이 끌려온 이들의 얼굴을 알아본 것이다.
“……모리아티의 일원이야.”
“모리아티?”
뜬금없이 밝혀진 정체에 카인은 혀를 짧게 찼다. 암성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건 둘째 치더라도 그들의 행동 양식과 어울리지 않았다.
“의미 없는 살인은 하지 않는다. 그게 모리아티의 모토였을 텐데?”
수치스럽다는 듯 고개를 돌린 자넷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당연히 스승님은 그렇게 살아오셨어. 하지만 너도 알잖아.”
“부단주란 녀석이 말썽인가?”
“그래. 녀석을 따르는 무리가 심심풀이로 소일거리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잡범이나 할 법한 짓을 받고 다닐 줄은 몰랐어.”
“뭐,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중요한 건 이 녀석들의 배후였다. 푸줏간 고기처럼 천장에 매달려 있는 사내에게 걸어간 카인이 고갯짓했다.
“의뢰인이 누구지?”
“모, 모릅니다.”
더 이상 대답을 구하지 않고, 그 옆에 매달린 사내에게 다가간 카인이 똑같은 물음을 던졌다. 그리고 그다음 사내에게도, 또 그다음도.
하지만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모두 앵무새처럼 상부의 지시를 받았다는 소리밖에 하지 않았다.
참다못한 자넷이 검을 빼 들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이! 입 꾹 닫고 있는 게 자존심을 챙기는 거라 생각하고 있는 거냐!”
카인이 지팡이를 들어 그 앞길을 가로막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모리아티 내부의 일이야. 참견하지 마.”
“진정해라.”
“이 꼴을 보고도 진정하라고?”
암살단이 떳떳한 집단이 아니라는 건 자넷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의적에 가까운 성향을 띄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런데 이런 삼류만도 못한 몰골이라니.
자넷의 분통이 터지기 직전, 가까이 다가간 카인이 그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내 밑에서 10년을 채우면 모리아티를 너에게 준다고 했었지?”
“갑자기 그건 왜?”
“지금부터 슬슬 준비하는 게 어떻지? 아래에서부터 파고드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 것 같은데.”
“결정적일 때 비수로 써먹으라는 거야?”
“그래. 쓰레기는 쓰레기지만, 재활용도 못 해서야 제대로 버렸다고 할 수 없지 않나.”
놀랍게도 카인은 눈앞에 걸린 이들을 모리아티를 장악하는 패로 사용한 뒤에, 처분하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너, 상상 이상으로 무서운 놈이구나.”
“그리고 지금 네가 진정하지 않으면 나도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겠거든. 일단 너도 모리아티 소속이잖나?”
흉흉하기 짝이 없는 눈빛에 자넷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돌연 깨달은 것이다. 자신보다 더 화난 건 눈앞에 있는 사내라는 걸.
“아, 알았으니까 화 풀어. 내가 연관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책임감을 느끼고 있으니까.”
“모리아티의 마지막 양심이 그리 말해 주니 안심이군.”
다른 사람도 아닌 피아와 관련된 문제였다. 수상한 기색을 느끼지 못하고, 지나쳤으면 헬라가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었다.
카인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누구에게 의뢰를 받은 건지 모르겠지만, 그 녀석은 꼭 죽일 생각이었다.
짐작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 명료해 인명록을 구성하는 게 어려울 정도였다.
‘하샤 왕국.’
그 안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녀석은 누구든지 용의자가 될 수 있었다.
* * *
“모리아티라는 겁니까.”
침음을 흘린 바질이 팔짱을 꼈다. 그도 나름대로 경험을 쌓은 기사지만, 거대 조직의 등장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헬라와 함께 당분간 성에 머무르는 게 좋을 거다. 호른의 눈길이 닿는 곳이라면 그들도 경거망동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헬라가 성안을 돌아다니면 피아가 수상하게 여기지 않을까요?”
팔불출답게 딸의 반응부터 챙기는 바질이었다.
“네가 제안하고, 내가 수긍했다고 해라. 성에 있는 온천은 공작령에서 제일가는 시설이니까.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한다, 라고 하면 그럴듯하겠군.”
바질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옆에 앉아 있던 헬라가 손뼉을 쳤다.
“마침 결혼기념일도 머지않았으니 적당한 변명거리가 되겠군요.”
“그래, 사용할 수 있는 건 뭐든지 사용해라. 그리고…….”
“그리고?”
“피아가 지닌 체질에 대해 더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 어제 들어 보니 아란 왕도 그랬다는 걸 보면 혈통을 따라 이어지는 것 같은데 말이야. 필시 세이피르 왕실과 깊은 관계가 있을 터.”
“공작님은 못 속이겠네요.”
예리한 지적에 헬라는 생각을 정리했다.
“대외적으로 체질이라고 부르지만, 왕실에서는 ‘신혈’이라고 불러요.”
보통 사람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형질의 총칭, 신혈(神血).
세이피르 왕실의 직계 자손은 이 신혈을 타고 났다. 방계에 속하는 왕족들이 험하게 다투면서도 스스로를 왕이라 부르지 못하는 건 이 특질 때문이었다.
“공작님도 아시겠지만 피아의 경우엔 신혈을 이어받아 자지 않는 체질을 가지게 되었죠.”
“아란 왕도 잠을 자지 않았나?”
“아니요. 대신 그 이는 한 번 본 건 절대로 잊지 않았어요.”
“확실히 신혈이라 부를 만한 체질들뿐이군.”
“왕실의 자산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신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능력에 대한 건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만 밝히는 전통이 있어요. 부모나 형제, 그리고 반.려.”
헬라가 의미심장하게 마지막 단어를 늘어뜨렸지만, 카인은 모르쇠로 일관하며 자연스럽게 턱을 괴었다.
그가 주목한 건 신혈이라는 키워드였다. 피아란이 왕족일 가능성은 낮았다. 그러면 중요한 단서가 될 수도 있었다.
‘외견은 흉내 낼 수 있겠지만, 능력은 글쎄?’
그 점을 집중적으로 파 보면 해답이 나올 것도 같았다.
“고맙군. 덕분에 생각할 거리가 많아졌다.”
“어머, 어머.”
외교 사절단의 대표가 되어 하샤 왕국에 가면 긴 싸움이 기다리고 있을 터. 정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두 사람과 헤어진 카인은 곧장 이브에게 달려갔다.
“이브, 짐 챙겨라.”
* * *
하샤 왕국으로 가는 길은 한산했다. 외교 사절단과 합류하는 건 조금 더 뒤였기 때문이다. 이미 다른 노선으로 간다고 세라에게 보고한바, 카인은 느긋하게 일정을 확인했다.
그가 제일 먼저 가기로 결심한 곳은 시렐 남작령이었다. 슈발체베인 공작령과 인접한 곳에 있는 영지로 하샤 왕국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남작령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마을 몇 개가 붙어 있는 수준이라 특산물이라고 부를 만한 건 없었다.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조그마한 도시였다.
하지만 카인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장소였다.
바로 그가 나고 자란 고향이었던 것이다.
창밖을 바라본 이브가 입을 연 건 그때.
“드디어 공작님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는 겁니까. 저는 매우 걸렙니다. 아, 오타 정정. 저는 매우 설렙니다.”
“…….”
카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옆자리에는 상태가 좋지 않은 동료가 함께하고 있었다.